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4화 (54/235)

집요함의 끝

무연은 깊이 가라앉은 얼굴로 눈앞의 사내를 쏘아봤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당장이라도 쏟아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건 상황의 난잡함 때문.

"이제 와서 물러나겠다는 건가?"

"너무 일을 크게 벌였습니다, 무연 도사. 첫수에 패를 잡지 못했으니 일은 실패했다고 봐야겠죠."

"아직 늦지 않았어! 놈을 잡아서 목만 날리면 그만이다!"

"사파 연합의 책임으로 몰기 위해서?"

"······!"

움찔. 무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설마 그런 조악한 수를 우리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습니까? 내버려 둔 건 그리해도 상관없었기 때문. 당신이 뛰어났기 때문은 아닙니다."

"큭. 그래서 이제 손 떼고 물러나겠다는 건가? 역시 마교의 무뢰배들다운 의리로군."

"그 무뢰배와 손잡고 정도 운운하는 것이 누구인지 모르겠군요."

"네놈이 감히!"

무연의 발끝을 중심으로 삼 장 공간이 갈라졌다.

사고의 영민함과는 별개로 무력은 여전했다.

흑풍의 차림의 남자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넌지시 말했다.

"뭐, 좋습니다. 잠시나마 손을 잡았던 것은 사실. 마지막으로 기회를 드리죠."

"뭐?"

"소백. 그자는 지금 참회동 부근에 있습니다. 북문 방향으로 놓인 능선 쪽이니 찾는 건 어렵지 않을 겁니다."

"······무슨 생각이냐?"

"말했다시피 마지막 기회입니다. 그를 잡아서 죽일 수 있다면 사파 연합으로 몰든 뭘 하든 마음대로 하세요. 그리고 이것. 상황이 궁하다면 사용해 보시죠."

작은 주머니 하나를 던지는 남자.

정체불명의 단약 하나가 들어있었다.

‘날 도구로 쓰겠다는 건가?’

무연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마교 무리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꼴.

그렇게나 증오하던 모습이다.

"좋다. 그놈을 죽이고 이곳에 무림맹을 다시 세우겠다. 그 뒤에는 네놈들을 모조리 씹어먹으러 가 주마."

"후후. 용기는 가상하군요. 할 수 있다면 해보시죠."

하지만 더이상 물러날 곳은 없다.

시위를 떠난 화살이며 호랑이 위에 탄 형국이다.

뽑아 든 칼로 베지 않으면 그 날카로움은 돌아와 자신을 벨 뿐이다.

"남은 제자들을 전부 불러와라."

동전은 이미 던져졌다.

#

이미 곤륜의 암연은 전부 걷혀 있었다.

시간도 꽤 지나 산턱 너머로는 동이 터왔다.

희미하게 들어오는 햇살에 화무천이 눈을 가늘게 떴다.

십수 년 만에 맞이하는 햇살이었다.

"······다시 나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깊은 감회가 서린 목소리였다.

느리게 걸어 햇살을 전신으로 받았다.

그때마다 쇠사슬이 부딪쳐 요란한 소리를 내지만 않았어도 분위기가 더 괜찮을 뻔했다.

"그 쇠사슬은 제거하지 않아도 되는 겁니까? 소소의 검을 쓰면 자를 수 있어 보이는데."

"아니, 됐네. 이 쇠사슬은 내 참회의 증거. 평생을 안고 갈 생각이네."

"꽤 답답한 성격이네요."

"내게 그리 말하는 것도 자네뿐일걸세."

명한의 설득에 밖으로 나왔지만, 깊은 후회가 사라진 건 아니다.

쇠사슬은 그 마음에 대한 증거였다.

"어쨌든 서두릅시다. 날도 밝았으니 눈에 불을 켠 채 찾고 있을 겁니다."

"암연이 걷혔는데, 무연이 우리를 칠 수 있을까?"

