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연의 끝
궁곡이 명한의 소식을 전해 들은 건 하루 전.
소림사가 아닌 아미파에서 모습을 드러냈다는 정보였다.
급히 말머리를 돌려 아미파로 강행군을 시작했다.
"아직도 멀었나? 신교의 궁곡이 왔다고 전하란 말이다!"
그렇게 도착한 아미파 산문.
앞을 막아선 아미파 선자들의 모습에 절로 역정이 났다.
이러다가 소백이 사라지면 다시 찾아 헤매야 한다.
고생이 낯선 궁곡에게는 짜증만 나는 일이었다.
"장문인께서 들어오시라 합니다."
"하! 이제야 말이 통하는군."
겨우 열린 문을 궁곡이 거칠게 비집고 들어갔다.
아미파의 아름다운 정경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바짝 선 기감으로 소백을 찾을 뿐이었다.
"형님께서 이 먼 곳까지 무슨 일로 오셨을까."
"소백!"
그리고 접객당 문가에서 익숙한 얼굴을 찾았다.
비스듬히 문가에 몸을 기댄 채, 웃음 띤 채 바라보고 있는 소백.
그 여유에 화가 치밀었다.
"그리 소리치지 않아도 충분히 듣습니다. 이 먼 곳까지 어인 일로 오셨습니까?"
"그야 네놈이 망친 일을 수습하기 위함이 아니더냐!"
"망친 일이라. 무슨 일 말입니까?"
"소림사! 소림사 말이다! 사절로 보내 놨더니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르고 다니는 거냐!?"
이건 적당한 구실에 불과했다.
어차피 궁곡은 사절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저 소림사에서 사고가 있었으니, 구실로 소백을 묶어두려 할 뿐이었다.
천마궁으로 돌아가면 죽이기 어려우니까.
"하하. 궁곡 형님이 절 그렇게 걱정하시는지는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신교의 체면이 달린 일이다. 네놈이 망치고 다니는 꼴을 내가 어떻게 봐줄까?"
"그렇습니까? 그럼, 이리 온 김에 아미파의 장문인과도 잠시 이야기를 나눠 보시죠."
"뭐?"
한 걸음 물러나 백순순을 가리키는 명한.
"근처에 아미파를 귀찮게 하는 사파 잔당이 남아 있다고 하더군요. 그 처리를 논하고 있었는데, 형님께서 오셨으니 주도를 하심이 어떻습니까?"
"사파 잔당? 그걸 네가 왜 여기서?"
"사절의 목적······몰랐습니까?"
"아, 안다! 알고 있어! 크흠. 사파가 문제가 이거지?"
궁곡의 눈알이 데굴데굴 굴러갔다.
"그래. 그렇게 하면 되겠구나. 굳이 아미파의 사람들이 움직일 것 없이, 너와 나 단둘이 사파 잔당을 처리하는 거다."
나름 묘수라고 뽑아낸 계획.
천마궁 밖에서 적당한 구실로 소백을 처리할 방식이었다.
"저와 형님만 움직이자?"
"어차피 사파 잔당이라고 해 봐야 산도적 무리 아니느냐. 신교의 핏줄인 우리 둘이 고작 그 정도도 감당하지 못할까. 아니면 두렵기라도 한 거냐?"
"하하. 형님 말씀이 옳습니다. 어찌 신교의 핏줄이 사파 따위를 두려워할까요. 형님과 함께 그 무도한 놈들을 응징하겠습니다."
"그래. 그래야 소궁주 다운 모습이지."
속내를 감추며 그럴듯한 표정도 지었다.
"아미파 장문. 우리 둘이 일을 처리해도 괜찮겠소?"
"······제가 감히 신교의 소궁주 두 분을 어찌 막겠습니까. 저는 이곳에서 희소식만을 기다리겠습니다."
"하하. 말이 통하니 좋구려. 이곳에서 좋은 소식만 기다리시오."
