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화 (46/235)

전장으로

명한이 감았던 눈을 천천히 밀어냈다.

몸 안의 기운이 화산처럼 뜨겁게 타오르다 천천히 가라앉았다.

깊이를 알기 어려운 바다와 같은 느낌이었다.

"축하해, 소백."

"축하드려요, 도련님!"

그리고 그 앞에서 두 여인이 웃음으로 반겼다.

어딘가 샐쭉한 기색이 섞여 있는 은소소와 환한 미소의 향아였다.

"그래도 너보다는 내가 먼저 화경에 들거라 생각했는데. 금세 추월당하고 말았어."

"한 발과 두 발 차이야."

"그건 알지만······에잇. 그래서 기분은 어때? 화경의 고수가 된 소감은 있겠지?"

명한이 양손을 움켜쥐며 가만히 내려다봤다.

‘화경의 고수라.’

말로 설명하기에는 너무 많은 것이 바뀌어 있었다.

[이름 : 소백]

[등급 : 40급 / 화경(化境)]

[체질 : 연단성체(練團成體) / 천하급]

[능력 : 심(60급) / 기(65급) / 체(55급)]

[생명 : 1450 / 1450]

[내공 : 220년 / 220년]

[무공 : 오독경 / 지중급(10성)]

[무공 : 가이신공 / 천하급(10성)]

[무공 : 타구봉법 / 천하급(5성)]

[무공 : 묵혼공(습득 제한) / 천상급(3성)]

[상태 : 천독불침 / 환골탈태 / 귀문전인 / 반탄지체]

[사역수 : 쌍각사 / 성성이]

40등급의 화경 고수.

모든 수치의 증가는 일일이 언급이 힘들 정도.

두드러진 변화라면 역시 독단이 사라지며 내공으로 통합된 것과, 몇 가지 바뀐 상태들이다.

[이름 : 귀문전인]

[분류 : 전승계열 상태]

[설명 : 귀문을 정식으로 승계하는 표식. 묵혼공을 대성하면 그 진가가 드러난다]

[이름 : 천독불침]

[분류 : 내성 상태]

[설명 : 오독경이 극성에 이른 결과. 천 가지 독에 면역이 생긴다]

[이름 : 반탄지체]

[분류 : 내성 상태]

[설명 : 가이신공이 극성에 이른 결과. 모든 충격을 흡수해서 상대에게 돌려준다. 내공과 ‘체’수치가 높을수록 반탄공의 위력이 강해진다]

간단 표기로 살펴도 이 정도의 변화였다.

이를 자세히 살피자면 전과는 아예 다른 사람이었다.

‘기의 흐름에 막히는 곳이 없고, 모든 감각이 날카로워. 이게 화경인가.’

그야말로 혼연일체의 경지.

어째서 절정과 화경을 크게 구분 짓는지를 알 것 같았다.

"쳇. 표정만 봐도 알 것 같네."

"아, 미안. 나도 변화에 적응하는 중이라서."

"그럴만하지. 그보다 그 영단인가 뭔가 하는 거. 솔직히 의심했는데, 진짜로 효과가 있네. 한 번에 경지를 넘어설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구왕채 놈들 덕분이지. 저번에 말했던 것처럼, 고수일수록 영단을 많이 채우는 모양이야. 묵혼공이 삼성에 이르면서 넘어설 초석을 다졌어."

묵혼공이 3성에 도달한 뒤 필요한 영기 수치는 무려 천이었다.

처음 모았던 영기 수치의 10배.

구왕채의 채주나 사필헌 같은 자들이 아니었다면, 채우는데 꽤나 긴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삼성의 영단만으로 절정급 고수를 화경으로 이끈다는 거냐?"

"그만큼 벽이 얇았다는 거지. 은소소, 너도 영단의 도움을 받으면 바로 넘을 수 있을 거야."

"흐응."

"왜? 아직도 못 미더운 거냐?"

"아니, 그런 건 아니야. 다만······"

은소소가 머리를 긁적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약의 도움을 받아서 경지를 올린다는 것이 영 찝찝해서. 나는 지금껏 검 하나를 휘두르며 무공을 쌓아왔어. 이제 와서 약으로 경지를 올린다는 건 어딘가 이상해. 아, 그렇다고 너한테 뭐라는 건 아니야. 내가 그렇다는 거니까."

"천생 무인이라 이거네. 이해해."

현대를 살다 온 명한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고집스럽고 어딘가 답답하기도 한 무인의 자세.

‘하지만 이대로 두면 반년은 족히 걸릴 텐데.’

명한이 살짝 고민했다.

"게다가 요즘은 뭔가 올 것 같기도 하거든. 머리끝이 간질간질한 느낌이야. 조금만 더 내디디면 벽을 넘을 것도 같아."

"요즘 그렇다고?"

"응. 아버지가 전수해준 혼원일기라는 무공. 막연해서 겨우 흉내만 내고 있지만, 어렴풋이 그 안의 묘리가 보이는 것 같기도 해."

