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화 (43/235)

묵혼공

일단 무당파의 일은 막천우가 맡기로 했다.

조사령과 태극진검결을 가지고 본산으로 돌아가서 장로 들과 담판을 져야 할 일이었다.

잘 풀리면 막천강의 죄를 인정하고 귀문에 대한 사죄.

그리고 막천우의 복귀와 장문직 논의 등이 이어질 것이다.

반대로 잘 풀리지 않는다면······

"내전이겠지."

청운은 죄를 받아들이고 바뀌는 것을 택했다.

하지만 모든 무당의 사람이 그러할까.

청운을 따라온 무당파의 제자들 중에서도 작금의 상황을 불만스럽게 보는 자라면 얼마든지 있다.

까딱하면 패가 갈려서 싸울 판이다.

"정말로 막 대협을 따라가지 않아도 되는 거냐?"

그런 상황에서 은소소는 막천우를 따라가지 않고 남았다.

"······이야기는 충분히 나누었어. 아버지가 왜 그리했는지 알 것도 같아. 하지만 아직은 시간이 필요해. 게다가 너와 한 약속도 있잖아. 없던 일처럼 떠날 수는 없어."

"광검의 의리라는 거냐?"

"그냥 의리가 아니야."

걸음을 세우고 명한을 돌아보는 은소소.

평소와 다르게 부드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난 철이 들기 전부터 어머니를 쫓았어. 핏줄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이 있었지. 아마도 어느 정도는 내가 천마의 핏줄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을지도 몰라."

명한이 돕지 않았다면 지금도 그러했을 터.

"네 덕에 많은 걸 덜어낼 수 있었어. 어머니가 날 사랑하셨다는 것도 알게 됐고, 가문의 비화도 이해했어. 갑자기 무당파의 아버지가 생긴 건 낯설긴 하지만, 그래도······차차 나아지겠지."

"시간이 해결해 줄 거다."

"그래. 이 모든 게 전부 네 덕이야. 나, 은소소는 평생에 걸쳐서도 못 갚을 은혜를 너에게 빚졌어. 그러니, 받아 줘."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주저앉는 은소소.

애검을 손으로 받치고 명한을 향해서 내밀었다.

이건 신하게 왕에게 표하는 예식이었다.

"언젠가 말했듯이, 나는 세상 어떤 일에 있어서도 네 편에 서겠어. 그건, 나 은소소의 이름으로 하는 맹세야. 이제 내 검은 오롯이 네 것이다, 소백."

"은소소."

"충동적인 것도 가벼운 마음도 아니야. 내 평생은 이제 널 위해서 쓰겠어."

은소소의 태도는 더없이 진지했다.

이건 거부하거나 회피하는 것이 되레 무례한 일.

명한이 잠시 생각하다, 은소소가 내민 검을 받아 들었다.

"마음은 받고 예의는 거두자. 앞으로도 지금처럼 내 옆에서 도와주면 충분해."

"······고마워."

부드럽게 웃음 짓는 은소소.

이 모습을 누가 광검이라 부를 수 있을까.

이날 명한은 명검을 손에 넣었다.

#

"이렇게 보내도 되겠느냐?"

낡은 비석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산자의 것이 아닌, 저 너머의 울림이었다.

"저 아이에게는 저 아이 나름의 삶이 있습니다. 귀문의 핏줄을 이었다고는 하나, 그 삶을 강요할 수는 없지요."

"해서, 네가 이곳에 남았다는 거냐?"

"네. 은공께서 말하기를 조사의 영은 귀문의 땅을 벗어날 수 없으니, 봉납할 사람이 필요하다 했습니다. 은소소, 저 아이를 제외하면 유일하게 남은 귀문의 핏줄은 저 하나. 남은 평생 이곳에서 속죄해야지요."

그리고 이에 답하는 건 은영영이었다.

그녀는 남은 삶을 귀문의 터에서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 속죄라. 소백, 그 아이가 내게 말한 것과는 조금 다르구나.

"네?"

― 재미있는 아이야.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다른 영기를 지니고 있어. 마치 천도를 깨달은 영도자의 그것과 같이.

조사, 은휘의 말에 은영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 그 아이에게 내 묵혼공을 전수했다. 고로, 귀문의 정식 후계자는 그 아이가 되는 것이지.

"묵혼공. 그런 무공이 있었습니까?

― 네 백발귀모공의 모체가 되는 무공이다. 대성까지는 요원한 일이나, 요결은 전부 전했으니 구색은 갖췄다고 봐야지."

"그럼 귀문의 명맥이······?"

― 그래. 그 아이가 말하더구나. 후에 네가 찾아와 귀문의 터를 지키고자 한다면, 아예 문중 부활을 꾀함이 어떻겠냐고.

"무, 문중 부활이요? 하지만 저 혼자서 그걸 어찌?"

― 그 아이가 남겨 둔 물건이 있다. 네가 온다면 전해주라 하더구나.

은휘의 소리가 색을 입고 한쪽을 가리켰다.

