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화 (38/235)

예기치 못한 손님

자박자박.

발을 디딜 때마다 풀이 바스락거렸다.

환각이나 환상으로 치부하기에는 지나치게 현실적이었다.

바닥에 난 풀도, 폐허에 가까운 건물도.

"한때, 사람이 살았던 곳이라 이거지?"

"귀문은 정사중간의 문파였어. 사실 문파라고 하기도 힘들지. 인원이라고 해봐야 열을 넘지 않았으니까."

"근데 왜 지금은 이런 꼴이 된 거야?"

"욕심 때문이지."

명한이 부서질 듯 위태로운 벽을 훑었다.

오랫동안 사람 손길이 닿지 않은 듯, 뿌연 먼지가 묻어나왔다.

"귀문에는 천하인들이 탐내는 보물이 있었어. 멸문 전까지는 스스로를 가둬 이를 보호했으나, 한 번의 실수로 모든 것이 틀어졌지."

"실수? 무슨 실수?"

"말했다시피 욕심. 굳이 덧붙이지만 사람을 믿은 잘못이라고 해야 하나."

걷어낸 먼지 아래로 깊은 검흔이 나타났다.

벽면 전체를 다 덮고도 남을 흔적이었다.

그 기세와 강맹한 기운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소백. 내가 잘못 보고 있는 건가? 벽에 새겨진 검흔은 무당의 태극혜검이다."

"눈썰미가 좋네."

"그럼 귀문을 멸문시킨 것이 무당이라는 거냐?"

"글쎄. 흔적만으로 모든 걸 답하기는 힘들지."

"소백. 제대로 말해."

이상하게 답답한 가슴.

은소소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높이 올라갔다.

"말했잖아. 궁금한 건 직접 물어보라고."

하지만 명한은 답 대신 한 곳을 손으로 가리켰다.

마을 중앙에 위치한 커다란 사당이었다.

반쯤 무너진 문짝 뒤로, 흐릿한 그림자가 엿보였다.

앞서 추격을 피해 도망쳤던 그 광인이었다.

"······저 사람도 귀문의 인물이었다 이거군."

"머리카락을 귀신처럼 쓰는 능력은 귀문의 독문무공이지. 알아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어."

"······"

그걸 어떻게 알아보는가.

은소소는 질문이 남았지만, 일단은 무시하고 사당으로 접근했다.

물어봐도 답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다.

"시이······"

그렇게 거리가 몇 족장 안으로 좁혀졌을 때.

기척을 눈치챈 광인이 깨어났다.

어둠 속에서 눈만 붉은색으로 빛났다.

"이거 대화가 되는 상태냐?"

"지금 상태로는 무리가 좀 있지. 일단 좀 두드려서 기운을 잠재워야 할 거야."

"언제부터 그걸 대화라고 정의했지?"

"뭐, 사람 따라 다르지 않을까? 무당의 사람들이 오기까지 시간이 남아 있으니 적극적으로 해보자고."

"쯧."

마뜩잖지만 도리가 없다.

은소소가 허리춤의 검으로 손을 옮겼다.

그러자 덩달아 치솟는 광인의 기운.

솜털이 비죽 설 만큼 살기어린 기운이었다.

"향아야, 넌 기회를 봐서 사당 안의 바구니를 훔쳐와라."

"아, 아이를 말인가요?"

"아이 같은 건 없어."

"네?"

깜짝 놀란 향아의 물음에 답할 시간은 없었다.

사당의 그림자 안에서 강철같은 머리카락이 기습적으로 날아왔기 때문이다.

명한은 타구봉을 길게 세워 이를 막았다.

묵직한 충격과 함께 두 걸음 이상 몸이 밀렸다.

"전력을 다해라, 은소소. 그녀는 화경급의 고수다."

"흥. 화경이 아니라 현경이와도 광인은 두렵지 않아."

은소소의 검이 검집을 벗어났다.

은백색의 섬광이 수 개의 갈래로 뻗어 나와 사당을 통째로 베어버렸다.

우르르, 무너지는 벽에 광인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가볍고 경쾌한 경공이었다.

"품에 바구니가 없다, 소백."

"알아. 그건 향아가 해결할 테니 넌 상대에 집중해라."

"젠장. 귀신놀음이군."

그렇게나 지키려던 것이 바구니.

하지만 지금의 광인은 마치 그런 일이 없었다는 듯 움직이고 있었다.

발로 파편을 밟아 귀신처럼 몸을 띄우더니 머리카락을 사정없이 쏘아댔다.

