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화 (49/235)

혼돈의 소림사

명한이 손끝으로 안개를 훑었다.

희미하게 느껴지는 목향.

"곤륜의 암연인가. 역시 칼을 뽑은 건 무연이었네."

습작에서도 등장한 적 있는 물건.

명한이 품을 뒤적여 단약 몇 개를 꺼내 들었다.

"하나씩 입안에 물어. 무연으로 인한 어지러움을 가라앉혀 줄 거야."

"소림사 경전 안에서 습격이라. 곤륜이 제대로 미친 모양이군."

"속전속결이지. 날 죽인 뒤, 사파 연합으로 죄를 물면 득 보는 건 정도뿐이야."

단약을 물고 재빨리 숙소를 빠져나왔다.

주변은 불과 연기. 고함과 발소리로 혼잡스러웠다.

이 안에서라면 어떤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도련님―!"

그리고 일이 벌어진 건 순식간이었다.

향아가 명한의 옷자락을 잡아서 당기며 땅을 강하게 찼다.

북, 소리를 내며 뜯겨나가는 옷자락.

흑색의 손이 반대편 명한의 옷자락을 움켜쥔 탓이었다.

"곤륜의 흑용수(黑龍手)!"

용을 잡기 위해 용을 흉내 냈다고 알려진 무공이었다.

검게 단련된 손은 강철보다도 단단했다.

암연 속에서 발 미끄러지는 소리가 들리고, 검은 손이 다시금 튀어나왔다.

"어림없다!"

하지만 이번엔 이쪽도 준비가 돼 있었다.

은소소의 검이 흑수를 위로 올려친 뒤, 빈 공간을 횡격으로 갈랐다.

암연이 일순간 반으로 잘리며 속을 드러냈다.

"곤륜의 도사들께서 아주 급한 모양이로군."

"······문답무용!"

대화에는 불응.

흑수의 무인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순식간에 일행을 조였다.

합공에 대한 망설임이 전혀 없었다.

"이곳에서 머뭇거릴 수는 없어. 돌파한다."

명한의 선택은 돌파였다.

타구봉을 강하게 움켜쥔 채, 앞으로 뛰었다.

텅. 묵직한 울림으로 맞서는 건 곤륜의 왕윤.

그의 흑용수는 화경의 고수가 휘두르는 타구봉을 막을 만큼 단단했다.

‘왕윤. 곤륜의 장문제자인가.’

절정의 끝자락.

명한보다는 한 수 아래였다.

"평소라면 놀아줬겠지만, 오늘은 아니다."

타구봉이 엄청난 속도로 회전했다.

"······!"

기운을 빨아들이는 회백의 역순이었다.

왕윤이 맨손으로 맞서지 못하고 물러났다.

극한으로 단련된 그의 손바닥이 벗겨져 있었다.

"네 장문의 선택으로 곤륜은 이제 멸문을 걷게 될 것이다."

"감히―!"

양손을 교차하며 용의 형상으로 장력을 뽑아내는 왕윤.

곤륜이 자랑하는 절기 중 하나였다.

‘도련님!’ 하지만 이쪽에도 장력이라면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

향아가 미끄러지듯 앞으로 나서서 왕윤의 장법을 정면으로 쳐냈다.

용과 용이 허공에서 맞서는 격이었다.

우레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주변 석 장이 단번에 초토화되었다.

"······대체 무슨? 몸종의 무공이 이리 높단 말인가?"

"상대를 알지도 못한 채 계획을 짜다니. 네 장문, 무연은 복수심에 눈이 멀었을 뿐이다. 지금이라도 수습하는 것이 곤륜을 위한 길이야."

"사악한 마교 놈들의 말 따위는 듣지 않는다!"

"뭐, 좋을 대로."

어차피 설득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명한이 타구봉을 강하게 휘둘러서 그와 왕윤 사이의 공간을 찍었다.

장력 싸움으로 금이 가 있던 바닥이 사정없이 무너지며 앞으로 쏟아졌다.

"멈춰! 크윽!!"

"사, 사형!"

"무슨 돌덩어리 하나에······!"

파편 하나하나가 치명적인 위력의 암기였다.

왕윤은 둘째 치고 나머지는 감히 견딜 수가 없었다.

힘겹게 쳐내다가 주저앉고 피를 토했다.

"젠장!"

왕윤도 이 마당에 더는 쫓을 수 없었다.

발만 구르며 멀어지는 명한을 쏘아보기만 했다.

이미 계획은 첫 단추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다.

#

명한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소림사 안을 달렸다.

과거 습작을 구상할 때, 가장 많이 그렸던 것이 이 소림사 내부 모습이다.

직접 짠 구도와 배경이 수십 장을 넘어섰다.

