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 (42/235)

귀문전인

[무상비고에서 생존했습니다]

[의뢰 보상이 지급됩니다]

짧은 알림창 사이로 빛이 번졌다.

명한은 그 안으로 손을 뻗어서 꺼냈다.

"······이래서 표시가 엉망이었던 거네."

빛에서 나온 건 명패와 한 권의 책이었다.

둘 다 명한이 익히 알고 있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본래 이곳에서는 나올 리 없는 물건이기도 했다.

‘또 부족한 설정 채우기인가.’

[이름 : 무당조사령]

[분류 : 증표]

[등급 : ―]

[설명 : 무당파의 조사가 남긴 명패. 장문령보다 우선하는 권위를 지녔다]

[이름 : 태극진검결]

[분류 : 무공서]

[등급 : 천하급]

[습득제한 : 심, 기 합 100이상]

[설명 : 무당파 조사가 남긴 비전무공. 그 위력이 하늘을 덮고 바다를 가른다고 전해진다. 무당삼결을 모두 익힌 자만이 수련이 가능하다]

간단하게 말해서 무당파 조사의 유품이었다.

이게 왜 무상비고의 보상으로 주어지는가.

생각해보자면 굳이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귀문과 무당파는 교류가 많던 집단.

조사의 유품이 귀문에 남겨져 있는 것도 납득이 안 되는 일은 아니었다.

그런 ‘설정’이 된 것이다.

"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저건······장문인! 장문인께서 어째서!?"

"당신들이 장문인을 헤친 건가!?"

그리고 이내, 무상비고 초입에 잡혀 있던 무당파의 인물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가슴이 뚫린 채 앉아 있는 막천강은 그들이 무기를 뽑게 하는 이유로는 충분했다.

"그만. 모두 검을 내려라."

"청운 사형? 무슨 소리입니까?"

"저들이 장문인을 해쳤습니다! 복수해야 합니다!"

"그만하라고 했다!"

하지만 이들의 수장 격인 청운은 태도를 달리했다.

위압적인 목소리로 나머지를 진정시킨 뒤, 크게 걸어와 막천우 앞에 무릎을 꿇었다.

지극히 공손한 태도였다.

"대사형께 인사 올립니다."

"대사형? 이 사형,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계시는 겁니까?"

"이분이 막천우, 대사형이시다. 비록 파문당했다고는 하나, 예까지 저버릴 수는 없지."

"막천우······그 막천우 말입니까?"

나머지는 어려서 기억하지 못하나, 청운은 알고 있다.

막 검을 들고 수련동을 나왔을 때.

현장에 대한 수습으로 그 역시 함께 움직였었다.

피눈물 흘리며 죽은 여인을 안고 있던 그의 모습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청운. 청운이구나. 오랜 세월이 지났어. 어리기만 하던 네가 이제는 사형소리를 듣는구나."

"십수 년이 흘렀으니까요."

"좋은 얼굴이다. 자, 무엇하느냐. 장문인을 죽인 죄인이 이곳에 있으니, 어서 잡아가라."

막천우는 검을 버리고 손을 내밀었다.

친동생까지 죽인 이상 미련은 없었다.

"아니, 그런 식은 아니지요."

이때 나선 건 또다시 명한이었다.

향아의 부축을 받아 두 무리 사이에 섰다.

얼굴은 창백했지만, 다행히 치명상은 아니었다.

"청운 도사. 명이공(明耳功)의 성취가 뛰어나시군요."

"······어찌 안 겁니까?"

"아무리 오랜만에 만난 대사형이라 해도 장문인이 죽은 걸 먼저 반응했어야 옳습니다. 지금까지의 대화를 전부 들은 것이 아니라면."

"이 사형!?"

"······"

청운이 입술만 잘근 씹었다.

"고민하는 건 이해합니다. 어디까지나 무당파의 치욕이라 할 수 있는 과거. 인정하고 넘어가자니 걸린 것이 너무 많겠죠."

"나는 그런 것이······"

"그러니 여기서 절충안을 제안하죠."

무당의 신념이나 정의관 등을 설득하자니 너무 길다.

명한은 이 지긋지긋한 감정놀음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막 대협, 받으시죠."

보상으로 챙긴 물건 두 개를 막천우에게 던졌다.

무당조사령과 태극진검결이었다.

"이, 이건!?"

"무당파 조사의 물건입니다. 이곳, 귀문의 비고에 숨겨져 있더군요."

"그걸 자네가 어떻게?"

"의문은 넣어 두시죠. 그냥 두 물건을 챙겨서 무당으로 돌아가세요. 파문을 취소하기에 조사령이면 충분하고도 남을 겁니다."

막천우만이 아닌 나머지 모두가 놀랐다.

"그, 그 영패가 무당파의 조사령이란 말입니까?"

"무당파의 조사령과 태극검의 부족함을 채운 태극진검결입니다. 조사께서 귀문과 왕래를 하면서 남겨 둔 물건이겠지요."

"그런 물건이 이곳에 있었을 리가······"

"있든 없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장문인을 파문당한 전대 장문제자가 죽인 상황이죠. 이걸 공개적으로 무마할 수 있습니까?"

