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신투가 어둠을 틈타 조용히 움직였다.
바람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은밀한 걸음이었다.
어깨높이의 목책을 넘어 장원 구석으로 내려앉았다.
‘방비가 꽤 삼엄한데?’
안을 지키는 숫자가 상당했다.
면면의 실력도 제법 뛰어난 수준.
작심하고 꽉 틀어막은 형국이었다.
"에잉. 고작 도둑 하나 때문에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가?"
"이 사람이 못하는 소리가 없어. 창고에 보관 중인 물건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서 하는 소리야? 진상품이라고, 진상품."
"나도 알지. 중요한 거 누가 모르나. 근데 고작 해봐야 도둑이잖아. 자기가 무슨 수로 여기서 훔치겠다는 건데?"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온 목소리.
경비를 서고 있는 흑점의 인물들이었다.
‘흐흥. 찻잎은 확실히 이 안에 있는 모양이네.’
하루 꼬박 내부 인물을 솎아내는 것도 봤다.
연극일까 싶어서 신중하게 봤지만, 행동에 거짓은 없었다.
안을 다잡고 방어를 튼튼하게 한다.
"······생각보다 별거 없는 사람이었나?"
기대보다는 못 미치는 대응이었다.
"야, 방금 뭐라고 했어?"
"응?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뭐야. 바람 소린가?"
경비가 중얼거림에 소리를 따라와 봤지만, 남은 건 그림자뿐.
‘바람인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자리로 돌아갔다.
이미 신투는 사라진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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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쯤이면 들어왔겠지?"
늦은 밤, 컴컴한 하늘 아래에 명한이 섰다.
눈을 제외한 모든 부위를 가리는 복면을 착용한 상태였다.
"빠져나온 건 안 들켰을까요?"
"이월의 솜씨는 장인의 그것이니까. 가까이서 보기 전까지는 알아채기 힘들 거야."
"후우. 엄청 긴장돼요."
"긴장 풀어. 이건 그냥······가벼운 도둑질이니까."
명한이 씩 웃으며 향아의 복면을 추어올렸다.
"명심해. 잡히지 않는 게 최우선이야. 위험하다 싶으면 그냥 빠져나가."
"네, 도련님."
두 사람이 서 있는 곳은 천하상단의 분점.
진상을 위한 찻잎이 모여있는 창고였다.
오월상단과 경쟁적으로 찻잎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모자라지 않은 양이 비축되어 있다.
즉, 흑점의 찻잎을 태워도 채우는 건 가능했다.
"가자."
관건은 천하상단의 경비.
큰돈이 걸려있는 만큼 이쪽의 방비도 만만치 않게 두껍다.
이를 뚫어내기 위해서는 몇 가지 수가 필요하다.
펑―!!!
요란하게 피어오르는 적색의 운무.
"침입자다!! 잡아라!!"
"누구냐!? 누군데 이곳을 침범하느냐!?"
"잡아! 도망치지 못하게 해!"
첫째는 교란.
"나, 신투를 잡겠다고? 백 년은 이르다!"
"신투!?"
"신투다! 신투가 잠입했다!!"
일행 중 신투의 경공과 맞설 수 있는 건 향아의 월보가 유일하다.
이런 밤중에 둘의 차이를 알아보는 건 쉽지 않다.
귀신처럼 날뛰는 향아에 경비 수십이 이끌려 갔다.
‘그럼 이제부터가 두 번째.’
"밖이 소란스럽군. 우린 나가지 않아도 되나?"
"흥. 우리는 이곳만 지키면 그만이다."
"우리 북천 삼괴가 지키는 곳을 누가 감히 침범할지 궁금하군."
찻잎이 보관 중인 창고의 경비를 쓰러뜨리는 일이다.
향아의 경공은 신투에 비견할 만하지만, 도둑질에서는 미치지 못한다.
그건 명한도 마찬가지.
찻잎을 훔치려면 뚫어야 한다.
"······! 누구냐!?"
최선의 선택지는 기습.
명한이 어둠 속에서 큰 걸음으로 뛰어 삼괴의 거리 안으로 들어갔다.
덩어리져 있던 세 사람의 기운이 셋으로 나뉘어 하나하나 구분되기 시작했다.
‘정면. 측면. 그리고 사선에서 오는 검.’
미래 예지에 가까울 정도의 예측.
모든 방위에서 쏟아지는 공격을 촌각 만큼 앞서서 반응하여 전부 흘렸다.
"뭐······!?"
당황한 목소리의 남자의 턱을 주먹으로 강타.