"무연이 아니더라도 우린 이미 중죄인이야. 화무천을 꺼내온 마당에 걸리면 공적으로 낙인이 찍힐걸?"

"아······맞네."

이젠 무연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화무천을 꺼낸 사실이 걸리면 소림사 전역이 전쟁터가 되고 만다.

"빠져나갈 방법은?"

"혼란."

"혼란? 아. 사파 연합?"

"이제 곧이야. 놈들이 소림사를 습격하면, 우린 그 틈에 몰래 빠져나가는 거지. 멀지 않은 곳에 흑점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인적을 피해서 화 형의 외모만 가리면 그만이지."

"화 형?"

살짝 어이없어하는 목소리를 뒤로 명한이 손짓했다.

이미 정해둔 탈출로가 있었다.

필요한 건 시간에 맞춰서 사파 연합이 소림사를 습격해주는 것.

"도련님!"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세상일은 그렇게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하늘에서 벼락같이 거대한 도기가 날아와 박혔다.

향아가 가장 먼저 발견.

분신(分身)에 가까운 수준으로 거리를 좁히고 도기를 정면에서 받아냈다.

황색 용 두 마리가 도기를 맞아 승천했다.

"으으으!"

"젠장, 무연 이 미치광이."

하지만 내공 차이는 어쩔 수 없다.

힘에서 밀리는 향아의 옆으로 명한이 달려가, 쏟아지는 기운을 옆으로 밀어냈다.

굉음과 함께 능선이 폭발했다.

"마교의 주구! 이 자리에서 네놈을 처단하겠다!"

"지랄도 그 정도면 수준급이다, 늙은이!"

하늘을 밟으며 운룡대팔식을 시전하는 무연.

명한은 이에 휘둘리지 않고 정면으로 타구봉을 휘둘렀다.

펑. 펑. 펑. 펑.

구름 속 번개가 치듯, 연달아 타격음이 들려왔다.

운무처럼 하늘을 유영하던 무연이 몇 번의 타격 이후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손등과 당황한 얼굴이 유독 도드라졌다.

"대체 무슨 수작을 벌인 거냐?"

"이몸께서 반야를 깨달았거든. 너처럼 무도한 자는 이 타구봉으로 두드려 주겠다 이거야."

"감히 네놈이!"

웃으며 도발하는 명한에 무연이 눈을 뒤집었다.

해일과 같은 내공이 도로 실려서 그야말로 태풍처럼 밀려왔다.

파괴력 하나로 찍어누르겠다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그게 명한이 유도한 일.

허리에 힘을 딱주고 봉을 땅에 박았다.

‘무형(無形)의 것도 실존의 굴레를 벗어날 순 없다.’

반야의 심상이 기의 본질을 꿰뚫었다.

비유하자면 폭풍의 눈.

명한이 봉 끝을 발로 차 띄운 뒤, 눈을 향해 던졌다.

퍼엉―!!

태풍과 같던 도기가 그대로 사라졌다.

‘어떻게!?’ 무연은 놀랐지만, 명한은 대꾸할 생각이 없었다.

탄력으로 빙빙 돈 타구봉을 다시 잡고 순식간에 초식을 쏟아부었다.

당황으로 어그러진 손과 발에 무연은 연신 밀려났다.

"소백, 비켜!"

그리고 그사이.

하늘로 뛰어오른 은소소가 검에 혼원일기를 담았다.

순간, 주변 공간이 새카맣게 물들고 한 점으로 빨려들었다.

음과 양의 본질을 파괴하는 기운이었다.

단번에 무연의 호신강기를 파괴하고 그의 어깨를 찢었다.

"크아아아아!!"

"후······! 아! 얕아, 소백!"

본래의 형에 가깝지만 그래도 부족한 공력.

무연은 몇 걸음을 물러나, 내공으로 상처를 막고 강기로 이루어진 막을 쳤다.

안개로 이루어진 장벽과 같았다.

