소설리스트

64화 (64/235)

극천일무기

주어진 시간은 기다림에 비해서는 턱없이 짧았다.

해후의 정을 다 나누기도 전에 정해진 시간이 다 되었다.

"떠날 시간이다, 화무천."

장문인이 허락했어도 회심곡은 아미파의 금지.

다른 이가 이 출입을 알아차리면 큰 사달이 날 수밖에 없다.

"내 어찌 떠나리오. 이제야 겨우 만났거늘."

"욕심으로 또 한 번 일을 그르칠 생각인가? 저 아이를 위한다면 이만 떠나라."

"사부님 저는······"

"안 된다."

구검신녀는 대화에 껴든 소선연의 말도 딱 잘라냈다.

묵은 인연에 시간을 허락해 주었을 뿐.

아미파의 문도가 사내와 정을 통하게 할 수는 없었다.

"구검신녀께서는 정말로 냉정하시군요."

해서, 이번에도 명한이 끼어들었다.

"너. 뭐 하는 놈인지는 모르겠으나, 이건 아미파 내부의 일이다. 외인이 끼어들 생각은 하지 마라."

"자격이 없음은 압니다. 허나, 저리 애달파 하는 연인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아파서 말입니다. 구검신녀께서는 아무렇지도 않습니까?"

"이곳은 아미파다. 속세의 정을 끊고 구도를 위해 살아가는 자들의 모임이다. 어찌 사사로이 내 마음을 쓸 수 있단 말인가."

"그럼 아미파가 아니면 된다는 겁니까?"

명한의 시선이 구검신녀를 거쳐서 소선연으로 이어졌다.

"네놈. 감히 그 세치 혓바닥으로 내 제자를 현혹하려 하느냐!?"

"감히 제가 무슨 배짱으로 그러겠습니까. 다만, 구도의 길이 누군가를 구속한다면 그것이 올바른 도라 할 수 있는지 의구심을 품을 뿐입니다."

"네가 지금 아미파에 의문을 품는 건가?"

"한때, 구검신녀께서도 그러지 않았습니까? 오월검, 백주대랑을 만났을 때."

"······!!"

구검신녀의 눈동자가 번개라도 맞은 듯 흔들렸다.

이 내용은 세상 누구도 알 수 없는 것.

오래전에 묻어둔 비밀이었다.

"당신의 후회를 제자에게 넘기지 마세요. 할 수 있을 때, 하는 것. 그게 가장 깊이 남은 후회 아닙니까?"

"너, 너. 대체 누구냐? 어떻게 그 사실을 알고 있지?"

"아는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깊이 남은 후회를 제자에게도 대물림해 줄 것인가. 이게 중요한 일이죠."

구검신녀도 과거에는 소선연과 같았다.

아미파 출신으로 오월검과 사랑에 빠졌고, 문파의 규율 안에서 갈등했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선택하지 못하고 오월검과 결별.

후에 그의 죽음을 전해 듣고 깊은 상심에 빠져 회심곡에 은거하게 됐다.

"내 후회를 대물림한다고······?"

"깊은 곳에 물어보시죠.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어떻게 하고 싶은지."

"다시 그때로."

구검신녀가 고개를 돌려 화무천과 소선연을 봤다.

과거, 그녀 자신과 오월검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아. 끊어내지 못하니 이것이 인간인가 보구나."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탄식.

모든 것을 끊고 속세를 등졌다고 생각했지만, 이리 작은 돌멩이에도 파문은 넓고 거칠었다.

그저 속이고 있었을 뿐이라는 것.

그녀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았다.

"선연아."

"네, 사부님."

"후회는 남지 않겠느냐?"

"아미파는 제집과 같아요. 어찌 후회가 남지 않겠어요. 하지만······단장의 아픔을 다시금 겪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어요."

"그래. 네 병은 마음에서 왔으니, 마음으로 다스려야겠지. 아미타불, 아미타불."

구검신녀는 한 걸음 물러났다.

"화무천. 앞으로는 오직 저 아이를 위해서만 살아라. 또다시 중원에 네 이름이 들려온다면 내 기필코 네놈의 목을 베어버릴 테니까."

"명심하겠소, 신녀."

"하아. 인연이란 대체 무엇인가. 어찌 이리도 깊고 무겁단 말인가. 아미타불. 아미타불."

그리고는 무거운 경고를 남긴 채 사라졌다.

제자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가시죠, 두 분. 서둘러야 합니다."

이제 남은 뒷수습은 명한의 몫.

연인을 인도해 산을 내려갔다.