떨어지는 검은 손등으로 흘린 뒤, 힘을 파도처럼 넘겨서 반대쪽을 후려쳤다.
일타에 두 명이 쓰러졌다.
"어디서 이런 고수······컥!"
그리고 당황한 호흡 속, 가장 약한 순간에 명치를 찔렀다.
큰 내공도 엄청난 초식도 쓰지 않은 간결한 공방.
나름대로 난다긴다하는 무인 셋을 처리하는 데는 한 호흡이면 충분했다.
"괜찮은데?"
깊어진 묵혼공과 반야의 합치.
순간 공방에 있어서만큼은 어마어마한 상승효과를 내고 있었다.
명한이 만족한 얼굴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저쪽으로 간다! 잡아!!"
"쫓아라! 구석으로 몰아!"
"아차차.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승리의 감격은 잠시 넣어 두고 창고 문을 비틀어 열었다.
천하상단의 상징으로 봉인된 상자 수십 개가 나란히 쌓여 있었다.
흑점에서 보관하고 있던 양보다 되레 더 많았다.
"남은 건 불놀이인가.‘
웃음을 머금고 상자를 하나씩 들쳐멨다.
나르는 것도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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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파미보가 소요파의 신기라면 은사장갑(銀蛇掌鉀)은 신물이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다.
옛 소요파의 선인인 잡았다고 알려진 영물, 은사의 가죽장갑.
손을 대고 문지르는 것만으로 얇은 벽은 소리 없이 투과할 수 있다.
지금껏 ‘신투’ 이름 두 자를 있게끔 한 물건이었다.
"조용한데? 오늘 안 오는 거 아니야?"
"윗분들에게 겁먹은 거 아니야? 태사께서도 작정하고 지킨다고 하던데."
"무공이 어마어마하다며?"
"소문만 무성하긴 한데······듣기로는 현경이라나 봐."
"허억. 현경? 그건 뭐 거의 문파 조사급 아니야?"
"그러니까. 겨우 신투 나부랭이가 넘볼 곳이 아니라 이거지."
경계를 선 경비들의 속삭임.
신투의 이마 위로 핏대가 팍 섰다.
‘현경이 뉘 집 애 이름이냐?’
한 마디 똑 부러지게 해주고 싶지만, 일이 급해 참았다.
입술만 비죽이며 창고의 옆을 뚫고 들어갔다.
"······"
함정. 함정. 함정.
수십 개의 함정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는 길이었다.
연쇄적으로 발동하는 것도, 은밀하게 가려져 있는 것도 엄청나게 많았다.
‘흥! 이런 거로 나를 잡으려고 하다니.’
걸리면 신투라는 이름이 울 뿐이었다.
스슥―
빼곡하게 늘어선 함정 위를 날아서 지나가는 신투.
전설적인 허공답보(虛空踏步)의 경비를 보는 것만 같았다.
‘표랑(漂浪)이 있으면 이 정도 거리는 우습지.’
하지만 신투의 경공은 허공답보가 아니었다.
표랑이라 불리는 무색의 발판과 은사장갑에서 이어진 실의 힘이었다.
미려한 능파미보에 이런 기물들이 합쳐지면 허공을 나는 것 같은 장면을 연출할 수 있었다.
"······흥. 소문만 못하네."
그렇게 복도를 가로질러 문 앞에 섰다.
너머로 꽤 많은 기척이 느껴졌다.
찻잎을 아예 앞에 두고 지키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날 막을 거 같았나?’
우스울 따름이다.
신투가 문을 살짝 밀며 그 틈으로 원통 몇 개를 굴려 넣었다.
바람 소리와 함께 자욱해지는 실내.
"앞이 전혀 안 보이잖아! 이거 무슨 연기야!?"
"기척에 집중해! 접근하는 놈만 잡아라!"
금세 소란스러워지는 실내로 살금살금 걸어 들어갔다.
특수하게 제작된 이 안개 속에서는 제아무리 고수라도 기척을 감지하기 어렵다.
여기에 능파미보의 은밀함이 더해지면, 천하의 고수라도 잡을 수 없다.
"찻잎만 지켜! 큰 상자를 들고 나갈 수는 없다!"
"거리만 유지해라!"
‘보통이면 그게 맞는 대응이겠지.’
하지만 상대는 다름 아닌 신투.
허우적거리는 사람들 사이를 가로질러 상자 옆에 작은 고를 붙였다.
철을 녹이고 물건을 꺼내줄 도구였다.
몇 숨 세기도 전에 상자 옆으로 구멍이 숭숭 났다.
"이곳 주인에게 전해. 찻잎은 받아간다고."
