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당제일검
안개처럼 절벽이 흩어지고 그 사이로 길이 나타났다.
마치 마법과 같은 장면이었다.
하지만 신비에 감탄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일행은 열린 길로 걸음을 서둘렀다.
"······여긴?"
그리고 몇 분을 달려 올라간 길의 끝.
천 길 낭떠러지가 일행의 눈앞에 나타났다.
바닥이 안 보일 정도로 아득한 높이였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여기가 응봉이야. 숨겨진 길. 그리고 누구도 찾지 않는 은밀한 장소. 은어로 숨겨둔 거였지."
"숨겨? 누구에게? 왜?"
"저 나무를 봐. 가면 답이 있을 거다."
응봉이라 불린 벼랑 끝 언덕.
커다란 버드나무 하나가 치렁치렁 가지를 늘인 채 세월을 자랑하고 있었다.
은소소는 대꾸 없이 나무 앞으로 걸어갔다.
"······이곳 응봉에서. 백년해로를 약속하다."
나무에 새겨진 글귀를 더듬으며 중얼거렸다.
세월에 깎여 나갔으나 지워지지 않은 마음이었다.
은소소의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새긴 글귀인가?"
"그래. 네 아버지 막천우와 네 어머니······은수연의 약속이다. 한때, 연인이었던. 미래를 약속했던 이들의 흔적이지."
"아버지는 무당파. 어머니는 이곳 귀문의 사람이었다는 거지?"
"내가 알기로는."
은소소의 손끝이 벌벌 떨렸다.
희미하게 남은 어머니의 기억을 쫓기를 수년.
그 어떤 가정과 상상 속에서도 이런 장면은 존재하지 않았다.
"말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나도 완전한 건 아니야. 추측과······"
"말해! 그냥 말하라고."
"그래. 알았어."
어떻게 알았는지 설명은 필요 없었다.
명한이 그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말하기 시작했다.
"무당파와 귀문은 지리적으로 가깝고 예로부터 하는 일도 흡사했어. 교류도 많은 편이었지."
"도사와 귀문가라 이건가."
"그렇지. 다만, 그건 무당파가 명성을 얻고 난 뒤로는 싹 사라졌어. 귀문의 은밀함이 정파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었지."
"······고지식한 정파."
고지식함이 쳐 놓은 벽.
아마 그게 시작이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네 어머니와 아버지가 만나게 됐어. 한 명은 무당의 장문제자. 다른 한 명은 귀문의 후계자였어. 어떤 상황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겠지?"
"숨겨야 했겠네."
"맞아. 막천우는 자신의 동생인 막천강에게만. 네 어머니 은수연은 동생 은영영에게만 비밀을 터놓고 남들 모르게 만남을 가졌어."
"이곳, 응봉에서."
명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나 언제나처럼 사람의 마음에서 시작했어."
"······설마 이모님이 무슨 짓을 저지른 거냐?"
"맞아. 네 이모 은영영은 남몰래 막천우를 사랑했어. 질투심에 속앓이하면서도 겉으로는 둘의 사랑을 돕는 역할을 했지."
"미련한 사람. 대체 왜 그런 건데."
"그만큼 네 어머니를 사랑하기도 했으니까. 한 사람이 개입하지만 않았어도 그대로 묻혔을 마음일지도 몰라."
"막천강?"
"그래. 그는 오래전부터 귀문의 보물을 탐내왔어. 무상은가의 절대지보."
명한이 가슴팍을 툭툭 두드렸다.
제갈가 비고에서 빼돌린 악보였다.
"하지만 귀문은 이런 험지에 몸을 숨기고 자신을 방어해 왔어. 일반적으로는 공략이 불가능했지. 그렇기에 막천강은 아주 약은 수를 냈어."
"이모님을 이용했구나."
"그녀에게 속삭였지. 아주 작은 흠집 하나만 낼 수 있다면 네 어머니의 직위를 박탈할 수 있다고. 그리하면 막천우의 마음도 돌아설 거라고."
