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화 (57/235)

신투와의 내기

천하의 뭇 경공술 중 제일을 뽑자면 분명 의견은 여럿으로 나뉠 것이다.

전투적인 운룡대팔식이 최고라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정중동을 중심으로 하는 소림사의 나한보가 최고라 말하는 이도 분명 존재할 터.

하지만 이동의 미려함과 경쾌함으로 따지자면 모두가 입을 모아서 말할 것이다.

"능파미보라고."

"능파미보는 예전에 사라진 거 아니야? 소요파가 멸문당하면서 자취를 감췄다고 들었는데."

"가능성이야 여럿이지."

중요한 건 신투의 경공술이 분명 능파미보라는 것.

그 미려한 동작은 다른 것으로는 따라 할 수 없는 멋이 있었다.

"그 어린 나이에 수준급의 경공술을 익히고 있다는 건가. 대단한 재능이네."

"응? 설마 모르고 있었어?"

"어? 뭘?"

"신투 말이야. 축골공(縮骨功)으로 체형을 바꾼 거잖아. 목소리도 아마 변용술의 일부를 사용했을 거야."

"저, 정말?"

"손등이나 미세 주름을 살펴야지. 어린애치고는 투박한 피부였잖아."

"으윽. 전혀 몰랐어."

은소소가 앓는 소리를 내며 발을 굴렀다.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속아 넘어간 경우였다.

"뭐, 그건 그렇다 치고······상황이 꽤 고약하게 됐어. 우리 행적을 파악한 것도 대단한데, 이미 흑점과의 관계도 알고 있잖아."

"천하상단 쪽에서 알아낸 걸까?"

"그쪽일 수도, 혈염마녀와 공조하는 다른 세력일 수도 있지. 이래저래 뻗어놓은 손은 많으니까."

"그럼 앞으로 흑점 활동도 위험하지 않겠어?"

"어차피 언젠가는 걸릴 일이었어. 싸움이 붙으면 그대로 싸우면 그만. 게다가······"

신투의 내기.

"느낌상 신투는 정보를 천하상단 쪽에 공유하지 않은 거 같아."

"우리를 농락하는 거 아닐까?"

"가능성은 있지만, 느낌상 아니야. 뭔가, 개인적인 흥미가 더 강하게 느껴져. 찻잎을 가지고 하는 내기도 그렇고. 어딘가에 강하게 소속된 인물은 아닌 거 같아."

"소속이 아니다. 일시적인 계약 관계?"

명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의 습작에서도 신투가 천하상단에 소속되어 있었다는 이야기는 없다.

설정을 메웠어도 갑자기 관계가 바뀌는 건 이상한 일.

‘계약을 맺고 날 쫓았다고 보는 편이 옳아.’

아마도 흑점을 되찾는 순간부터.

"그럼 이제 어떻게 하려고? 내기는 받아들일 거야?"

"걸어오는 싸움을 마다할 수야 없지. 찻잎은 안가에 모아서 보호한다. 방비는 일월과 이월 쪽에서 맡아서 해줘야겠어."

"네, 태사님."

"명을 받들게요."

왠지 모르게 가슴 언저리가 간질간질한 느낌.

이번 일은 어쩐지 재미있게 흘러갈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럼 손님이 오기까지 이틀."

무엇을 할까.

명한이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

명한이 청명루 높은 곳, 난간에 걸터앉아 주변을 관조했다.

수많은 사람이 개미 떼처럼 모여서 지나갔다.

"영시(靈視)를 수련하는 건가?"

그 옆으로 쇠사슬을 절그럭거리는 화무천이 앉았다.

"이렇게 보는 걸 영시라고 합니까?"

"네 무공이 내 극천일무기와 닮았다면."

명한이 답을 아끼고 눈을 반개했다.

덩어리로 모여있는 군중들 하나하나가 낱개로 떼 져 읽히기 시작했다.

"묵혼공이 오성이 이르자 이런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더군요. 기감과는 다른 개념이었습니다."

"기감이라는 건 호수에 떨어진 돌멩이가 낳은 파문과 같지. 이를 읽는 건 근본에서 나온 흔적을 되짚는 것이라네."

"영시는 본질을 읽는다?"

"호수에 떨어진 돌멩이가 무엇인가. 근본을 꿰뚫어 보기 시작하면 흔적의 형태도 미리 읽을 수 있지."

"출수 전에 이미 공격을 읽는다."

"이에 능숙해지면 벌어질 모든 일의 가능성을 재단할 수 있다."

화무천이 손이 난간 저 너머를 가리켰다.

보일 듯 보이지 않는 무언가의 흐름이었다.

