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화 (45/235)

다 털어먹기

총 일곱 개의 산채를 털었다.

죄질이 나쁜 산적 이백여 명을 처단하고, 잡혀 있던 촌민 수십과 재물 수십만 냥 치를 풀었다.

이제는 산길을 달려도 산적은 눈을 피하고, 촌민들은 나와서 먹을 것을 내어주었다.

인근에서는 모르는 이가 없었다.

[묵혼공이 이성(二成)에 도달했습니다]

[심, 기, 체가 각 5씩 증가합니다]

[영단의 필요 영기수치가 증가합니다]

그리고 그 즈음해서 명한도 묵혼공 2성을 찍었다.

산채 일곱을 털었으니, 어지간히도 많이 잡아먹은 셈이다.

체질이 안 맞는 만큼 올리기가 쉽진 않았다.

"슬슬 올 때가 됐는데."

"와? 누가?"

"거물. 녹림도 나름대로 체계가 있고, 그 안에 서열이 있거든. 내가 노리는 건 녹림 12산채 중 하나인, 구왕채야."

묵혼공을 찍고 평판을 올리는 등.

원하는 작업은 다 끝냈는데, 딱 하나가 모자랐다.

주변 녹림 무리의 두목격인 구왕채였다.

‘이놈을 털어야 사파 연합의 구체적인 습격 시기를 알아내는데.’

겁이 많은지 아직 미끼를 물지 않았다.

"도련님."

그때였다.

가만히 앉아 주변을 관찰하던 향아가 눈을 깜빡였다.

그녀의 벽안지체가 숲의 음영 사이를 꿰뚫은 것이다.

"으하하하하!! 이놈들, 드디어 잡았구나!"

그리고 이내, 호탕한 웃음과 함께 일단의 무리가 장내로 들이닥쳤다.

짐승 가죽을 잘라서 만든 옷에 투박한 무기.

어딘가 산짐승 같은 기세를 내비치는 이들이었다.

"산중 어르신들이 오셨다!"

"구왕채."

올 사람이 왔다.

명한이 기쁜 마음으로 웃었다.

#

명한은 뒷짐을 진 채 상대를 눈으로 훑었다.

앞서 상대했던 산적들과는 기도가 달랐다.

‘그래도 12산채 중 하나라는 건가.’

녹림의 기둥이라 할 수 있는 대산채.

명문가 수준은 아니지만, 그래도 구색은 했다.

"크하하하! 어린 것들이 이 산왕을 보고 얼어붙은 거냐?"

말 없는 명한의 모습에 녹호군이 크게 웃었다.

8척이 넘는 키에 호랑이 가죽으로 만든 옷.

확실히 위압적인 모습이기는 했다.

"채주가 직접 왔나 보네. 송사리가 걸리나 어쩔까 싶었는데, 월척이야."

"후후. 좋아, 채주는 내가 상대한다."

"혼자서 재미를 보겠다는 거냐?"

"앞에서는 네가 날뛰었잖아. 이번엔 나한테 양보해."

하지만 명한과 은소소의 대화는 전혀 아니었다.

누가 녹호군을 상대하는가로 옥신각신했다.

"이놈들이 감히! 이 몸이 누군지는 알고 있는 거냐!?"

당연히 녹호군은 크게 분노했다.

사람 몸만 한 도끼를 강하게 땅에 찍으며 소리쳤다.

돌이 쩍, 갈라지는 것이 보통 힘이 아니었다.

"스스로 구왕채라고 밝혔잖아. 산적질 하다 보니까 머리가 굳기라도 한 거냐?"

"뭐야!?"

"구왕채면 녹림의 12 대산채 중 하나. 우두머리면 산왕이라 지칭하는 녹호군 아닌가? 뭐, 호랑이라기보다는 고양이에 가깝지만."

"이······! 건방진 연놈들이 겁을 상실했구나! 당장 저것들을 잡아 와!"

그래도 왕이라고 먼저 나서지는 않았다.

녹호군의 손짓에 구왕채의 산적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수준은 3류에서 2류 중간 즈음.

썩 나쁜 실력은 아니었다.

"소백, 평가는?"

"척살 1순위. 구왕채라고 하면 악질 중의 악질이야. 이놈들이 쓸고 간 마을은 볍씨 하나 남지 않았어. 잡아간 농민들을 노예로 부린다고도 해."

"하. 개만도 못한 것들이군."

은소소가 사나운 표정을 지으며 검을 뽑았다.

