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제일악
"도련님. 이대로 계속 개입하는 건 곤란합니다."
검은 흑풍의 차림의 사내가 무릎을 꿇고 말했다.
넘쳐나는 기도는 보통의 고수가 아님을 나타냈다.
그리고 그 앞에 오만하게 앉아 있는 한 청년.
"곤란이라."
천마궁 서열 2위의 도귀, 파운이었다.
"곤륜의 무연은 쓰기 좋은 패이나, 나머지는 그렇지 않습니다. 개입을 눈치채면 이를 수단으로 삼을 터. 도련님께 좋은 결과는 아닙니다."
"정도 무림의 버러지들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
"그건 그렇습니다만, 교의 적수들에게 좋은 빌미가 될지도 모릅니다."
"······"
파운의 눈가가 미미하게 일그러졌다.
살기가 형(形)을 가지고 뿜어내와 주변을 날카롭게 베었다.
의지가 기운과 동조하여 영향을 미치는 경지였다.
"이 내가. 도귀 파운이 원하는 것도 마음대로 손에 쥘 수 없다는 건가?"
"대계를 생각하시지요. 지존의 자리에 오르면 무엇이든 손에 넣을 수 있습니다."
"······천것의 핏줄 따위가."
으드득.
움켜쥔 주먹에 내벽이 종잇장처럼 우그러졌다.
경지에 걸맞은 어마어마한 수준의 내공이었다.
"날고 기어봐야 궁외혈통에 불과합니다. 적통이신 도련님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지요. 이번 일은 경고로 삼고 물러가심이 좋을 듯싶습니다."
"알겠다. 네가 그리 말한다니 더이상 고집은 피우지 않으마. 나가 있는 신기자(神氣子)에게도 전해라. 굳이 신기를 소모하지 말고, 뒤만 쫓으라고."
"알겠습니다, 도련님."
오체투지의 예를 보이고 돌아서는 남자.
시야 밖으로 물러나는 것과 동시에 기척이 바람에 쓸려 사라졌다.
"후에. 후에 처리하면 된 일이다."
어차피 최후의 1인이 되는 것은 자신.
도귀, 파운은 한 점의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천마의 뒤를 이을 적통은 자신이 유일하니까.
#
"끙."
명한이 앓는 소리를 냈다.
원각대사가 전수하는 반야신공은 일반적인 무공과는 궤를 달리하고 있었다.
신공이기 보다는 심공에 가까운 무공이었다.
"모든 구결에 진기가 반응하여 천지와 호흡하는 것. 그게 반야신공의 요체다."
"말은 쉽죠."
"네놈이 자꾸 요령을 피우지 않느냐."
"끄으응."
그렇기에 일반적인 무공 습득 방식을 따르지 않는다.
습작 내에서도 소백이 반야신공을 배우는 건 현경에 도달한 이후.
깨달음에 차이가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다.
"또 잡생각. 네놈은 아직도 천지와 호흡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제가 말인가요?"
"그래. 천지가 네놈을 부르는데, 답을 머뭇거리니 진기가 어찌 호응을 할까. 망설임이 있다면 그것부터 떨치고 연습하거라."
"망설임."
명한이 가슴 언저리를 손으로 더듬었다.
혼이 있다면 깃들 것으로 생각하는 쪽이었다.
‘두 개의 혼이라면 역시 소백일까.’
명한 자신이 아닌 소백.
본래라면 자신 대신에 소백이 이곳에 있어야 한다.
몸도 친구도. 이 이야기 역시.
모든 것의 주인공은 소백이 옳다.
"······"
어쩌면 그것 때문일까.
소백의 인생을 앗아간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
세상을 글로 쓴 창조주라고 해도, 그 안에서 숨 쉬고 살아가는 건 어디까지나 피조물의 영역.
‘신적인 누군가 장난을 친 것이라 해도······’
온전히 이를 받아들여도 될지 꺼려졌다.
아니, 두려웠다.
만약 이를 인정하여 다른 이들이 자신이 아닌 소백을 보기 시작한다면······
그건 다시 힘없고 재능 없는 명한이 되는 일이니까.
어느 곳에서도 인정받지 못한 채.
의미 없이 글만 끄적이는 글쟁이.
찌릿.
"······어?"
그 순간이었다.
명한은 자신의 묵혼공이 반응하는 것을 감지했다.
단의 형태로 뭉쳐있는 영기가 활화산처럼 타올라 순식간에 전신으로 퍼졌다.
