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신승
사실 정도 무림과 신교가 전쟁까지 벌이게 된 데는 과거 화무천의 악행이 큰 원인이 된다.
그의 마공 극천일무기(克天一武氣)는 사람의 죽여서 그 힘을 빼앗는 괴공중의 괴공.
명한의 묵혼공이 혼기를 쌓는 거라면 극천일무기는 살인에서 나오는 순간의 강렬함을 뺏는다.
당연히 이런 괴공에는 단점이 있고, 단점을 깨닫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피가 흘러 바다가 된 후였다.
천하제일악, 화무천.
아직도 정도의 인물들이 신교라 부르지 않고 마교라 칭하는 것에는 나름 타당한 이유가 있다.
"미쳤어, 미쳤어. 나도 정상은 아니지만, 소백 넌 확실히 머리가 어떻게 된 거야. 그 인간이 어떤 인간인지는 어린 나도 알아."
"위험 부담이 큰일이라는 건 이해해. 하지만 소림사를 무사히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그의 도움이 필수적이야."
"하아. 모르겠다. 널 위해 검을 휘두르겠다고 맹세한 이상, 끝까지 따르기는 할 거야. 하지만 명심해. 신교에서조차 그 인간을 악으로 규정한 것에는 이유가 있다는 거."
은소소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신교에서 자라는 대부분의 이들은 ‘천하제일악’에 대한 이야기를 어릴 적부터 듣는다.
꿈에 등장하는 악몽 같은 존재.
그런 사람을 소림사에서 탈출시킨다는 건, 상상도 잘 가지 않는 일이었다.
"그만 떠들고 집중하자. 슬슬 우리가 들어온 걸 알아차린 모양이야."
"끄응."
어느샌가 주변에서 느껴지는 기척들.
"어? 도련님, 사람이 아닌데요?"
"소림이 자랑하는 목인(木人)이야. 무공을 연습할 때 쓴다고는 하는데······사실상 전략 병기지."
"으음. 소림사도 괴상한 걸 사용하네."
나무로 만든 수십 기의 인형이었다.
단관절로 이루어진 형태 때문에 동작은 단순하지만, 진법으로 구동되는 힘은 상당했다.
스슥, 스슥.
바닥 끄는 소리가 일행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굳이 이 인형들과 싸워 줄 이유는 없지. 향아야, 눈에 힘을 집중해서 인형들을 살펴봐."
"제가요?"
"그래. 네 눈에만 보이는 무언가가 있을 거야."
갸웃거리면서도 명령은 충실하게 따랐다.
가늘게 뜬 향아의 눈에 인형들 사이사이로 번진 뿌연 선들이 들어왔다.
참회동 전체를 에워싸고 있는 기운과는 또 달랐다.
"이상한 선이 보여요."
"그걸 소소에게 말해줘. 소소, 넌 혼원일기로 그 선을 자르면 돼."
"선을?"
"진법으로 모인 기운을 동력으로 사용하는 거야. 네 혼원일기라면 기의 흐름으로 방어를 해도 단번에 꿰뚫겠지."
"흐음. 믿어주는 건 꽤 기쁘네."
은소소가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검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이내, 향아의 손끝을 따라서 인형 사이를 잇는 선의 궤적이 드러났다.
보이지 않아도 있다면 벨 수 있다.
은소소의 검이 혼원일기의 힘을 담아 공간을 벴다.
풀썩. 풀썩.
곧바로 힘을 잃고 무너지는 인형들.
수는 수십이었지만 모두 하나의 힘으로 제어되고 있었다.
"이만 나오시죠."
그리고 명한은 제어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다.
"에잉. 이상한 놈이 꼬였구만."
툴툴거리며 그림자 속에서 걸어 나오는 노승 하나.
자글자글한 주름에 허리마저 굽어서 신색이 궁핍하기 짝이 없으나, 이를 아는 사람이라면 감히 그런 표현은 할 수 없다.
소림사에 살고 있다고 전해지는 생불 삼인 중 하나.
"원각 대사."
삼신승(三神僧), 원각이었다.
#
호로록.
찻잎 하나 동동 떠 있는 차를 시원하게 넘겼다.
썩 달가운 자리는 아니었으나, 명한에게는 수가 없었다.
어찌 됐든 참회동의 주인은 그들이니까.
"그래, 천마 고놈의 자식들이라?"
"저, 저는 아니에요."
"아니야? 눈깔도 훤하게 뚫려있는 것이 이 셋 중 제일 재능이 있어 보이는데."
"네?"
"모르면 됐어."
손사래 치며 명한 앞에 털썩 주저앉는 원각.