"그 지위가 백은이구나. 그래서 내 기억에 백은과 응봉이 남아 있었던 거야."
은소소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뒤는? 막천우가 귀문을 공격한 거냐?"
"잔인한 일이었지. 자신과 뜻 맞는 이들을 모아서 귀문을 도륙하고 보물을 빼돌렸어. 사실상 멸문지화였지."
"당당한 정파라는 것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무당파에서는 이를 두고만 본 거냐?"
"보물이잖아. 당시 장문인은 욕심은 많은 인간이었어. 고지식한 막천우만 빼놓고 일을 진행했지."
"빌어먹을!"
은소소가 거칠게 분노했다.
항상 정파라고 으스대는 놈들의 위선이 역겨웠다.
"그 뒤는 일사천리였어. 무당파는 귀문을 사파로 몰고 그들의 행적을 덮어버리려 했지. 남은 모든 흔적과 함께."
"어머니와 이모님."
"그래. 남겨서 좋을 것 없는 치부였지. 막천강이 직접 움직여서 네 어머니를 먼저 죽이려 했어."
"쓰레기 같은 인간!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그에게는 무당파를 제외하면 전부 밟고 지나갈 발판에 불과했으니까. 하지만······같은 배에서 나온 그의 쌍둥이 형은 달랐어."
같은 얼굴에 전혀 다른 성격.
막천강이 철저한 악이라면 막천우는 철저한 선으로 구성된 인물이었다.
"직접 검을 들고 사문에 맞섰어. 장문제자의 직위까지 버리면서 자신이 사랑하던 여인과······그 자식을 지키려고 했지."
"그때 이미?"
"응. 그때는 이미 네 어머니, 은수연이 널 낳은 상태였지. 그렇기에 상황은 더욱 치열하고 처절하게 돌아간 거야."
"무당은 절대로 용인하지 않았구나."
"사파에서 나온 핏줄이라 여겼으니까. 절대적인 치욕이라고 생각한 거야. 모든 무당의 전력이 동원되어 막천우를 쳤어. 그 과정에서 네 어머니는 죽게 된 거야."
"······"
할 말조차 없었다.
어디부터 부정해야 할까.
은소소는 버드나무를 짚으며 주저앉았다.
"나는. 그럼 나는 어떻게 살아있는 거지?"
"짐작하고 있지 않아? 천마의 덕이야."
"그가······날 구했다는 거야?"
"세상은 모르지만, 천마와 막천우는 친구 사이야. 나이와 소속을 떠나서 우정을 나눈 사이지. 모든 비밀을 알았을 때, 막천우가 기댈 수 있는 건 천마밖에는 없었어."
막천우는 정의롭고 자유분방한 사람이었다.
사파에 가까운 귀문의 은수연을 사랑했던 것만 봐도 그의 성격을 알 수 있다.
천마가 인정한 정파의 몇 안 되는 호걸.
하지만 그런 그조차 견디지 못한 일은 존재했다.
"막천우. 그가 내 아버지라면 어째서 사라졌지? 날 핏줄이라 여겼으면 지켜야 하는 것 아닌가?"
"네 이모, 은영영은 그날의 일로 미쳤어. 네 아버지 막천우도 비슷했지. 그는 차마 널 바라볼 수 없었을 거야. 너무나 지독한 기억과······자신이 부정해야 할 무당의 더러움만이 보였을 테니까."
"하지만 그래도 자식이잖아. 핏줄이잖아! 어머니를 생각했다면 날 찾았어야지······!"
"그럴 수 없는 이유가 또 있긴 했어. 알잖아. 네 이모, 은영영."
"아. 막천강이 그녀를 죽일 수 없다는 이유가?"