깜짝 놀라서 대응할 시간도 없었다.
『――――――』
그건 어떤 울림이었다.
죽은 혼이 남기는 단말마와 같았다.
그리고 그 안에는 명한이 두려워하는 목소리도 섞여 있었다.
전신이 벼락을 맞은 것처럼 부르르 떨렸다.
"······너. 괜찮은 거냐? 조금 전 영통(靈通)의 기미가 보였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원각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물었다.
세상을 관조하는 그의 벽안지체로도 볼 수 없는 무언가가 명한의 몸에서 일어났었다.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하도 꿍하니 있으니 누군가 화를 낸 모양입니다."
"허. 혼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다른 혼이 완전히 사라진 거냐?"
"사라졌다기보다는 하나가 됐다고 보는 편이 옳겠죠. 처음부터 그게 맞았는데. 너무 오래 망설였네요."
"으음. 네놈은 정녕 괴이하구나."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는데, 관조가 되지 않는다.
마치 세상 밖에서 무언가 개입한 듯.
원각이 멋쩍은 얼굴로 헛웃음을 지었다.
그리 오랜 세월을 연마했음에도 그 너머의 것은 언제나 존재했다.
"반야신공은 계속할 수 있겠느냐?"
"네. 지금이라면 충분히 익힐 수 있을 거 같아요."
지금이라면 충분히.
명한의 답에는 자신감이 서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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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반야신공]
[분류 : 무공]
[등급 : 천상급]
[설명 : 소림사의 3대 무공 중 하나. 모든 법의 진실상을 아는 지혜 반야(般若)의 현현. 대척점에 선 상대의 모든 공격을 예측, 반응한다]
명한이 긴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꽤 시간을 잡아먹기는 했지만, 결국 습득에 성공했다.
습작의 설정상 가장 완벽한 반응기였다.
능력이 된다면 모든 공격, 모든 수에 대응이 가능했다.
"허. 고작 반각만에 요체를 깨닫다니. 뭘 깨달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대단한 건가 보구나."
"이곳에 존재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게 된 거죠."
"자각이라. 대오각성이 따로 없구나."
"하하. 그렇게 거창하게 말할 건 아니지만요."
명한이 깨달은 진실은 간단하다.
그가 떨어진 이 세계에서 ‘소백’은 죽었다.
즉, 본래의 습작처럼 그가 깨어나는 미래는 없다.
죽은 소백을 대신하여 명한이 들어가서 삶을 살아간 것에 불과하다.
뺏거나 강탈한 것이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내 습작의 다른 버전.’
이미 틀어진 이야기도 많으니 당연했다.
그 전까지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을 뿐.
깨닫고 나자 나머지는 쉬웠다.
"역시 네놈에게 신공을 전수한 것이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이 또한 천명이겠지."
원각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돌로 된 열쇠를 던졌다.
무늬 하나 없는 투박한 형태였다.
"받아라. 화무천을 가둔 감옥의 열쇠니라."
"이 돌 열쇠가 말인가요?"
"그를 가두는 건 형태가 아닌 마음. 그 열쇠는 그저 구실에 불과하다. 문을 열었을 때, 그가 나오고 말고는 어디까지나 선택의 문제다."
명한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 뒤는 그의 역할이었다.
"이야기는 다 끝낸 건가?"
"흐흐흐. 아주 재미있는 아이들이야. 전할 건 모두 전했다."
얼마 안 지나, 원정도 원광도 일을 마치고 돌아왔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재주를 전달한 것이다.
뒤따르는 은소소와 향아의 얼굴도 밝았다.
"에잉. 꺽다리야 우리 일도 오늘이면 끝나는 모양이다."
"오. 돌 열쇠를 건넸구만. 우리도 참 오래 머물렀지. 이젠 건넬 때도 된 거다."
"공수래공수거라. 갈 때는 빈손이면 충분하구나."
삼신승은 홀가분해진 얼굴로 한자리에 모였다.
그러자 환한 빛이 세 사람을 휘감더니 참회동 전역을 밝히기 시작했다.
열기 대신 포근함이 느껴지는 빛이었다.
"······열반에 드셨구나."
그리고 그 빛이 사라지고 난 뒤.
세 사람은 눈을 감은 채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
한 점의 고통도 한 점의 번뇌도 남기지 않은.
불가에서 말하는 열반의 모습이었다.
"아미타불."
