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화 (39/235)

진실이라는 늪

막천강은 이곳에 나타나서는 안 될 인물이었다.

소백의 라이벌격인 막군천과 마찬가지로, 한참 뒤에나 앞길을 막아서는 역할.

게다가 지금은 면벽에 들어가 있어야 정상이다.

가속화된 사건을 고려해도 지금 등장하는 건 전혀 예상범주 안에 있지 않았다.

명한은 당황을 감추기 위해 애를 썼다.

"답해라. 본문의 아이들을 진에 가둔 것도 너희의 수작이겠지?"

"······이거, 놀라운 일이군요. 무당의 장문께서 직접 모습을 드러내다니요."

"날 알고 있다면 거짓은 입에 담지 않아야 할 것이다. 노부의 검에는 정이 없으니까."

서슬 퍼런 기세로 검을 꺼냈다.

검왕의 애검, 묵오검(墨汚劍)이었다.

오래전 주검산장에서 주조했다고 전해지는 천하 3대 보검 중 하나였다.

명한이 두려움을 누르며 침착하게 대응했다.

"무림의 대선배께서 저희 같은 초출들을 검으로 위협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요?"

"어설픈 변명은 그만둬라. 무림의 초출이 화경의 고수와 맞서서 싸울 수 있는 건 아니다. 게다가 그쪽 계집의 검은······천마의 것이더군."

"······"

천마응출까지 봤으면 변명은 무용지물이다.

명한의 입술이 바짝 말랐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든 말로 해결이 되지만······’

눈앞의 검왕, 막천강은 불가능하다.

냉정하기가 극지의 얼음보다 더하다 하여, 검왕의 별호를 받기 전에는 냉검(冷劍)이라 불렸었다.

"막······가가?"

순간. 어딘가 기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명한에게 제압당해 앉아 있던 은영영의 목소리였다.

흔들리는 눈동자와 떨리는 입매.

무언가 크게 당황한 표정이었다.

"불쾌하다. 사파의 계집 따위가 감히 어디라고 그따위 말을 올리는가."

"막 가가? 정말 막 가가인가요?"

"네년을 진즉에 죽였어야 했다."

"은소소, 앞을 막아!"

출수는 그야말로 빛과 같았다.

막천강의 손에서 뽑혀 나온 검이 십 수 족장을 가로질러 은영영의 가슴팍을 베었다.

은소소의 검막은 종잇장처럼 찢긴 후.

피를 쏟아내며 은영영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이게 무슨 짓이냐!?"

"끼어들지 마라, 신교의 계집. 그의 얼굴을 봐서 목숨은 살려 둘 테니, 물러나라."

발끈한 은소소가 검을 날렸지만, 막천강은 손짓 하나로 튕겨냈다.

어른과 아이 수준의 격차.

삼왕급 고수가 제대로 힘을 쓰면 싸움 따위는 성립되지 않았다.

"그럼 마저 답해라. 네놈은 누구인데 저 저주받은 계집의 이야기를 알고 있지? 귀문과 관계가 있나?"

"······"

별일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묻는 막천강.

명한이 피를 흘리며 주저앉은 은영영과 구석에 처박힌 은소소를 번갈아 바라봤다.

‘모든 수를 다 쓰면 가능할까?’

무공, 독, 밖에서 대기하는 성성이나 쌍각사.

‘아니. 불가능해.’

하지만 그 어떤 수로도 견적이 나오지 않았다.

그만큼 삼왕의 경지라는 것은 아득한 수준이었다.

아래에서 숫자를 모아 상대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수를 틀어야 한다.

"귀문의 보물을 탐하여 이곳에 왔을 뿐. 귀문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습니다."

"그걸 믿으라는 건가? 저 계집의 이름을 외부의 인사가 알고 있다?"

"무상은가의 악보. 제갈가가 보관하고 있더군요."

품 안에서 꺼내 흔드는 건 무상악보.

처음으로 막천강의 눈빛이 달라졌다.

"네놈이 제갈가를 공격한 자였구나."

"서로 이득을 두고 다투다 보니 그리했을 뿐. 개인적인 감정은 아니었습니다. 아니, 개인적이면 검왕께서 더하지 않습니까? 왜, 무상악보가 제갈가에 있었을까요?"

"······"

무상은가. 귀문에서 보관하고 있었어야 할 악보.

제갈가의 비고에서 발견된 건 우연이 아니다.

"제갈가와 무당의 일부가 귀문을 공격해서 보물을 빼돌린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갈가가 한 번 더 뒤통수를 쳐서 무상악보를 빼돌릴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겠죠."