모두의 입이 딱 달라붙었다.

온전히 드러나면 단순한 충격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그러니 말하는 겁니다. 조사령을 들고 가서 스스로 과오를 다잡으세요. 적당히 포장하든, 체면만은 살리든. 그 정도의 기회는 드리겠다 이 말입니다. 무당파의 진짜 전인이 있다면 안될 말은 아니겠죠."

"대사형을 말입니까?"

"막 대협은 살아있는 증거입니다. 무당의 과오이며 귀문에 저지른 죄의 증인이죠. 하지만 그렇기에 그가 가장 적합한 사람입니다. 무당이 흔들린 지라도 뿌리가 뽑히지는 않을 테니까."

"허나, 그리되면 무당은······"

"청운 도사. 이건 다시 한번 선택권을 드리는 겁니다. 당신이라면 모든 대화를 다 들었으니 알겠지요. 무당이 무엇 위에서 고결함을 쌓아 올렸는지."

명이공. 먼 거리의 이야기를 듣게 해주는 무공이다.

청운은 남보다 일찍 무상비고의 진법을 벗어나, 막천강의 이야기를 들었다.

고결하다 자부하던 무당의 과거였다.

"많은 이들이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

"그걸 바로잡는 건 어디까지나 무당파 도사들의 역할입니다. 편한 길을 가고 싶다면 모든 걸 덮고 말아도 됩니다. 하지만 그게 무당파입니까?"

"······"

"과오가 있다면 인정하고 씻어야 옳습니다. 그게 정도의 의미니까요."

명한은 말을 맺으며 막천우를 돌아봤다.

남은 건 그의 선택이었다.

"내게 그럴 자격이 있겠나?"

"그럴 걱정을 할 시간에 일단 하고 볼 겁니다. 아니면 이번에도 두려움에 도망칠 겁니까?"

"아니네. 자네 말대로 나는 지독한 겁쟁이였을 뿐이야. 연인의 복수도 하지 못하고, 딸의 인생도 책임지지도 못한. 이번에는 다르게 해 보겠네."

"좋네요. 이제야 좀 사람다워 보입니다."

명한이 씩 웃으며 한 걸음 물러났다.

할 말은 다 했으니, 남은 건 당사자들의 몫이었다.

"······소소야."

은소소. 그리고 막천우.

아주 오랫동안 떨어져 있던 부녀지간의 이야기였다.

#

"정신은 좀 들었어?"

부녀는 부녀끼리 할 일이 있으니 명한도 본래의 목적으로 돌아갔다.

이 개고생을 하며 귀문을 찾은 건 이유가 있어서다.

겨우 정신을 차린 은영영이었다.

"은영영이 은공에게 인사 올립니다."

그녀는 명한을 보자마자 대번에 큰절을 올렸다.

"갑자기 예의를 찾는 건가? 정신은 돌아왔고?"

"은공께서 주신 약 덕분입니다. 백발귀모공의 독기가 상당 부분 씻겨나갔지요.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하물며, 소소 저 아이와 막 가가의 일은······어찌 갚아야 할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군요."

"뭐, 이유 없이 도운 건 아니니까."

"은공께서도 무상가의 보물을 원하시는 겁니까?"

명한이 답 대신 품 안에서 무상악보를 꺼냈다.

은영영의 눈이 살짝 커졌다.

"은공. 은공께서는 혹시 소소도 그럴 목적으로 데리고 계셨습니까?"

"착각하지 마. 은소소를 데리고 온 건 호위를 겸해서야. 너희 보물을 찾는 일에 그녀는 필요 없어."

"허면 어찌······무상은가의 보물을 은공께서 알고 계셨는지요."

"그게 중요한가?"

"······네. 그렇지요. 어차피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요. 다만, 은공. 아쉽게도 보물은 이곳에 없습니다. 무상은가의 보물이라는 건 허상에 불과합니다."

보물 따위는 없다.

은영영은 귀문이 멸문하는 순간까지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야 당연하지. 귀문의 보물은 어떤 형태를 가지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니까."

"네? 그게 무슨 소리인가요?"

"왜 이런 악보를 남겼다고 생각하냐? 귀문의 보물은 정확한 장소에서 정확한 음을 연주할 때 그 모습을 드러내게 돼 있어."

"그런 이야기는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설명하기는 귀찮으니 답이나 해. 귀문의 조사가 묻힌 무덤은 어느 곳에 있지?"

애초에 귀문 사람들을 알 길이 없는 비밀.

이를 알기 위해서는 귀문의 조사가 어떤 사람인지부터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그 사실은 원작에서도 후반부에나 풀린다.

하지만 답안지가 있는데, 굳이 풀이를 고집할 이유는 없다.

"은공은 대체······"

"말하기 어려운가?"

"아뇨. 어차피 이름만 있던 보물입니다. 더이상 귀문에게 보물의 가치는 존재하지 않겠죠. 은공께서 이 보물에 연이 있다면 가져가는 편이 나을 거 같습니다."

"그래도 말이 통하니 좋네."

"다만, 한 가지 조건은 있습니다."

"이 마당에 조건이라. 뭔데?"