‘역시 향아의 벽안지체를 꿰뚫어 보고 있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원각 역시 벽안지체였다.
그것도 150년 이상 무공을 갈고 닦은 화석 같은 존재.
비교조차 되지 않는 원숙함이 있었다.
"그래, 두 개 혼을 지닌 아이야. 여기는 무슨 일로 온 거냐?"
"······그게 보이십니까?"
"여기에 눈알이 달려 있으니까."
이마를 툭툭 치는 원각.
"과연 삼안신승(三眼神僧)이라는 별호는 과장이 아니었군요."
"삼안은 무슨. 오래 살다 보니 남보다 눈이 조금 좋아진 거지. 됐고, 여기 온 이유나 말해. 네놈처럼 뭔가 기묘한 놈이 이유 없이 찾아올 리가 없잖아."
"······"
두 개의 영혼.
무언가 더 아는 것이 있을까 싶어 잠시 망설였다.
"참회동에 갇혀있는 화무천을 꺼내 가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내 의문을 접고 본론으로 넘어갔다.
지금 중요한 건 화무천였다.
"화무천? 머리에 화살이라도 박힌 거냐?"
"아뇨. 농담하러 소림사 심처까지 기어들어 오지는 않습니다. 이곳에서 화무천을 꺼내 가는 것이 제 목적입니다."
"허. 이런 미친 중생을 봤나. 화무천이 어떤 인간인지는 알고 있는 거냐?"
"네. 천하제일악. 천마 이전 신교의 주인이었던 남자입니다."
"그런데도 데려가겠다고?"
"그렇습니다."
명한은 에둘러 말하지 않고 직진했다.
어차피 벽안지체의 원각에게 거짓말 따위는 통하지 않는다.
"끄응. 어쩐지 잠자리가 뒤숭숭하더니만. 오늘이 그날인가? 어이, 둘. 구석에서 엿듣지만 말고 나와 봐."
머리를 긁적이던 원각이 구석으로 손짓했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
하지만 눈 한번 깜빡이고 나자······
훌쩍 마른 몸에 큰 키를 지닌 중 한 명.
그리고 퉁퉁한 체형의 중 한 명이 모습을 나타냈다.
"원정 대사, 원공 대사. 소백이 인사드립니다."
삼신승의 남은 둘.
불해(不解) 원정과 공염(空念) 원공이었다.
"호오오. 이 젊은 친구가 우리 이름을 다 아는구려."
"그러게 말이야. 이젠 다 잊힌 줄 알았는데. 그래도 일월교 친구들이 예의는 참 밝아."
"일월교요?"
"응? 아니었어? 요 작은 아이의 몸에 일월교의 흔적이 있던데?"
배를 긁적이며 손짓하는 건 원공.
눈만 깜빡이는 향아를 향한 말이었다.
"대사께서는 일월교에 대해서 알고 계신가 보군요."
"뭐, 한때 같이 뱃놀이 가던 친구가 일월교였으니까. 작은 아이가 익힌 건 명월심법하고 월보인가?"
"네, 네!"
"잘 익혔는데, 운기가 좀 틀렸네. 여기를 이렇게 해 봐."
툭툭. 향아의 어깨를 손끝으로 두드렸다.
그러자 명월심법의 흐름이 묘하게 바뀌더니, 평소보다 강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마치 물길 한가운데에 놓여있던 돌을 치운 느낌이었다.
"와, 와. 훨씬 좋아요!"
"일과 월의 교차에 너무 매달리지 않아도 돼. 어차피 해가 지면 달이 뜨고, 달이 지면 해가 뜨는 거니까. 순환은 자연의 이치니 목맬 필요가 없지."
"순환은 자연의 이치······"
순간, 향아의 눈이 하얗게 물들더니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환골탈태!?"
"갑자기 이렇게 경지를 넘는다고!?"
깨달음을 얻어서 화경으로 나아가는 모습이었다.
차가움을 품은 달과 뜨거움을 품은 해가 향아의 등 뒤로 교차해서 지나갔다.
"이야. 이 작은 아이는 원각 너랑 같은 눈을 가지고 있는데? 이러니 일월교의 요체를 단번에 간파하지."
"에잉. 알면서 그렇게 퍼주는 거냐? 이 아이들이 어디에서 왔는지는 알고?"
"그게 뭐 중요하다고. 눈이 맑고 생각에 사심이 없으니 신교가 아니라 개방의 거지라도 괜찮지."
"하여튼 혼자만 잘났지. 얘기하는 데 방해되니까 환골탈태든 뭐든 저리 가서 해."
원각은 툴툴거리며 향아와 원공을 구석으로 몰아냈다.
누군가는 평생을 염원할 활골탈태지만, 그에게는 그저 번거로운 허물 벗기에 불과했다.