"극천일무기로 그 너머를 본 적이 있습니까?"

"봤지. 그리고 좌절했다. 극천일무기는 분명 절세의 무공이나, 대가가 참혹하다. 앗아간 생명의 단말은 대상의 정신을 좀먹기 때문이지."

"제게 경고하는 겁니까?"

"자네 목적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이네. 약속에 홀려 밖으로 나왔으나, 나는 극천일무기를 세상에 풀어놓을 생각이 없어."

화무천의 목소리는 상당히 단호했다.

"제게 극천일무기를 제어할 수단이 있다고 해도 말입니까?"

"반야를 익혔어도 안 되네. 일찍이 삼신승이 시도했으나, 실패했던 일이니까."

"반야가 아닙니다."

설정상 존재하는, 명한만이 아는 방식이 있다.

하지만 이건 아직 말로 풀어낼 단계가 아니었다.

"뭐, 이건 차차 이야기하도록 하죠."

달싹이던 입을 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무천은 시선으로 그 모습을 따라갔으나, 더 묻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지금 우리 도둑이 먼저니까요."

난간 너머로 훌쩍 뛰어내리는 명한.

그의 시선 끝에는 전날 만났던 ‘2천 냥을 받아간’ 남자가 있었다.

#

골목 어귀, 인적이 드문 장소였다.

명한은 소리 없이 땅을 밟아 한 남자에게 접근했다.

전날 만났던 바로 그 남자였다.

"쉿. 움직이지 마."

"······헉! 뭐, 뭐냐!?"

목 언저리에 닿은 차가운 금속에 남자가 바짝 얼었다.

"몇 가지 물어볼 말이 있다. 솔직히 답만 한다면 여기 이 물건은 무사할 거야."

툭툭, 목을 두드리는 금속에 마른 침만 꼴딱 삼켰다.

끄덕이다 베일까, 간신히 머리끝만 까딱였다.

"어제, 청명루로 가서 소란을 피운 게 너 맞지?"

"마, 맞긴 합니다만······다 이유가 있었습니다요."

"이유는 됐고, 그때 네 물건을 훔쳐간 소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봐."

"그 어린 계집이요?"

"그래. 어디에서 만났고 어떻게 물건을 훔쳤지?"

남자의 눈알이 데굴데굴 굴러갔다.

누군데 이런 걸 물어볼까 싶은 거였다.

"쓸데없이 머리 굴리면 그대로 이승과 작별이다. 있는 그대로만 답해."

"네, 네! 그대로만 말하겠습니다!"

하지만 명한이 그런 낌새를 놓칠 리 없다.

날이 피부를 살짝 자리고 들어오자, 눈알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처음 만난 곳은 어디지?"

"저, 저희 집 창고였습니다."

"창고? 그냥 도둑질하러 들어왔다는 거냐?"

"아뇨. 며칠을 굶었다나. 모친께서 불쌍히 여겨 밥도 주고 쉴 곳도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염치도 없는 계집이······"

빠드득, 이 가는 남자의 모습에 거짓은 없었다.

‘사전 작업을 그렇게까지 한다고? 아니면 보물을 훔치며 겸사겸사 날 노렸나?’

어느 쪽이든 꽤 공들이는 성격은 확실했다.

"그 뒤로는? 무언가 수상쩍은 모습은 없었나?"

"부엌데기를 제가 뭐 관심이나 줬겠습니까. 아, 저희 부엌에서 일하는 노홍이란 계집하고 친했습니다."

"하녀?"

"네, 네. 자주 붙어 다니며 쑥덕거리는 모양새가 아주 친자매 같았지 뭡니까."

"그건 또 관심 가지고 봤다는 거냐?"

"노, 노홍 그 계집이 좀 반반한지라. 하하······"

쑥 들어온 질문에 멋쩍게 웃었다.

흑심 가지고 관찰했던 건 사실이니, 괜히 꼬투리 잡힐까 무섭기도 했다.

"······어?"

하지만 꼬투리를 잡아야 할 사람은 이미 없었다.

목에 닿아 있던 금속도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답하는 사이 이미 사라진 것이다.

"어? 어? 내 주머니 어디 갔어? 전표!!"

품속 고이 모셔 두었던 금 이천냥 전표와 함께.

남자가 불같이 화를 내며 길길이 뛰었다.

하지만 그래 봐야 사라진 전표가 돌아올리 있겠는가.

골목만 시끄럽게 울렸다.

#

도둑질을 위해 잠입한 사람이 굳이 친분을 쌓을 이유는 없다.

어울리기 위해 두루두루 친해지는 거면 모르겠으나, 한 명과 특별하게 그러는 건 이상하다.

