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화 (44/235)

협행

구왕채(九王砦) 채주, 녹호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수확이 마음에 안 든 탓이다.

바닥을 닦던 하인을 걷어차며 소리 질렀다.

"이 새끼들아, 일 똑바로 안 해!? 수확이 이게 뭐야!? 이 양으로 누구 배를 채우라는 거냐!?"

쿨럭, 하고 하인이 피를 쏟았지만, 누구 하나 눈길을 주지 않았다.

"내가 말했지? 무당 그 말코도사하고 소림사 땡중 새끼들 신경 쓰지 말라고. 지금 그쪽 놈들은 자기 앞가림하기도 바빠. 그냥 보이는 족족 다 털어서 가져오라 이 말이야!"

이번엔 손에 잡히는 대로 항아리를 쥐고 던졌다.

구석의 다른 하인이 머리를 얻어맞고 고꾸라졌다.

주변 다른 녹림도가 자연스럽게 끌어내는 모습이 한두 번 있었던 일이 아니었다.

"채주, 화를 가라앉히지요."

"끄응. 사 선생. 뭐, 할 말이라도 있소?"

녹림도와는 조금 다른 복장의 사내가 나섰다.

어딘가 먹물 꽤나 먹은 듯한 얼굴이었다.

품격있게 포권을 하더니 말을 이었다.

"사파 연합이 발족하고 저마다 성과를 자랑하는 시기이니 채주께서 초조한 것은 이해합니다. 허나, 이곳이 소림과 무당 사이의 험지라는 건 다른 연합의 수장분들도 이해하고 있습니다."

"끄응. 사 선생이 그리 말씀해 주시니 화가 좀 가라앉는구려."

"하하, 이 사모를 높이 사주시니 감읍할 따름입니다."

사 선생. 본명은 사필헌.

사파 연합에서 파견된 일종의 감사직이었다.

사파의 성향상 서로가 서로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건 불가능한 일.

중심 연합에서 사람을 파견해서 감시하는 것이다.

녹호군도 말만 그럴싸할 뿐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 않았다.

"이왕 말 꺼낸 김에 사 선생 머리를 좀 빌립시다. 다른 채주들에 비해서 우리 산채 공물이 적은 건 누구나 아는 사실. 타개책이 있겠소? 이리 가다가 대업 전에 대 산채에서 밀려날 판이오."

"있지요. 있으니 이 사모가 나선 것 아니겠습니까."

"오오. 그렇습니까? 고견을 경청하지요."

"혹, 흑점이라 들어보셨습니까?"

"흑점? 그 정보상 나부랭이들 말입니까?"

"네. 정보를 사고파는 걸 가업으로 삼은 놈들이죠. 얼마 전에 제대로 부활했다고 합니다."

"그게 우리 일과 무슨 상관이오?"

"그야 흑점에서 정보가 아닌 돈을 옮긴다면 우리 일이 되는 것이지요."

돈이라는 말에 녹호군의 눈이 반짝였다.

"수송계획이라도 알아냈소?"

"후후. 무당산 인근에서 흑점의 움직임을 파악했습니다. 꽤 요란하게 짐을 꾸리더군요. 적지 않은 양이 북상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쓰읍. 무당산 쪽에서 북상이면 소림 근방 아니오? 그렇게 정직하게 올라가면 손을 쓰기 곤란한데."

"후후후. 제가 어찌 그런 불구덩이에 채주님을 몰아넣겠습니까."

사필헌이 가죽 지도를 꺼내 먹으로 점을 찍었다.

무당산에서 벗어나, 소림사로 이어지는 산길이었다.

인적이 적고 그만큼 문파 간의 영향력도 없는 위치였다.

"산행을 하고 있다는 말이오?"

"나름 은밀하게 기동하기 위함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마침 산채 인근을 지나고 있더군요. 어떻습니까. 이 정도라면 채주님께 도움이 될는지요?"

"으하하하. 이건 호랑이 입속으로 떡이 들어오는 격 아니오? 역시 사 선생입니다. 하하하."

녹호군이 목젖이 보이도록 크게 웃었다.

흑점 같은 정보상은 은밀함에 중점을 두는 집단.

무력 면에서 걱정할 건 없었다.

"애들아 무기를 들어라! 사냥이다!!"

일확천금.

그렇게 생각했다.

#

덜그럭. 마차 바퀴가 소리를 내며 정지했다.

크릉, 성성이가 콧김을 뀌며 주저앉았다.

오는 길에서 벌써 몇 번이나 마주했던 장면.

