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화 (55/235)

숨 고르기

왕윤은 말없이 스승의 시체를 내려다봤다.

평생을 모셨고, 평생을 따랐던 사람.

하지만 그 내면이 어떻게 썩어갔는지는 헤아리지 못했다.

"······모든 건 사파 연합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사후만은 지켜주고 싶었다.

"사파 연합의 계획이었다?"

"네. 소림사를 뒤덮은 연기도 장문인을 습격한 이들도 전부 사파 연합이었습니다."

큰 소란에 몰려온 이들에게 이렇게 둘러댈 수밖에 없었다.

사건의 당사자인 이들도 그리하라 말했으니, 이게 최선이었다.

"사파 연합에 곤륜의 장문인을 꺾을 정도로 고수가 있다는 얘기는 못 들어 봤는데."

"불시의 기습에 당했습니다. 그걸 위한 안개였겠죠."

"흐음. 뭐, 그리 말한다면."

화산의 악무군은 더이상 깊이 캐묻지 않았다.

가장 의심 많은 그가 물러나자 나머지도 거리를 두었다.

어차피 다른 문파의 일.

들춰서 좋을 건 없었다.

"그보다 숙소에 사절이 안 보이던데. 그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나요?"

"전 모르는 일입니다. 사절이 사라졌다면 사파 연합의 공세에 몸을 피한 것이겠죠."

"뭔가 편리한 설명이네요."

"실제로 그들이 공세를 취하지 않았습니까?"

왕윤이 턱짓으로 소림사 끝자락을 가리켰다.

소림사의 나한들이 총동원된 108나한진에 막혀 허둥대는 사파 연합의 모습이 있었다.

일찍이 경고를 받고 대응한 결과였다.

"이거 이래서야 안건은 물 건너간 셈이 됐군요. 발의자는 죽고 대상은 사라졌으니······"

"별수 없지요. 누구도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을 터이니."

"······"

묘한 침묵이 좌중을 스쳐 갔다.

모인 이들 중 대부분이 왕윤의 말을 믿지는 않았다.

하지만 깊이 개입하기에는 득 되는 부분보다 실이 더 많다는 것을 알기에 침묵할 뿐.

"아미타불. 우선 무연 도사를 안뜰로 모십시다. 나머지는 밖의 적을 상대한 후, 논의하면 될 터."

"감사합니다, 허공 대사님."

"아미타불. 아미타불."

그저 염불을 외는 허공의 목소리만이 진실이었을 뿐.

침묵과 외면 속에서 진실은 그렇게 잊혔다.

#

"과연. 내게 그런 말을 한 이유가 있었어."

화려하게 치장된 마차 안.

쇠사슬로 온몸을 감싸고 있는 화무천이 명한을 보며 중얼거렸다.

"도련님이 왜 저러고 있는지 아시겠어요?"

무연을 처리하고 산에서 내려온 직후.

명한은 좌정을 한 채 계속 눈을 감고 있다.

한마디 말도, 한 마디의 움직임도 없었다.

"네 주인이 익힌 무공은 내 극천일무기와 닮았다. 죽은 자에게서 기운을 뺏어오지. 무연 정도 되는 자라면 그 기운이 엄청나게 클 터. 소화에 시간이 걸리는 건 당연하다."

"그럼 안 좋은 건 아니죠?"

"글쎄. 내 극천일무기는 시전자를 광인으로 몰았지. 네 주인이 익힌 무공의 성질까지는 모르겠구나."

"과, 광인!?"

향아가 깜짝 놀라서 펄쩍 뛰었다.

"후우. 화 형도 생각보다 짓궂은 면이 있군요."

"아! 도련님!"

그때, 명한이 좌정에서 깨어났다.

"날 두고 형자를 붙이는 네놈만 할까."

"딱히 호칭이 애매하니 그렇죠. 형 자가 싫으면 선배라 할까요?"

"됐다. 호칭이 뭐가 중요할까."

"그러니까요, 화 형."

명한이 짓궂게 답을 한 뒤 아직도 놀란 듯 한 향아의 머리를 다독였다.

"내 묵혼공은 극천일무기와는 달라. 순간의 파괴를 흡수하지 않고 생전에 쌓은 영기만 흡수하는 방식이야. 그만큼 파괴력은 덜하지만 안정적이지."

"그럼 광인이 되는 건 아니죠?"

"그런 미련한 방법은 안 써."

"듣고 있네만."

"들으라고 하는 소리예요."

명한이 깊은 숨을 토해냈다.

무연의 영기를 흡수하고 묵혼공은 대번에 오성에 도달.

만들 수 있는 영단의 크기도 질도 월등하게 늘었다.