하나하나가 철로 된 검과 같았다.

은소소는 자세를 바로 하며 이를 전부 쳐냈다.

‘무거워······’

실린 내공이 어마어마했다.

은소소의 발이 지면 깊숙이 박혔다.

"그녀의 내공은 못해도 오갑자 이상이야. 정면에서 맞서지 마."

"오······갑자? 그건 종사급이잖아!"

"실제로도 종사급이니까."

명한이 타구봉을 짚으며 몸을 허공으로 띄웠다.

은소소를 밀어붙이고 있는 광인의 옆구리 부근이었다.

튀어 오르는 탄력에 회전력을 더해서 찔렀다.

치르르르릉.

뱀처럼 휘감기는 머리카락에 마찰하는 타구봉.

잘라내거나 태워야 정상임에도 머리카락은 한 올의 상처도 없었다.

‘역시 백발귀모공(白髮鬼毛功).’

품 안의 바구니를 떼어낸 광인의 전력이었다.

"비켜라, 소백!"

그래도 그 덕에 시간은 벌었다.

은소소를 중심으로 회백색의 기운이 응축했다.

천마검 사초식 천마응출이었다.

점으로 모인 기운이 선으로, 면으로 확장했다.

그녀와 광인 사이를 잇는 회백색의 절단면이었다.

"······이걸 막아?"

하지만 광인은 이 절단면을 머리카락으로 덮었다.

한올 한올이 침처럼 날카롭게 벼려져, 면을 파서 뭉개버렸다.

검격은 먼지처럼 흩어지고 기운은 흩날렸다.

잘게 잘린 몇 올의 머리카락이 상처의 전부였다.

"빌어먹을! 그냥 화경이 아니잖아! 이건 권왕급의 고수 아니냐!"

권왕조차 진지하게 대했던 것이 천마응출.

이를 박살 내려면 권왕에 준하는 실력이 아니라면 불가능하다.

‘대체 삼왕급의 고수가 여기에 왜 있는 거냐?’

은소소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또 온다. 집중해."

남은 힘마저 모두 해소하고 광인이 움직였다.

머리카락이 뱀처럼 휘어서 명한과 은소소를 각각 노렸다.

"감기는 걸 조심해라."

"그 정도는 나도 알아!"

명한은 타구봉을 회전시켜 머리카락을 걷어내고, 은소소는 검막으로 접근을 막았다.

뭉친 머리카락이 검은 파도처럼 둘 앞에서 출렁였다.

우드득. 드득.

나뉘어 힘을 받았음에도 두 사람의 발이 조금씩 땅으로 박혀 들어갔다.

무지막지한 내공으로 인한 차이였다.

"무슨 수라도 있는 거겠지, 소백?"

검을 땅에 박으며 은소소가 소리쳤다.

버티기만 하는 건 한계가 있었다.

‘······아직 멀었냐, 향아야?’

명한은 답 대신 향아가 향한 사당 쪽만 바라봤다.

애초에 힘 싸움으로 광인을 이길 생각은 아니었다.

"도, 도련님 찾았어요!"

그때였다.

박살 난 사당 안으로 스며들었던 향아가 바구니를 찾아서 밖으로 나왔다.

"시이······?"

순간적으로 쏠리는 광인의 관심.

명한은 이를 확인한 뒤 단호하게 외쳤다.

"바구니를 부숴!"

"네?"

"부숴! 당장!"

"네, 네!!"

의아해하면서도 명령에 따르는 향아.

들고 있던 바구니를 양손으로 잡아서 뜯었다.

찢긴 바구니 파편이 먼지처럼 주변으로 날렸다.

"캬아아아아아!!!"

그리고 갑자기 괴성을 토하는 광인.

머리를 움켜쥐고는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반응 자체는 기묘했지만, 명한과 은소소는 사실을 놓치지 않았다.

이건 기회였다.

"전력이다, 은소소."

"말하지 않아도 알아!"

광인의 좌우로 나뉘어 전력을 뿜어내는 둘.

삼왕급의 고수를 제압할 유일무이한 기회였다.

폭풍이 몰아쳤다.

#

광인은 침묵했다.

아무리 권왕급 고수라도 무방비하게 얻어맞으며 견딜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중요 혈(穴)이 전부 짚여, 무력화됐다.

"미치겠군. 내공이 너무 강해. 오랫동안 잡아놓을 수는 없다."

"그렇게 오랜 시간은 필요 없어."

명한이 양팔을 걷어붙이고 광인의 앞에 앉았다.

‘광기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지.’