술술 풀려가는 일에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내가 나서야 해.’
자신감은 최고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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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파 인근에 사파 잔당이 있는가?
이건 명한이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다.
실제로 아미파 주변 몇 곳에서 녹림 세력이 기승하여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고작 녹림이니 아미파가 나서면 되지 않는가,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상황이 녹록지 않았다.
우선 이들이 굉장히 영악했다.
농민이나 상인을 괴롭혀 재물을 강탈하다가도 아미파가 움직인다 싶으면 귀신같이 숨었다.
전문적인 추적술을 배운 이가 없으니, 번번이 아미파도 허탕을 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
"이런 곳에 숨어서 산다는 말이냐?"
"험한 곳에 숨어 사는 놈들이니, 아미파 선자들이 힘을 못 쓸 수밖에요."
지독하게 험한 산세였다.
무공을 익힌 무림인이라도 오가기가 쉽지 않을 정도.
그 안 어딘가에 콕 박혀 있으니, 토벌이 어려운 건 당연했다.
"흥. 그래 봐야 천만대산에 비교하면 언덕이다. 녹림이든 뭐든 후딱 정리하고 내려가자."
"네, 형님."
하지만 명한이든 궁곡이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노리는 건 따로 있었기 때문.
얼추 구색만 맞추고 아미파 산문을 나섰다.
따르는 이 없이, 개별 행동이었다.
"그래. 듣자 하니 소림사에서 꽤 큰일이 있었다고 하던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형님께서 제 일에 관심을 가지는 건가요?"
"네 일이 아니라 신교의 일이다. 신교의 대표로 갔으면 합당하게 일을 해야지."
"그 대표라는 거. 제 의지대로 뽑힌 게 아니라는 건 형님이 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산 중턱으로 이어지는 길.
형제의 대화, 비슷한 것이 이어졌다.
"윗분들의 선택이었다. 감히 네가 의문을 품어?"
"그 윗분에 형님의 어머니께서 포함되어 있다는 거. 이제 와서 부정하는 건 아니겠죠?"
"······네놈이 아주 간을 배 밖으로 내놓고 사는구나."
"어차피 독으로 죽을 운명이었습니다. 이 마당에 눈치 보고 살 이유는 없지 않나요?"
한 걸음 앞서 걸어가는 명한.
그 모습에 궁곡은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그래, 말 나온 김에 물어보자. 독은 어떻게 처리한 거냐? 그리 호락호락한 물건이 아닌 거로 아는데."
"이젠 뭐 숨기지도 않는 겁니까? 천폐독을 형님께서 사용했다고?"
"하. 알면 뭐 어쩌게? 어차피 천마궁 밑바닥, 도울 사람 하나 없는 네놈이."
"그러게요. 형님 기준에서는 제가 그런 놈에 불과하죠. 근데, 그런 놈을 왜 그렇게까지 죽이려고 한 겁니까?"
천마궁의 망나니.
이렇게 불리기는 하지만, 자신 앞에서 이렇게 기를 피고 덤빈 경우는 없다.
언제나 쪼그라든 가죽처럼 숙이고 있었다.
이것이 이질적이었다.
"어차피 하늘의 주인은 한 명. 천마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면 응당 감수할 운명이지. 가장 약한 가지부터 부러뜨리는 건 현명한 수다."
"이 마당에도 모친을 두둔하는 겁니까?"
"감히 네 더러운 입에 어머니를 올리지 마라."
"올리면? 제 어머니를 질시하여 수작을 부리다가 아버님께 냉궁(冷宮)으로 쫓겨난 사실이 사라지기라도 합니까?"
"네놈이 정녕!"
궁곡의 기운이 강렬하게 쏟아졌다.
"예전부터 그런 식이었죠. 독곡이란 거대한 세력을 업고 들어와 위풍당당. 혈혈단신 아버님을 따라와 신교에 든 어머니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습니다."
