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한 만남
화무천을 군중에 녹여들 만큼 꾸미는 일은 절대 쉽지 않았다.
수염과 머리카락을 정돈하는 건 간단한 일.
하지만 치렁치렁 달고 있는 쇠사슬이 문제였다.
무슨 수를 써도 이건 처리가 불가능했다.
"죄인이라. 머리를 좀 썼군."
"관군으로 흉내를 내면 그리 도드라지진 않을 겁니다."
일월이 낸 꾀는 관군과 죄수였다.
포승줄 대신 쇠사슬로 몸을 옭아매고 구속구 비슷한 걸 팔에 걸었다.
죄인을 호송하는 관군의 모습이었다.
"신분은?"
"돈을 써서 몇 개 구해 두었어요. 자세히 살피면 걸리겠지만, 성의 출입 정도는 어려움이 없을 거예요."
"수고했다."
"태사님을 위한 일인걸요."
만약을 위한 신분증과 뇌물도 넉넉하게 챙겼다.
흑점은 과연, 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영민하게 움직여 주었다.
"그래. 이 건은 되었고, 그간의 이야기나 좀 들어보자. 오월의 상행은 계획대로 잘 돼 가고 있지?"
"네. 태사님이 남겨주신 정보대로 시세가 폭등하는 물건으로 차익을 얻고 있어요. 비단과 차로 얼마나 많은 이득을 얻었는지 헤아리기 힘들 정도예요."
"한동안은 상태가 유지될 거다. 해가 바뀔 무렵에는 철값이 또 오르겠지. 시기는 알려 줄 테니, 미리 준비해 두도록 해라."
"네, 태사님."
아무런 근거도 없지만, 일월과 이월은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이미 믿음 수준을 넘어선 신앙의 경지였다.
"그리고······조사하라고 지시해 둔 건 어떻게 됐지?"
"천하상단 말인가요?"
"슬슬 위기감을 감지하고 움직일 때가 됐는데."
"안 그래도 그 건으로 상의할 내용이 있었어요."
이월이 양피지 하나를 내밀었다.
"흠? 이건 서신용이 아닌데?"
"신투(神偸)에게서 온 알림장이에요."
"신투? 그 도둑 말이냐?"
"네. 얼마 전에 장안의 분타 쪽으로 신투의 알림장이 날아왔어요. 며칠 내로 물건을 훔치겠다고."
"신투라."
신투.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괴도다.
작업 며칠 전에 알림장을 보내어 경계하게 하고, 목표물을 귀신같이 훔치는 거로 유명하다.
"신투와 천하상단이 무슨 관계가 있지?"
"시기가 너무 공교로워서요. 지금 장안에는 황실로 옮길 찻잎이 대량으로 들어와 있어요. 찻잎에 문제가 생기면 득을 보는 건 다름 아닌 천하상단이죠."
"그들도 진상품을 노리는 건가?"
"네. 찻잎을 선점한 덕에 거래권을 따낸 건 오월상단이지만, 천하상단도 곧바로 따라붙었거든요.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죠."
황실 독점 거래권에는 어마어마한 돈이 걸렸다.
고위층이 사용하는 찻잎은 양과 품질 모두 최상급.
이를 얻기 위해서라면 무슨 수를 쓰든 이해가 된다.
"신투가 천하상단을 돕고 있다고 보는 건가?"
"흑점의 정보력으로 그간의 일을 분석해 봤어요. 흑점이 등장할 때면 천하상단이 득을 보는 경우가 많더군요."
"흐음."
습작 설정에는 없는 이야기.
신투는 그냥 있을 법한 인물로 넣어두었을 뿐.
별다른 설정이나 배경을 잡지 않았다.
‘모자란 설정이 이렇게 잡힌 건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일단 신투에 대해서 좀 더 조사해 봐. 그리고 찻잎은 혹시 모르니, 안가로 옮겨 둬."