"제갈가. 허명만 높은 그놈들은 그 악보의 가치를 알지 못한다. 단순히 협상의 도구로 빼돌렸을 뿐."

"맞습니다. 다른 보석과 마찬가지로 보관하고 있더군요."

"그래. 그것이 정상이다. 네놈처럼 악보의 가치를 아는 것이 되레 이상하지. 말해라. 넌 누구지?"

막천강의 기세가 높아졌다.

사방 공간이 그의 기운에 짓눌렸다.

숨 쉬는 것조차 버거운 그런 압력이었다.

"······은가의 마지막 후손.""뭐?"

"무당의 숨겨진 치욕이라고 하면 이해하겠습니까?"

"헛소리!"

검이 선이 되어 명한의 볼을 스쳤다.

살점을 얇게 베고, 뒤편 나무와 벽을 양단하는 절세의 검기였다.

‘태극검, 음검(陰劍)의 수.’

노린 것이 목이었다면 죽었을 것이다.

말라붙은 입술은 잘 떨어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럴수록 침착해야 한다.

명한이 떨림을 억지로 짓눌렀다.

"은영영. 그녀를 살려둔 것도 혹시나 하는 우려 때문 아니었나요? 언젠가 무당의 치욕이 살아서 돌아온다면 그녀를 통해서 잡으려고."

"닥쳐라. 대 무당에 치욕 따위는 없다. 하찮은 사파 계잡의 목숨 따위, 언제든지 벨 수 있기에 연명해 두었을 뿐이다."

"그런 말솜씨로 설득했던 겁니까?"

"뭐?"

"귀문의 진을 풀어 실책을 범하게 하면 백은의 지위를 뺏을 수 있다고. 그리하면 사랑하는 사람을 차지할 수 있다고. 그렇게 그녀를 현혹한 건가요?"

다시 한번 무시무시한 기운이 뻗어 나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명한도 피하지 않았다.

아니, 피할 이유가 없었다.

"속여? 속였다고? 막 가가가 나를?"

점혈을 풀고 상처를 회복한 은영영이 막아섰기 때문.

막천강의 검기는 대단했지만, 은소소의 검막에 한 벌 걸러졌었다.

은영영의 경지 역시 삼왕급.

상처를 회복하고 나서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떠올려라, 은영영. 누가 널 속여서 귀문을 파멸로 몰았는지를. 네 질투심을······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마음을 이용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나, 나는······"

"누가 네 언니를 죽였는지, 네 조카를 앗아갔는지 기억하란 말이다!"

"아, 아아아아아아!!!"

명한의 다그침이 불씨가 되었다.

은영영의 광기가 다시금 폭주하여 사방으로 기세를 뿜어냈다.

말하자면 광전사 상태.

"얕은수를 쓰는군. 저 계집의 힘으로 감히 대 무당의 검을 막겠다는 거냐?"

"쓸 수 있는 건 전부 써봐야지. 그래야 냉검의 냉정한 검을 피할 수 있지 않겠어?"

"너. 대체 어디까지는 아는 거냐?"

"네가 형제조차 베어버리는 냉정한 인간이라는 것 정도."

"······!"

순간적으로 흔들리는 막천강의 눈동자.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은영영이 포탄처럼 튀어나갔다.

본능만 남은 상황에서 자신에게 가장 위협적인 적이 누구인지, 그리고 어떤 기회가 있는지를 빠르게 파악한 것이다.

콰르르르릉―!

삼왕급 고수가 충돌했다.

"은소소, 정신 챙겨. 일단 튄다."

"크, 크윽. 소백······"

"설명은 나중에. 일단은 벗어나야 한다."

그 사이 명한은 부상 입은 은소소를 부축.

향아와 함께 마을 안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은영영은 절대로 막천강을 못 이겨.’

시간을 끄는 것이 전부.

"응봉으로 간다."

타개책이 필요했다.

#

명한이 향한 곳은 마을 뒤편의 절벽이었다.

고개를 들고 올려다봐도 끝이 안 보일 정도의 높이였다.

"여기 막혔어. 아무리 경공이 빼어나도 이걸 올라가는 건 무리야."

"나도 알아."

애초에 귀문은 거대한 분지 안에 자리한 마을이다.

입구를 진법으로 막고 나머지는 자연적인 벽으로 차단한 형태였다.

백이 오든 천이 오든 입구만 막으면 난공불락.

그렇기에 과거의 침략자들은 내부의 공조자를 사용했었다.

‘······하지만 이게 전부는 아니야.’

