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회동
파운은 천마신교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월익(月翼)’ 부족 출신.
적통의 다섯 가문 중 하나를 잇는 후계였다.
외부의 독곡이나 세외세력을 업고 있는 다른 이들과는 근본부터 다른 혈통이다.
그만큼 그의 행보는 무게감이 있다.
"신교의 둘째 도련님께서 직접 움직이셨다?"
도찰령을 흔드는 악무군의 눈빛이 달라졌다.
"직접 움직였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 영패가 파운 형님의 것임은 분명한바. 악 장문을 습격한 이들도 명령에 따른 것이겠죠."
"호오. 습격의 주체를 신교라 밝혀도 되는 것이오?"
"믿고 안 믿고는 어디까지나 내 소관이 아닙니다. 이 정보를 어떻게 쓸지가 관건. 악 장문이라면 이미 복안이 선 것 아닙니까?"
명한이 넌지시 떠봤다.
악무군의 의중만 확실해져도 계획을 세우는 것이 한결 수월해진다.
"이 악모가 어찌하면 좋겠소? 이대로 소 공자를 보호하여 누군가의 계획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것도 한 가지 방법. 허나, 그리하면 정도 무림이 신교의 소궁주를 습격했다는 것이 기정사실이 될 터. 빌미가 되지 않을까 우려되오."
"그 점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주전파의 의도가 무엇이든, 전 전쟁을 반대하는 입장이라. 습격은······사파연합의 것으로 해 두죠."
"하하. 타인의 계획을 역으로 이용한다?"
"신교의 소궁주를 사파 연합의 공격에서 구하고, 되레 그들을 토벌. 이를 빌미로 무림맹을 창설한다면 명분과 실리를 함께 얻을 수 있습니다."
"······일리가 있는 말이오."
악무군이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하지만 명한은 그 미소 너머에 서려 있는 의심과 경계 또한 읽을 수 있었다.
"그럼, 반대로 이건 어떠시오? 소 공자를 잡아다가 신교의 둘째 공자에게 바치는 겁니다."
"······정도의 자존심에 그건 무리 아닙니까?"
"실리를 택함에 잠시 자존심은 접어 두어도 괜찮소. 소 공자를 넘기고 본래의 계획을 지지해도 괜찮아 보이는데."
"날 넘기면 전쟁은 피할 수 없습니다."
"말했다시피, 이 악모는 신교의 둘째 공자가 전쟁을 원해서 소 공자를 노린다고 생각하지 않소이다. 모든 건 수단. 결과는 소 공자로 귀결된다고 보고 있소."
솜털이 서고 목덜미가 뻐근할 정도로 당겼다.
악무군이라면 충분히 하고도 남을 짓.
무림맹주 자리 때문에 반대표를 던지지만, 필요하다면 그 반대의 행동도 충분히 가능한 인물이다.
‘생각해라 명한.’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핥았다.
"날 파운 형님에게 넘긴다면 화산에 불똥이 튀고 말 텐데. 그건 괜찮습니까?"
"호오. 그건 또 무슨 말이오?"
"나와 함께 소림사로 온 동료들. 어디 있는지 짐작은 가십니까?"
"흠. 그러고 보니 그들이 없구려."
"파운 형님이 노리는 건 내가 아닌 그들 중의 한 명이기 때문입니다."
"소 공자가 아니라?"
"소림사 산문에서 신분 확인을 위해서 검을 휘두른 건 내가 아닙니다."
악무군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신교에서 보낸 사절. 그 단어에 매몰되면 정작 중요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놓치게 되는 것입니다."
"신교의 둘째 공자가 노리는 건 사절이 아니다?"
"악 장문의 말씀대로 전쟁을 원한 수가 아니라면, 사절은 의미가 없지요. 개인적인 노림수. 고작 사십팔궁에 위치한 저보다야 훨씬 가치 높은 사람이 있으니."
"······"
은소소가 신교의 사람임은 안다.
하지만 사절의 주체는 명한이었기에 몇 번째 궁이고 어느 정도 위치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아무리 눈과 귀를 심어도 천마궁은 그런 곳이다.
"후후. 소 공자는 이 악모의 생각보다 훨씬 재미있는 사람이구려. 상황이 이렇지만 않았어도 객으로 초대하여 함께 차를 나누었을지도 모르겠소이다."
"화산의 절경을 바라보며 차라. 기회가 된다면 꼭 맛보고 싶군요."
"뭐······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악무군이 한 걸음 물러났다.
"혼란 속에서는 득과 실을 따지기 어렵소. 이 악모는 침묵으로 관조하기를 택하겠소."
