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라는 사람
이기어검이란 자신의 기를 사물에 동화시켜서 의지로 움직이는 경지를 의미한다.
안의 기운, 내기(內氣)가 충만하여 밖으로 이어짐에 막힘이 없는 것이다.
이는 화경보다 윗 단계.
바로 현경에 도달한 자의 절예였다.
"혀, 현경이라고? 웃기지 마!"
막천강은 전력으로 부정했다.
막천우는 장문제자의 위치마저 버리고 떠난 배신자.
무당의 진신절예를 모두 배운 건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아직 자신조차 이루지 못한 경지를 배신자가 먼저 익히는 건 있을 수 없었다.
"삶의 회한을 겪고 나니 머리가 하얗게 세더구나. 그리고 그제야 내가 걸어온 길이 얼마나 하찮았는지를 깨달았다."
"무당의······대 무당의 직전이었던 삶이 하찮았다고?"
"어디 무당만이 귀할까. 산의 약초꾼도 기슭은 농부도 모두 귀한 이들이다. 그러니, 되레 우리 모두가 하찮은 것도 같은 도리다."
"어디서 궤변 따위를!!"
막천강은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무당만을 위했던 사람이다.
무당을 위해서라면 몇 명이 죽고 몇 명이 다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마도에 빠진 거다. 분명해!’
그게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모든 내공을 동원해서 태극검의 정수를 뽑아냈다.
"이게 대 무당의 검이다!"
검극이 태극의 형상을 취하며 사방 공간을 뒤덮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검의 빗줄기.
바닥에서 치솟는 검의 기둥.
양의 양검(陽劍)과 음의 음검(陰劍)의 합치였다.
맞물린 기운 속에서는 무엇도 벗어날 수 없는 치밀함이 느껴졌다.
"아우야. 이것이 내 답이다."
막천우는 손끝을 모아 눈앞으로 두었다.
그리고 사방을 덮은 태극의 기운을 향해서 뻗었다.
기가 움직이니 세상에 그것에 동한다.
의지를 받은 검은 한 줄기 빛이 되어 태극의 중심을 꿰뚫었다.
음도 양도.
세상을 위시하던 태극도 한 점으로 흩어졌다.
시작한 점이 있다면 끝나는 점도 존재하는.
아주 당연한 이치였다.
"태극검의······음양합일검이 일수에 파훼 됐다고?"
"기라는 건 형(形)에 구속받는 존재가 아니다. 태극이라는 것도 결국 음과 양이라는 이치를 단순화시킨 형에 불과한 것이지."
"있을 수 없······큭!"
다시금 부정을 위해 몸을 움직이던 막천강이 주저앉았다.
사지에 못이라도 박힌 듯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름 붙이기를 혼원일기(混原一氣)라 한다. 네 태극을 파하며 기에도 상처를 입혔다. 섣불리 움직이면 회복하지 못할 터이니 그대로 앉아 있거라."
"우, 웃기지 마! 내 내공은 무려 7갑자에 달한다! 고작 일수 따위에 상처 입지 않아!"
극성에 이른 태청강기다.
단전이 꿰뚫리지 않는 이상 노도와 같은 기운은 멈추지 않을 거라고 자신했다.
허풍일 뿐이다.
그리 여기며 기운을 끌어 올렸다.
"쿨럭―!"
하지만 채 소주천을 이루기도 전.
내기가 역행하여 심맥을 건드렸다.
십수 년 만에 입는 내상이었다.
"······말하지 않았느냐. 더 움직이면 기만 상할 뿐이다. 자연치유를 기다려라. 수일이면 정상으로 돌아갈 테니까."
"쿨럭! 쿨럭! 고작 이런 상처로······커억!"
"그만. 그만해라. 이 정도면 되었다."
막천우가 낼 수 있는 최선의 수였다.
동생을 베지 않으며 딸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길.
"이렇게 또 도망가는 겁니까?"
하지만 명한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자네는······그분의 아이인가?"
"소백입니다. 막 대협의 따님분과 동행하여 여기까지 온 사람이죠."
"나를 자극한 것도 자네였지. 대체 우리 이야기는 어디에서 들은 건가?"
"지금 그런 걸 물어볼 때입니까? 저기 저 막 문주는 그대로 둘 겁니까?"
명한은 턱짓으로 막천강을 가리켰다.
창백한 얼굴에 입에서는 피를 토하고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여전히 살벌했다.
굴복한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다.
"어쩌겠나.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는 한들 내 혈육이네. 이리 무마하는 것이 최선이겠지."
"막 대협. 막 대협은 여전히 겁쟁이네요."
"자네, 말을 삼가게."
"아뇨. 할 말은 해야겠습니다. 막 대협은 여전히 그날에 갇혀 계십니다.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셨어요. 이리 흐지부지 도망치는 것이 최선입니까?"