"참선으로 극천일무기의 광기를 억누르고 있지만, 그건 완벽하지 않아요. 정말로 예전의 약속을 지키고 싶다면 무공을 완성하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

"두렵다는 건 압니다. 화 형이 무공 때문에 어떤 일을 겪었는지도 알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대로 참선으로 물러나 있는 건 그날에 대한 도피에 불과해요."

화무천의 이마에 깊은 고랑이 파였다.

그라고 자신의 은거가 도피라는 사실을 모를까.

알고 있음에도 그럴 수밖에 없던 것이다.

아내를 잃고 자식은 자신을 원망하는 삶.

그 안에서 연인마저 떠나니 제정신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삼신승을 찾아 스스로를 구속하지 않았으면 광인이 되어 신교마저 파괴했을지 모른다.

"자네 말은 이해했네. 하지만 그 오랜 세월을 참선 속에서 참아왔던 내 입장도 이해해주게."

"하아. 알겠습니다. 어차피 동전 뒤집듯 단번에 해결될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니까요. 일단 모습부터 정리하고 넘어가도록 해요."

"모습을 정리하겠다는 건 이해했네만, 다음은 대체 무엇인가?"

"화 형의 그분을 만나기 위해서는 아미파에 접근할 방법이 필요합니다. 마음 정리든 뭐든 시간이 필요할 테니, 그 안에 이건 부터 처리해 보죠."

"······아미파에 말인가?"

"금남구역이긴 한데, 그쪽 수장은 말이 좀 통하는 사람이라서요."

아미파 장문인 백순순.

다음 목표였다.

#

와락, 하고 종이가 구겨졌다.

종이만큼 구겨진 얼굴의 궁곡의 손아귀에서였다.

"전부 실패했다고? 근데 실패한 것도 모자라서 비위를 홀라당 파운이 움직였다는 거냐?"

"확실하지는 않지만, 파운 소궁주께서도 실패하신 모양입니다. 비위의 명령권을 반납하고 회궁했다고 전해집니다."

"실패? 그 파운이?"

"네."

부하의 답에 궁곡의 얼굴이 복잡해졌다.

파운의 계획이 무엇인지는 모르나, 직접 나서서 비위의 명령권까지 가져갔다면 꽤 큰일.

근데, 중도에 일을 접고 돌아왔다면 실패는 확실하다.

‘신기자가 붙어 있는 그 인간이 실패할 수도 있나?’

오묘함에 눈썹이 춤을 췄다.

"그래서 소백, 그놈은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지? 움직임은 확인하고 있는 거냐?"

"소림사에서 종적을 감춘 뒤로는 오리무중입니다."

"중원에 애들을 잔뜩 풀어 뒀잖아! 안 찾고 뭐 해!?"

"찾고는 있습니다만, 흔적을 워낙 교묘하게 감추고 있는 터라······"

"아니, 그래 봐야 소백이잖아. 그놈이 가려봐야 뭘 어떻게 가린다는 건데?"

"확실하지는 않지만, 조력자가 있는 모양입니다."

"조력자 누구?"

"그건······"

"에라이!"

답변이 부족한 부하를 향해 찻잔을 던졌다.

퍽, 소리와 함께 파편과 핏물이 튀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제대로 하는 놈이 없어! 대체 다들 뭐 하는 거야!? 내가 고작 그따위 놈 때문에 이렇게 골머리를 썩여야 해!? 어!?"

하지만 그럼에도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쓰러진 부하를 발로 걷어찼다.

"마음에 안 들어. 독으로 뒈졌어야 할 놈이 아직도 버젓이 살아서 돌아다니는 꼴도 그렇고, 암살이 실패하는 꼴도 그렇고. 이게 다 모자란 새끼들 때문이야."

"······"

"아니냐? 무능한 네놈들 아니었으면 내가 이렇게 전전긍긍하고 있을 거 같아? 벌써 차기 후계자가 됐어야 한다고! 이 내가!"

버럭버럭 외치는 궁곡에 부하는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 열을 낼 때면 어떤 말을 해도 듣지 않았다.

말릴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모친인 혈염마녀 정도.

하지만 그녀 역시 지금은 독곡으로 가 자리를 비운 상태.

"안 되겠어. 내가 직접 간다. 애들에게 전해서 채비를 하라고 해."

"네?"

"소림사 인근에서 행적이 끊겼다고? 제깟 놈이 숨어봐야 부처님 손바닥 안의 원숭이야. 이 몸이 가서 찾으면 손바닥 뒤집기보다 쉽다."

"도련님. 직접 움직이시는 건 안 됩니다."

"닥쳐. 네놈들이 무능하니까 이 몸이 직접 간다는 거 아니냐. 마침 어머님도 자리에 안 계시겠다, 아들이 역량을 증명하면 기뻐하시겠지."