"현명하십니다, 악 장문인."
"그럼, 이 혼란 속에서 눈먼 칼에 맞지 않기를. 짧은 대화의 우의로 이 악모가 평안을 기원하겠소."
"살펴 가시기를."
바람 소리와 함께 악무군의 모습이 사라졌다.
기척은 느낄 수도 추적도 불가능했다.
명한이 긴 한숨을 토하며 주저앉았다.
"두 번은 못해 먹겠네."
너무 아찔한 줄타기였다.
#
악무군이 사라지고 향이 하나 탈 시간이 지난 후.
흩어졌던 은소소와 향아 등이 명한을 찾아왔다.
시간상 조금만 빨랐어도 악무군과 마주칠 수도 있었다.
아슬아슬함에 명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악무군이 널 찾았었다고?"
"응. 무연과 손잡은 신교의 세력이 파운 형님 쪽임을 알아냈어. 눈속임으로 물러나게는 했지만, 아슬아슬했지."
"파운? 도귀 파운이 이곳에 와 있다고?"
은소소도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독특한 위치인 은소소를 제외하고 십궁 이내의 사람은 천마궁 안에서도 만나기가 쉽지 않다.
파운같은 적통은 더더욱.
"직접 와 있는지, 수만 써서 비위를 움직이는 건지는 확실하지 않아. 하지만 그가 이번 일에 개입되어 있다는 건 확실해."
"하지만 어째서? 후계다툼에 바쁜 그가 왜 밖의 일에 신경을 쓰지?"
"그건 나도 모르겠어. 우리가 확인한 사파 연합의 습격 계획만 떠올려봐도, 정확하게 시간을 맞추고 있어. 즉, 우리가 소림사에 당도하는 시간도 예측했다는 거야."
구왕채를 털면서 확인한 계획.
습격 시기는 명한이 소림사로 들어간 직후였다.
판을 읽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상황이었다.
"네가 소림사에 당도한 이후. 투표에 부칠 걸 계획했다, 이거네. 찬성하면 죽인 뒤 습격하는 사파 연합에 넘기면 되니까."
"반대의 결과가 나오면 칼을 빼 들고. 사전에 다 계획되어 있던 일이야."
"주전파?"
"아니. 사파 연합에 넘긴다, 라는 가정 자체가 전쟁의 불씨를 끄는 일이야. 무연은 자신이 수를 냈다고 생각하겠지만, 애초에 목적이 그게 아니지."
전쟁을 원하면 더 좋은 수가 얼마든지 있다.
이렇게 복잡한 형태로 떠넘기지 않는다.
"이건 차도살인계(借刀殺人計)야."
무연을 통해 명한을 죽이겠다는 계획.
하지만 그럼에도 그가 이해하지 못하는 건······
"왜 파운이 개입한 거지?"
천마궁의 둘째 공자, 파운.
나와서는 안 될 사람의 개입이었다.
명한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눌렀다.
"안 되겠다. 변수가 너무 많아. 모든 걸 상정하면서 움직일 수는 없어."
"어떻게 하려고?"
"나도 강수를 둬야지."
참회동을 찾고 갇혀있는 누군가를 설득한다.
시간이 소요되는 계획은 아무래도 불안하다.
"참회동 안에서 죄수를 탈옥시켜야겠어."
과정을 생략한다.
명한도 칼을 꺼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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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림사 전역을 뒤덮은 암연이 조금씩 걷혀갔다.
아무리 특수 약물을 섞었다고는 해도, 소림사는 산 정상에 있는 사찰.
바람에 씻겨나가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이곳이다. 이 아래에 참회동이 있어."
뚜렷해지는 시야 속에서 명한은 한 장소를 찾았다.
굽이친 능선의 중간 부근이었다.
바닥이 단단한 흙으로 덮여 있었다.
"부근에 입구로 보이는 곳은 없는데?"
"입구로 가면 늦어. 소림사의 나한들이 지키고 있어서, 힘으로 뚫으려면 하루로도 안 될 거야."
참회동 입구를 지키는 건 그 유명한 십팔나한.
개개인의 능력은 떨어져도 그들이 펼치는 나한진은 소림사의 간판과도 같다.
전력으로 덤벼도 단시간에는 무리였다.
"그럼 방법은?"
"위에서 아래로. 물리적으로 길을 낸다."
"길을? 어떻게?"
명한이 답 대신 수풀 쪽으로 손짓했다.
주변에 숨어있던 쌍각사가 스스슥 기어 와서 그의 손 위로 타올랐다.