정말로 극소수만이 아는 길이 하나 있다.

"은소소. 전에 네가 내게 요구한 정보. 기억하고 있어?"

"그래. 잊을 리가 없지. 백은과 응봉. 지금이라도 답할 생각이 든 거냐?"

"백은은 지위. 응봉은 지형이라고 했어."

"아는 걸 반복해서 말하지 마. 내가 원하는 건 모르는 내용이야."

은소소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명한이 무언가를 감추고 있다는 건 이미 아는 사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 정도가 너무 심했다.

"이 길이 바로 응봉이다."

"······뭐?"

불쑥 던진 말.

"이 절벽 길이 응봉이라고. 과거, 소수의 사람만이 이용하던 길을 특수한 진법으로 가려 둔 거야."

"그걸 네가······아니, 그게 어떤 의미인 거지?"

"응봉을 여는 조건은 혈육. 즉, 너야 은소소."

"장난치지 마라, 소백."

"장난이 아니야. 너도 어느 정도 의심은 하고 있었잖아. 귀문. 무상은가. 바로 네 본가가 이곳이다."

잘근.

피가 배어 나올 정도로 은소소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뭔가 이상했다는 건 스스로도 인정한다.

묘한 느낌의 광인과 어딘가 이상한 감정을 불러오는 마을의 모습.

하지만 본가라니.

덜컥 믿기에는 너무 과한 이야기였다.

"······그럼 저 광인은? 은영영이면 같은 가문 사람 아닌가?"

"내 생각이 맞는다면 그녀가 네 이모일 거다."

"이모······? 어머니의 자매라고?"

"그래. 널 보며 언니라고 비명 지른 거 기억나지? 네 얼굴에서 어머니의 모습을 본 거야."

"그, 그럼 그녀를 구해야 하잖아!"

"기다려!"

튕겨 나가려는 은소소를 명한이 낚아챘다.

"놔! 어머니의 동생이라면 저렇게 놔둘 수 없어! 그녀 입으로 들어야 할 이야기가 산더미라고!"

"멍청아, 가면 우리 둘 다 죽고 말아. 검왕, 막천강은 우리가 힘을 모은다고 이길 상대가 아니야."

"그러니까 더 구해야지! 이대로 두면 죽는다고!"

"안 죽어. 막천강은 절대로 그녀를 죽일 수 없어. 그녀를 죽이면 분노할 사람이 있거든."

"······분노할 사람?"

명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뒤의 이야기는 조금 상황이 진정된 뒤 하려던 말.

하지만 지금은 경우를 다질 때가 아니었다.

"무당제일검이자 전대 장문제자. 막천강의 사형 되는 인물. 그리고······네 부친인 사람이다."

"무슨.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천마궁에서는 혼자의 힘으로 살 수 없어. 높은 순번으로 올라갈수록 그런 경향은 더욱 짙어지지. 하지만 유독 이례적인 경우가 하나 있어. 너도 알지?"

"그게 나라는 거냐? 난······"

"뛰어난 재능으로 천마의 무공을 사사받은 천재. 맞아. 넌 분명 천재야. 하지만 천마궁의 소궁주들 중에 정말 너만 한 사람이 없을까?"

사십팔 궁 소백을 제외하더라도 독자노선은 여럿이다.

개중 은소소에 비견할 만한 사람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누구도 은소소 만큼의 권위는 얻지 못했다.

"설마, 천마가 날 뒤에서 봐주었다는 거냐?"

"확실한 건 아니야. 하지만 네 위치가 천마궁 내에서도 독보적인 건 사실이지. 만약, 내 추론이 맞는다면 누군가 널 천마에게 맡겼다는 뜻이 돼."

"소백―!"

은소소가 명한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알고 싶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런 건 아니었다.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매스꺼웠다.

"선택지를 줄게. 정말 알고 싶다면 응봉을 향해서 네 피를 떨어뜨려. 그게 아니면 그냥 천마의 자식으로 돌아가. 검왕이라도 널 죽이지는 못할 테니까."

"너 정말······"

"이런 식으로 알게 해서 미안해. 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어. 검왕이 개입하는 건 예상하지 못한 일이거든."

"젠장! 빌어먹을 놈!"

잡았던 멱살을 풀며 은소소가 분개했다.

화가 나서 검이라도 휘두르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음은 스스로가 잘 안다.

"모든 일이 끝나고 따로 이야기하자."

"기꺼이."

진실이라는 늪에 발을 내디딘 이상, 물러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거대한 절벽, 응봉을 향해서 손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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