"어디인지 알고 가는 거냐, 소백?"

"참회동(懺悔洞). 그 안에 갇힌 사람을 만나야 지금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어."

"참회동? 소림사의 참회동에 누가 있는데?"

"그건······위험해!"

답을 할 틈도 없이 명한이 은소소를 밀었다.

둘 사이의 공간으로 날아와서 박히는 거대한 도(刀) 한 자루.

충격파가 횡으로 퍼지며 둘을 좌우로 밀어냈다.

단순한 여파만으로 속이 뒤틀릴 정도의 위력이었다.

"······무연."

곤륜파의 장문, 무연이었다.

바람처럼 도 위에 내려서 주변을 오시했다.

"마교의 주구들이 생각보다 실력이 있었군. 윤이, 그 아이라면 충분히 제압하리라 봤는데."

"쯧. 발이 묶인 줄 알았는데. 용케 이곳까지 왔네."

"당황하지 않는군. 상황을 예상했던 건가?"

"어느 정도는. 정도무림을 자칭하는 인간들이 썩어 문드러진 장작이라는 건 익히 알고 있었으니까."

"건방진 마교의 주구. 네놈의 세치 혀가 목숨줄을 구해 줄 것 같더냐?"

"그쪽이야말로 지나친 도박 아닌가? 투표는 부결난 분위기 같던데. 소림사에 불을 지르고도 무사할 것 같아?"

"우리 중 하나와 내통하기라도 한 건가? 아니, 상관없겠지. 이곳에서 널 죽이고 정도의 불을 다시 켜면 그만."

팡. 파공성과 함께 무연의 옷자락이 팽팽하게 펴졌다.

내공이 극도로 팽창하여 대기가 끓어오른 결과.

터무니없는 내공이었다.

"도룡기(道龍氣). 소문으로만 들었는데, 어마어마하군."

"영광으로 알아라, 마교의 주구. 곤륜의 절기는 정도의 불씨. 널 태우고 세상을 밝힐 것이다."

"······완전히 맛이 갔군."

말로 어떻게 될 사람이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이성이 있게 설정을 잡을걸.’

조금 후회가 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떠난 펜이고, 만들어진 인물이었다.

"죽어라."

어마어마한 압력과 함께 무연의 도가 벼락같이 떨어졌다.

도룡기를 바탕으로 하는 곤륜의 도룡도법이었다.

강철이라도 찢어발길 것 같은 위력이 있었다.

쩌엉―!!

"막아?"

하지만 명한은 물러나지 않고 이를 받아냈다.

타구봉이 휘어 거의 반으로 접힐 정도였지만, 부러지지는 않았다.

퉁, 소리와 함께 탄력에 되레 무연이 밀려났다.

기회를 놓치면 하수.

명한이 파르르 떠는 타구봉을 잡아서 그대로 연격을 퍼부었다.

무연의 도와 순식간에 수십 번을 충돌했다.

"정말로 타구봉법이군. 개방을 회유라도 한 건가?"

"개방의 늙은 거지와 친구를 먹어서. 너같이 꽉 막힌 머리로는 상상이 잘 안 가나?"

"마도에 틈을 내어주는 건 정도가 아니다!"

무연이 도를 기묘하게 비틀었다.

바람이 딸려 올라가 용의 형상으로 치솟았다.

곤륜의 절기 중 하나인 운룡포(雲龍抛)였다.

용의 형을 띈 기운이 그대로 명한을 휩쓸었다.

‘젠장. 강한데 빠르기까지 하네.’

속도로 따라가는 건 버거웠다.

맞서는 건 포기하고 그냥 앞으로 봉을 내질렀다.

수비를 등한시한 공격.

"······이 계집이!"

혼자라면 그렇겠지만, 명한은 혼자가 아니었다.

은소소가 옆으로 뛰어들어와 운룡포를 정면에서 맞받아쳤다.

천마검, 천마응출이었다.

굉음과 함께 바닥이 움푹 들어갔다.

‘크윽!’ 짧은 신음과 함께 주저앉는 은소소.

힘 대결로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하아압―!"

하지만 그 정도면 충분했다.

벌어준 틈으로 명한의 타구봉이 강하게 밀고 들어갔다.

일점타구(一点打狗)의 초식이었다.

한 점으로 쏠린 파괴력으로는 타구봉법에서도 최상위.

도를 쥐지 않은 빈손과 그대로 충돌했다.

쿵. 쿵.

무연이 명한과 은소소를 양쪽에 잡아 둔 채 두 걸음을 물러났다.

‘괴물 같은 내공이군.’

단순 셈으로 오갑자가 넘는 걸 정면에서 받은 것이다.