"알겠습니다, 태사님."
본래라면 하루 이틀 머무르고 떠날 계획.
‘이 시점에서 오월상단이 꺾이면 곤란하지.’
하지만 상황이 이렇다 보니 며칠은 더 머물러야 할 것 같다.
"뭐, 아미파가 도망가는 것도 아니고."
여유를 가지기로 했다.
#
명한 일행은 장안 제일의 기루, 청명루 가장 위쪽에 숙소를 잡았다.
귀빈이 아니면 출입이 제한된 특별한 장소.
사람들은 누군데 저 장소에 출입할까 의아해했지만, 이건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에 청명루가 오월상단의 소유였으니까.
"너무 눈에 띄는 거 아니냐?"
"괜찮아. 중요 죄인 이송하는 관부의 인물이라고 치면 되니까. 괜히 어설픈 곳에 숨어있기보다는 이편이 더 낫지."
은소소는 우려를 드러냈지만, 명한은 태연했다.
화무천 때문에 이목을 숨기기 어렵다면, 차라리 대놓고 드러내는 편이 나았다.
관군. 그것도 고위 관군이라면 쉬쉬하는 경향이 있으니까.
"화려함 속에 깃털을 숨긴다. 자네의 수는 언제나 과감함을 바탕에 두고 있군."
"줄타기해야 하는 아슬아슬한 상황에 놓여있어서요. 습관이 됐다고 봐야죠."
"그 상황에 나도 포함되어 있는 건가?"
"그렇다고 하면 돌아가시게요?"
"이 죄인에게 돌아갈 곳이 어디 있겠나. 지금은 그저 이끌리는 대로 흔들리고 있을 뿐이네."
"삼신승과 있다 보니 승려 다 됐네요."
화무천은 침묵하고 명한은 가볍게 웃었다.
"소백. 할 일이 없다면 난 목이나 축이겠다."
"아직 이른 시간인데?"
"······이렇게 만담으로 시간을 죽이는 것보다야 낫겠지."
은소소는 자리를 털고 아래로 내려갔다.
어딘가 불편함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저 아이는 내가 불편한 모양이군."
"천하제일악이라 듣고 자라왔으니, 편하게 대하기는 어려운 법이죠."
"자네는 아닌가?"
"글쎄요. 선과 악은 제 기준에서는 크게 중요한 일이 아니라서. 필요에 응해서 마땅한 역할만 해 주면 그만입니다."
"내 약속이 자네에게는 그런 역할이다?"
"매듭을 짓지 못하면 넘어가지 못하는 일도 있죠. 천하제일의 기공을 그냥 버리기는 아깝지 않습니까?"
화무천의 입가가 미묘하게 떨렸다.
"자네는 내가 아는 누군가와 매우 닮았군."
"그 닮은 사람이 누구인지는 묻지 않을게요. 우리 일에 그런 이야기는 필요 없습니다."
"알고 있네. 나도 그런 걸 바라지는 않아. 내가 감히 그런 걸 어떻게 바라겠나. 전부 배신하고 떠난 사람인데."
"······"
명한이 입술을 달싹이다 그만두었다.
화무천이 말하는 ‘누군가’의 정체라면 알고 있다.
그가 떠올릴 대상이라고 해봐야 자식인 천마밖에 더 있겠는가.
하지만 아쉽게도 혈연에 반응해야 할 소백은 없다.
여기 있는 건 소백의 역할을 하는 명한뿐이다.
처음부터 선을 딱 긋고 역할만을 논하는 건 이 때문이었다.
"······이 계집이 감히!"
"응?"
순간.
아래층에서 요란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날이 바짝 서 있는 목소리였다.
명한이 층 난간에 몸을 기대고 아래를 내려다봤다.
"술이나 마시라니까."
한 무리와 대치 중인 은소소.
딱 봐도 조용히 넘어갈 일은 아니었다.
"잠깐, 다녀오죠."
