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의 밤
늦은 밤, 소림사 방장실.
이른 시간에 모였던 이들이 다시금 한자리에 모였다.
물론, 명한과 그 일행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어찌 생각하십니까?"
포문을 연 건 화산의 악무군이었다.
"표면적으로 보자면 패자에 대한 승자의 관용. 허나······"
"마교의 의도를 순수하게 읽을 수는 없다."
"그렇습니다."
합장하며 답하는 허공.
대표로 그가 말했지만, 나머지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뭘 그리 깊이 생각들 하시오. 마교의 간악한 놈들의 수는 뻔한 것 아니오? 우리로 하여금 사파를 견제하고, 그 틈에 정비하겠다는 것 아닙니까?"
"후계다툼 말인가요?"
"여기 모인 분들이라면 눈과 귀 하나 정도는 다 있을 겁니다. 마교의 내부가 후계다툼으로 시끄러운 것 정도는 알고 있을 터. 우리를 사용해서 외난을 막겠다 이겁니다."
청성의 장문이 직접적으로 짚었다.
마교의 의도는 무림맹을 도구로 쓰기 위함이라는 것.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곤륜의 무연 도사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허공이 말없이 있는 무연에 질문을 돌렸다.
장내의 인물 중 자신을 제외하고 가장 연배가 높은 이였다.
"······서신에 응하면 아니 될 일이오."
"아니 된다?"
돌아온 답은 꽤 단정적이었다.
"소백. 신교의 소궁주는 팔륜 황금마차로 세간의 이목을 끌며 소림사로 들어왔소이다. 이미 소문은 날개를 달고 중원 전역으로 퍼져나갔을 터. 우리가 이 마당에 신교의 뜻을 받들어 무림맹을 재창설하면 세간은 이리 생각할 것이오."
"무림맹은 신교의 하수인이다."
"그렇소이다. 아무리 정마대전에서 패배했다고는 하나, 아직 정도무림의 기지는 꺾이지 않았소. 그들 속셈대로 휘둘려서는 안 될 일이외다."
무겁고 단단한 목소리였다.
반색한 것은 청성의 장문이었다.
"역시 곤륜의 무연도사께서는 의기가 있습니다. 정도무림이 신교의 개가 되어서야 쓰겠습니까? 사절은 정식으로 거절하는 것으로 하죠."
"아니.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소이다."
"충분하지 않다?"
"거절은 명분을 줄 뿐이오. 되레, 후계싸움을 일찍 앞당기고 신교를 단합하게 해 줄 수도 있을 터. 우리는 보다 강한 수를 써야 하오."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악무군이 포권을 하며 의견을 청했다.
겉으로는 생각을 읽기 힘들었다.
"사절을 죽이고 무림맹의 발촉을 우리의 의지로 진행해야 합니다."
"······뭐라 하셨습니까? 사절을 죽이 다니오?"
"무연 도사. 생각이 지나치십니다."
"신교와 전쟁이라도 하자는 말씀이십니까?"
과감한 발언에 반발이 돌아왔다.
하지만 무연의 표정은 한 점의 흔들림도 없었다.
"여러 수(數)가 움직이고 있소이다. 그 안에서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려야 옳소. 사절이 소림사 산문으로 들어왔음은 옳지만, 서신을 받았는지는 이곳의 모두를 제외하고는 아는 자가 없소이다."
"하지만 사절이 소림사 안에서 죽으면, 마교는 그 책임을 물을 것이오."
"책임은 밖으로 돌리면 되오."
"밖으로?"
"사파 연합이외다."
무연이 손으로 허공에 점을 찍고 그림을 그렸다.
검은 먹처럼 기운이 일어나 선명한 색을 입혔다.
곤륜의 묵운지(墨雲指).
절기 중의 절기였다.
"서쪽에 마교. 중앙에 소림사. 그리고 남과 동에 사파 연합이오.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고 있으니, 소식은 새보다 빠르게 전파되고 있소. 소림사로 여러 장문인들께서 모인다는 이야기는 사파에도 전해졌을 것이오."
"허나, 그렇다고 사파가 이곳을 습격하리란 보장은 없소. 수는 많으나 실력은 부족한 이들이오. 감히 소림사를 습격하다니, 믿기 어렵소."
"말하지 않았소이까. 많은 수가 움직인다고. 사파를 뒤에서 조종하는 건 마교의 세력이오."
"마교의?"
"소림사 내에서 사절이 죽는 건 좋은 명분이 될 터. 전쟁을 원하는 이들은 이를 기회로 삼고 있소."