"소소. 앞으로도 저 아이를 지켜주셨으면 합니다. 평생을 잃은 채 살아온 아이입니다. 은공같이 빼어난 사람이 곁에 있다면······"

"헛소리는 그만해."

"네?"

명한이 팔짱을 낀 채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뻔한 반응, 뻔한 대사였다.

"지은 죄가 있고 죄책감이 있다면, 직접 소소에게 가서 사과해. 그리고 벌을 받든 곁에서 죄를 덜든 마음대로 하라고. 남에게 떠넘길 생각은 하지 말고."

"······제게 그럴 자격이 있을까요?"

"판단은 소소가 하는 거야."

"아! 그렇군요. 은공의 말씀이 옳습니다."

은영영이 무언가 털어낸 것 같은 얼굴로 끄덕였다.

귀문의 멸문, 언니의 죽음, 잃어버린 조카.

죄가 없다면 거짓이나, 그걸 받아내야 할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은소소였다.

‘알아서 하겠지.’

명한이 개입할 문제는 아니었다.

"귀문 조사가 묻힌 장소는 사당에서 동쪽으로 쉰 걸음. 북으로 다시 쉰 걸음을 간 곳에 있습니다. 비석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있지요."

"비석 하나라."

"조사의 유언이었다고 합니다. 남길 것은 비석 하나면 충분하다고."

"호인이었네."

짧게 웃음을 남기며 명한은 몸을 돌렸다.

은소소와 막천우.

두 부녀가 다가오고 있었다.

한발 물러나 줄 때였다.

#

[무명자(無名子) 묘(墓)]

정말로 덩그러니 비석만 놓인 묘.

명한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먼지를 털어냈다.

세월이 훑고 간 흔적 말고는 특별함이 보이지 않았다.

"참나. 그래도 왕년 천하제일인의 묘인데."

무명자, 은휘.

천마가 등장하기 아주 오래전, 무림을 횡횡한 천하제일 고수의 이름이다.

더이상 적수가 없음에 은거하니 그곳을 무상가라 불렀다.

그리고 후에 이 이름은 다시 귀문으로 바뀐다.

"괜히 귀문으로 바꾼 게 아니지."

명한이 무상악보를 꺼내 연주하기 시작했다.

악기는 대단한 걸 요구하지 않았다.

그저 작은 대나무 하나를 깎아 만든 피리면 됐다.

풀잎 사이로 소리가 음을 이루며 울려 퍼졌다.

― 참으로 오랜만에 듣는 노래로군

이윽고, 노랫소리 사이로 섞여드는 낯선 목소리.

이 땅의 것이 아닌 듯 음울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이렇게 직접 뵈는 건 처음이군요, 은노사."

― 오. 그대가 날 불러낸 사람인가? 산자와 대화를 나누는 건 정말 오랜만이군.

"노사께서 영면에 드시고 난 뒤니, 대략 300년은 족히 지났을 겁니다."

― 허어. 벌써 그렇게 된 건가. 영속을 떠돌다 육체가 부서지는 것도 몰랐으니, 참 무상한 일이로고.

은휘는 날 때부터 독특한 재주가 있었다.

산자가 아닌 죽은 자들.

세상에 속하지 않은 영(靈)을 느낄 수 있는 재능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무공도 창안하니, 후에 귀문으로 이름을 바꾼 건 당연한 일이었다.

"무상함이 어찌 육체뿐이겠습니까. 한때 이름을 알리던 귀문조차 지금은 흔적밖에 남지 않았지요."

― 귀문이 그리된 건가?

"조사께서 떠나시고 그 비전을 제대로 잇는 자가 없었습니다. 반절만을 겨우 떼어 죽은 자의 독으로 기를 연마하니 통탄할 일이었지요."

― 본좌의 묵혼공(黙魂功)이 사장되었다는 건가?

"이름조차 아는 이가 없습니다."

명한의 답에 긴 침묵이 이어졌다.

아무리 속세를 벗고 스스로 영이 되어 떠난 이라도, 한 줌의 미련은 남는 법.

은휘, 그도 마찬가지였다.

― 자네. 자네는 어찌 이를 알고 날 찾았는가?

"척운. 그분의 무공을 잇고 있습니다."

― 척운. 가이신공의 척운 말인가? 하하. 다행이군, 다행이야. 그의 신공은 다행히도 전인을 찾았어.

천마궁 서고에서 찾은 고려의 무공.

가이신공은 한때, 은휘와 무를 두고 경쟁하던 척운이라는 남자의 무공이었다.

― 그렇지. 이리 찾은 것도 인연이니, 자네가 내 묵혼공을 이어받게나. 후대에 이르러 척운 그 친구와 한 맥을 이어 겨루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겠지.

"제가 감히 그리해도 되겠습니까?"

― 어차피 세속에 남은 미련이라고는 티끌뿐이라네. 자네가 이름을 이어 족적이라도 남겨준다면 나야말로 기쁠 따름이지.

"그리 말씀하신다면······소생 은노사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명한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아주 정성껏, 온 마음을 다한 절이었다.

‘드디어 묵혼공인가.’

그 숫자가 구배(九拜).

제자의 도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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