순식간에 아득한 기운이 몰려와 검 끝에 맺혔다.

뚜렷하게 보이는 검기였다.

‘검기!? 절정 급이다!’ 누군가 외쳤지만 늦었다.

그녀는 산을 타는 범처럼 뛰어 선두의 산적들을 도륙했다.

검, 팔, 다리, 머리.

검격에 닿는 족족 잘려나갔다.

"이이익! 고작 흑점의 수송 인원에 절정 급이 웬 말이냐!? 서 선생! 어찌 된 일이오!?"

"으, 으음. 그래 봐야 한 명입니다. 게다가 절정 급이 지키는 패물이면 얼마나 값지겠습니까!?"

"크응. 부 채주들은 앞으로 나서라!"

이미 뽑은 검.

녹호군이 구왕채의 부채주들을 앞으로 밀어 넣었다.

나름 1류 이상의 실력을 지닌 이들이었다.

‘우리가요?’ ‘절정인데?’ ‘채주님은요?’ 구시렁거리며 머뭇거리는 모습은 보였지만, 그래도 나가긴 했다.

수가 다섯이니 한 명은 감당할 거라 여긴 것이다.

"소소 아가씨를 건드리게 둘 수는 없어요."

"뭐야, 이 계집은?"

이 합류의 앞을 막아선 건 향아였다.

명한이 해도 될 일이지만 그녀가 자원했다.

‘조금 더 도움이 되고 싶어.’

기특한 마음의 발로였다.

"네년은 이 어르신의 밤 시중이나 들거라!"

"······소녀의 모든 건 도련님의 것입니다."

풀잎을 밟으며 앞으로 미끄러지는 향아.

순식간에 부채주 하나의 간격 안까지 접근했다.

놀란 듯 벌어지는 눈동자를 전부 시야 안에 두며, 가슴으로 장권을 쑤셔 박았다.

[항룡이십팔장 - 강룡파강(强龍破江)]

발끝부터 시작한 강맹한 와류가 그대로 부채주의 가슴팍을 헤집었다.

몸 전체가 태풍에 휘말린 나뭇잎처럼 돌면서 날아갔다.

"이, 이 계집도 고수다!"

"젠장! 어린 계집의 장법이 뭐가 이리 매서워!"

당황한 부채주들이 황급히 태세를 갖췄다.

하지만 이미 월보를 밟기 시작한 향아는 그야말로 드리워지는 달그림자와 같았다.

순식간에 부채주들의 사이를 헤집고 지나갔다.

가슴, 어깨, 옆구리.

묵직하게 들어오는 장력에 한 놈씩 고꾸라졌다.

"하아. 하아."

"그만 됐다, 향아야. 이제 쉬어라."

대충 정리가 될 즈음 명한이 그녀를 불러세웠다.

향아의 월보와 항룡이십팔장은 분명 빼어난 절기.

하지만 제 역량을 내기에는 수준이 많이 부족했다.

‘단기전으로는 절정급이지만.’

내공의 부족함도 문제.

장시간 싸우는 건 힘들었다.

"죄송해요, 도련님. 조금 더 싸울 수 있었는데."

"그 정도면 충분히 역할을 했다. 네가 더 날뛰면 내가 활약할 시간이 줄어들지 않겠어?"

"헤헤. 역시 주인공은 도련님이죠."

슥슥, 쓰다듬는 손길에 웃으며 물러났다.

굳이 사고는 읽지 않아도 됐다.

"젠장, 사 선생! 이렇게 된 이상 사 선생도 뒷짐 지고만 있을 수는 없소이다!"

"크음. 알겠습니다, 녹 채주. 연합의 힘을 보여드리지요."

"전부 돌격해라! 저것들을 다 쓸어버려!"

마침내 녹호군이 완전히 칼을 빼 들었다.

구왕채 전원이 일제히 달려들기 시작했다.

선두의 녹호군과 사필헌의 기세 역시 만만치 않았다.

"소백!"

"미안. 그쪽에 묶인 건 내 잘못이 아니라고."

"에잇!"

아직 선두에 묶인 은소소를 제치고 명한이 나섰다.

녹호군을 포함, 주력을 상대하는 건 그의 역할이었다.

수는 얼추 셈해도 오십.

‘예전이라면 오줌을 지리고 주저앉았겠지만.’

이제는 그저 처리해야 할 적으로 보일 뿐이다.

한때 글을 끄적이던 작가 대신, 이곳에 있는 건 무림인이었다.

