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후
청성파의 개입.
명한과 무연 양쪽 모두 그의 입을 주시했다.
아직은 어느 쪽이라 확답하기 어려웠다.
"과하셨습니다, 무연 대사. 어찌하여 이렇게 과격한 일을 벌인 겁니까?"
"정도를 위함이다. 투표 같은 무른 방법으로 뭇 사람의 동의를 얻어서야 늦는다. 반드시 오늘 저자를 죽이고 정도의 의기에 다시 불을 붙여야 한다."
"정도를 위함입니까."
"네 사부. 청성의 임호도 내 의견에 동의했다."
무연의 답에 명한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임호와 백순순.
둘 중 찬성한 쪽은 청성이었다.
"맞습니다. 장문께서는 무연 대사의 의견에 동조하여 찬성에 표를 던졌다고 하셨습니다."
"그럼 날 도와 저 마교의 무리를 죽여라."
"아니요. 장문께서 찬성한 것은 투표. 부결된 마당에 이런 무도한 짓을 저지르는 것은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도운비의 검이 무연을 향했다.
"네 사부조차 내게 미치지 못하거늘. 감히 네가 내게 검을 들이대는 것인가?"
"청성의 검은 옳은 것을 따릅니다. 이 무도함이 당신의 정의라면 저는 그것을 벨 뿐입니다."
"건방진. 오늘 네 목을 비트는 건, 청성의 앞길을 위함이다."
무연의 몸 주변, 운무가 짙어졌다.
극성에 이른 운룡대팔식의 운용이었다.
"무림의 선배라는 인간이 저렇게 고집이 세서야."
"흥. 오늘에야말로 곤륜의 운룡대팔식을 견식하겠군."
"저, 저도 도울게요."
그리고 도운비 옆으로 서는 명한 일행.
각자의 무기를 꼬나쥐고 짙어지는 운무에 대항했다.
"이번뿐이오."
"하하. 고전적이군."
시원한 웃음을 시작으로 운무가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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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는 넷대 하나.
그것도 화경의 고수가 둘에 근접한 절정급이 둘이었다.
하지만 싸움 자체는 우위를 잡기가 어려웠다.
"위험해!"
"큭! 뭐가 이렇게 빨라!?"
"누, 눈으로 좇기도 버거워요!"
어마어마한 속도 때문이었다.
운룡대팔식은 허공을 유영하는 자유로운 동작에 장점이 있는 보법.
하지만 그걸 다루는 자가 무연 정도 되면 이야기가 아예 다르다.
땅에 아예 발이 닿지도 않은 채 번개처럼 움직였다.
눈이 좋은 향아조차 그 움직임을 다 좇기 어려울 정도.
검을 휘두르고 봉을 찔러 넣어도 허공만 때렸다.
"어리석음을 안고 죽어라."
왼쪽으로 도운비를 치고, 오른쪽으로 돌아 은소소의 검을 튕겼다.
그리고 허공을 밟아 머리 위에서 명한을 노렸다.
촌각에 벌어진 공격.
타구봉으로 결을 잡아 비틀어 튕겨냈지만, 안개 속으로 몸을 감출 뿐이었다.
"뒤!"
다시 나타난 건 향아가 있는 쪽.
도가 운무를 가르고 허리 안쪽을 횡으로 베어갔다.
다급히 월보를 밟아 그 궤적 위를 넘어섰지만, 틈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강력한 운룡포가 향아의 전면에서 터졌다.
"꺄아악······!"
"향아!"
다행히 직격은 아니었다.
명한이 봉 끝으로 그녀의 옷자락을 휘감아서 구석으로 내려 주었다.
해소되지 않은 힘에 봉이 벌처럼 웅웅거렸다.
‘이게 구파의 장문인가.’
그래도 화경급이니 맞상대는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장문인은 역시 장문인이었다.
"소백."
"알아. 이렇게 된 이상 우리도 어중간하게 갈 수는 없어. 전력으로 싸운다."
"전력?"
이 마당에, 라는 뒷말을 삼킨 의문.
명한은 설명 대신에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휘―!’소리를 내며 길게 퍼지는 휘파람.
어디선가 굉음이 울리더니 거대한 원숭이 한 마리가 담을 넘어서 장내로 뛰어 들어왔다.
"고작 원숭이로 무엇을 하자는 거냐?"
"크아아앙!!"
무연의 비웃음에 성성이가 엄청난 속도로 들이박았다.
당연히 무연은 보법을 밟으며 이를 회피.
무의미한 공격으로 끝이 나는 것으로 보였다.
‘큭······! 뱀!?’ 하지만 이건 쌍각사를 숨기기 위한 위장 공격.
털 속에 숨어있던 쌍각사가 무연의 발을 물었다.