"제대로 알지 못 하는 일은 떠드는 것이 아니네."
"그 말을 여기 있는 소소에게도 한 번 해보시죠."
명한이 은소소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막천우가 등장하고 지금까지 두 사람은 제대로 눈 한번 마주친 적이 없었다.
맞물리는 눈동자에 당혹감이 서렸다.
"소소야······"
"잠깐! 아무 말도 하지 마. 듣고 싶지 않아."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은소소가 크게 반응했다.
무어라 형언하기 어려운 표정이었다.
"대체 뭐야. 당신이라는 사람은······뭘 원하는 거야? 어머니를 사랑했다면서 지키지 못하고, 그 원수가 눈앞에 있으면서도 놔주겠다는 거야?"
"소소야. 천강은 내 아우다. 과거의 원한은······"
"원한은 뭐? 놔주라고? 그럴 거면 대체 여기에서 뭘 하는 거야? 미련이 남아서 떠도는 귀신이야?"
"······"
막천우가 입술을 깨물며 답하지 못했다.
"이제 알겠습니까, 막 대협? 당신의 따님께서도 당신을 그날의 모습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을."
"대체 뭘 말하고 싶은 겐가? 내가 내 아우를 직접 베기라도 해야 마음이 풀리겠나?"
"그럴 용기는 있습니까? 소소의 어머니를 구하고자 했다면 끝까지 맞서야 했습니다. 힘이 부족하여 할 수 없었다면 적어도 소소는 당신이 책임을 졌어야죠."
"나는······"
"무당의 죄악이 비쳐서 그럴 수 없었다? 그럼 대체 여기서 은영영은 왜 지켜봤던 겁니까? 구하지도 못하고 그저 암동에 남은 걸 바라보면서. 뒤처리해주면 누가 감사패라도 줄 거 같았습니까?"
명한은 독한 말투로 쏘아붙였다.
막천우는 막천강에 대비되어 ‘선’으로 구축된 인물.
경지의 고하와 상관없이 ‘선’자체에 매몰된 성격이다.
그만큼 무엇 하나 단호하지 못하다.
"사건을 일으킨 원흉이면 죽이든가. 그게 아니라면 암동에서 은영영을 구해서 정신이라도 차리게 했어야 옳습니다. 먼발치에서 지켜만 보는 건 그저 자기 위로 아닙니까?"
"그만하게. 소소의 친우라 하여 참는 것도 한계가 있네."
"참지 말아 보시죠. 당신에게 그럴 용기가 있는지 지켜보게."
명한은 되레 한 걸음 다가가며 도발적으로 말했다.
막천우의 성격은 그 자신이 설정한 것.
지독할 정도로 고집스럽고 답답하다.
‘이걸 깨려면 어지간한 말로는 안 돼.’
막천강이 여기서 살아 돌아가면 훗날 막천군과 함께 소백을 막는 주적이 되고 만다.
기회가 있을 때 잘라내야만 한다.
"그것 보십시오. 막 대협은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을 뿐입니다. 무당의 자랑스러운 검. 아우를 사랑하는 형님. 정의로운 집행자. 하지만 무엇 하나 제대로 이룬 것은 없습니다."
"아닐 말일세. 나는 무당 밖에서 새로운 검을······"
"검의 경지가 한 아이의 인생을 채워주지는 못합니다. 당신이 외면했던 소소처럼."
"······!"
막천우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떨렸다.
어떻게 외면할까.
현경에 이른 경지, 이기어검이라는 천하의 절예.
고강한 무공으로 포장을 하려 해도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자신은 무당의 변절자, 딸을 지키지 못한 부모, 징죄하지 못하는 겁쟁이에 불과했다.
목소리마저 떨렸다.
"그럼, 대체 내가 뭘 어찌해야 하는 건가?"
"정하세요. 당신이 아끼고 사랑해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를. 지켜줘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를. 갚아야 할 빚이 어디에 있는지를."
"그리 잔인한 선택밖에는 없는 건가?"
"어느 한쪽은 이 고리를 끊어야 합니다. 막 대협이 아니라면, 막 대협의 아우님이 그러하겠죠. 언젠가, 어느 때에. 따님분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으로."
막천우의 눈동자가 은소소와 막천강을 오고 갔다.
한 점의 망설임도 없이 은수연을 베던 모습.
조카인 은소소도, 자신을 도운 은영영도 모조리 죽이려한 태도.
바뀔 수 있을까?
아니.
안된다는 건 다른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안다.
"하지만······"
동생이다.
자신의 친혈육을 어떻게 벨 수 있을까.
막천우의 손이 풍이라도 맞은 듯 벌벌 떨렸다.
천하의 고수라도 선택하기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이래도 안 먹힌다는 건가.’
이 모습에 명한이 입술을 씹었다.
할 수 있는 한으로 몰아붙였음에도 꺾이지 않았다.