"일 보게나."
난간을 잡고 아래로 뛰어내렸다.
#
은소소는 화가 잔뜩 난 얼굴로 소리쳤다.
"네놈들은 경우도 없는 거냐? 이 작은 아이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그리 핍박하는 거지?"
그녀의 뒤로 몸을 숨기고 있는 여자아이.
향아보다도 어린, 앳된 기색이 가득한 소녀였다.
"이이이! 이 방자한 계집년이! 뭣도 모르면서 감히 일에 끼어드는 거냐!?"
"방자한 계집? 오늘 네놈들 혓바닥을 모조리 잘라서 안주로 삼아야겠다."
"이익! 뭐 하고 있어!? 당장 저 계집들을 잡아 와!"
대치하던 무리의 남자가 손짓했다.
주변 수 명의 무리가 일제히 달려들었다.
딱히 빼어난 기도가 느껴지는 모습은 아니었다.
"잠깐, 잠깐. 이렇게 소란피울 일인가?"
그 틈바구니로 명한이 뛰어들었다.
달려들던 무리는 위층에서 뛰어내린 명한에 깜짝 놀라며 걸음을 멈췄다.
이것만 봐도 무림인은 아니었다.
"너, 너는 또 누구냐!?"
"그냥 술로 목 축이던 손님. 위에서 보다 보니까 서로 오해가 있는 거 같아서."
"오해는 무슨 오래! 저 무뢰배들이 이 어린아이를 괴롭혔다고."
"그래? 그럼 그 아이가 무슨 일로 위협을 당했는지는 들어봤어?"
"흥! 그런 건 안 들어봐도 뻔하지."
당당하다는 얼굴의 은소소.
"이이익!! 이 머리에 똥만 찬 계집아! 저 어린 년이 무슨 짓을 저지른 지나 알고 떠드는 거냐!?"
"뭐, 뭐!? 머리에 똥?"
한 마리에 꼭지가 돌아서 검까지 빼 들었다.
날카로운 검광에 분위기가 단번에 살벌해졌다.
"뭐 하는 거야, 소소. 이런 곳에서 검을 빼 들면 되나. 집어넣어."
"너도 저놈들이 하는 말을 들었잖아!"
"들었지. 그래도 검은 안 돼. 집어넣어."
"크윽!"
발끈한 기색은 여전하지만, 말은 따랐다.
납검을 한 채 숨만 거칠게 몰아쉬었다.
"자, 그쪽도 자꾸 도발하는 소리만 하지 말고 이야기를 해 봐. 무슨 일로 저 어린아이를 잡아가려고 한 거지?"
"저 계집이 우리 가문의 보물을 들고 튀었다고!"
"가보? 뭔데?"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보검이다!"
명한이 사내를 한 번, 은소소 뒤에 숨은 소녀를 한 번 번갈아 바라봤다.
‘이것 봐라?’
묘한 기색이 있었다.
"이 아이 몸을 봐! 보검을 대체 어디에 숨긴다는 말이냐!?"
그 기색을 다 판단하기도 전에 나선 건 은소소.
버럭 외치는 소리에 사내 쪽도 흥분했다.
"저 어린 계집에게 공범이 있는 거지! 아니, 이제보니 네놈들이 공범이구나! 싹 다 한패인 거 아니야!?"
"뭐? 이젠 하다 하다 그런 개소리를······!"
"당당하면 관청으로 가! 포두를 불러와서 누가 잘못인지 따져보자고!"
아예 관까지 대동하자는 움직임이었다.
작은 소란이 큰 사건으로 번질 위기였다.
"이렇게 합시다."
이때, 명한이 다시 나섰다.
"잃어버린 가보. 제가 대신 물어드리죠. 대신 더 이상의 소란은 없는 거로."
"무, 물어준다고? 그게 어떤 물건이지 알고나 하는 소리냐!?"
"금 천냥."
"······어?"