이제는 익숙해진 것이다.

"어때? 이놈들도 죽여 마땅한 놈들인가?"

"흠. 파산채에서 온 놈들인가? 흑점 평가로는 악질 중 악질이라고 하네. 인신매매, 부녀자 납치, 살인, 강간. 독한 것만 손을 대는 놈들이야."

"소림과 무당 인근에서 이런 패악질이라니."

"어쩌겠어. 정마대전이 벌어지고 난 뒤, 공백이 많은 거지."

은소소와 명한이 나란히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봇짐을 맨 향아도 그 뒤를 바짝 따라왔다.

"크하하하하! 이것들아! 이곳은 우리 산 어르신들이 차지했다! 지나가려거든 가진 건 몽땅 내놓아라!"

"계집은 지금이라도 옷고름을 풀어라!"

"겁도 없이 어리신들 구역을 어슬렁거려!?"

그리고 맞은 편에서 산적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저들 딴에는 숨어서 기습했다고 생각하겠지만, 이미 한참 전부터 기척을 읽고 있었다.

심드렁히 바라봤다.

"오, 오! 형님 저 계집들 얼굴을 좀 보쇼! 반반한 것이 촌구석에서는 보기 힘든 미색입니다!"

"크흐흐흐. 입은 옷도 좀 봐라. 번들번들하니 죄다 고급이다. 어디서 돈 좀 있는 한량들이 산으로 나들이를 왔나 보구나."

"월척이야, 월척. 뭐하냐, 애들아. 계집은 벗기고 사내 놈은 사지를 잘라라."

겉으로 보기에는 충분히 그렇다.

예쁘장하게 생긴 명한부터, 미인인 향아나 은소소.

나이는 앳되고 생김새는 곱다 보니 험한 무인이라 여기기는 힘들다.

"내가 먼저."

하지만 착각의 대가는 지나치게 가혹했다.

한 걸음 먼저 나서는 명한.

허리춤에서 뽑힌 오죽타구봉이 벌떼 우는 소리를 내며 강하게 진동했다.

2갑자가 넘는 내공의 힘이었다.

"무공······?"

퍼석.

가장 앞에 있던 산적의 머리가 날아갔다.

목 위가 나선 형태로 뜯겨 나간 것이다.

강한 회전력을 실은 일종의 나선참.

몇 걸음 뒤의 나무까지 커다란 구멍을 남긴 채 부러졌다.

"무, 무림인이다! 한 번에 덮쳐!"

"젠장! 이런 산길에서 무슨 무림인이란 말이냐!"

"소림인가!? 무당!?"

당황하는 산적 무리 사이로 명한이 뛰어들었다.

바닥을 끄는 봉을 타고 붉은 샌 선이 그어졌다.

그리고 이 선은 삶과 죽음의 경계였다.

[타구봉법 - 천하무구(天下無拘)]

사방을 휩쓰는 폭격이었다.

거침없이 쏟아지는 봉을 제대로 막는 놈이 하나 없었다.

부러지고 깨지고 터졌다.

"으아아악!! 괴물이다! 도망쳐!!"

"제길! 제길! 우리에게 왜 이러는 거냐!?"

"대체 무슨 원한이 있다고!"

살아남은 놈들은 사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뭉쳐 싸울 의리나 용기는 애초에 없었다.

먼저 도망치겠다고 앞선 놈 잡아끄는 모습은 존재했다.

"흥! 버러지 같은 놈들. 네놈들이 습격한 촌민은 무슨 죄가 있어서 그랬던 거냐?"

뒤이어 은소소도 끼어들었다.

허리에서 시작해서 사방으로 솟구치는 특유의 검기였다.

궤적에 걸리는 거라면 하나도 남김없이 잘랐다.

산적의 능력으로는 감히 막을 수 없었다.

"활을 쏴! 도끼를 던져! 뭐라도 하라고!"

"육시랄!!"

그나마 몇 걸음 멀리 있던 놈들이 원거리 공격을 시도했다.

난전 중에 하나라도 맞으면 가능할까 싶어서.

하지만 은소소는 그런 어설픔에 당할 실력자가 아니었다.

"혼원일기!"

검이 아닌 손끝으로 허공을 그었다.

사방에서 날아오던 화살과 도끼 등이 무언가에 걸린 듯 그대로 추락했다.

무공이라기보다는 거의 법술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소소, 아가씨 하나 남았어요."

"아, 고마워 향아야."

하지만 아직 많이 어설펐다.