"도련님······!"

"시끄러워! 한 번 만 더 안된다는 말을 하면 네놈 머리를 뽑아서 개밥으로 주겠다."

으름장에 부하가 입을 닫았다.

고삐 풀린 망아지를 맨손으로 제압하는 격.

괜히 나서서 다치고 싶진 않았다.

"소백, 소백아. 형님이 직접 찾아가 주마."

그날 저녁.

궁곡이 천마궁을 벗어났다.

#

"에취!"

"왜 그러세요, 도련님? 고뿔이라고 걸리셨어요?"

"아니, 아니. 이상한 놈이 험담하는 기분이라."

명한이 손사래 치며 코를 훌쩍였다.

뒤통수가 조금 찝찝했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요즘 무리해서 그런가 봐요. 성에 도착하면 몸조리부터 하죠."

"괜찮다니까. 성에······아, 딱 맞췄다. 저기 성이 보인다."

멀찍이서 보이는 성, 장안이었다.

높은 성벽과 잘 닦인 가도가 번성한 장소임을 나타냈다.

사천으로 넘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정비를 하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태사님. 흑점의 표식이 보입니다. 그쪽으로 안내할까요?"

"그래. 부탁하지."

소림사에서 마중 나왔던 흑점의 인물이었다.

며칠을 쉼 없이 달려서 섬서지역까지 들어왔다.

말수는 적고 행동력은 뛰어났다.

"흑점이라. 내가 활동하던 시기에도 있었지. 자네가 그곳을 관장하고 있는 건가?"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나에 대한 것도 그렇게 알게 됐나?"

"글쎄요. 그렇다고 말하기는 좀 모호한데."

"모호하다니?"

"흥. 그만 물어보는 편이 좋을 텐데? 소백이 저 질문에 제대로 답을 하는 건 못 봤어."

마지막은 은소소의 말이었다.

꽤 각진 말투였다.

"날이 서 있는 말투로군. 내게 원한이 있는 건가?"

"······천하제일악을 경계하는 건 당연한 일이야."

"음. 맞는 말이군. 여기 이 친구의 태도가 되레 이상한 일이겠지."

"쯧. 마음에 안 들어."

은소소는 무언가 더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어릴 적부터 전해 듣던 천하제일의 악, 화무천.

상상 속 그의 모습은 그야말로 폭력과 광기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남자는 전혀 아니었다.

늙고 병든 노인에 불과했다.

‘게다가 저 인간은······’

힐끔 소백 쪽을 바라보는 은소소.

혈통으로만 따지자면 화무천은 소백의 조부였다.

이 미묘함이 이상하게도 불편했다.

"도착했습니다."

때마침 마차가 서고, 마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소소가 장소를 벗어나기 위해 먼저 마차 밖으로 뛰어내렸다.

"응?"

그리고 커다란 장원 앞에 모인 사람들을 발견했다.

"오랜만이네요, 은 소저."

"태사께서는 같이 안 오셨나요?"

일월과 이월.

그리고 흑점 본타에서 나온 장로들이었다.

숫자나 태세 모두 단순한 환영이 아니었다.

"굳이 나올 필요는 없다니까."

명한이 마차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을 때.

"태사님을 뵈옵니다."

"태사님을 모십니다."

일제히 무릎을 꿇고, 명한에게 극진한 예를 보였다.

단순히 일월과 이월만이 아닌, 흑점의 모든 사람이 보여준 태도였다.

명한의 영향력이 그만큼 강해졌다는 의미.

"과하다, 과해. 다들 일어나. 그간 잘들 지냈지?"

"네, 태사님. 덕분에 흑점의 모두가 평안하였습니다."

"태사님께서 남겨주신 쪽지 덕에 얼마나 많은 이득을 봤는지 몰라요. 태사님의 혜안은 그야말로 천신과 같았다니까요."

"이월아."

"아. 죄송해요, 언니. 저도 모르게 그만."

들뜬 얼굴의 이월이나 상기된 모습을 감추는 일월.

그리고 도열한 흑점의 장로들 모두 마찬가지였다.

명한이 일월을 구하고 무학을 복원한 건 그저 시작이었을 뿐이다.

남겨 둔 쪽지로 오월이 상행을 주도한 결과.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이득을 얻어냈다.

분열됐던 흑점의 세력이 모여드는 건 당연한 일.

흑점은 이미 전성기의 힘을 넘어섰다.

"한 며칠 쉬어갈까 하는데. 괜찮을까?"

"당연한 말씀을. 흑점은 모두 태사님의 것입니다. 부디 개의치 마시고 사용하시기를."

"저흰 태사님을 위해 모든 것을 할 각오가 돼 있습니다."

명한은 확고한 흑점의 주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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