무연의 손끝이 신교를 절반으로 갈랐다.
"주전파의 공작으로 사파가 움직인다 이거군요. 하지만 그 말대로 된다 해도, 전쟁이 벌어지면 쓸모없는 일 아닌가요?"
침묵하던 아미파의 백순순이었다.
그녀의 눈은 정황의 득실을 따지고 있었다.
"그러니 사절의 죽음을 사파의 책임으로 몰고, 그들을 뿌리 뽑아야 하오. 이를 명분으로 무림맹을 창설한다면, 정도의 기치에도 어긋나지 않을 터. 마교에서 명분을 삼기 전에 선공을 취하면 되오."
"선수필승이라 이거군요."
"마교 내에도 의견은 여럿이오. 사절인 소백은 사십팔 번째 소궁. 미약하기 짝이 없는 위치에 있소이다. 그가 죽어 없어지기를 바라는 자도 여럿. 대신 손을 써 준다면 일이 끝나기까지 시간을 끌어 줄 사람도 있소이다."
"······사람이라."
백순순의 미간이 가볍게 움직였다.
무연의 말은 설득력이 있지만, 지나치게 확신에 차 있었다.
‘마교와 내통이라도 하는 건가?’
의심은 안개처럼 짙었다.
"그만. 그만하시오."
순간. 허공이 나서서 이어지는 대화를 끊었다.
그의 표정은 수많은 번뇌로 일그러져 있었다.
"대체 우리 정도무림이 어쩌다 이리되었소. 아무리 마교의 인물이라 하여도 산문을 넘은 손님이외다. 그런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자니. 불자의 신분으로 허락할 수 없습니다."
"허공 대사님. 모든 건 정도무림을 위해서입니다. 불심과 도의를 저희가 왜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생각을 머뭇거리다가 당한 것이 정마대전입니다. 같은 전철을 반복하실 생각입니까?"
"무연 도사······!"
"이곳에 구파의 절반 이상이 모여있습니다. 과거의 약조에 따라, 정식으로 의결을 제청합니다."
무연은 허공을 무시하며 의견을 밀어붙였다.
여섯 중 과반수가 찬성했을 때, 그것을 무림맹의 의견으로 삼는다는 약조였다.
무림맹이 해체된 이상 구파 중 여섯이면 중론이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할 일이오, 무연 도사?"
"머뭇거리면 먹힐 뿐입니다, 대사. 지지부진 이용당하다 신교가 집안을 정리하고 진출하면 그때는 어찌할 것이오? 정도 무림의 씨가 다 마르고 난 뒤에도 불심을 논할 수 있소이까?"
"아미타불. 아미타불."
염불을 외는 허공 앞에서 무연이 손을 휘둘렀다.
탁자의 모서리가 잘려서 여섯 조각으로 나뉘었다.
방장실에 모인 장문인 숫자와 같았다.
"가(可). 불가(不可)."
명운을 건 투표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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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쯤 투표가 시작됐겠지?"
손님용 객실.
명한이 침상에 몸을 비스듬히 누인 채 중얼거렸다.
"투표요?"
다리를 주무르고 있던 향아가 물었다.
"내 명운을 건 투표. 날 죽여서 이득을 취하든가, 살려서 굴욕을 감내하든가. 허울 좋은 정도의 아귀다툼이야."
"도, 도련님을 죽여요? 누가요?"
"확실한 건 곤륜과 점창. 나머지는 나도 모르겠어."
"그럼 이렇게 있을 때가 아니지 않아요? 지금이라도 도망가야죠."
안절부절못하는 향아의 머리를 명한이 손으로 꾹 눌렀다.
"소림사 심처야. 도망가고 싶다고 도망갈 수 있는 장소가 아니야. 게다가 도망갈 거면 아예 들어오지도 않았어."
"그러니까요. 그렇게 위험한 곳이면 왜 들어오셨어요. 그냥 신교로 돌아가시지······"
"위험하지 않으면 얻지 못하는 것도 있으니까. 어차피 위기를 피해 신교로 간다고 비단길만 있는 것도 아니거든. 살기 위해서는 줄타기가 필요할 때도 있는 거야."
지금까지의 위기는 애들 장난이었을 뿐이다.
신교와 무림맹.
목을 노리는 수많은 이들 사이에서 곡예를 해야 한다.
"소백. 잠깐 들어가도 괜찮을까?"
"어. 들어와."