"너······"
하지만 그 기운에도 명한은 미동도 없었다.
"대체 왜. 수십의 첩이 있음에도 굳이 어머니만을 질시하고 괴롭혔던 겁니까? 세력이 없어서? 아버님이 어여삐 여긴다고?"
"······천마신교의 안주인이다. 그 거룩한 이름에 네 어머니 같은 천것은 어울리지 않아."
"천것. 그 기준이 당신들이라 이건가요?"
"이 세상에는 격이라는 것이 있다. 타고난 절대 강자, 천마. 위대한 집안, 독곡. 그에 반해 네 어머니는 하찮은 변방 계집이었지."
"······"
명한이 잠시 숨을 고르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런 문답 따위.
사실 의미 없는 행동이라는 건 안다.
하지만 소백의 이름으로 세상을 살고 있음에 최소한의 도리라 여겼다.
‘이 분노는 소백의 것일까?’
가슴이 절절 끓었다.
"이걸로 확실해졌습니다. 당신들과 저 사이에는 천년이 지나도 이해하지 못할 간극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 달라지는 것이라도 있나?"
"이해가 가능했다면 혈육의 정으로 목숨을 붙여둘까 했습니다. 하지만 같은 피를 두었어도 남보다 못하다면······굳이 살려둘 이유가 없겠죠."
"감히 네놈이 뭘 어째?"
"어차피 형님도······아니, 너도 같은 생각이었잖아."
명한이 더이상 시간을 끌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허리춤의 타구봉을 뽑아 앞으로 내밀었다.
무겁고 깊은 기도가 땅에서 하늘로 이어졌다.
"끝을 보자, 궁곡."
시작의 악연.
마무리를 질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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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은 조용하고 인기척은 없었다.
이건 오롯이 두 사람만의 싸움.
하지만 대하는 태도에는 분명 차이가 있었다.
"감히 주제도 모르고 설치다니. 오늘 여기서 태생의 한계를 알게 해 주마."
궁곡은 철저하게 명한을 무시했다.
타고난 혈통, 배움, 배경 따위에서 상대가 아니었다.
밖을 돌며 조금은 대가 굵어졌지만, 그것뿐.
‘이 버러지를 죽여서 어머니를 기쁘게 하겠다.’
생각은 단순했다.
카앙―!!
궁곡의 검과 명한의 봉이 허공에서 격돌했다.
불꽃이 튀고 여력에 검과 봉이 파르르 떨렸다.
"하! 신교의 인간이 봉술이라니!"
우스울 뿐이다.
검을 비틀어 연격을 날렸다.
화려한 초식의 향연이었다.
카앙. 캉. 캉.
하지만 그 화려함은 단순한 봉술에 모조리 막혔다.
찌르고 베고 찍는 모든 검격에 봉이 끼어들었다.
완벽한 방어.
그리고.
"컥―!"
깔끔한 반격이었다.
검면을 밀고 들어온 봉에 가슴팍이 찍혔다.
궁곡이 두 걸음을 물러나 인상을 구겼다.
"어디서 잔재주를 배웠구나!"
내공을 극한으로 끌어모아 검에 주입했다.
가문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보검 중의 보검.
한 단계 위의 검사라도 능히 이겨낼 만큼의 물건이었다.
"죽어라!!"
강기에 가까운 검기가 벼락처럼 쏟아졌다.
절정 끝자락에서나 볼법한 강맹한 공격이었다.
"열 내는데 미안하지만, 역시 이건 안 되겠다."
하지만 이 검격은 명한에게 닿지 못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닫긴 했다.
다만 원하던 대로 몸을 벤 것이 아닌, 손아귀 안에 잡힌 모습이었다.
빠드득, 소리를 내며 뭉개지는 검기.
"그래도 초반부 주요 악역이라서 나름대로 신경 써서 싸울까 했거든. 근데, 너무 약하네."
파앙.
기운이 통째로 부서졌다.