하나는 천마궁을 떠날 때 금 마차와 함께 가지고 나온 ‘패백’이라는 약물이었다.

몸 안에 쌓인 독기를 중화할 재료.

그리고 나머지는······

촤악.

"소백?"

"기다려."

명한 몸 안에 잠들어 있는 천폐독의 독기였다.

습작에서도 정확하게 같은 방법으로 소백은 눈앞의 여인의 광기를 잠재웠다.

사실 이건 독곡 이야기를 먼저 푼 뒤 나름의 해법을 받아와야 할 일이지만, 그냥 무시했다.

득실을 따져도 이쪽을 먼저 공략하는 게 유리했다.

"그······그으으으."

광인의 입가로 피거품이 흘러내렸다.

아주 오랫동안 백발귀모공의 여파로 쌓인 독기였다.

본래의 백발귀모공은 독을 정제하는 방식으로 내공을 순환시켜야 하는 괴공.

하지만 미쳐버린 광인에게는 무리인 일이었다.

독기가 머리까지 뻗쳐서 광기를 계속 자극했다.

명한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언제가 됐든 폭주를 한 뒤 자멸하는 것이 광인의 운명이었다.

‘그렇게 보낼 수는 없지. 원작에서는 죽었지만······’

이곳에서는 그렇게 할 생각이 없었다.

바닥에 떨어진 피가 연기를 내며 타들어 갔다.

"······여, 여기는 어디지? 너희는 누구냐?"

그렇게 시간을 보내기를 반 각.

떨어진 피가 한 그릇을 넘어서자, 광인의 눈에 서서히 초점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이제 좀 정신이 드나?"

"누구냐? 내게 무슨 짓을 한 거지? 언니는 어디에 있지? 조카는? 무슨 짓을 한 거냐!?"

쿠르르릉.

광인의 발밑이 거칠게 흔들렸다.

점혈이 찍혀 내기의 흐름이 제압당한 상태임에도 이런 반응이었다.

은소소의 얼굴이 바짝 굳었다.

"제대로 기억하는 게 없는 모양이군. 주변을 봐. 귀문은 이미 멸문당했다. 누군가 잘못된 사람을 믿은 대가로. 이래도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건가?"

"뭐? 마, 말도 안 돼. 우리 귀문이 어째서? 그럴 리 없어. 그건 불가능해."

"정신 차려. 두 눈 크게 뜨고 봐. 어째서 이런 일이 생겼는지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나?"

"그, 그만. 하지 마. 아니야. 이건 꿈이야. 꿈일 거야. 귀문이 그럴 리 없잖아."

"정신 차리라고, 은영영!!"

"허억······!"

벼락같은 호통에 광인.

아니, 은영영의 눈동자가 마구잡이로 흔들렸다.

"소백, 이건 좀 지나치다. 상태가 좋지 않은 여인인데 그렇게 호통만 쳐서야······"

은소소는 그 모습이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그녀를 괴롭히는 것이 불편했다.

"어. 어? 어어어!? 언니? 아니야.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언니가 여기에 있을 리 없잖아!?"

"······뭐?"

"꺄아아아악! 오지 마! 다가오지 마!!"

하지만 그런 그녀의 접근에 은영영은 더욱 발광했다.

마치 볼 수 없는, 봐서는 안 될 사람을 본 것 같은 반응이었다.

"제발 용서해 줘.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니야. 부탁이야. 제발, 제발. 언니가 이곳에 못 오게 해 줘. 응?"

"진정해라, 은영영. 널 헤칠 사람은 이곳에 없어."

"저, 정말? 날 지켜줄 거야? 아니지. 아니야. 그 사람도 약속했는데, 저버렸잖아. 너흰 다 거짓말쟁이인걸."

"난 아니야. 누구처럼 배신도 안 하고, 누구처럼 떠나지도 않아."

사실 이건 굉장히 잔인한 말.

하지만 당장은 필요한 말이기도 했다.

은영영의 떨림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소백.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제대로 된 설명이 있어야 할 거다."

"당장은 힘들어. 일단······"

"아니, 지금 말해야 할 거다."

"!"

마지막 말은 은소소의 것이 아니었다.

기척의 감지 범위 밖에서 훅 다가오는 한 사람.

흰 도포 자락을 펄럭이며 명한과 은소소 사이에 내려앉았다.

순식간에 퍼지는 강력한 기세.

"막천강?"

현, 무당파의 장문인.

삼왕의 일인인, 검왕이었다.

‘이거 뭔가 좀 잘못됐는데?’

그리고 명한이 예상하지 못한 불청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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