명한은 조용히 합장하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만남은 짧았지만, 보냄에 가벼움은 없었다.
향아와 은소소도 나란히 합장했다.
소림의 생불, 삼신승의 마지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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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은 길지 않았다.
명한 일행은 열반에 든 삼신승을 그대로 둔 채 참회동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시 본래의 목적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이 너머인가."
그렇게 도착한 가장 깊은 장소.
돌로 된 벽에 큰 글자로 ‘금악(禁惡)’이라 적혀 있었다.
"후우. 정말로 이 너머에 그 사람이 있는 건가?"
"내가 알기로는. 신교에서는 죽었다고 이야기하지만, 그렇기 호락호락 죽을 인간이 아니야. 직접 자신을 참회동에 가두었지."
"직접 자신을 가두었다라. 어째서?"
"궁금하면 만나서 물어봐."
명한이 답과 함께 열쇠를 돌렸다.
그르르릉.
무거운 소음이 들리고, 이내 문이 옆으로 밀려났다.
뽀얗게 피어나는 흙먼지는 세월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
"화무천."
사람 팔뚝만 한 쇠사슬에 전신이 묶인 채 잠들어 있는 한 남자.
산발한 머리카락에 얼굴은 다 가려져 있지만, 명한은 그가 화무천임을 확신했다.
망설임 없어 걸어서 그에게 다가갔다.
"······그만. 더이상 다가오지 말거라."
그 거리가 한 걸음까지 가까워졌을 때.
화무천의 입에서 쇳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주 오랫동안 쓰지 않은, 말라붙은 목소리였다.
"당신을 이곳에서 빼내기 위해서 왔습니다."
"무용하다. 나는 이미 죽은 사람이다. 문을 닫고 다시 돌아가라."
"당신을 구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내게는 없다."
"소선연. 그녀에게도 말인가요?"
"······!"
팽―!
쇠사슬이 단번에 팽팽해졌다.
나름 경지에 오른 명한 일행이었지만, 오싹함에 저도 모르게 물러나야 했다.
이건 산 자의 기운이 아니었다.
"네가 어떻게 소선연, 그녀를 알고 있는 것이냐?"
"······만일홍(萬一紅). 옛 그루터기에서 임을 기다림에 시간이 흐른 줄도 몰랐다."
"어찌. 어찌 그 글귀를······"
절그럭. 절그럭.
화무천이 쇠사슬을 끌며 명한에게 다가갔다.
흔들리는 머리카락 속으로 낡은 눈동자가 음울하게 빛나고 있었다.
"당신은 모르겠지만, 그날 이후로도 소선연은 당신을 기다렸습니다. 그녀의 산문에서 잡으러 오기 전까지도."
"불가능하다. 나는 그녀를 배신했다. 나를 기다릴 이유가 없다."
"글귀를 찾은 곳은 아미산. 회심곡(悔心谷)의 가장 깊은 장소입니다. 당신을 원망했다면 그런 글귀를 남길 이유도 없겠죠."
흔들리는 눈동자.
화무천은 자신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싼 채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거대하게만 느껴지던 기운도 모두 사라졌다.
지금은 그저 낡고 병든 노인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나는······나는 그녀가 원망하리라 생각했다. 무엇하나 지키지 못했으니까. 버리지도 못하고 쥐지도 못한 채 방황하기만 했다."
"누한 평원의 약속 말이군요."
"그래. 그녀는 내 극천일무기가 정신을 망가뜨리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렇기에 무공을 버리고 자신과 함께 떠나기를 바랐지. 나 역시 그렇게 약속했고."
"하지만 떠나지 않았군요."
"떠날 수 없었다. 나를 따르던 수많은 신교인들, 자식, 아내. 모든 것들이 발목을 잡았다. 내가 없으면 신교는 정도 무림에 패배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래서 벌어진 것이 누한 평원의 학살."
"아. 아아······내 죄다. 내가 지고 갈 업보야. 아미타불. 아미타불. 아미타불······"
화무천은 머리를 땅에 박고 염불을 외웠다.
천하제일악, 이라는 악명으로 세간을 두렵게 만들던 대마두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어쩌겠어······’
학살로 연인은 떠나고 그의 아내는 죽었다.
게다가 자식은 그를 원수로 대했다.
미치지 않은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화무천."
그러니 이제 충분하다.
"그때의 약속. 지금이라도 지킬 생각은 있습니까?"
명한이 손을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