"묵혼공의 제물이 되어라."

치솟는 암색의 기운.

명한의 봉에 죽음이 드리웠다.

#

녹호군의 손이 벌벌 떨렸다.

지금의 상황을 믿기 힘들었다.

기백에 달했던 산채의 부하들이 대부분 도륙당했다.

어디 명문가 토벌대에 당한 것도 아니었다.

고작 셋.

그것도 제대로 싸운 건 둘뿐인 이들에게 전부 당해버렸다.

"대, 대체 뭐 하는 것들이냐?"

"청소부? 지나는 길에 쓰레기가 있으면 치워야지."

"감히. 감히 녹림을 건드리고도 두렵지 않은 거냐?"

"대사라도 연습하는 거냐? 어째 하는 말이 다 똑같아."

명한이 타구봉의 피를 툭 털어내며 답했다.

주변 한 족장 안에는 머리가 터져 죽은 시체가 수십이었다.

"우리 녹림은 사파연합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 네놈들은 범의 코털을 건드린 거다!"

"하아. 사파연합. 정마대전의 여파로 각 문파들이 안을 단속할 때, 기회를 노리고 세를 불린 쓰레기들. 버러지 여럿이 모인다고 구축업자가 겁이라도 먹을까?"

"네놈―!!"

녹호군이 힘을 쥐어짜 달려들었다.

그의 애병기인 대호도를 사용한 붕천격이었다.

이름만큼 대단한 무공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위력 있는 공격이긴 했다.

터엉―!

"뭐!?"

하지만 상성이 좋지 않았다.

명한의 오죽타구봉은 ‘파괴 불가’가 붙은 신병이기.

아무리 중량공격을 해도 받아치기는 무조건 가능하다.

게다가 충격 흡수에 특화된 가이신공까지.

접힐 듯 낭창하게 휜 오죽타구봉이 일자로 펴지며 녹호군을 통째로 튕겨냈다.

"다음 생에는 녹림은 거르라고."

그대로 텅 빈 몸뚱이에 봉을 찔러 넣었다.

꼬챙이에 꿴 물고기처럼 그대로 절명했다.

나름대로 절정 급에 오른 녹림, 대 산채의 채주.

그 이름값에 비해서는 허망한 죽음이었다.

"쳇. 벌써 끝난 거냐?"

"생각보다 약하더라. 그쪽은?"

"아예 산 밖으로 튄 놈들은 놓쳤지만, 대부분은 처리했어."

"수고했어."

은소소도 나머지를 정리하고 왔다.

대 산채 하나를 정리하는 데는 그리 긴 시간도 필요 없었다.

그만큼 명한 일행이 강하다는 증거였다.

"응? 그놈은? 무슨 사 선생인가 뭔가 하는."

"처음에 좀 싸우는가 싶더니, 곧바로 내빼더라."

"그걸 놔줬어?"

"설마."

둘의 관계를 유추하는 건 쉬운 일이었다.

녹림 옆에서 선생 소리를 들은 놈이라면 사파 연합의 일원밖에 없으니까.

이미 쌍각사를 풀어 두었다.

"대충 정리해둬. 묵혼공만 돌리고 나면 뒤를 쫓을 거니까."

"이대로 사파 연합이라도 치게?"

"근처에 그런 거창한 곳이 있을 리가 없잖아. 사파 연합은 그냥 사기꾼 모임 같은 거야. 연합이지만 결국 서로가 서로를 못 믿지. 사 선생이라는 놈이 어디로 도망갔을 거 같아?"

"······설마 구왕채?"

"응. 여차하면 뒤통수 칠 준비가 돼 있던 거지."

"하. 신용 없는 새끼들."

그래서 사파 연합이라는 거다.

명한이 눈을 감고 묵혼공을 연마하기 시작했다.

#

"젠장. 젠장. 젠장!"

사필헌이 숨을 헐떡이며 구왕채로 들어섰다.

입구를 지키던 잔당들이 ‘사 선생님?’ ‘채주는 어디 갔습니까?’라며 물었지만 싹 무시했다.

선생이라 불리는 만큼 정세를 읽는 눈은 있었다.

‘그 새끼들 보통이 아니야.’

하나같이 쓰는 무공이 엄청났다.

여자 쪽은 정체불명이지만, 남자는 확실했다.

"여기에 왜 개방의 고수가 나타난 거지?"

오죽타구봉에 타구봉법이었다.