그리고 바닥을 뚫으며 아래로 도망쳤다.
남겨놓은 건 주먹만 한 구멍.
실내를 가득 메우던 연기는 뻥 뚫린 구멍을 따라서 한 번에 쏠려갔다.
상자의 열린 틈으로 팔랑거리기 시작한 찻잎도 마찬가지.
순식간에 수십, 수백 장의 찻잎이 연기와 함께 바닥으로 사라졌다.
"막아!!"
"어디야!? 어디가 뚫린 거냐!?"
당황에 날뛰어도 이미 늦었다.
‘신투’ 이름 두 자만을 남긴 채 이미 자취를 감춘 지 오래.
승부는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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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싱거웠지."
인적이 드문 교외지역.
신투가 두툼해진 자루를 깔고 앉아 중얼거렸다.
뭔가 재미있는 상대가 될까 싶었는데, 평범하게 끝나고 말았다.
"역시 사부님 말대로 우리 은영문의 상대가 없는 건가?"
아예 자루를 깔고 누워버렸다.
동이 터오는 하늘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복잡했다.
이런 마음을 죽이고자 세상을 주유했는데, 사라지기는커녕 커지기만 했다.
"팔자가 폈군, 그래?"
"······!"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일어났다.
고작 10장 밖에, 명한이 서 있었다.
‘어느새······?’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물건을 훔쳐갈 거면 흔적은 남기지 말아야지."
"난 흔적 같은 건 남기지 않아."
"창고 아래쪽에 특별 염료가 섞여 있었거든. 자루에 묻어서 이곳까지 날 안내해 줬지."
"특별 염료? 쯧. 처음부터 찻잎을 주고 날 잡으려던 속셈이군."
"그런가?"
명한이 가볍게 웃으며 손짓했다.
신투가 깔고 앉은 찻잎이었다.
"우리 내기의 정확한 내용이 뭐였지?"
"······뭐긴 뭐야. 내가 찻잎을 훔치면 승리, 못하면 패배. 이거잖아."
"그럼 얘기해 보자고. 넌 승리했을까, 패배했을까?"
"무슨 헛소리를 하고 싶은 거냐? 추적했으니 승리라고? 내가 못 도망칠 것 같아?"
"네 경공술이면 분명 도망치겠지. 하지만 넌 도망치지 않아."
명한이 탄기의 요령으로 자루의 끈을 잘랐다.
팍, 소리와 함께 찻잎들이 밖으로 노출됐다.
"봐. 찻잎은 내가 확실하게 훔······"
쳤다, 라고 말하려는 순간.
햇빛에 노출된 찻잎이 격렬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기름 먹인 짚단에 불을 붙인 것만 같았다.
끄고 말 틈도 없이 순식간에 타올라 전부 재가 되고 말았다.
"무, 무슨 짓이야!?"
"말했잖아. 우리 내기는 찻잎을 훔치는 거라고."
"하. 그래서 아예 찻잎을 태운다고?"
"훔친 찻잎이 없다면, 성공이라고 할 수 있나?"
"그럼 넌? 찻잎이 없으면 너도 지킨 게 아니잖아!"
역정 내는 신투를 향해 명한이 가볍게 웃었다.
그리고 뒤를 향해서 가볍게 손짓했다.
덜그럭, 소리를 내며 수레 몇 대가 다가왔다.
‘오월’이 박힌 상자들에 신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설마."
"네게는 찻잎이 없고, 내게는 찻잎이 있다."
덜컹. 소리를 내며 상자를 여니, 찻잎이 빽빽하게 차 있었다.
"······천하상단."
"그쪽에는 신투가 왔다 간다는 서명까지 남겨 뒀다."
"하. 하하. 절묘한 수다, 절묘한 수야. 날 천하상단 쪽에서 쳐내며, 찻잎은 보존하는. 그러면서도 내기에서도 완벽하게 이기는 수야."
처음에는 허탈하게 보던 신투가 아예 손뼉을 치며 즐거워했다.
이렇게까지 자신을 엿 먹인 상대는 처음이었다.
훔칠 물건을 불태워서 내기를 이기는 발상이라니.
그 과감함과 수의 독특함이 마음에 쏙 들었다.
"좋아. 너라면 충분히 자격이 있는 거 같다."
한걸음에 명한의 앞으로 다가오는 신투.
명한은 다음 말로 ‘승복, 인정, 충성’ 따위를 생각했다.
패배 후 부하가 되는 전형적인 흐름이었으니까.
"너, 내 남편이 돼라."
"······뭐?"
하지만 언제나와 같이.
인생은 예상처럼 흘러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