"혼원일기의 묘리가 보인다?"

"어설프지만."

혼원일기는 묵혼공과 마찬가지인 천상급의 무공.

명한은 익히고 싶어도 제한에 걸려서 익힐 수 없다.

‘그걸 그냥 단순한 재능으로 엿보는 건가.’

과연 은소소.

귀문 후계자와 무당파 전인의 핏줄.

그리고 천마에게 담금질을 당한 초월적인 재능의 소유자였다.

"알았어. 네가 원하지 않는 이상 내 방식을 고집하지는 않을게."

"고마워, 소백."

"믿고 있으니까 하는 말이야. 너라면 머지않아 화경에 오를 수 있겠지."

"으, 응. 그건 또 그것대로 고맙네."

살짝 부끄러워하는 은소소의 얼굴이 붉었다.

꽉 막혀있던 과거가 풀려서인지 최근에는 종종 이런 모습을 보이곤 했다.

"도련님. 저, 저도 항룡이십팔장 많이 늘었어요."

그리고 그럴 때마다 슬쩍 끼어드는 것이 향아였다.

치기 어린 질투 같기도 하고, 관심을 끌고 싶은 아이같기도 하다.

어느 쪽이든 귀여운 건 매한가지.

명한이 향아의 머리를 가볍게 다독이며 큰 꾸러미 하나를 내밀었다.

"말 잘했다, 향아야. 약 먹자. 내공 올려야지."

"또, 또요? 도련님의 약은 많이 쓰던데······"

"쓴 게 몸에 좋은 법이야."

향아의 항룡이십팔장 성취는 무려 칠성.

재능의 급으로 따지자면 은소소보다 이쪽이 더 미친 수준이다.

다만, 제대로 무공을 배운 기간이 짧다 보니 기반이 약할 뿐.

계속 약을 먹이며 내공을 올리고 체질을 보강하고 있다.

"우우······"

울상지으면서도 약은 받아가는 향아.

뒤처지기 싫은 마음은 좋은 향상의 재료였다.

그리고 이런 향상은 아무리 많아도 넘치지 않는다.

"각자의 방식으로 열심히 해보자고."

이제 곧 소림사였다.

#

소림사.

무림의 태산북두이며 정도의 상징.

숭산의 고요함은 천하의 태평과 같으니, 그 정적이야말로 지켜야 할 도리로 여겨졌다.

하지만 최근은 그 고요함을 찾기가 어려웠다.

"방장, 청성의 사람들도 도착했다고 합니다."

"아미타불. 결국, 걷잡을 수 없이 되었구려."

"이 마당에 거절하면 소림사의 명성에 큰 누가 되리라 봅니다."

대웅전에서 말을 주고받는 두 사람.

한 명은 소림사의 방장, 허공이었고 다른 한 명은 그의 사제 허선이었다.

최근 계속해서 이어진 소림사의 소란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불가의 제자가 어찌 명성을 탐하겠나. 허나, 본사를 찾은 외객들을 말없이 쫓을 수도 없는 노릇. 참으로 곤란한 일이외다."

"청성, 화산, 아미, 곤륜. 각지에서 사람을 보내오고 있습니다. 본사가 아니라면 중심을 잡아줄 곳도 없겠지요. 방장께서는 이를 명예롭게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허선 사제. 본사는 명예를 좇는 곳이 아니라네. 어찌 이 소란스러움에서 세속의 영광을 찾으려 하는가."

"방장. 무너진 정도 무림을 되살릴 수 있는 건 소림사뿐입니다. 불자는 오욕을 참고 견디며 걷는 것이 도리 아닙니까. 세속이 뭐라 하든, 이번 일은 소림사가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허어. 아미타불."

사제, 허선의 말에 허공이 염불을 외웠다.

단지 그 하나의 의견이라면 참선으로 해결하면 될 일.

하지만 아쉽게도 허선의 생각이 소림의 의견이었다.

신교에 의해서 정도가 무너진 이후.

이를 복권하는 것에 소림사가 앞장서야 한다는 강한 외침이 있었다.

‘세상사가 그리 단순하면 좋겠으나······’

아니라는 걸 허공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답답한 마음에 염주만 계속해서 손끝으로 돌렸다.

"허공, 방장님! 방장님!"

순간, 대웅전 문 앞으로 누군가 달려왔다.

다급한 숨소리와 목소리가 한데 뒤엉켰다.

"어허, 부처님 앞일세. 왜 이리 경망하게 구는가!"

"죄, 죄송합니다! 워낙 급한 일이라······"

"무슨 일인데 그리 서두른 건가?"

"본사 입구에서 큰 싸움이 벌어질 모양입니다. 당장 사람을 보내셔야 합니다!"

"싸움? 누가 말인가?"

정도 무림의 핵심들이 모여있는 자리.

암암리에 견제는 하더라도 큰 다툼은 없었다.