"수호연기(守護煙氣)!"

상처를 회복하고 외부의 공격을 막아내는 곤륜의 비전 기공이었다.

내공이 순환하며 끝없이 안을 두텁게 하므로 외부에서 깨기란 쉽지 않다.

무연으로서도 궁지에 몰렸다는 의미였다.

"사부님!!"

"장문인!"

"저쪽이다! 장문인을 도와라!"

그리고 그사이, 조금 늦게 곤륜의 무인들이 도착했다.

장문제자 왕윤을 포함해서 그 수가 기십은 족히 넘었다.

"쯧."

명한이 그 모습에 혀를 찼다.

수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다만, 소란이 길어지면 소림의 다른 세력이 몰려올 터.

화무천을 감춰야 하는 처지에서는 보통 곤욕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조만간 사파 연합이 습격할 텐데······’

시간이 부족했다.

"화 형. 어떻게 도와줄 수는 없습니까?"

"다시는 무공을 쓰지 않기로 약조를 했네."

"쯧."

화무천도 그저 짐 덩어리.

‘어쩔 수 없나. 최대한 빨리 돌파하여······’

상황을 탈피하겠다.

명한이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으, 으아아악!!"

"장문인!! 장문인 대체 무슨 짓을······컥!"

"아아악! 살려줘!!"

무연의 뒤로 집결하던 곤륜의 무리 쪽이었다.

무연의 몸 안에서 피어오른 검은 연기가 그들을 뒤덮더니 생기를 빨아내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왕윤을 제외한 남은 곤륜의 도사들이 전부 죽었다.

"이, 이게 무슨!? 사부님!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르시는 겁니까!?"

"마교. 마교를 처단해야 한다."

"사부님!!"

"네놈도 마교의 주구구나!!"

이젠 왕윤조차 알아보지 못하고 손을 뻗었다.

‘정신 차려.’ 명한이 넋 놓고 서 있는 왕윤을 걷어차며 기운 밖으로 밀어냈다.

무연의 일장은 땅을 찍어 누르고 순식간에 녹였다.

어마어마한 수준의 기공이었다.

"소백, 봤지?"

"어. 흑염사골조(黑炎死骨操). 신교에서도 금지한 금법이야."

"저걸 무연이 그냥 익혔을 가능성은 없겠지?"

"익혔어도 저렇게 흔적 없이는 불가능해. 이건 독곡의 흑탁고(黑濁蠱)다. 파운 형님께서 마지막으로 선물 하나 남긴 거 같은데?"

독곡의 흑탁고는 특정 무공을 익힌 대상에게서 고를 배양.

이를 특수한 방법으로 빼내어, 일시적으로 그 능력을 타인에게 부여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모든 금법이 그렇듯, 부작용이 심각하다.

고를 받은 이는 엄청난 힘을 얻지만, 그 후에는 혈맥이 역류하여 죽는다.

"마교. 마교······! 모든 마교의 주구는 죽인다!!"

"온다."

관건은 그때까지 버틸 수 있는가.

완전히 미쳐버린 무연이 달려들었다.

#

본래 명한 일행은 무연의 상대가 아니었다.

합공으로도 이기지 못해서 계속 밀리기만 했었다.

하지만 참회동에서 만난 삼신승은 커다란 기연을 선물하고 떠났다.

이곳에 있는 삼 인은 반나절 전의 그 삼 인과 달랐다.

"정면에서 받는 건 내가 한다. 소소와 향아는 주변을 돌면서 틈을 공략해."

"응."

"네, 도련님."

분배는 깔끔했다.

명한이 정면으로 달려가 그대로 무연과 충돌.

타구봉을 앞세워서 그를 압박했다.

힘에서 무연이 앞선다고는 하지만, 명한은 가이신공고 반야신공이라는 받아치기에 특화된 능력이 있었다.

쉽게 밀리지 않았다.