#

급한 불은 껐고, 남은 건 약속의 이행이었다.

명한은 화무천과 소선연을 일단 흑점에 맡겨서 숨겨둔 뒤, 다시 백순순을 찾았다.

이번에는 회심곡이 아닌 운무곡이었다.

"이곳에 조사의 무공을 복원할 수 있다는 건가요?"

"혜허검은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심공입니다. 마음에서 기를 일으켜 상대를 베는······심검(心劍)의 경지라고 해야겠죠."

"심검!"

본래의 혜허검은 ‘자격’을 갖춘 이에게만 보이는 아주 특별한 무공.

하지만 이는 빛 반사를 통한 약간의 꼼수로도 얻을 수 있다.

명한은 운무곡 주변에 거울을 빼곡하게 설치했다.

"이제 곧 자시가 되면 달이 위치에 오르고 거울을 통해서 빛을 반사할 겁니다. 그때, 운무곡 중앙에 서서 달을 바라보세요. 그럼 혜허검의 검결이 보일 겁니다."

"······놀랍군요. 달빛을 통해 남긴 검결이라니."

"그만큼 아미파의 조사께서 만물에 능통하신 분이었다는 거죠."

설치를 끝낸 명한이 한 걸음 물러났다.

"산 아래 마을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약속이 지켜졌는지는 검결을 모두 익히고 난 뒤 내려와서 확인해 주시죠."

"소 공자는 혜허검의 검결이 궁금하지 않은가요?"

"궁금하긴 하지만, 혜허검은 저와 맞지 않습니다. 무공은 어울리는 자가 얻어야 힘을 쓰는 법이죠."

"그 모든 걸 공자께서는 알고 있다 이거죠?"

"저만의 독특한 비법이다, 정도로 여겨 주세요."

그대로 짧게 포권한 뒤 산을 내려왔다.

구구절절 설명할 것도, 서로 캐물을 비밀도 없었다.

백순순은 이해득실을 따짐에 있어서 경계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혜허검은 필요가 없거든."

얻어야 하는 건 최악(最惡)의 무공.

극천일무기였다.

#

산속 깊은 곳에 위치한 작은 오두막.

흑점에서 사용하는 안가의 하나를 화무천과 소선연을 위해서 제공했다.

은거를 위해 처리할 일은 아직 많았지만, 당분간은 충분했다.

"모두 네 덕이다."

그곳에서 만난 화무천은 전보다 훨씬 밝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 한 약속을 지켰을 뿐입니다."

"수없이 내뱉는 약속 중 제대로 지키는 것이 몇이나 될까. 나는 평생에 걸쳐도 갚지 못한 은혜를 입었다."

"그렇게 거창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찌 됐든 우리가 남인 건 아니니."

"······그렇지."

천마야 길길이 날뛸 일이겠지만, 알 바 아니다.

어찌 됐든 명한이 받아낼 무공은 천마가 아닌 화무천이 가지고 있으니까.

"그럼, 약속대로 극천일무기를 받아가도 될까요?"

"정말로 극천일무기를 통제할 자신이 있는 건가?"

"방법이 없었으면 천하제일악을 만든 무공을 달라고도 안 했을 겁니다."

"으음."

화무천이 고민하는 건 당연했다.

극천일무기는 마공을 다루는 신교에서도 금기시했던 극악의 무공.

당시 현경의 끝자락에 있던 화무천조차 통제하지 못했었다.

"극천일무기가 사용자를 광인으로 몰아가는 건, 무공에 결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결함? 그게 무슨 소리냐?"

"극천일무기가 어디에서 온 무공인지는 알고 계시죠?"

"일월교. 아니, 일월신교라고 해야겠지."

"네. 천마신교의 모체가 된 일월교에서 창안한 무공입니다. 정확하게는 점을 치던 술사의 술법이죠."

길과 흉을 점치고 복을 불러오는 술법.

이걸 위해 제물을 바치고 피를 공양했다.

극천일무기의 독특한 성질은 이곳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를 신교의 조사께서 무공으로 직접 다듬어 극천일무기를 만들었으나, 스스로는 익히지 않았습니다."

"네가 말한 결함 때문인가?"

"네. 정확하게 말하자면 체질의 결함이라고 해야 하나. 조사께서는 무공에 있어서는 천하의 기재였으나, 아쉽게도 영성은 깨닫지 못했거든요."

"영성. 술사의 힘 말인가?"

"술과 법은 결국 하나로 만나게 돼 있습니다. 조사의 경지가 현경마저 넘어섰다면 충분히 가능했을 일. 하지만 아쉽게도 극천일무기를 창안하실 당시에는 현경의 끝자락이었습니다."