"그래. 멀지만 가까운 곳에서 항상 지켜보고 있었던 거야. 은영영이 암동을 탈출하여 약초꾼들을 잡아가고 빈 바구니를 너로 착각해서 날뛸 때도. 그가 뒤처리했었어."
막천우 역시 은영영이 자신을 사랑해서 그런 짓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렇기에 그 책임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죄책감과 후회.
속죄의 굴레에서.
"잠깐만. 그럼 네가 이곳에 온 이유가······"
"잘도 도망쳤구나, 쥐새끼들."
은소소가 사실을 깨닫고 고개를 드는 순간.
응봉을 가리던 안개가 갈라지며 막천강이 나타났다.
손에는 피투성이가 된 은영영의 머리채를 쥐고.
"더는 숨을 곳도 도망칠 곳도 없다."
저벅저벅 다가오는 막천강.
은영영이 당한 마당에 명한 등이 상대할 재간은 없었다.
그야말로 벼랑 끝에 몰린 상황.
"이 마당에도 지켜만 볼 셈입니까? 그렇게 두렵나요? 자신의 과거를 직시하는 것이?"
"음? 뭐라는 거냐?"
"한때 당신이 사랑하던 여인의 딸이 이곳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딸을 죽이려는 남자가 눈앞에 있습니다. 언제까지 현실을 외면하는 겁쟁이가 될 겁니까."
"너······무슨 속셈이냐?"
막천강의 걸음이 빨라졌다.
무언가 묘한 기색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나오세요, 막천우!"
하지만 그 불안이 현실로 바뀌는 것이 먼저였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벼락과도 같이.
땅에서 솟아나는 그림자와도 같이.
하얗게 샌 머리카락의 중년인이 막천우와 은소소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형님?"
"오랜만이구나, 아우야."
막천우.
무당제일검의 등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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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고뇌에 잠긴 눈이었다.
막천강을 바라보는 막천우의 시선 속에는 지독할 만큼의 고뇌가 서려 있었다.
한때, 자신이 사랑하던 여인을 죽인 인간.
하지만 한 배에서 난, 사랑하는 쌍둥이 동생.
이율배반적인 감정이 끝없이 충돌하고 있었다.
"정말······형님이십니까?"
"머리가 하얗게 셌다고 몰라보는 거냐?"
"어떻게. 아니, 어째서 이곳에 있는 겁니까?"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겠지."
떠나지도 다가가지도 못하는 처지.
하얗게 센 막천우의 머리카락은 깊은 고뇌의 증거였다.
"형님은 여전하군요. 예전처럼······우유부단합니다."
"천강아."
"그리 부르지 마십시오. 장문제자의 직위도 버리고, 무당파의 위광마저 저버린 사람에게 친근하게 불리고 싶지 않습니다."
"네가 날 그리 비난하는 것이냐?"
"그날, 분명히 물었습니다. 무당인지, 사파 계집인지. 형님께서는 이미 답을 하시지 않았습니까?"
"······"
흔들림을 먼저 지운 건 막천강이었다.
그는 떨림마저 멈춘 눈으로 막천우를 강하게 쏘아봤다.
"물러나십시오. 이 계집과 함께 저 둘을 처리해야 합니다. 세간에 무당에 대한 헛소문이 퍼지게 둘 수는 없으니까요."
"어째서 그렇게까지 하는 거냐, 아우야."
"그걸 몰라서 물어보시는 겁니까? 다 무당파를 위해서입니다. 대 무당의 고결함을 위해 더러움을 씻어내고 있는 거 아닙니까? 형님께서는 두려워서 하지 못한 일을, 제가! 제가 직접 말입니다!"
베일 것 같은 기세였다.
막천강은 그런 사람이었고, 한 번도 그런 사람임을 부정한 적이 없었다.
"······이번에는 아니 된다, 아우야."
그렇기에 선택을 하는 건 막천우가 돼야 했다.
죽은 연인을 위해서.
그 연인이 남기고 간 핏줄을 위해서.