"부식독. 내 몸의 독과 섞으면 단단한 지반도 녹일 수 있어."
"여기서 참회동까지가 얼마나 깊은지도 모르잖아."
"알아."
아니까 할 수 있는 방법이다.
명한이 바닥의 흙을 걷어내고 봉으로 그 위를 찍었다.
푹 들어가는 깊이는 얼추 5척.
‘반석 위로 덮은 흙만큼의 깊이라 했어.’
즉, 흙더미만큼의 깊이로 돌덩이가 차 있다는 의미.
"쌍아야, 부탁할게."
"쉬익!"
팔뚝을 그어 핏물을 떨어뜨리고 그 위에 쌍각사의 독액을 섞었다.
지독한 냄새와 함께 흙이 타들어 갔다.
엄청난 독성이었다.
"······지독하네. 이걸 무연에게 쓰지 그랬냐."
"그 인간이면 살점을 잘라내고 나랑 쌍아를 토막 냈을 거다. 제정신이 아니거든."
"하긴. 정의 운운하면서 소림사에 불 지르는 인간이 정상은 아니지."
"아마, 예전 정마대전 시기에 가족이 몰살당했을 거야. 그때부터 미쳤던 거겠지."
"그런 건가."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이야기였다.
당시의 참극은 정사마를 가리지 않고 일어났으니까.
"아. 돌이 녹기 시작했다."
그 사이, 독이 흙더미를 뚫고 암석에 구멍을 냈다.
단단하기 짝이 없는 암석 벽이었지만, 독은 그보다 훨씬 강했다.
조금씩 표면을 갉아먹으며 스며 들어갔다.
"열렸다."
[참회동(懺悔洞)에 진입하였습니다]
입구가 아니라도 괜찮다는 의미.
명한이 발로 흙더미를 툭툭 걷어낸 뒤.
"가자."
아래로 뛰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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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무겁게 짓누르는 압력.
명한은 자신이 진법의 영향권에 들어왔음을 알아차렸다.
"이거, 뭐야? 몸이 무거운데?"
"도련님, 주변에 이상한 선들이 떠다녀요."
이내, 은소소와 향아도 눈치챘다.
소림사가 참회동 전체에 걸쳐서 쳐 둔, 은문쇄진(隱門鎖陣)이었다.
몸을 무겁게 하고 길을 찾기 힘들게 하는 힘이 있다.
급수 높은 진은 아니나, 넓은 지역에 걸쳐 있으면 해제 또한 어렵다.
"다들 침착하게 움직여. 아직 밖에서는 우리를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진을 유지하는 이들은 달라. 조만간 우리를 눈치챌 거야."
"진이라. 소림의 고승이 지키고 있는 건가?"
"참회동 안의 죄수가 그만큼 위험해서."
가둔다, 라기보다는 관리하는 의미.
죄인은 스스로 참회동에 들어와 소림에게 구속을 요구했다.
"누군데 이 정도로 방비를 하는 거지? 소림사에 그 정도로 죄를 지은 사람이 있나?"
"갇혀있는 사람은 소림사 출신이 아니야."
"소림사 출신이 아니라고? 그럼 왜 여기에 있어?"
"너무 많은 사람을 죽여서."
명한이 설정으로 적기를 1만의 생명.
죄인이 죽인 사람의 숫자였다.
"은소소, 너라면 누한대전에 대해서 알고 있지?"
"누한? 누한 평원?"
"응. 신교와 무림맹이 정면으로 충돌한 장소. 수많은 무림인이 죽어간 곳."
"설마······"
늘어지는 이야기에 은소소가 무언가를 깨달았다.
명한이 참회동에서 꺼내고자 하는 무인이 누구인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이며 명한에게로 바짝 다가갔다.
"미쳤어? 너, 지금 진심이야?"
"난 언제나 진심이었어."
"제정신이 아니군. 곤륜파 늙은이에게 뭐라 할 처지가 아니었어. 그 인간이 살아있다는 것도 의문이지만, 구하겠다니!"
여차하면 한 대 칠 기세였다.
그만큼 명한이 구하고자 하는 사람의 정체가 상상을 초월했다.
"대, 대체 누구를 구하려는 건데 이렇게 화를 내세요?"
향아가 중간에서 쩔쩔매며 의문을 표했다.
"화무천. 전대 신교의 교주. 천마에 의해서 교주직을 박탈당한 광인이 우리가 구해야 할 인물이야."
"······네?"
그녀의 표정이 은소소의 것처럼 되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신교의 전대 교주이기 이전, 화무천의 별칭은 이것.
천하제일악(天下第一惡)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