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0화 (60/235)

아미파에서

전설에 보면 그런 이야기가 종종 등장한다.

오랜 세월을 수련한 이무기가 여의주를 물고 용이 되어 승천한다는 내용.

쌍각사는 이무기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같았다.

"용. 새끼 용이라고 봐야 하나?"

금색 비늘에 등에는 날개 한 쌍이 돋아났다.

외견 역시 뱀보다는 도마뱀의 그것과 가까워졌다.

풀어 두면 자유롭게 허공을 유영하고 바닥을 길 때는 뱀처럼 날렵했다.

― 주인, 고맙다.

전심통도 훨씬 깨끗해졌다.

격이 올랐다는 증거였다.

"으으으. 기껏 훔쳐온 보물이었는데."

묘아는 발을 동동 굴렀지만, 명한은 아까워하지 않았다.

여의주 그 자체도 대단한 보물인 건 맞지만, 신수보다야 못하다.

영물 단계의 쌍각사가 절정 끝자락 수준.

신수가 된 지금은 그보다 훨씬 강한 전력이다.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주겠어?"

명한의 요구에 쌍각사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몸의 금빛이 더욱 진해지더니, 전방으로 번개 줄기를 날렸다.

예전에 사용했던 전격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위력.

바위가 타고 나무가 단번에 재가 됐다.

발만 동동 구르던 묘아가 입을 떡 벌렸다.

"벼, 벼락이 쳤어!?"

"쌍아는 원래 뇌(雷) 속성을 타고났으니까. 신수가 됐다면 강해지는 건 당연하지."

"와······그럼 이 뱀이 전설에 나오는 그 동물이야?"

"격은 맞췄지. 성장만 하면 우화에 등장하는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어."

명한의 손등 위로 쌍각사가 날아와 몸을 말았다.

아직은 뱀에 가까운 습관이 남아 있지만, 파르르 떨리는 날개는 용임을 증명했다.

‘근데 동양의 용은 날개가 없지 않나?’

잠시 의문을 가졌으나, 이내 털어냈다.

중요한 건 아니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 나야말로, 주인

교감에 미소지었다.

#

명한 일행은 속도를 올렸다.

이미 지체한 시일이 꽤 많았다.

말을 갈아가며 아미산까지의 여정을 서둘렀다.

그리고 달이 채 바뀌기 전.

아미산 부근에 도착했다.

"일단은 이곳에 짐을 풀고 쉬었다가 가자."

아미파의 비호를 받는 마을이었다.

"주변에 아미파 비구니들이 꽤 많네요?"

"백순순이 장문인으로 앉은 이후로는 행보가 좀 달라졌지. 전처럼 신선놀음하면서 산 위에만 틀어박혀 있지 않다는 거야."

어렵지 않게 마을 내를 오가는 비구니를 확인할 수 있었다.

제법 속세와 가까운 모습이었다.

"세속적인 태도라고 봐야 하나. 그래서 설득이 가능하다고 보는 거냐?"

"아무래도 그런 면이 있지. 산속에서 도만 닦겠다는 사람들을 설득할 방법은 없어. 속세로 내려올 마음이 있어야 이해득실을 따지는 거지."

"그만큼의 매물은 있고?"

"백순순이 포기하지 못할 물건은 있지."

적어도 회심곡에 들어갈 정도의 가치는 있어야 한다.

소선연은 한때 아미파를 배신하고 역적 화무천과 정을 통하던 인물.

아미파 입장에서도 치욕과 같은 존재다.

어중간한 물건으로는 대면을 허락할 리가 없다.

"도련님, 그냥 몰래 만나러 가는 건 안 되나요?"

"아미파 산중에 몰래 잠입하자고?"

"어려울까요?"

"뭐, 너나 묘아는 어느 정도까지는 가능하겠지. 하지만 회심곡 심처, 소선연이 머물고 있는 장소까지는 불가능해. 그곳에는······"

"구검신녀(九劍神女)가 있겠지."

마지막 말은 화무천의 것이었다.

"알고 있군요."

"알다마다. 나와 소선연의 관계를 가장 먼저 알아챈 것도 그녀였다. 수백, 수천 번을 넘게 합을 겨뤘다."

"······천하제일악. 당신하고 겨뤘다는 거야?"

은소소가 놀란 어투로 물었다.

과장된 별호를 제외해도 화무천은 전대 신교 교주.

그 무력은 천하제일에 가까웠다.

"세간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미파 제일의 고수는 구검신녀다. 당시의 나와도 호각세를 이룰 정도였지."

"······세상에는 숨은 고수들이 많네."

"드러난 강자는 어디까지나 표면에 불과하다. 진짜 강자들은 수면 아래에 숨어있지. 소림사의 삼신승과 같이."