"향아를 대신해서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벽을 하나 넘었군요."
"감사는 무슨. 네놈은 이미 알았지?"
"······네."
"흥. 기묘한 놈."
굳이 변명 따위는 하지 않고 명한은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쯧. 꺽다리, 네가 얘기해 봐라. 여기 이 이상한 놈이 글쎄 화무천을 데려가겠단다."
"······"
"꺽다리? 야, 원정. 뭘 그렇게 보고 있어?"
"아이야. 네, 그 검은 어디에서 배웠느냐?"
원각의 부름에도 답하지 않은 원정은 은소소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검이라면 신교에서······"
"아니, 그 검 말고. 네가 가슴에 품은 그 검 말이다."
손끝이 가리키는 건 은소소의 가슴 언저리.
하지만 음흉한 시선이나 손짓은 아니었다.
"설마, 제 혼원일기가 보이세요?"
"오. 혼원일기라 하는구나. 내게 한 번 보여줄 수 있겠느냐?"
"······아직 다루는 게 많이 서툴러요."
"괜찮다."
은소소가 명한 쪽을 힐끔 바라본 뒤, 혼원일기를 꺼내 들었다.
기운이라기보다는 검강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신묘하구나, 신묘해. 음과 양의 혼재 속에서 그것을 가르는 검을 얻어내다니. 이를 만든 자는 불세출의 천재로고."
"혼원일기를 만든 건 제 부친이신 막천우에요."
"막천우? 막천우?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인데."
"무당파의······"
"아! 그 아이. 기억이 난다. 확실히 검에 재능이 있었지. 천하제일 검이 되겠다고 그리 소리치더니, 이런 절세의 검을 만들었구나."
은소소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사정이 좀 복잡하긴 하지만, 그래도 아버지.
칭찬을 들으니 괜히 기뻤다.
"헌데, 네 검은······아직 뭔가 부족하구나."
"네. 아버지의 혼원일기를 온전히 배우기에는 제 역량이 부족했어요."
"으음. 부족하여 깎아냈다는 건가. 현명한 판단이기는 하나, 너무 아쉽구나. 이를 만개한다면 분명 아름다운 검이 나올터인데."
잠시 고민하는 원정.
이내, 무언가를 결정한 듯 고개를 들었다.
"내 검을 배움이 어떻겠느냐?"
"······네?"
"네가 가진 본연의 재주를 깨닫기에 좋은 가교가 되어 줄 거다. 어차피 꽉 막힌 소림사에 내 검을 배울 인간도 없을 터. 연이 닿은 셈 치고 네가 배워가거라."
"그래도 되나요?"
"어차피 인생사 먼지와 같은 일. 하찮은 재주 하나 건넴이 무슨 대수일까."
원정은 그리 말하고는 양손을 합장했다.
오색찬란하게 빛나며 전신을 휘감는 빛무리.
그 자체가 등불이며 살아있는 불꽃이었다.
‘원정 대사의 불살불활(不殺不活)의 검.’
지켜보던 명한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향아까지는 계획했지만, 은소소까지 이런 기연이 닿을 거라고는 예상 못 했다.
"하여튼 저 꺽다리. 욕심을 버리라고 이런 구덩이에 처박아도 끝내 비우지를 못하네."
원각은 툴툴거렸지만,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친구가 전인을 만났다는 것이 못내 기쁜 모습이었다.
명한이 따라 웃었다.
"좋냐?"
"네, 좋습니다. 절 따라 이곳까지 와 준 사람들이니, 이런 연이 생겼다는 것이 즐겁네요."
"에잉. 혼이 두 개라 그런지 말도 참 뻔뻔하게 잘하네."
"대사님을 속이지 못하니 말이라도 예쁘게 해야죠."
"허, 그놈 참. 그 입으로 화무천을 데려가겠다는 말만 안 해도 한 수 가르쳐 줄 터인데."
"욕심은 나지만, 필요한 건 화무천입니다."
쩝, 하고 원각이 입맛을 다셨다.
다들 하나씩 챙겨가니, 혼자만 남은 게 못내 아쉬운 눈치였다.
주변을 잰걸음으로 한참을 걷다,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다가왔다.
"에이, 모르겠다. 이렇게 된 이상 네가 신공을 배워라. 그래야 화무천 그 인간이 미쳐서 날뛰면 어떻게든 제어를 해 볼 테니까."
"신공이라면?"
"알면서 묻기는. 반야신공(般若神功)이다."
달마역근경과 세수진경에 이은 소림의 3대 무공.
‘드디어.’
그리고 명한이 소림사로 찾은 핵심 이유 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