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3화 (63/235)

해후

궁곡. 천마의 자식이 죽었다.

이 이야기는 어느 쪽이든 후폭풍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명한은 한발 빠르게 움직였다.

"도련님!?"

"소백!!"

넝마 차림의 명한이 궁곡을 안고 아미파로 돌아왔다.

헐떡이는 숨과 갈라진 상처는 거짓이 아니었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산문을 넘어 쿵 소리와 함께 무너졌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기습을 받았다. 우리가 잔당을 토벌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겠지."

"사파 연합?"

"······그 결과 형님이 죽었다."

절절 끓는 목소리는 연기라고 보기 힘들 정도.

"궁곡 도련님!!"

"이, 이럴 수는 없어! 어찌 도련님이!?"

"소백!! 네놈이 도련님을!?"

하지만 이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디까지나 눈가림에 불과하니까.

믿고 안 믿고는 상관없이, 드러난 정황만 맞아떨어지면 공식적으로는 어찌할 수 없다.

그러기 위해 단둘이 움직인 것이니까.

"너희의 무례는 탓하지 않겠다. 형님의 시신을 궁으로 모셔가라."

"어떻게 감히······"

"조심해라. 나 역시 슬픔에 젖어, 두 번은 용서할 아량이 없으니까."

스산한 기색.

그리고 주변의 전력들.

궁곡과 함께 이 자리로 온 소궁의 이들은 상황을 인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는 자신들이 약세였다.

"이 일은 대가가 따를 것이오."

"누가 누구에게 대가를 치를까. 가서 형님의 어머님께 전해라. 과욕은 화가 된다고."

"크윽······!"

이만 갈 뿐 움직이지 못했다.

궁곡이 죽은 이상 기댈 곳은 혈염마녀 뿐이었다.

궁곡의 시체를 조심스레 안아, 장내를 벗어났다.

"후우. 귀찮은 일이군."

"도련님, 괜찮아요? 상처가 많아요."

"걱정하지 마. 필요해서 직접 그은 것들이니까."

향아의 호들갑에도 명한은 태연하게 대꾸했다.

운기로 기를 한 바퀴 돌리자, 피는 금세 멎었다.

시늉일 뿐, 치명적인 상처는 없었다.

"······정말로 형제를 베었군요."

그리고 이내, 멀리서 지켜보던 백순순이 다가왔다.

조금은 복잡한 표정이었다.

"마굴에 사는 짐승들에게 형제의 정을 기대하지 마시길. 우린 서로를 뜯어먹고 사는 괴물이니까."

"무섭군요, 신교라는 곳은."

"그러니까 천하제일의 괴물이 태어난 것 아니겠습니까. 그보다 어떤가요? 약속대로 내 가치를 증명한 것 같은데."

서열 끝자락의 명한이 14위 궁곡을 죽였다는 것.

작금의 순위가 의미 없는 지표라는 증거가 되기에는 충분했다.

"충분하고도 남습니다. 앞으로 아미파는 소 공자님을 은밀하게 지지하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동맹이 될 거 같군요. 그럼 회심곡도?"

"네. 공식적으로는 불가능하나, 장문인만 아는 통로가 있습니다. 그걸 이용하시죠."

"확실히 셈이 빠르군요."

백순순이 답 대신 가볍게 웃어 보였다.

이 선택이 득인지 실인지는 그녀도 확신하지 못했다.

다만, 눈앞의 먹이가 놓치기 힘들 만큼 매력적인 건 사실.

"혜허검은 확실히 복원이 가능한 거겠죠?"

"허언은 없습니다."

"그럼, 오늘 밤에 바로 움직이도록 하죠."

동전을 던졌다.

#

달이 떠 하늘을 가득 채울 시간.

명한은 산 아래 마을을 떠나서 아미파로 올라갔다.

중턱에 이미 백순순이 기다리고 있었다.

"절 따라오시면 됩니다."

사람이 오간 흔적이 적은 산길이었다.

준봉을 오르고 낭떠러지를 미끄러지며 반각 이상을 걸었다.

"회심곡은 이 너머에 있습니다. 두 갈래로 갈라진 바위를 축으로 삼고 계속 오른쪽으로 올라가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백 장문인."

"긴 시간은 드리지 못합니다. 최대로 두 시진. 그 안에는 다시 돌아오셔야 합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은밀함이 필요하다는 건 두 사람 모두 아는 일.