"황금······황금빛 마차를 끌고 온 사람입니다. 스스로를 천마신교의 사절이라 칭했습니다."

"신교······!?"

허공이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몇 달 전, 천마궁을 떠나서 실종되었다는 신교의 소궁주 중 하나.

그가 이끌던 마차가 신교의 상징 중 하나였던 팔두 금마차였다.

"허선 사제. 나한들을 불러오게."

그의 목소리도 다급해져 있었다.

#

"네놈 당장 내려오지 못할까!?"

청색 두건 차림의 무인이 검을 꼬나쥔 채 소리쳤다.

소림사의 입구 부근.

쏟아지는 햇빛을 온몸으로 받아서 반사 시키고 있는 황금색 마차를 향해서였다.

"하암. 꽤나 시끄럽네. 소림사 산문은 고요함의 최고봉이라 하던데. 이제보니 시장통하고 다를 바가 없잖아?"

"감히! 정체도 모를 뜨내기 따위가 소림사 앞에서 소란을 일으키려는 것이냐!?"

"정체를 모르기는. 하여튼 입만 열면 거짓말이야."

명한이 툴툴거리며 마차 위에서 뛰어내렸다.

노곤한 표정은 유지한 채, 주변은 곁눈으로 훑었다.

‘청성파. 곤륜파. 그리고 저긴 아미파인가?’

생각대로 정도 무림의 거인들이 모여있었다.

"정체를 밝혀라! 이런 괴상한 물건을 끌고 소림사 앞에서 소란을 벌이는 건 무언가 속내가 있어서겠지!?"

"괴상하다니. 그걸 아버지께서 알면 속상하실 텐데. 감당되겠어?"

"우, 웃기지 마라!"

청색 두건의 남자가 검을 앞으로 내밀었다.

살짝 떨리는 검극은 ‘마차의 정체를 알고 있다.’의 방증이기도 했다.

어느 누가 모르겠는가.

‘흑점에게 일러서 이를 복원하기를 잘했어.’

팔두 황금마차는 중원 정벌의 증거이기도 했는데.

"사제, 그만하게."

그때,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같은 청성파의 인물, 칠룡의 일원인 도운비였다.

"청성의 도운비라 하오. 성함을 알 수 있겠소?"

깍듯한 태도, 군더더기 없는 자세였다.

"청성에 용이 하나 나왔다고 하더니 그쪽이었군. 난 소백. 이쪽은 은소소. 그리고 저기 작은 아이는 향아라고 한다."

"소형과 은 낭자, 향 낭자셨군. 실례가 아니라면 금색 마차에 대해서 여쭈어도 되겠소?"

"알면서 묻는 취미가 있나?"

"확실히 해야 할 문제이니 그렇소. 금색 마차의 상징성은 누구보다 우리 청성이 가장 잘 알고 있소. 거짓이라면······허투루 넘어갈 수는 없소이다."

기도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바람마저 갈라버릴 것 같은 날카로운 기세였다.

‘청성의 대라신공인가. 검은 청풍검이겠네.’

명성만큼의 위력이었다.

"그걸 내가 그 쪽에게 증명할 이유는 없는데."

하지만 위력에 지고 들어갈 생각은 없다.

명한이 도운비의 기도를 역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한 걸음에서 파생한 힘이 땅을 파고 주변 삼 장으로 번졌다.

내공이 약한 이들은 깜짝 놀라 물러났다.

"······과연. 범상치 않은 내공이외다."

"그쪽의 기도도 제법이었어."

"허나, 이 도모 청성의 검으로 묻고자 하는 것에 답을 얻지 못한 적은 없소."

"호오."

"소림 산문을 통과하려거든 그대의 본적을 확실하게 밝히시오."

도운비가 발끝으로 지면을 누르며 다시 검을 들었다.

땅을 타고 흐르던 기운이 갈라져 파편처럼 튀었다.

나무, 돌, 흙더미 따위가 날카롭게 갈라졌다.

‘이 새끼 봐라?’

말은 번드르르하지만 수는 뻔했다.

첫수에 명한의 본적을 읽지 못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지금의 도발은 그저 신교에 대한 반발심이었다.

"청성의 검이 매섭다고 하던데. 오늘 한 번 받아봐야겠군."

"청성의 검에는 눈이 없소. 그대가 치장한 금색 마차가 진짜이든 가짜이든······결과에 후회하면 늦고 말 것이오."

"하여튼 도사라는 것들은 말을 참 꼬아서 한단 말이야."

콰드드득―!

명한이 힘껏 땅을 밟아서 맞서던 기운을 폭발시켰다.

주변 땅이 사정없이 뒤집히며 수 장 너머로 튀었다.

벼락이라도 맞은 것 같은 광경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명한이 말했다.

"덤벼."

도발에 대한 응수.

물러난다는 선택지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미 이곳은 전장.

그리고 명한은 후퇴가 허락되지 않은 선봉장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