혼원일기의 기운에 걸리지 않은 화살이 허공에서 향아의 손에 잡힌 것이다.

제법 익숙해진 항룡이십팔장의 수법이었다.

본래의 강맹함 대신 유려함이 도드라졌지만, 절기의 가치가 어디 간 건 아니었다.

"도련님, 저 뒤에 한 명 숨어있어요."

게다가 좋은 눈을 바탕으로 하는 척후에도 능했다.

앞선에서 날뛰던 명한이 그녀의 손짓을 따라 숲으로 타구봉을 던졌다.

아름드리나무가 그대로 뚫렸다.

우드득, 부서지는 나무 뒤로 가슴이 뚫린 시체 하나가 같이 무너졌다.

"내 경험치······아니, 협행의 제물이 돼라."

남은 이는 이제 겨우 몇.

명한의 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

[무공 : 묵혼공 1성(成) 99 / 100]

명한의 몸 주변으로 희뿌연 안개가 감돌았다.

죽은 이의 영기가 몸 안으로 흡수되는 광경이었다.

머리 위의 상태 창에서 숫자가 순식간에 차올랐다.

[1단계 영단이 완성됐습니다]

그 숫자가 100을 넘는 순간.

몸 안에서 단이 완성됐다.

혼의 기운으로 연성된 영단이었다.

‘이게 1성 묵혼공의 영단이라 이거로군.’

묵직한 기운은 절대로 적지 않았다.

명한이 운기를 통해서 내공의 바닷속으로 영단을 밀어 넣었다.

[영단이 독단과 섞입니다]

[심, 기, 체가 각각 1씩 증가합니다]

뭉그러지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독단에 영단의 기운이 섞이며 성질이 달라졌다.

그리고 이건 명한이 약기를 통해 쌓은 내공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

‘슬슬 내공이 하나로 섞이고 있어.’

분리되어 있던 기운의 혼재였다.

"된 거야?"

안개가 흩어지자 은소소가 다가와서 물었다.

"첫 번째 영단 연성에 성공했어. 하지만 이 정도로는 많이 모자라네. 영단을 고스란히 먹었는데도 아직 성과가 없어."

"사람마다 차이가 있는 거 아니야?"

"나도 같은 생각이야. 혼기라는 건 그 사람의 격과 관계가 있지. 이런 산적 놈들 따위보다야 고수 한 명이 훨씬 더 높은 격을 지녔을 거야."

"수련을 위해서는 고수를 죽여야 한다. 마음에 드네."

"무림 공적으로 가는 지름길이지. 그러니 이럴 때 평판을 쌓아 둬야 한다고."

명한이 죽은 산적의 품을 뒤졌다.

푼돈 조금과 열쇠 꾸러미가 발견됐다.

"쌍아야, 길을 좀 안내해주렴."

"쉬익!"

냄새를 맡게 한 뒤, 쌍각사로 하여금 산채를 찾도록 했다.

산적은 나름대로 영역 동물.

멀지 않은 곳에서 놈들의 산채를 발견했다.

"누구냐!?"

"적이······커억!"

잔당은 그대로 쓸어버렸다.

묵혼공의 영양분도 되기 힘든 찌꺼기에 불과했다.

남은 적 하나까지 싹 처리한 뒤, 산채 안쪽에 갇힌 이들을 구해냈다.

인근 마을에서 잡혀 온 촌민이었다.

"감사합니다, 대협!"

"아이고, 나으리!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까요!"

"형아, 고마워. 누나도 고마워!"

대협 소리도 꽤 들을 만했다.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산 아래에 마을까지 안내할 분들이 도착해 있으니 따라가시면 됩니다."

"허어. 벌써 그런 준비까지. 혹, 무당파에서 오신 분들인가요?"

"아뇨. 그저 무림을 유랑 중인 뜨내기들일 뿐입니다. 불의를 참지 못해 나서게 된 것이죠."

"오, 오. 무림의 신성이시군요. 저희 같은 촌부들을 위해서 나서주시고. 영광입니다."

"하하. 영광이랄 게 뭐 있습니까. 아, 이건 혹시 몰라 준비한 물건이니 노잣돈으로 챙겨가시죠."

털린 돈에 얹어서 웃돈과 식량도 챙겨 줬다.

대협 소리 하던 이들이 이젠 아주 신선 보듯이 한다.

이 정도면 충분히 평판작업을 했다 싶어, 명한이 넌지시 흘렸다.

"우린 이만 가자, 은소소."