한때, 개방과 싸워본 적 있는 만큼 몰라볼 수는 없었다.

그 강맹한 봉법은 분명 타구봉법이었다.

"설마 흑점에서 개방의 고수를 고용한 건가?"

하지만 흑점이 무슨 수로?

개방이 아무리 사분오열되었다고 한들, 흑점이 돈으로 고용할 만큼 호락호락하진 않다.

‘설마. 개방이 우리 사파연합의 계획을 눈치챈 건가?’

손톱을 씹는 속도가 조금 더 빨라졌다.

"사 선생. 채주는 어쩌고 혼자서 돌아온 거요?"

"에이잇! 꺼져라!"

"컥!?"

안으로 찾아온 구왕채 산적은 일수에 때려죽였다.

일이 틀어진 이상 지킬 의리 따위는 없었다.

‘이렇게 된 거 보물만 빼돌리고 튄다.’

피도 닦지 않고 구왕채 구석으로 달렸다.

채주인 녹호군을 제외하면 접근할 수 없는 장소였다.

"사 선생?"

"비켜!"

"커억!!"

막아서는 놈들은 전부 일수에 죽였다.

"이 부근일 텐데······"

그렇게 죽인 숫자가 열을 넘어섰을 때.

사필헌은 어딘가 버려진 것처럼 보이는 창고 앞에 당도했다.

‘분명, 이 안이야.’

녹호군 주변을 염탐하면서 알아낸 정보였다.

자물쇠를 힘으로 뜯어내고 문을 억지로 밀었다.

거친 마찰음과 함께 통로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있다. 이 새끼, 녹호군."

그 통로 너머에 존재하는 건 엄청난 숫자의 보물들.

금, 은을 비롯해서 각종 보석과 각지에서 모인 명화나 보검 등이 즐비해 있었다.

녹호군이 남몰래 비축해 둔 물건이었다.

"이래 놓고서는 상납할 재물이 없다고?"

연합이라고 손은 잡았지만, 제대로 소통하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그러니 연합 측에서도 믿지 못하고 사필헌을 파견했던 것이고.

이래저래 파투날 수밖에 없는 관계였다.

"그래서 내가 말했잖아. 연합은 무슨 연합. 버러지들이 모였다고 그걸 연합이라고 쳐주나?"

"······!"

순간, 바로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몸을 앞으로 빼려 했지만, 뒷덜미를 낚아채는 손이 먼저였다.

혈이 막혀 목이 빳빳하게 굳었다.

"안내해 줘서 고마워."

"너, 너! 어떻게 여기를!?"

"충직한 안내뱀이 있거든."

"쉬익!"

"히익!"

어디선가 나타나 사필헌의 몸을 타고 오르는 쌍각사.

사필헌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너도 너지만, 녹호군 그 인간도 대단하다. 그래도 녹림의 채주라는 놈이 이렇게 재물을 모아뒀던 건가."

"재, 재물이 필요하면 전부 가져라! 어차피 녹호군 그자와 나는 아무런 관계가 아니다!"

"구질구질하네. 그래도 연합이라고 온 거 아니야?"

"우린······"

"우린 뭐? 소림사에서 있을 대 회의를 습격이라도 하려고?"

"······!"

벼락이라도 맞은 듯 사필헌이 몸을 떨었다.

절대로 알아서는 안 될 정보를 명한이 언급한 것이다.

"정보는 정체 모를 자들에게서 받았고? 미련한 새끼들. 누구 손아귀에서 놀아나는지도 모르고."

"너, 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뻔한 거 아니냐? 소림사를 습격해서 득 볼 사람이 누구 같아? 무림맹 재창설을 반대하는 놈들이야. 마도의 주전파라고."

"······"

입만 벙긋거리는 사필헌에 명한이 코웃음 쳤다.

애초에 그 정도까지도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기회다 싶으니 냅다 연합을 움직인 것.

‘물론, 연합 내에도 거물은 있지만······’

상황이 바뀔 기미는 없었다.

"됐고, 연합 측에서 제공한 계획이나 불어."

"무슨 소리!? 내가 그걸 한마디라도 토설할 것 같나!?"

"쌍아야."

"쉬이이익!"

"히익!"

허벅지를 타고 바지 안쪽으로 쌍각사가 파고들었다.

아주아주 중요한 무언가에 날카로운 이빨이 닿았다.

사필헌의 얼굴이 더없이 창백해졌다.

"계획."

"끄으으으······"

남자라면 이길 수 없는 협박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