"마교의 뿌리를 뽑겠다!!"

"조심해, 흑염사골조다!"

바위를 녹이고 흙을 태운 맹렬한 공격이었다.

"쉬이이익······!!"

하지만 독으로는 천하에 둘도 없는 영물이 쌍각사.

몸을 둘둘 말아 명한의 몸을 지키니, 흑염사골조의 독성은 감히 침범하지 못했다.

"크어어엉!!"

그리고 그 옆은 성성이가 이를 드러내며 덤볐다.

단순 무위로는 상대가 아니었지만, 체력과 내구성이 압도적이었다.

맞고 걷어차여도 다시 일어나서 붙었다.

"도련님을 계속 괴롭히게 둘 수는 없어요!"

앞에서 시선을 끌면 뒤에 틈이 생기는 법.

그림자 사이를 바람처럼 밟으며 향아가 무연의 뒤를 잡았다.

손아귀를 휘감는 건 황색의 용.

유연하며 강맹하기도 한 항룡이십팔장이었다.

명월심법이 경지에 도달하며 그 위력 또한 배가 되었다.

강기의 벽을 단번에 무너뜨렸다.

"크아아아아!!"

챙―!

본능적으로 반격하는 무연의 도는 은소소가 막았다.

검면으로 무게를 튕기고, 천마응출로 그 틈을 찔렀다.

흑색 기운이 촉수처럼 일어나 그 위를 덮으려 했지만, 그녀에게는 혼원일기가 있었다.

손가락을 모아 횡으로 일(一)자를 긋자 흑색 기운은 먼지로 돌아갔다.

천마응출이 옆구리를 비집고 들어갔다.

드드득.

사람의 살갗이 베이는 소리가 아니었다.

"조심해, 극마(極魔)상태다!"

마공이 극한에 이르러 이성을 상실한 상태.

한계를 초월해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마······교. 모든 마교는······죽어야. 죽어야. 죽어야 해! 죽어어어어어!!"

사방 오장의 영역을 흑색의 기운이 뒤덮었다.

거대한 손아귀와 같은 형태였다.

생명을 불태워 만상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일시적으로 무연은 자신의 경지를 초월했다.

"안 돼! 그만 하세요, 장문인!!"

그때였다.

한쪽으로 물러나 있던 왕윤이 그 앞을 가로막았다.

장문의 명이라 줄곧 따르고는 있었으나, 마음 한쪽에는 계속 의문이 남았었다.

대체 누가 마(魔)이고 누가 정(正)이란 말인가.

눈앞의 무연은 더이상 정도의 일원이라 할 수 없었다.

"왕······윤."

"네, 장문인. 저입니다, 왕윤. 이제라도 그만두세요."

"네놈도 마교에 홀렸구나!!"

"자······!"

말을 맺을 틈도 없이 거대한 손이 그를 뒤덮었다.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힘이었다.

눈을 감고 죽음을 각오했다.

"미련하기는. 내가 말했지? 무의미한 복수심으로 너희 장문이 곤륜을 멸문으로 이끌 거라고."

"너!"

하지만 명한은 그를 죽게 두지 않았다.

거대한 손아귀 앞을 봉 한 자루로 막아섰다.

쏟아지는 강기의 해일에 전신이 타들어 가고 있음에도 물러나지 않았다.

"반야. 세상의 이치를 헤아리면 보이는 것이 있지. 옳고 그름. 원과 은. 무엇을 담고 무엇을 버리는가는 마음에 달렸을 뿐."

타구봉의 끝에서부터 백색의 불이 타올랐다.

불은 흑염사골조의 기운을 밀어내고 그 안의 혼탁함을 밖으로 드러냈다.

순수하지 못한 뒤섞임.

"악은 네 마음에서 온 것이다, 무연."

그리고 이 뒤섞임을 한 곳으로 쌓아······

"마교 노오오오오옴!!!"

쏟아낸 사람에게로 돌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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