무덤가에 덩그러니 놓인 봇짐이었다.

은영영이 황급히 달려가 봇짐을 열었다.

"······이, 이건 전표 아닙니까? 세상에 10만 냥!? 그리고 흑점? 그 정보상 흑점이 우리는 돕는다는 건가요?"

― 이미 몇 수 앞을 내다본 모양이더구나. 확실히 특이한 아이야. 영(靈)위에 덧씌워진 영(靈)이라. 귀문을 잇기에 이보다 좋은 재목이 또 어디에 있을꼬.

"아······아아. 아흐흑. 흐으으윽."

은영영이 봇짐을 품에 안고 흐느꼈다.

한때의 실수로 귀문을 멸문지화로 몰아넣고 얼마나 많은 세월을 허비했는가.

다시 일어날 기회가 생겼다는 것이 꿈같았다.

― 속죄 또한 기회를 잡은 자만이 할 수 있는 일. 그 아이들이 네게 기회를 주었으니, 평생에 걸쳐서 갚아야 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죄인, 은영영은 귀문의 부활을 위해 남은 인생을 모두 바치겠습니다."

― 그래. 노부도 속세의 연이 끊겨 다시 영속으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널 도와주도록 하마.

"감사합니다, 사조님."

은휘에게는 사실 미련이 없다.

진신절기인 묵혼공도 이미 명한에게 전한바.

다시 영속에 빠져 속세를 떠나는 것이 옳은 순서다.

하지만 왜일까.

― 소백. 소백이라.

제자로 삼은 아이에 대한 호기심이 남아 있다.

― 우선은 네 엉터리 백발귀모공부터 뜯어고치자꾸나.

그 호기심이 사그라지는 날까지.

조금 더 남아 있을 셈이었다.

#

덜그럭, 덜그럭.

마차가 거친 산길을 힘차게 달려갔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마차는 아니었다.

앞자리에서 끌고 있는 건 말이 아닌 거대 원숭이였으니까.

"성성아, 조금만 더 힘내라."

"크응!"

성성이가 콧김을 답하고는 힘껏 마차를 끌었다.

말도 달리기 힘든 산길을 성성이는 거침없이 내달렸다.

"굳이 이런 산길로 가야 해?"

콩콩 튀는 엉덩이에 은소소가 물었다.

호북지방을 지나 소림까지 올라가는 길에, 명한은 굳이 험한 산길을 택했다.

"이제 남은 건 소림사뿐이야. 도착하면 다른 곳으로 빠질 시간이 없다고. 최대한 시간을 아껴야지."

"무슨 시간? 뭘 하는데 시간을 아껴?"

"수련."

명한이 손으로 자신과 나머지 둘을 가리켰다.

"떠나기 전에 막 대협에게서 무공은 전수받았지?"

"응. 혼원일기. 아버지가 무당을 떠나서 스스로 창안한 무공이야. 하지만 겨우 요결만 전수받은 거라 제대로 다루려면 아직 멀었어."

"태극검 쪽은 아무래도 어려웠지?"

"태극진검결? 무리야. 나는 아예 무당파 쪽 기반이 없는걸. 배우려면 기초부터 갈아엎어야 할걸?"

"그렇겠지. 그럼 그 혼원일기. 소림사에 당도하기 전까지 최대한 숙련도를 올려두자고. 여차하면 화경도 뚫고."

"······농담이지?"

은소소가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절정 끝자락에서 화경으로 넘어가는 일.

평생을 무학에 몸담아도 정말 소수만이 당도하는 영역이다.

그걸 명한은 뒷산 정도로 언급했다.

"내가 언제 시답지 않은 농담하는 거 봤어?"

"하지만 그래도 화경은 애들 장난이 아니야."

"애들 장난이 아니니까, 이번 기회에 넘어야지. 소림에 당도하면 지금 우리 수준으로는 버티기 힘들어."

소림까지만 해도 벌써 몇 번의 위기가 있었다.

대부분의 상황을 알고 있음에도 대처가 쉽지 않았던 것이 사실.

소림에 당도하면 이 상황은 더욱 가열된다.

‘예상대로 흘러간다면 사파 놈들과 신교도 엮이겠지.’

살아남으려면 더욱 높은 경지가 필요했다.

"내가 귀문에서 무언가를 찾고 있었던 건 알고 있지?"

"응. 대충 눈치는 챘어. 귀문의 무공이지?"

"정확하게 말하자면 귀문 조사 은휘의 무공이야. 이름은 묵혼공.""묵혼공. 들어본 적 없어."

"그럴 수밖에. 조사, 은휘를 제외하면 익힐 수 있는 사람이 없던 무공이거든."

애초에 은휘의 특수한 체질에서 파생한 무공.

그가 영속에 든 것과는 상관없이, 귀문의 어떤 제자도 이를 제대로 익힌 적이 없다.

백발귀모공 같은 아류 무공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묵혼공은 혼백의 영기(靈氣)를 쌓아서 힘으로 치환하는 일종의 법술(法術)이야."