"도련님을 풀어 줘!!"

다만, 사람인 이상 손은 둘일 수밖에 없었다.

하늘로 뛰어올라 정수리를 노리는 향아.

어설프면 기막으로 걷어내겠지만, 척 봐도 보통 위력이 아니었다.

무연이 손해를 감수하고 명한과 은소소를 억지로 밀어냈다.

각각 세 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마교의 것들이 보통이 아니로군."

그리고 무연의 입가로 흐르는 한 줄기 핏물.

한 문파의 장문인이 약관이나 됐을까 싶은 젊은이 셋에게 밀린 격이다.

이것만으로 충분한 치욕이었다.

"좋다. 너희를 얕잡아 본 것은 내 실수다. 허나, 지금부터는 일말의 가능성조차 없다. 곤륜이 어떤 곳인지를 알게 해 주마."

무연의 발밑에서부터 퍼지는 운무.

독특한 기색에서 명한은 그 무공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렸다.

"운룡대팔식(雲龍大八式)."

곤륜의 간판과도 같은 무공이었다.

한 번 발을 떼면 하늘을 나는 용처럼 적을 유린 한다고 알려진 최상승의 무공.

‘내공으로 찍어누르려던 걸 바꿨어.’

무연이 전력을 낸다는 신호였다.

"후우. 소백, 괜찮겠어?"

"아예 수가 없는 건 아니야."

명한이 품 안을 만지작거렸다.

수단은 아직 있었으나, 무연에게 전부 쏟아붓고 싶지는 않았다.

‘여기서 다 쓰면 뒤가 없는데.’

변수가 많은 상황인 만큼 여분은 남겨 두고 싶었다.

"어쩐지 무언가 수상쩍다 싶었다."

"······!"

그 순간.

암연 사이로 낯선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아니, 명한에게는 낯설지 않았다.

훅, 하고 불어오는 바람.

암연을 날려버리며 청색 도포 차림의 사내가 장내가 뛰어들었다.

"청성의 도운비가 곤륜의 장문께 인사 올립니다."

청성의 검.

도운비였다.

#

명한 일행이 무연과 대치하고 있을 무렵.

"기가 막히는군. 소림사가 언제부터 이렇게 외인의 왕래가 쉬웠는가."

악무군은 자신의 숙소 앞에서 수십의 복면인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하나의 진을 구축한, 상승의 고수들이었다.

"말해라. 너희는 어디에서 왔지?"

"······"

악무군의 물음에도 복면인들은 답하지 않았다.

일정 거리를 남겨 둔 채 그저 악무군의 움직임만 주시하고 있었을 뿐이다.

"나를 이곳에 묶어두겠다는 건가? 흐음."

그의 눈이 심유하게 가라앉았다.

주변 암연은 상당히 짙었지만, 그의 자하신공(紫霞神功)은 이를 꿰뚫고 있었다.

당황하여 뭉친 문하인들과 바삐 오가는 인물들.

주변 상황조차 기감에 걸려 지도위의 점처럼 움직였다.

‘결과에 불응하는 건가. 셋 중 누구지?’

상황은 불을 보듯 뻔했다.

투표에 불응한 누군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

"이해는 하나, 수가 너무 조악하군. 하물며 정도를 운운하는 자가 외인. 그것도 마도와 손을 잡다니."

"······!"

악무군이 손을 복면인 쪽으로 뻗었다.

그러자 보이지 않는 인력이 작동하며 복면인을 잡아당겼다.

저항해 보려고 바동거렸지만, 소용없었다.

거미줄에 걸린 나비마냥 손아귀에 잡혔다.

"이 기운은 비위의 것이로군."

"······!"

"내 자하 앞에서 거짓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의외로군. 너희의 수장인 위궁은 죽은 것으로 안다. 복수를 위해 거래에 응하기라도 한 건가?"

비위는 신교의 12걸 중 하나인 위궁이 이끄는 집단.

한때는 명한을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 후 위궁은 되레 죽임을 당했다.

악무군이 언급하는 건 바로 그들이었다.

"아니면······위궁보다 윗선이 이곳에 와 있다?"

복면인의 몸이 아주 희미하게 떨렸다.

단순한 반응으로 봐도 무방한 수준이지만, 악무군의 자하신공은 이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손에 힘을 주었다.

우드득.

복면인의 목이 그대로 부러졌다.

"재미있게 돼 가는군."

훌쩍 몸을 날리는 악무군.

주변을 포위하던 복면인들이 반사적으로 그 뒤를 쫓아서 몸을 날렸다.

그리고 이내.

뿌옇게 내리깔린 암연 속으로 자주색 섬광이 몰아쳤다.

아니, 자주색이 섞인 붉은 섬광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