"다들 약을 물어."
그 사이 명한은 단약을 남은 이들에게 뿌렸다.
독공은 적아를 가리지 않으니 최소한의 조치였다.
‘묵혼공으로 뒤섞이기 시작했지만······’
독은 사라지지 않았다.
되레 묵혼공으로 정제되어 더욱 순수한 독성으로 가라앉아 있었을 뿐.
명한의 운기와 함께 주변 운무가 녹색으로 물들었다.
"크윽! 이 비열한 마도 놈! 독공을 쓰다니!"
"시끄러워. 문파의 장문이라는 것이 어린애들 사이로 전력을 쓰는 건 괜찮고?"
"네놈―!"
운무 사이로 용처럼 뛰어오는 무연.
어마어마한 기세였지만, 명한은 피하지 않았다.
독을 바닥으로 깔고 타구봉은 땅에 박았다.
그리고.
콰앙―!!
정면에서 일어난 충돌.
내공의 고하로 따지자면 명한은 아예 상대가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수를 씀에 상대를 파악하는 건 기본.
이미 내공 겨루기로 대충의 견적을 잡아두었다.
수십 걸음을 밀려난 뒤, 바닥을 짚으며 버텼다.
"쿨럭······!"
"소백!"
"난 괜찮아. 밀어붙여."
죽은 피가 흘러나왔지만, 죽은 건 아니다.
게다가 그가 상처 입은 만큼 무연도 멀쩡한 것은 아니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창백한 얼굴을 한 채 휘청거렸다.
운룡포로 명한의 가슴을 때리는 순간, 어마어마한 반탄진기 밀려와 내장을 흔들어 버린 것이다.
평소라면 태산 같은 내공이 이를 잡아주었겠지만, 지금은 독이 이를 방해했다.
"어디 이것도 받아낼 수 있는지 보자고!"
은소소가 틈을 놓치지 않고 달려들었다.
검으로 발현하는 혼원지기였다.
음과 양을 관통하는 혼원의 기운이 무연의 기막을 파고들었다.
흔들린 기운은 생각만큼 단단하지 않았다.
검이 파고 들어가 그의 어깨를 후벼팠다.
"쯧. 비틀렸군!"
노린 건 심장이었지만, 내공에 살짝 밀려났다.
아쉬움에 혀를 차며 은소소가 크게 뒤로 물러났다.
쾅. 소리와 함께 서 있던 곳에 도가 박혔다.
악귀나찰과 같은 얼굴의 무연의 일격이었다.
"감히 네놈들 따위가!"
피부가 저릿저릿할 정도의 내공 방출.
도신을 타고 파괴적인 기운이 흘러 바닥을 전부 들어냈다.
독이 퍼지는 걸 무시한 공격이었다.
그만큼 분노했다는 의미.
"······"
그리고 그 찰나에 명한은 사고를 전환했다.
‘맞불은 공명일 뿐이야.’
굳이 목숨을 걸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전부 사방으로 흩어져!"
"뭐?"
"신호를 보내면 그걸 보고 따라와."
순식간에 무연의 앞으로 달려드는 명한.
은소소와 향아는 잠시 망설이다, 그의 뜻을 따라서 반대로 뛰었다.
얼떨결에 명한, 도운비 둘이서 무연을 상대하는 그림이 됐다.
하지만 명한의 그림은 이조차도 아니었다.
푸우웃―!
입안에 머금고 있던 피를 전방으로 뿜어냈다.
운무의 색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무연은 이를 공격으로 인지.
도를 휘둘러 걷어내려 했지만, 독성은 스며드는 것이었다.
내공 방출로 약해진 몸 안으로 독기가 누적됐다.
"감히 이따위 독으로 날 이길 수 있을 것 같더냐!?"
물론, 무연 정도의 고수에게 독은 잘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번 수는 제압이 아닌 눈가림용.
명한은 재빨리 몸을 비틀어서 무연의 옆을 스쳐 갔다.
"청성의 무인이니 그쪽을 죽이지는 않을 겁니다!"
"자, 잠깐!"
도운비만 남겨 두고 도주를 택한 것이다.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싹 무시하고 뛰었다.
운룡대팔식을 멈추고 내공을 방출한 무연.
독에 내기까지 뒤틀렸으니, 사방으로 튀는 명한 등을 따라잡는 건 무리였다.
"이 비열한 노오오오오옴!!!"
성난 외침이 따라왔지만, 알 게 뭔가.
말마따나 마교의 무리.
튈 때는 튀는 것이 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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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도망친 뒤, 명한이 걸음을 세웠다.
소림사 후미.
인적이 드문 공간이었다.
품 안에서 신호용 연통을 꺼내 위로 쏘아 올렸다.