문을 밀며 은소소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이 마당에 그렇게 여유 부리고 있어도 되는 거냐? 주변 분위기를 못 읽는 건 아니잖아."
"걸음이 멈추기 시작했지?"
"응.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부산스럽던 각 숙소의 움직임이 지금은 전혀 느껴지지 않아."
"투표를 마치고 돌아간 모양이네."
명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바로 앉았다.
툭툭, 무릎을 두드리는 손가락의 속도가 빨랐다.
"부결(不結)인가."
"부결? 투표가 한쪽으로 기울지 않았다는 거냐?"
"한쪽이 다수였다면 지금 움직임이 있어야 옳아. 아마 삼 대 삼 동수가 나온 모양이야."
습작에서는 투표가 통과되어 명한은 공격을 받는다.
운이 좋아 죽지는 않지만, 이때 당한 부상으로 반년간 거의 불구에 가까운 몸이 된다.
후에 기연으로 이어지는 상처이나, 명한은 이 방식을 취할 생각이 없다.
‘너무 위험 부담이 커. 틀어진 이야기도 많고.’
해서 사전에 작업을 공들여 쳐둔 것이다.
"서신은 미리 전해 뒀지?"
"응. 네 말대로 아미파 여제자를 통해서 건넸어. 비녀라고 하니까 의심조차 안 하더라. 그게 도움이 된 거냐?"
"글쎄. 확신은 없어. 표가 바뀔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아마 둘. 아미파의 백순순과 청성의 임호. 각각 수를 써놓기는 했지만, 반반이지."
"임호? 그 사람은 언제?"
"도운비에게 건넨 약."
"아."
단지 좋은 사람이고 싶어서 건넨 건 아니다.
약 속에 서신을 같이 넣어서 임호에게 전해 두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부결이면 재투표를 하나?"
"······"
보통의 경우라면 그것이 옳다.
결정권자 여섯의 의견이 모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시간을 끌 수가 없어.’
명한이 소림사로 온 건 이미 퍼진 소문.
시간이 지나면 ‘서신’이 소림사로 전해지는 것이 기정사실로 굳어진다.
이를 막기 위해서라면······
"습격이다―!!"
"적이다! 적습이다!"
"막아라!"
순간, 밖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잠잠하던 경내에 발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고 어디선가 불길이 치솟았다.
공교로울 정도로 한 번에 일이 벌어졌다.
"칼을 빼 들었군."
강행.
부결을 무시하는 강경 진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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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림사 전각에 불이 붙어 타들어 갔다.
새카만 연기가 주변을 메워, 시야를 제한했다.
요란한 발소리와 다급한 외침이 그 안을 메아리처럼 오갔다.
"······놓치지 않는다."
그 안을 곤륜의 무연이 소리 없이 걸었다.
지금의 이 연기 안에는 곤륜파에서 특별히 만든 암연(暗煙)이 섞여 있다.
어지간한 고수라도 앞을 헤아리기 힘들다.
"장문. 발각되면 공적으로 낙인이 찍힐 수도 있습니다."
곤륜파 장문제자 왕윤이었다.
명에 따라 움직이지만, 걱정은 감추지 못했다.
태산북두 소림사 경전 안.
그것도 여섯 문파의 장문인이 모여있는 자리였다.
발각되면 사과로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윤아, 우리 정도는 언제나 그런 어중간한 마음 때문에 당하기만 했다. 공적이라고? 그럴 배짱이 저들에게 있을 것 같더냐? 일을 마치고 상황만 좋게 흘러가면 다들 입 닦고 말 것이다."
"제자, 감히 장문인의 생각을 의심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허공과 악무군이 걱정되는 것이냐? 그럴 필요는 없다. 그들은 움직이지 못하니까."
"장문?"
무연이 손을 툭 털어 암연 속 길을 열었다.
"마교에 의해서 사지가 찢겨나간 사형제들을 기억하고 있느냐? 그들의 검 아래에서 피 흘린 아이들을 기억하고 있느냐? 정도의 유약함이 불러온 참극이었을 뿐이다. 나는 결코 그 길을 다시 걷지 않겠다."
"······"
"가거라. 가서 마교의 주구를 잡아 와라. 그자를 친히 찢어 죽인 뒤, 정도 무림의 효시로 삼겠다."
왕윤은 입술만 달싹일 뿐 대꾸하지 못했다.
사부인 무연이 이런 태도를 보일 때는 누구도 설득할 수 없었다.
"곤륜을 위하여."
이미 기호지세.
물러날 방법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