영(靈)을 깨달아 심기체 모두가 통하는 경지.

지고의 경지이기에 신교의 조사조차 이것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걸 넌 어떻게 넘어서겠다는 거냐?"

"묵혼공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타고나기를 이미 영체였던 어떤 천재가 창안한 무공이지요. 이를 바탕으로 극천일무기의 결함을 상쇄하면 됩니다."

"묵혼공이라.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무공인데, 그런 신묘함이 있다는 말인가?"

"귀문. 무상은가의 조사가 창안한 무공이죠."

"귀문. 그래, 그들에게 그런 능력이 있었구나."

귀문조사 은휘의 타고난 능력을 바탕으로 하는 무공.

명한이 아는 하에서는 극천일무기를 제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제 곧 천마대전(天魔大戰)이 열립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아니, 그 안에서 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극천일무기가 필요합니다."

"······결국, 같은 핏줄이라 이거구나."

"그 피가 어디 가겠습니까."

화무천이 잠시 말을 삼키고 생각했다.

오랜 세월을 괴롭혀온 악귀 같은 무공.

그걸 손자인 명한에게 넘긴다는 건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하지만 말마따나 같은 핏줄.

"좋다. 네게 극천일무기를 넘기도록 하마."

천마일가에 물러남이란 없었다.

#

극천일무기는 책으로 전해지는 무공이 아니었다.

구결을 외우고 화무천의 도움으로 진기의 흐름을 몸으로 터득했다.

그 형태는 반야신공과도 많이 닮아 있었다.

"기초는 이것으로 됐다. 구결 속에 모든 형(形)이 담겨 있으니, 이를 탐구하여 네 것으로 만들어라."

"습득, 극천일무기."

"?"

"아무것도 아닙니다."

물론, 그건 일반적인 경우.

명한은 궤가 달랐다.

화무천에게서 기초적인 극천일무기를 배우고 난 뒤에는 자연스럽게 습득 가능한 무공서가 나타났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습득했다.

애초에 극천일무기는 습득 제한이 없는 무공.

[이름 : 극천일무기(克天一武氣)]

[등급 : 외(外)]

[분류 : 무공]

[설명 : 천마신교의 조사가 창안한 무공. 생명이 스러질 때의 기운을 흡수해서 강해진다. 많은 생명을 탐할수록 광기에 침식당한다.]

습작 전체를 다 털어도 딱 셋밖에는 없는 외(外)등급의 무공이었기 때문이다.

익히는 것에는 조건이 없지만, 다루지 못하면 결국 미쳐서 광인이 되는.

사실상 습작 기준으로 등급을 매길 수 없기에 외라는 별도의 분류를 해 둔 것이다.

"······이런 느낌인가."

구결을 통해 극천일무기의 기운이 싹을 틔웠다.

잔뜩 굶주린 짐승 같은 기운이었다.

‘확실히 이런 걸 키우다가는 제정신을 유지하기가 힘들겠어.’

삼신승을 도움을 받았다 해도, 이제껏 멀쩡한 화무천이 경이로운 정도였다.

명한이 가부좌를 틀고 극천일무기를 제어하기 시작했다.

[극천일무기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극천일무기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극천일무기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빠르게 상승하는 극천일무기.

쌓아 둔 묵혼공의 기운을 야금야금 먹어치우며 금세 몸집을 불렸다.

차이는 있으나, 영성을 다룸은 같았다.

순간의 번뜩임과 잔재의 차이 정도.

명한은 일부러 극천일무기를 묵혼공으로 유도하여 그 성질을 익히도록 했다.

맹수를 사람 손으로 키우는 격이라 해야 할까.

타고난 야성은 어쩌지 못해도 최대한으로 다스리는 건 가능했다.

[반야(般若)의 심상(心狀)이 떠오릅니다]

[기운이 삼화취정(三花聚頂)에 이릅니다]

그리고 그 순간.

명한의 몸이 허공으로 떠오르며 등 뒤로 세 개의 꽃봉오리가 피어났다.

무공을 익히는 자라면 누구나 꿈꿔 마지않는 삼화취정의 경지.

심, 기, 체 삼위가 일치하고 그 눈이 자연을 관조하여 영통(靈通)에 닿았다는 증거였다.

"놀랍구나. 약관의 나이에 화경의 끝자락이라니."

그리고 명한이 삼왕급에 도달했다는 상징이기도 했다.

명한의 나이 고작 17세.

절대자의 반열에 한 발을 내디뎠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