그래서 명한은 확인하고자 했다.

"노홍이요? 노홍이면 오늘 새벽에 떠났는데."

하지만 이미 그 대상은 떠나고 없었다.

"떠나요?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고향에서 서신이 도착했다나 봐요. 기다리던 지아비가 드디어 결혼할 돈을 모았다나."

"결혼. 다들 아는 이야기였나요?"

"두루두루 알았죠. 이 댁에 일하러 들어왔을 때부터, 사정이 딱한 거야 유명했으니."

공교롭다.

우연이라면 지나친 일.

그게 아니라면 이것이 목적이라고 봐야 한다.

"이런 집을 노렸다는 건가."

필요한 사람을 위해서.

‘이것도 설정에는 없던 거야.’

명한이 저택을 벗어나 잠시 길을 걸었다.

"만약 가정이 사실이라면 인물 설정이 이렇게 되는 건가? 사정이 딱한 사람을 돕는 의적. 비밀을 캐낼 수 있는 능력자. 조직이 소속되지 않고 계약으로 움직이며, 흥미에 동해서 내기를 거는 인물."

얼핏 떠오르는 군상이 몇 가지 있었다.

‘그럼 이제 중요한 이런 인물의 행보와 대응인데.’

이틀 후로 내기 날짜를 잡았다면 이미 물밑에서 움직이고 있음이 분명하다.

우선 적으로 떠오르는 건 흑점 내부.

"······아니. 그렇게 미온적인 건 나답지 않지."

명한이 입술을 혀끝으로 핥았다.

머릿속을 스쳐 가는 생각이 꽤 재미있었다.

#

숙소로 돌아온 명한은 이월을 불러왔다.

몇 가지 상의할 내용이 있었다.

"대충 상황은 확인했어. 확실히 신투는 자기 실력만 믿는 사람은 아니야."

"신중하다는 건가요?"

"응. 미리 대상에 잠입하여 상황을 살피고, 물건을 빼내 가는 용의주도함이 있어."

"그럼 어떻게 하죠?"

이월의 질문에 명한이 손가락 두 개를 폈다.

"가짜에 진짜를 섞어서 의도를 흐리는 것이 첫 번째. 지금부터 이월 넌, 현지 흑점 분타원들을 연도별로 거슬러서 전부 조사해."

"전부 다 말이죠?"

"응. 그 정도는 해야 우리 행동을 진짜라고 믿을 거야. 불만은 좀 나오겠지만, 흑점을 위한 일이라고 설득해."

숨어든 첩자를 찾기 위해서 전수조사를 한다.

이건 신투 역시 생각해낼 만 한 일.

의심할 이유는 없다.

다만, 행동을 진실로 믿게 하려면 그만큼 진심으로 움직여야 한다.

"그 뒤는 어떻게 할까요?"

"흑점의 병력을 모아서 안가를 방어해야지. 찻잎을 훔쳐가지 못하도록 모든 방위를 막아둬."

"전력으로 말이죠?"

"맞아. 나를 포함해 모든 전력이 동원될 거야."

반드시 막겠다는 의지.

이렇게까지 움직이면 진실을 의심할 이유는 없다.

"신투는 이렇게까지 해도 훔쳐갈 수 있다는 건가요?"

"신투니까.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훔칠 거야. 하지만 그렇기에 이번 수가 효과를 낼 수 있는 거지."

명한은 손가락으로 바닥에 그림을 그렸다.

네모반듯한 흑점의 안가와 그 가운데에 놓인 찻잎.

병력을 어떻게 배치하든 신투가 이를 훔쳐낸다면, 아예 훔쳐낼 것을 없게 만들면 된다.

"태워."

"네?"

"미리 바닥에 장치해서 찻잎을 모조리 태운다. 훔쳐갈 물건이 없으면, 훔치는 것도 성립이 안 되겠지."

"그······"

이월이 입만 뻐끔거렸다.

여러 가지 수를 생각해 봤지만, 이건 아니었다.

차를 태우면 진상은 대체 무슨 수로 한단 말인가.

"내기는 어디까지나 찻잎을 훔치는가, 훔치지 못하는가의 싸움. 찻잎을 태우는 이상 우리의 승리야."

"하, 하지만 그렇게 하면······"

"진상할 찻잎이 없다고? 걱정하지 마. 태워버린 찻잎은 다른 곳에서 채우면 되니까."

명한이 마지막으로 손을 그어 한 곳을 가리켰다.

흑점과 동떨어진 곳에 놓인 검은 반점.

그리고 그 옆에 끄적인 글자 하나.

천(天).

그제야 이월이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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