정말 지독할 정도로 답답한 인간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극단적인 방법이라도 써야 하나?’
어쩌면 비인간적인 방법.
명한이 품안 의 마지막 수단을 만지작거렸다.
"당신이 아니라면 내가 해. 어머니의 원수."
그 순간.
말없이 물러나 있던 은소소가 나섰다.
명한도 예상하지 못한 움직임이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아버지, 막천강은 둘째 치더라도 막천우가 원수라는 건 변함없는 사실.
평소라면 엄두도 못 낼 고수지만 지금은 아니다.
검에 내기를 두르고 빛살과 같이 휘둘렀다.
카앙―!
이를 막아서는 건 갈등하던 막천우.
반 박자 늦게 검을 휘둘러도 도달하는 건 같았다.
은소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막지 마! 어머니의 원수를 갚기 위함이다!"
"소소야······"
"비켜!! 네게는 핏줄일지 모르지만, 내게는 어머니를 앗아간 원수일 뿐이라고! 평생을 쫓았어! 어딘가 어머니가 살아계신 건 아닐까 하고! 근데, 고작 저런 놈에게 죽어버렸어! 막는다면 너도 내 원수일 뿐이야!"
처절한 외침에 막천우의 눈빛이 흔들렸다.
은소소가 이렇게까지 괴로워했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난······"
갈등이 떨리는 목소리로 새어 나왔다.
그리고 그 순간.
‘······약향?’
명한은 코끝을 스치는 묘한 냄새를 맡았다.
어디선가 한 번 맡아본 것 같은 냄새였다.
"······적수!"
"전부 네 년들 혈통 탓이다! 전부 이 빌어먹을 무상은가 때문이라고!"
깨닫는 것과 동시에 막천강이 튀어 올랐다.
적수는 쓰기 까다로운 약재이나 배합만 잘 하면 매우 강력한 효과를 낼 수 있다.
몸을 보호하고 내기를 올리기도 하고······
‘순간적으로 내공을 폭발시킬 수도 있어.’
일시적으로 내상을 불식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죽어라, 이 빌어먹을 무상은가의 요녀!!"
막천강이 노린 건 막천우가 아니었다.
그가 노린 건 무방비하게 놓인 은소소.
어마어마한 검기 다발이 쏟아졌다.
"크윽!"
다급함에 반응한 건 막천우보다 명한이었다.
적수의 냄새를 맡는 순간부터 이미 봉을 쥐고 있었다.
오죽타구봉이 우산이 되어 은소소 앞에 막을 쳤다.
타타타탕. 타탕.
쉼 없이 부딪치는 검기 다발.
부러지지 않는다, 라는 오죽타구봉의 특성상 받아칠 수는 있었으나 충격은 도리가 없었다.
명한의 몸이 연신 뒤로 밀려났다.
"그만둬, 천강!"
"하하하하! 하하하!! 저 요녀를 죽이면 됩니다, 형님! 저 핏줄이 우리 무당을 더럽히고 있을 뿐입니다!"
"천강!!"
적수의 전형적인 부작용이었다.
내기를 폭발시킨 바람에 기운이 머리까지 뻗쳤다.
지금의 막천강은 광기에 휩싸인 미치광이와 다름없었다.
화경 끝자락에 오른 미치광이.
"그만. 그만!! 제발 그만둬, 천강!"
절절하게 외치며 검기를 걷어냈지만, 그뿐이었다.
한 번 뻗기 시작한 광기는 멈출 수 없었다.
7갑자라 자랑한 막천강의 내공이 모두 바닥이 날 때까지 폭주해서 날뛸 뿐.
설득이나 제압의 영역을 이미 넘어서 있었다.
"아악―!!"
스치는 검기와 터져 나오는 은소소의 비명.
제아무리 막천우가 고수라도 사방에서 쏟아지는 검기를 전부 걷어낼 수는 없었다.
유일한 방법이라면 시전자를 침묵시키는 것.
혼원일기를 통한 일격뿐이었다.
하지만 혼원일기를 다시금 막천강에게 쓴다는 건 그의 목숨을 걷어내겠다는 말과 같았다.
사랑하는 아우와 사랑하는 딸 사이.
갈림길에서 막천우가 망설였다.
"젠장, 막천우! 한 번이라고 아버지 노릇을 하란 말입니다!"
"······!"
그때였다.
힘을 쥐어짜 검기를 튕긴 명한이 소리쳤다.
심장을 뚫고 들어오는 소리였다.
"또다시 눈앞에서 놓칠 생각입니까!? 아버지가 되세요, 막천우!"
"······아버지."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 추를 한쪽으로 기울게 했다.
아버지라는 단어.
평생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일.
막천우가 검을 허공에 띄운 뒤, 혼원일기의 기운을 불러왔다.
"미안하다, 아우야."
쏟아지는 검우(劍雨) 사이를 낡은 검이 가로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