명한은 합류 장소에 은소소와 향아를 두고 화무천만 챙겨서 회심곡으로 걸음을 옮겼다.

절그럭거리는 쇠사슬 마찰음에 백순순은 잠시 눈길만 주었을 뿐 묻지 않았다.

"이제 곧입니다. 할 말은 정해두었나요?"

"······"

"시간은 넉넉하지 않아요. 후회로 남길 생각이 아니라면 지금이라도 정리를 해 두세요."

화무천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걷기만 했다.

뒤엉킨 속내는 몇 마디로 풀어낼 것이 아니었다.

명한도 더이상 채근하지 않고 조용히 뒤따랐다.

그리고 그렇게 걷기를 반각 정도.

산 중턱, 허름하게 지어진 오두막 하나를 발견했다.

[망연(忘戀)]

그 앞에 놓인 음각된 바위 하나.

화무천은 무엇에라도 홀린 듯 그 앞으로 걸어갔다.

"이건······그녀의 글귀다."

"소선연, 금화 사태의 글이라는 겁니까?"

"그래. 나와의 관계가 발각되어 인연을 끊으려 했을 때, 그녀가 남긴 글귀다."

손끝마저 벌벌 떨며 바위를 더듬었다.

천하제일악이 아닌, 늙은 남자 한 명만이 그곳에 있었다.

"누구냐!? 누군데 감히 이곳을 침범하는 것이지!?"

그리고 그 순간.

날카로운 목소리와 함께 검 한 자루가 화무천의 발 앞에 날아와 꽂혔다.

반응조차 못 할 정도의 속도였다.

"구검신녀."

화무천은 상대가 누구인지를 대번에 알아봤다.

"흥. 날 아는 자가 감히 아미파의 금지를 침범하다니. 목숨이 여럿이라도 되는 자인가?"

"침범이라 말씀하시면 곤란합니다. 저흰 어디까지나 백 장문인의 인도를 받아 이곳에 온 것이니까요."

"음?"

답을 한 건 명한이었다.

화무천 옆에 서, 백순순에게 미리 받아 둔 증표를 꺼내 들었다.

"그 아이가 회심곡에 외인을 허락했다고?"

"그만큼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신녀께서는 부디 두 시진 정도만 자리를 허락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기다려라."

구검신녀는 검 끝에 올라서 명한과 화무천을 바라봤다.

"이 기도. 쇠했으나 익숙하다. 설마, 네놈. 화무천인가?"

그리고 눌러둔 화무천의 기도를 감지해냈다.

"오랜만이오, 구검신녀."

"네놈이 어떻게 살아있지? 분명 죽었다고 들었는데?"

"구차하게 연명하고 있었소이다. 생에 미련이 남은 탓인지, 죽음이 두려운 것인지."

"하. 같잖은 소리는 집어치워라. 네게 구도 따위는 어울리지 않아."

구검신녀의 태도는 지극히 냉랭했다.

"대체 뭘 바라고 이곳까지 온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썩 물러가라."

"······소선연. 그녀를 만나고 싶소."

"물러가라! 네놈에게 무슨 자격이 있다고 만남을 운운하는가!? 너 때문에 그 아이는 생의 끝자락까지 몰렸었단 말이다! 그런 주제에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냉랭함이 분노로 바뀌는 데는 일 초면 충분했다.

살갗이 베일 것 같은 날카로운 기도가 구검신녀 전신에서 뿜어져 나왔다.

"내게 자격이 없다는 건 알고 있소. 약속조차 지키지 못하고 그녀를 실망만 시켰으니까. 허나, 삶에 단 하나 이유가 있다면······사죄를 하지 못한 죄책감일 뿐이오. 그대에게 아량이 있다면 내게 일각이라도 시간을 내어 주시오."

"네가 감히······! 아미파의 연꽃이 될 아이를 망가뜨려 놓고도 뻔뻔하게 얼굴을 들이댄단 말이냐! 네 변심과 죽음 이후로 그 아이가 어떻게 됐는지는 알고나 있는 거냐!?"

"모, 몸에 문제라도 생긴 것이오!?"

"이······!"

소눈같이 글썽이는 화무천의 눈빛에 구검신녀가 잇소리를 냈다.

치밀어 오른 분노를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오체분시를 해도 모자랄 일.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건 자신의 제자 때문이다.

"사부님. 밖이 소란스러운 것 같아요. 누가 찾아오기라도 한 건가요?"

"아."

바로 이 아이.