삼왕오제는 그저 간판.

그 이면에 숨어있는 자들이 진짜였다.

"하여튼 그런 괴물이 지키고 있으니까 섣불리 접근하는 건 금물이야. 우리가 아미파에 내 걸 조건은 전부 두개."

"두 개? 왜 두 개지?"

"하나는 백순순이 참지 못할 정도로 갈구하는 물건. 그리고 남은 하나는 명분이야."

"명분?"

명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을 손으로 가리켰다.

"백순순은 어디까지나 실리적인 성격. 정도 무림이 회복하기 전까지는 신교와 선을 대려 할 거야. 그 대상이 누구인지는 실력과 평판에 달려 있지."

"그걸 너로 만든다? 어떻게?"

"이미 소림사에서 한바탕 한 이력이 있으니까. 적당하게 시연만 하면 넘어올 거야."

"······너, 궁곡을 노리고 있구나."

"맞아. 본래라면 다른 방식으로 했을 테지만, 좋은 매물이 나와 줬는데 마다할 이유는 없지."

묘아가 물어온 소식에는 궁곡에 대한 것도 있었다.

"무대는 이곳, 아미산. 배역은 나와 궁곡."

배우만 모르는 연극이 펼쳐질 예정이었다.

#

"뭐? 마교의 소궁주가 산 아래 마을에 와 있다고?"

명한 일행이 산 아래에 도착한 것은 이내, 아미파의 안까지 전달되었다.

도착 이후로 모습을 감추지 않았기에 당연했다.

"대체 무슨 목적으로 마교의 것들이 신성한 아미파 주변을 얼쩡거리는 건데?"

"소림사의 일 때문에 찾아온 건 아닐까요?"

"소림사가 뭐? 장문인께서 잘못한 일도 없는데."

소식을 들은 선선이 화를 감추지 않았다.

장문인 백순순과는 같은 시기에 입문한 인물.

백순순이 아니라면 아미파는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성격이었다.

"장문인은 지금 어디에 있지?"

"운무곡에 올라가셨어요. 내려오시려면 반나절은 있어야 할 텐데······"

"흥. 기다리다가는 아미파에 흉한 소문이 돌겠어. 지금 이곳에 있는 애들을 추려 봐. 내가 직접 내려가서 마교의 인간들을 만나봐야겠어."

"하지만 장문인이······"

"운무곡에 있다면서! 우리가 마교 놈들하고 결탁이라도 한다고 사람들이 수군거리면 어쩔 생각이야!?"

버럭 외치는 소리에 제자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이럴 때는 괜히 안 막는 것이 상책.

여러 번 겪어봐서 아는 일이었다.

"건방진 마교 놈들. 우리 아미파는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보여줘야겠어."

아미파 산문이 시끄러워졌다.

#

명한이 마을에 들어서서 가장 먼저 한 건 흑점의 분파를 찾는 일이었다.

중요 문파, 인근 마을에는 반드시 분타가 존재했다.

"천마궁을 떠났다는 건 확실하지?"

"네. 이미 긴급으로 확인했습니다. 행적도 감추지 않고 곧바로 소림사로 직행하고 있습니다."

"소림사라. 그곳을 중심으로 날 찾으려 하는군."

"태사님 위치를 교란시켜 볼까요?"

"아니. 그럴 필요 없다. 이쪽으로 유도해."

무대에 배역이 오지 않으면 곤란하다.

명한은 궁곡의 현재 위치를 추측, 대충의 날짜를 가늠했다.

‘속도를 보면 하루 이틀인가.’

생각보다 멀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이 남으면······"

"도련님!!"

추가 지시를 내리려는 순간.

향아가 다급하게 숙소 문을 열고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아, 아미파에서 사람이 왔어요!"

"아미파에서? 흠. 근처에서 얼쩡거리는 게 마음에 안 들었나 보네."

예상한 상황은 아니지만, 크게 상관은 없다.

‘어차피 한 번 정도는 직접 보여줄 필요도 있으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마교의 인간은 당장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라!"

문밖으로 몇 걸음 나가기 전부터 큰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마을 입구, 아미파 승복을 입은 무리였다.

선두에 선 날카로운 인상의 비구니가 목소리의 주인이었다.

"아미파의 선선이로군."

"누군지 아세요, 도련님?"

"흔히 있는 군상이지. 장문인과는 같은 항렬인데 성격에 흠이 있어서 밀렸거든. 그 뒤로는 안방마님같이 설치곤 하지. 이래저래 아미파의 독버섯 같은 인간이야."

명한은 신랄하게 품평하며 무리 앞으로 접근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마을 사람들이 구경나왔지만, 굳이 숨기거나 가리지 않았다.