"절 막겠다는 겁니까? 전 예전의 그 막천강이 아닙니다. 장문직에 오르며 모든 무당의 기예를 이어받은 몸입니다. 전처럼 형님의 뒤만 바라보는 그런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한때는 나도 그랬다. 모든 것은 무당을 위하여. 무당만이 진리이며 무당의 힘이 전부라 여겼지."
"형님."
"하지만 아니다. 하늘 위에 하늘이 있고, 세상 밖에도 세상은 있다. 오늘 이곳에서 널 막겠다, 아우야."
"형님―!!"
무당을 부정하는 말.
막천강의 몸에서 아득할 정도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바닥이 수수깡처럼 부서지고 지독한 경기(硬氣)에 사물이 일그러졌다.
극성에 이른 태청강기였다.
"무당의 푸르름은 그 색에 있지 않다."
이에 막천우는 허리춤에서 낡은 검 한 자루를 뽑아 들었다.
날이 다 삭은, 볼품없는 검이었다.
하지만 그의 검이 막천강의 태청강기에 맞서기 시작했을 때.
검은 더이상 볼품없지 않았다.
"옳고 그름에 경계는 없으니."
검극을 타고 번지는 회색의 기류.
태청강기의 올곧음을 비틀고 그 강맹함을 뒤집었다.
"나는 이를 혼태극(混太極)이라 부른다."
소리 없이 무너지는 태청강기.
사위를 짓누르던 강맹함이 바람 앞의 먼지처럼 사라졌다.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안에서는 볼 수 없으나, 밖에서는 볼 수 있는 진실. 무당만이 세상의 중심은 아니다, 아우야."
"천마. 천마에게서 한자락 기예라도 배운 겁니까?"
"그는 상관없는 일이다."
"아니면 무엇입니까, 형님! 무당의 장문제자였던 사람이 문외의 것을 논하다니!"
분개한 막천강이 아예 몸으로 달려들었다.
수십, 수백으로 갈라져서 방위를 짓누르는 태극혜검이었다.
유성우와 같이 쏟아졌다.
‘네 검은 전과 같구나.’ 하지만 막천우는 한 점의 동요조차 보이지 않았다.
낡은 검을 좌에서 우로 한 번 그었을 뿐이다.
수십 수백의 검이라도 쥐고 있는 손은 단 하나.
태극혜검의 요체를 일검으로 잘라버렸다.
"웃기지 마!"
막천강은 억지로 힘을 주어 검극을 튕겼다.
태극혜검의 요체는 무너졌지만, 검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묵직한 강검이 벼락같이 이어졌다.
무당파의 장문인 다운 솜씨였다.
"힘 줄 때의 버릇은 여전하구나."
다만, 상대가 안 좋았을 뿐이다.
막천우는 빗물을 받아내는 바다처럼, 막천강의 강검을 부드럽게 흘렸다.
극성에 이른 태극검.
굉음과 함께 두 사람의 옆, 절벽이 뭉텅 잘려나갔다.
"이제 와서 태극검이라니. 부끄럽지도 않은 겁니까, 형님?"
"나고 자라고 배우고 익힌 것들. 어찌 다 잊을 수 있겠느냐. 한때 무당은 내 모든 것이었고, 뿌리였다. 하지만 그 무당이 옳지 않다면. 그렇다면······나는 검을 들어 태극을 배어야 옳다."
"무당이야 말로 정의입니다!"
"아니. 세상에 오롯한 정의는 없다."
막천우의 시선이 뒤편을 스쳤다.
초조하게 바라보고 있는 은소소였다.
그녀를 앞에 둔 채 무당을 정의라 할 수 있을까.
‘오래전에 이리 해야 했어.’
뒤늦게 나선 것이 부끄러울 뿐이다.
"내가 바라는 건 그저 작은······평안이다."
허공으로 떠오르는 막천우의 검.
"이기어검(理氣御劍)!?"
지고의 경지.
그 현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