물질이 아닌 기운을 짓누르는 건 한 단계 위의 무인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족히 서너 단계는 위.
압도적인 차이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뭐, 뭐? 뭐야? 어떻게 한 거야?"
"결집도가 약한 내공 따위 짓누르면 그만이거든. 반야신공을 익힌 내게 이런 건 통하지 않아."
"반야······신공? 소림의 절학?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냐!?"
"개소리는 네놈 입에서 나오는 소리고."
명한이 주먹을 움켜쥔 채 앞으로 크게 내디뎠다.
직진뿐인 단순한 보법.
다급히 궁곡이 검을 휘둘러 이를 제지했지만, 명한은 그대로 밀어붙였다.
힘이 있다면 단순함이 제일.
검격은 모두 튕겨 나가고 명한의 주먹이 궁곡의 가슴에 닿았다.
쿠웅―!!
초식도 없는 평범한 주먹.
하지만 그 안에 실린 내공은 범상치 않았다.
궁곡의 기막을 으깨고, 보의를 찢고, 태생적인 반탄력도 모조리 뭉개고 들어갔다.
단번에 뼈가 부러지고 근육이 파열됐다.
피를 토하며 날아가 처박혔다.
"커억!! 컥! 컥!!"
일격.
명한이 궁곡을 처리하는데 필요한 공격의 수였다.
천마궁을 떠날 때는 처지가 반대였으나, 지금은 이렇다.
명한은 더이상 그때의 명한이 아니었다.
"쿨럭! 쿨럭!! 이, 이럴 수는 없어! 하찮은······하찮은 핏줄 따위가!!"
궁곡을 바동거리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명한의 주먹은 이미 그의 경맥을 끊고 내기의 흐름을 뭉개놓은 상황이었다.
화타가 와도 이건 고칠 수 없다.
"태생 따위는 중요하지 않아. 독곡을 등에 업고 위시하는 네놈 따위는 애초에 내 상대가 아니었어."
"쿨럭! 쿨럭!! 이건 불가능해! 있을 수 없어! 나는 독곡의 적자다! 천마의 후계자가 될 사람이야!!"
"너 따위가? 재능도, 노력도, 인품도 갖추지 않은 자가 천마의 뒤를 논하다니. 독곡의 위세도 너를 평생 지켜주지는 못해."
"거······거짓말!! 거짓말!! 나는 독곡의······커어억!!"
궁곡이 검붉은 울혈을 토하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주먹의 여파가 심장까지 닿았다는 의미였다.
"이, 이건 안 돼. 이럴 순 없어. 소, 소백아······소백아. 내가 미안하다. 내가 사과할게. 제발 살려줘. 목숨은 살려다오."
그제야 자신이 놓인 처지를 깨달았다.
바닥을 개처럼 네발로 기며 구명을 갈구했다.
그 높던 자존심도 목숨 앞에서는 가벼웠다.
"천폐독을 쓸 때. 너는 내 목숨을 염두에 뒀나?"
"그, 그건 어머니가 그런 거야. 어머니가 널 죽으려고 한 거라고. 나는, 나는 아니야. 나는 쿨럭! 쿨럭!! 제, 제발 살려 줘!"
"죽기 직전에도 치마폭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군. 어차피 그 강단으로는 대전에서 살아남지 못해. 그냥 편히 죽어라."
"하, 하지마! 날 죽이면 어머니가 가만히 있을 거 같아!? 나와 함께 온 이들 중에는 독곡의 무사도 여럿이라고!"
회유가 안 되면 협박으로.
궁곡의 발버둥은 처절했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해도 결과는 같았다.
"걱정하지 마. 어차피 독곡도 내 손에서 무너질 테니까."
"······!"
콰득―!
마지막 숨통에 일격에 꽂아 넣는 명한.
푹, 고꾸라지는 궁곡의 머리를 응시한 뒤 손을 털었다.
큰 감흥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