"법술? 모산파의 도사들이 쓴다는 그런 술법?"

"비슷하지만 훨씬 고차원의 것이야. 비유하자면 현경 너머의 경지와 유사하지."

"······뭐?"

"말로는 나도 설명이 힘들어. 하여튼 이 묵혼공은 은휘 조사의 독특한 체질 때문에 가능했던 무공이야. 한 차원 높은 경지를 흉내 냈던 거지."

은휘가 아니면 불가능한 무공이 묵혼공이다.

사실 이론적으로는 명한 또한 이를 익힐 수 없다.

[이름 : 묵혼공(黙魂功)]

[분류 : 무공]

[등급 : 천상급]

[습득 제한 : 영환지체(靈環之體), 심 수치 500]

[설명 : 귀문 조사 은휘의 독문무공. 혼백으로 쌓은 힘으로 이치를 거스르는 능력을 발휘한다. 당대 적수가 없었던 극강의 무공]

제한만 봐도 가능성은 없다.

체질이 아닌 심(心)의 제한은 터무니없는 수치.

하지만 명한은 이 설정을 직접 짠 작가다.

당연히 이를 비집고 들어갈 꼼수를 알고 있다.

"영단(靈團)을 만들 거야."

"영단? 무슨 약 같은 거냐?"

"비슷하지. 일단 단약이 약재를 뭉쳐서 만드는거라면 이건 혼을 빚어서 만드는 거니까."

"······혼을 빚어서?"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순간, 그 혼백은 기운을 남기고 사라져. 이를 혼기(魂氣)또는 영기(靈氣)라고 부르지. 나는 이걸 묵혼공의 구결로 흡수하여, 가이신공으로 쌓고, 단으로 뭉칠 거야."

이건 은휘가 묵혼공을 직접 새겼기에 가능한 일이다.

습득제한 걸린 무공을 억지로 익힌 격.

정상적으로 수련은 불가능하지만, 이용은 가능하다.

그리고 여기까지가 명한이 계획은 1단계였다.

소림사에 도착하기 전까지 만들어야 할 필수 조건.

‘본래라면 이 상태로 허죽도를 돌아서 타구봉법의 경지를 올리겠지만······’

천마궁에서 운 좋게 연단성체를 빨리 얻었다.

연단성체가 있으면 아예 묵혼공을 통해서 경지를 올리는 것이 가능하다.

훨씬 빠르고 간단한 길.

"충분한 크기의 영단이 모인다면 단번에 너나 나. 향아까지도 경지를 한 단계 끌어올릴 수 있어."

"하! 말도 안 되는 이야기야!"

"아니, 가능해. 고래로부터 영약의 단계를 넘어서는 신단의 전설은 꾸준하게 전해져 왔어. 이 영단도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지. 뭐, 급은 좀 떨어지지만."

"터무니없군. 정말로 농담이 아닌 거냐?"

"직접 경험해 보는 편이 빠를 거야."

물론, 영단이라고 만능은 아니다.

억지로 격(隔)을 끌어 올리는 거라, 육체와 정신에 가해지는 부하가 어마어마하다.

고통을 참지 못하면 무위로 돌아가고 만다.

게다가 영단 자체가 벽에 막힌 이들을 위한 것.

어설픈 사람이 먹으면 광증만 도져서 미쳐버리고 말 뿐이다.

‘하지만 그건 단점도 아니지.’

벽에 막혀서 좌절하는 고수가 하나둘이겠는가.

눈앞의 천재 은소소만해도 화경에 들기까지 앞으로 반년은 족히 필요하다.

앞당길 수 있다면 고통이 대수일까.

"하아. 너랑 엮이면 내 상식이 자꾸 부서지는 기분이다. 그래 뭐······된다고 치자. 그래서 그걸 어떻게 연단한다는 건데? 산속 깊은 곳에라도 들어가냐?"

"소림사로 가는 길은 충분히 지체됐어. 더이상 시간을 끌기는 힘들지."

"그럼?"

"무당산에서 소림사까지. 두 세력의 눈을 벗어나 패악질을 벌이는 산적 놈들이 있어."

"녹림?"

"응. 우리는 북상하면서 이 녹림 놈들의 산채를 죄다 털어버릴 거야."

얼추 셈해서 큰 산채가 셋이고 작은 산채가 다섯이다.

이놈들 패악질에 굶어 죽는 농민이 수천.

‘소림사에서 만날 놈들이니 미리 줄여두면 좋지.’

겸사겸사 좋은 일이다.

"연단의 재료는 혼. 이왕 손에 피를 묻힐 거라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편이 좋겠지."

무림에서 독심으로 살고자 한다면, 차라리 악인을 베는 것이 마음은 편하다.

녹림도를 베어 영단을 살찌우는 길.

"협행(俠行). 해볼래?"

누군가는 협행이라 말하고.

누군가는 사냥이라 말할.명한의 녹림행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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