"으, 응. 소백."

"오. 은 여협와 소 대협이었군요."

"두 분의 존성대명. 반드시 기억하겠습니다."

미련 없이 훌쩍 떠나는 모습은 그야말로 대협 그 자체였다.

#

"수고하셨습니다, 태사님."

"응. 산채에서 사람들 내려오면 마을까지 안내해주고, 우리 쪽에 연락책 한 명만 붙여 줘."

"알겠습니다."

명한은 산 아래에서 흑점의 사람과 만났다.

귀문을 떠난 뒤, 불러둔 사람이었다.

산채를 털고 다니면 뒤처리할 사람이 필요했다.

"소백. 앞으로 계속 이렇게 할 거냐? 네가 평판을 이렇게 생각하는지는 몰랐는데."

"말했잖아, 협행이라고. 이왕 할 거면 제대로 해야지. 사람 구해주는 일이 나쁜 건 아니잖아."

"뭐······나도 여협 소리 듣는 거 썩 나쁘진 않아. 다만, 그게 전부인 것 같진 않아서."

"당연히 전부는 아니지."

명한이 타구봉으로 바닥에 그림을 그렸다.

큰 산 위에 놓인 소림사의 모습이었다.

"우린 조만간 신교의 사절로 소림사에 들어가게 돼. 어떤 목적으로 파견된 사절인지 알고 있어?"

"그냥 친교 아니었나?"

"설마. 단순한 친교 사절에 소궁주를 보낼 리가 없잖아. 사절의 목적은 두 가지. 상호불가침 조약과 무림맹의 재창단이야."

"뭐? 그걸 왜 우리가······?"

중원을 제패한 것이 신교다.

승자가 제안할 만한 내용이 아니었다.

"단순하게 보자면 승자의 관용. 조금 더 안을 들여다보자면 곤란함이야."

"전자는 이해하겠지만, 후자는 모르겠는데?"

"무림맹이 와해하니까 어디가 가장 날뛰고 있는지는 너도 봐서 알지?"

"사파."

"응. 신교는 분명 무림 최강이지만, 너무 서쪽에 있어. 각지의 사파를 제어할 영향력이 부족하지. 이걸 무림맹에 맡기겠다는 거야."

"단순히 그뿐이라면 곤란이라는 말은 안 썼겠지. 진짜 이유는 뭐야?"

이번에는 꽤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명한이 씩 웃으며 자신과 은소소를 번갈아 가리켰다.

"······후계싸움."

"그래. 집안싸움이 얼마나 가속화되고 있는지도 너도 알고 있을 거야. 각 소궁의 궁주들은 저마다의 세력을 끌고 외부와 결탁하기도 해. 이 마당에 밖으로 힘을 쓰는 건 곤란하지."

"웃기지도 않는군. 겨우 중원을 제패해 놓고 집안싸움이라니."

"뭐······천마의 생각은 조금 다르겠지만."

"응? 뭐라고 했어?"

"아니, 아무것도. 하여튼 상황이 그러니 우리는 이래저래 고립무원이야."

슥슥.

소림사 주변으로 신교와 무림맹을 나란히 적었다.

그리고 그사이에 ‘소백’이름 두 글자를 넣었다.

"아. 무림맹은 우리의 의도를 믿지 않겠구나."

"당연하지. 지금까지 실컷 패 놓고서는 싸우지 말자고 하면 믿겠어? 무림맹의 재창설도 신교의 알력이라 여길 거야."

"그럼 신교 쪽은?"

"뭐, 좋아하진 않지. 후계싸움은 둘째 치고 신교 안에서도 주전파와 비 주전파는 나뉘니까. 기껏 중원을 장악했는데 힘 못 쓰는 형국이잖아. 욕먹기 딱 좋은 사십팔 궁 망나니를 보낸 건 다 이유가 있는 거야."

"어쩐지 별말 없더니."

아무리 내각에서 힘을 썼다지만, 그래도 신교의 대표.

말없이 통과된 것에는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

"그럼, 협행이다 뭐다 하면서 평판을 쌓는 건 나름의 안전장치를 만드는 건가?"

"태산북두 소림사잖아. 대협소리 듣는 사람을 함부로 하기는 힘들어."

"쯧. 자존심 상하는 일이네."

"그깟 자존심이 뭐 대수라고. 버티고 살아남으면 그게 승자야."

필요하다면 더한 것도 할 수 있다.

자존심만 남은 사람의 말로를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

"가자. 아직 털 산채가 많아."

걸음을 서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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