"마을이 왜 이렇게 시끄럽나 했더니, 아미파의 선자께서 내려오셨군."

"음? 아, 드디어 나오셨나?"

마주 선 무리 중앙으로 두 사람이 대치했다.

"이리 극진하게 대접하실 필요까지는 없는데. 어차피 몸 추스르고 아미파로 올라갈 생각이었습니다."

"대접? 뭔가 착각한 모양이군. 나는 아미파의 대표로, 마교를 신성한 아미산에서 내쫓기 위해서 온 것이다."

"아미파의 대표? 장문인은 다른 분으로 아오만."

"흥. 잠시 자리를 비워, 내가 대리로 왔을 뿐. 신성한 아미파에 네놈들 마교가 설 자리는 없다!"

앙칼진 목소리가 마을을 쩌렁쩌렁 울렸다.

어찌 됐든 이 마을은 아미파의 비호를 받는 장소.

선선의 외침에 마을 사람들도 옹호 비슷한 말로 숙덕거리기 시작했다.

배척하는 분위기를 조성한 것이다.

"이거 사람을 곤란하게 만드는군요. 아미파의 정기를 받으며 나름 선행을 할까 했는데."

하지만 반응에 따른 대응책은 순서대로 정해 놓았다.

명한이 뒤로 손짓하니, 흑점의 인물들이 수레를 끌면서 다가왔다.

수레에는 쌀과 비단.

산중 마을에서 구하기 힘든 여러 물건이 실려있었다.

"보시라 하든가요? 아미파의 명성을 높게 여겨, 이곳 마을에도 도움이 될 물건을 좀 챙겨 왔습니다."

"비, 비단이다!"

"세상에, 이게 다 뭐야? 저 많은 게 전부 쌀이라고?"

"저, 저 가죽 질 좀 봐. 성에나 가야 구할 물건이라고."

손바닥 뒤집듯 태도가 바뀌었다.

직접 위해를 가한 것도 아니고, 돈 앞에 장사 없다.

선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금 뭐 하는 수작질이냐? 감히 아미파 앞에서 더러운 돈으로 사람들을 현혹하는 건가!?"

"돈에 더러움이 있겠냐만, 싫다면 거두는 수밖에요."

명한이 다시 손짓하자 수레가 멈췄다.

당연하게도 주변 마을 사람들의 인상도 대번에 험악해졌다.

분위기를 읽은 선선의 제자가 손사래를 쳤다.

"사, 사부님 이러면 안 됩니다. 되레 수작에 놀아나는 일이에요."

"크윽! 그럼 나보고 저 더러운 마교놈의 재물을 받으라는 말이냐?"

"모든 건 마음 먹기에 달렸다는 말이 있잖아요. 마교가 가지고 온 물건이라고 해도, 시주분들이 행복해하시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봐요."

"이젠 너도 내게 충고를 하는 거냐!?"

하지만 심사가 꼬이면 돕는 말도 제대로 들리지 않는 법.

선선은 크게 역정을 내며 검을 뽑아 들었다.

"나, 아미파의 선선은 마교의 농간에 놀아나지 않는다. 당장 이 신성한 땅에서 물러나라! 그렇지 않으면 내 검이 너희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나름대로 기운찬 외침.

"이게 아미파의 대접이라는 건가. 손님으로 찾은 사람에게 검을 들이대다니. 백 장문인을 봐서 한 번은 용서해 줄 테니, 그만 무기를 거두시오."

하지만 명한은 능글맞게 이를 대했다.

굳이 강변으로 맞설 이유가 없었다.

"이이익!! 누가 누굴 용서한다는 말이냐, 이 역적!"

"나는 앞서부터 그대가 마교라 우리를 멸칭하는 것도 봐주고 있소이다. 어디까지나 백 장문인의 체면을 봐서 참고 있을 뿐. 계속 무례하게 굴면 나도 참을 수 없소."

"하! 참지 않으면 네놈이 뭘 어쩌겠다는 거냐!? 이곳은 아미산이다! 아미파의 앞마당이다!"

"참 괴팍하구려. 아미산이 신성한 곳임은 맞으나, 그대가 신성하다는 의미는 아니거늘."

명한이 눌러 두었던 기도를 풀어냈다.

바닥이 푹 꺼지고 솟구친 내공에 바람이 밀려났다.

사방 오 장을 장악하는 절대적인 패도였다.

"뭐, 뭐······!?"

펄럭이는 옷자락을 손끝으로 여미며 답하는 명한.

"내 이름은 소백. 신교의 소궁주요. 그대의 검에 아미산을 담을 자신이 있다면, 어디 덤벼 보시구려."

아미산을 오시하는 눈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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