"금 천냥을 드리죠. 부족한가요?"
툭, 던진 말에 사내가 움찔했다.
가보라지만 금 천냥어치는 분명 안 된다.
"가, 가보란 말이다. 가보에는 의미가 있고, 단지 돈으로만 해결되지 않는······"
"금 이천냥. 부족합니까?"
"저, 정말이냐?"
"조용히 물러나 주신다면."
명한이 품에서 전표를 꺼내 던졌다.
오월상단에서 발행한 보증이 확실한 전표였다.
사내는 덥석 받아서 액수를 확인한 뒤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이, 이번만이다! 또 이러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아!"
"선처에 감사드립니다."
"흐, 흥!"
그리고 이내 콧방귀를 뀌며 물러났다.
화는 싹 날아간 날렵한 걸음걸이였다.
"소백, 대체 뭐 하는 거야? 왜 저런 놈들에게 돈을 쥐여 줘?"
이제 화가 남은 건 은소소 뿐이었다.
분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발만 동동 굴렀다.
"괜히 관과 엮이고 일이 커지는 건 좋지 않아. 소란이 벌어지면 이래저래 귀찮거든."
"하지만 그래도······"
"게다가. 돈 몇 푼보다 관심 가는 일이 있거든."
순간.
명한이 보법을 강하게 밟으며 은소소를 스쳐 갔다.
바로 뒤에 가리고 있는 소녀 쪽이었다.
팡. 손이 허공을 치며 공기 터지는 소리를 냈다.
잡으려던 소녀의 옷깃 대신이었다.
"역시인가."
"어떻게 알았지?"
소녀가 다시 나타난 건 위층 난간.
향아의 월보와 견줄만한 상승의 보법이었다.
"궁지에 몰려서 이곳까지 쫓긴 소녀치고는 심박 수가 낮아서. 표정이나 말투와 차이가 심하잖아."
"사십팔 궁의 망나니 소백. 소문과는 역시 다른가."
"나를 아는 건가?"
"어느 정도는."
소녀는 훌쩍 뛰어 명한과 은소소 너머에 내려앉았다.
그 날렵함이 새와 견줄만했다.
"그래. 네가 바로 그 신투로군."
"호오. 뛰어난 관찰력에 비상한 머리까지. 그쪽에서 전전긍긍하는 이유가 있었네."
"내가 이곳에 있는 건 어떻게 알았지?"
"몰랐어. 그냥 이집 저집 들쑤시던 중이었거든."
"으윽."
너스레 떠는 답에 은소소가 얼굴을 붉혔다.
괜히 나서서 정체를 드러내 준 격이었다.
"그래서 이젠 어떻게 할 셈이지? 내 위치를 공조하는 이들에게 알리기라도 할 건가?"
"그것도 방법이긴 하겠지만······그건 재미가 없지."
"재미라. 뭘 원하지?"
"간단해. 내기를 하자고."
"내기. 어떤 내기?"
"이틀 후. 오월상단의 찻잎을 훔쳐가겠어. 막는다면 네 승리. 막지 못하면 내 승리. 어때?"
"오월상단일에 내가 무슨 상관이지?"
"하하. 발뺌하지 말라고. 그쪽이 흑점의 주인이라는 것도 알고 있으니까."
눈 한번 깜빡할 사이에 신투는 창틀에 내려서 있었다.
그야말로 신기에 가까운 경공술이었다.
"내가 이긴다면 그쪽에 대한 정보를 반대편에 넘기겠어. 하지만 그쪽이 이긴다면 원하는 정보를 반대로 넘겨주지."
"약속은?"
"신투의 명성을 걸고 반드시 지키지."
"좋아. 그럼, 어디 한번 해보자고."
"탁월한 선택. 이틀 후에 다시 오지."
훅.
이번에는 바람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눈으로 보고도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였다.
"능파미보(凌波微步)라."
천하제일의 경공술.
생각지도 못한 만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