구검신녀가 지키고 선 오두막 안쪽에서 한 여인이 비틀거리며 걸어 나왔다.

하얗게 센 머리와 초점이 잡히지 않는 눈동자.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위태로운 모습이었다.

"소······"

"소매!"

찰나의 순간, 화무천이 먼저 소리쳤다.

"······어?"

"소매. 나요, 무천. 화무천이 여기 있소."

"화 가가? 그······그럴 리가 없어요. 화 가가는 이미 죽었는데. 사부님, 사부님. 제 광증이 또 도지려나 봐요."

하지만 소선연은 이를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울먹이는 얼굴로 구검신녀를 찾아서 비틀거렸다.

"소매. 나는 꿈이 아니오. 거짓도 아니오. 죽지 못해 그대를 보려고 다시 돌아왔소."

"그, 그만. 그만 하세요. 누구신지 모르겠으나, 절 자꾸 괴롭히지 말아 주세요."

"소매 난······"

"그만! 저 아이를 또 괴롭힐 셈이냐!?"

한 걸음 더 다가서려는 화무천의 앞을 구검신녀가 막아섰다.

"왜? 어째서 소매가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말이오?"

"그걸 내게 묻는 거냐? 저 아이가 어떤 상처를 받았는지 알면서도? 널 말리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널 보내지 못한다는 그리움 때문에 미쳐버린 아이를 두고?"

"그, 그럴 수가······"

화무천이 털썩 주저앉았다.

그날 이후, 소선연이 상처받았을 거라는 건 예상하였지만 이런 모습은 아니었다.

너무 깊고 날카로웠다.

"물러나라. 넌 저 아이에게 있어서 상처일 뿐이야. 겨우 아문 상처에 소금을 뿌려서 뭘 어쩌겠다는 거냐?"

"나는······나는."

천하제일악도 어쩔 수 없는 갈림길이었다.

‘이대로는 어렵겠는데.’

그리고 명한에게도 어려운 선택지였다.

모든 것이 잘 풀리면 좋겠지만, 예단은 어렵다.

화무천도 소선연도.

개입이 필요했다.

"벌은 나중에 받겠습니다!"

순간, 명한이 타구봉을 뽑아서 소선연 쪽으로 던졌다.

절묘한 순간에 이뤄진 매우 날카로운 기습.

순식간에 구검신녀를 지나쳐 소선연 바로 앞까지 당도했다.

"소매―!!!"

그리고 그때.

벼락 치는 소리와 함께 화무천의 신형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모습이 다시 나타난 건 소선연의 앞.

등으로 타구봉을 막고 팔로는 그녀를 감쌌다.

펑, 하고 둔탁한 울림이 퍼졌지만, 그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네놈!! 감히 무슨 짓이냐!?"

구검신녀는 극대노하며 명한의 목을 움켜쥐었다.

한 번에 비틀어 죽일 수 있을 정도의 힘이었다.

"크윽. 가끔은 극약처방이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냐? 저 약한 아이가 다치기라도 했으면 어쩔 뻔했느냐!?"

"막아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으니까요."

"뭐?"

"당신이 분노로 화무천을 볼 때, 화무천은 오직 소선연만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반응이 빠를 수밖에."

"······"

구검선녀의 미간이 파르르 떨렸다.

부정할 수 없는 말이었다.

"화 가가? 화 가가?"

그리고 그 뒤.

화무천의 품에 안겨 공격을 피했던 소선연이 묘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다친 곳은 없소, 소매?"

"화 가가? 정말로 화 가가에요?"

"그대가 못났다고 부르고, 그대가 못됐다고 우는 사람이 나라면. 그래서 옷 소매에 눈물을 새긴 것이 맞다면, 그 사람이 나요. 소매, 나 화무천이오."

"아. 아······화 가가. 화 가가!"

한 뼘 거리를 뛰어들어서 안기는 소선연.

수많은 광증에 휘말려 현실과 상상을 구별하지 못하는 그녀라 해도 자신을 품에 안은 이 팔까지 잊을 수는 없다.

언제나 이렇게 달려와 안아주던 사람이니까.

"미안하오, 미안하오. 내가 너무 늦었구려."

"아. 아아. 화 가가. 살아 계셨군요. 살아 계셨어요. 천지신명이시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

눈물 섞인 해후.

구검신녀도 명한도 끼어들 수 없는 자리였다.

긴 한숨을 자리에 둔 채.

두 사람은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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