암연에 가려져 있지만, 하늘을 보고 있다면 이내 찾아서 올 수 있을 것이다.
"생각보다 상황이 많이 복잡하네."
아예 바닥에 주저앉아 한숨 돌렸다.
소림사 내부의 격전은 예상하였지만, 돌아가는 형국이 생각보다 거칠었다.
특히, 무연의 방식은 과감함을 넘어섰다.
"단독으로 이런 수는 쓸 수 없어. 습작을 기준으로 생각해보면 역시 외부와 손을 잡은 건가."
바닥으로 선을 그리며 상황을 정리했다.
현재 명한의 즉결 처리를 찬성한 건 곤륜, 청성, 점창이 유력하다.
소림과 아미파는 반대.
부결을 고려하면 화산도 반대했다고 보는 편이 옳다.
‘하지만 같은 속내는 아니지.’
같은 반대라도 각각의 생각은 전부 다르다.
특히, 화산파의 경우는 살인을 꺼려서 반대한 것이 절대 아니다.
"일단 무당파가 없으니까."
화산과 무당의 경쟁 관계는 유명하다.
특히, 지금의 장문인인 악무군과 막천강의 구도는 차기 무림맹주를 놓고 겨루는 형세였다.
하지만 명한이 개입하면서 막천강은 사망.
현재, 무당은 막천우를 장문으로 세우고 내부 수습에 들어가 있다.
고로, 무림맹의 권력 구도는 악무군 쪽에 가깝다.
‘굳이 무리한 수를 쓸 이유가 없지.’
불같은 대의명분보다야 현실적인 권력을 탐하는 성격이다.
"그럼 문제는······"
무연이 손잡은 외부세력의 정체.
단순하게 습작을 기준으로 그들을 단정 지을 순 없다.
일단, 명한의 행적이 습작과 다르기 때문.
비위의 습격만 하더라도 전과 다르게 위궁이 직접 왔었다.
‘그러고 보니 당시 위궁은 혈염마녀의 지시를 받은 모습이 아니었지.’
또 다른 누군가의 흔적으로 읽혔다.
"이런 외진 곳에서 무엇을 생각하고 계신가."
"······!"
그때였다.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있던 기척이 불쑥 나타났다.
고작 다섯 걸음 안쪽이었다.
명한이 타구봉을 쥐며 펄쩍 뛰어 물러났다.
"그리 놀랄 건 없소."
"악······장문?"
갑자기 나타난 인물은 다름 아닌 악무군이었다.
명한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왜 악무군이 이곳에 나타났지?’
본래라면 그는 자신의 발을 묶은 잔당을 처리하고 화산 숙소를 경계해야 옳다.
이렇게 먼 곳까지 단독으로는 오는 건 상정하지 않았다.
"사찰 내부에 날벌레 몇이 들어왔소. 쥐어서 터뜨리고 나니, 품에서 이런 게 발견되더이다. 아는 물건이오?"
"······도찰령(刀察令)?"
악무군이 꺼낸 건 붉은 색 도신이 그려진 영패였다.
쉽게 말해서 명령권을 증명하기 위한 신분증.
‘도찰령이 나타났다고?’
그리고 명한은 이 도찰령의 주인을 알고 있다.
"역시 아는 모양이군. 패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겠소?"
"알면 어찌할 생각입니까?"
"생각을 해봐야지 않겠소. 소림사 경내까지 사람을 보낼 정도라면 매우 중요한 일이라는 의미. 그렇다고 이게 단순히 무림맹 재창설과 평화협정이 싫어서 파견한 병력이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하하. 소 공자의 침착함은 참으로 마음에 드오. 허나, 이 악모가 구구절절 설명했다면 몇 마디는 거드는 것이 예의."
도포를 펄럭이며 명한에게 손을 내미는 악무군.
태도는 정중하나, 실린 기세는 막중했다.
앞서 상대했던 무연이 가벼워 보일 정도.
명한이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적시며 답을 했다.
"서신의 내용과 목적을 아는 자. 그리고 이에 반발하는 누군가의 의중을 읽을 정도의 세력이 있는 자. 계획에 찬동하며 병력을 미리 준비시킬 정도로 치밀한 자. 그리고 그런 자가 노리는 인물."
"호오. 이미 예상을 했구려."
"상황은. 하지만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명한이 붉은색 도찰령을 보며 쓰게 말을 이었다.
이유는 아직 모르겠으나, 혈염마녀보다 더한 사람이 붙어버렸다.
"패의 주인은 도귀(刀鬼), 파운. 소궁 서열 2위이자, 신교의 강자 십익(十翼)중 하나. 내 형님 되시는 분입니다."
천마의 뒤를 진심으로 노리는 몇 사람 중 하나.
명한을 쫓는 거인의 정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