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37/235)

무상비고를 향해서

도사들의 부상을 치유하는데 시간이 제법 소요됐다.

금세 날은 저물고 주변이 어둑해졌다.

"지금이라도 추적을 재개해야 합니다, 사형."

"날이 저물었어요. 이 밤에 산길을 강행하는 건 무리입니다."

"삼 사저!"

무당의 인물 사이에서 갈등이 번졌다.

광인의 추격을 놓고 의견이 갈린 것이다.

"실례가 아니라면, 누구를 쫓고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이 틈에 명한이 끼어들었다.

청운은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이야기를 꺼냈다.

구명 받은 처지에서 숨길만 한 문제는 아니었다.

"무당산의 암동에 갇혀있던 죄인이 얼마 전에 탈출했습니다. 보다시피 무공이 고강한 인물이라 서둘러 잡아서 가둬야 하거늘······"

"무당의 암동이라. 악독한 죄인들만 갇히는 곳 아닙니까? 아까 그 괴인이 그렇게 악독한 죄인이라는 건가요?"

"흥! 그 미친 여자는 보통 죄인이 아닙니다. 무려 장문인을 암습한 죄인이라 이거에요."

"장문인을?"

명한의 놀란 얼굴에 항렬의 넷째 되는 청백이 말을 이었다.

"보통 미친 여자가 아닙니다. 감히 신성한 무당산 본전에 쳐들어와서는 장문인을 공격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어린 애들을 잡아가기까지 했다니까요."

"어린 애들을 말입니까?"

"다행히 장문 사형이 구해오기는 했지만, 보통 큰일이 아니었지요. 암동에 가두는 걸 반대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만. 사 사제. 어디까지 치부를 드러낼 셈인가."

"죄송합니다, 이 사형."

줄줄이 나오던 비사는 청운의 제지에 멈췄다.

그는 이 이야기 자체가 마뜩잖은지 불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거, 제가 결례를 범했군요. 무당의 청백은 누구보다 제가 잘 알고 있으니, 개의치 않으셔도 됩니다."

"크흠. 큼. 그리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보다 그쪽 세 분은 어인 일로 이런 산길에 오른 건지 알 수 있을까요?"

"저희야 그저 떠돌이에 불과하죠. 중원 이곳저곳을 떠돌며 한가하게 유랑하던 차에, 마을에서 귀신 이야기를 듣고 호기심이 동했지 뭡니까."

"그렇습니까······"

믿는 눈치는 아니었으나 깊이 묻진 않았다.

타구봉과 항룡이십팔장을 보았으니, 어림짐작으로 개방으로 추측하고 있을 뿐.

거의 와해 되었다고는 하지만 개방은 한때의 동맹.

청운 나름의 배려였다.

"그보다 날이 벌써 어두워졌습니다. 아무리 무당 분들께서 무공에 능하다 한들, 산짐승만큼 귀찮은 것도 없지요. 불을 피우고 이곳에서 야숙하는 편이 어떻습니까?"

"으음. 일리 있는 말씀이나, 도망친 죄인의 품 안에 아이가 있다고 생각하면······"

"그 죄인이 인육을 먹는 혈교의 무리입니까?"

"아, 아니오. 그런 괴악한 것은 아니고, 정신이 이상하여 납치한 아이들을 자신의 핏줄이라 여기는 것 같습니다."

"그럼 괜찮습니다."

명한이 발끝으로 땅을 골랐다.

지금 바로 추격에 나서는 건 어느 쪽도 바람직하지 않았다.

"죄인이 아이를 자신의 핏줄이라 여긴다면 지극정성으로 보살필 터. 급하게 추적하여 사지로 몰기보다, 날이 밝고 흔적을 찾으면 천천히 퇴로를 봉쇄하는 쪽이 낫습니다."

"음······"

"어둠 속에서는 실수가 나오는 법이죠. 실수로 아이가 다치기라도 하면 큰 후회로 남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명한 공자의 말대로 날이 밝은 뒤에 추격을 재개하도록 합시다."

고민은 길었지만, 선택은 간결했다.

반대 의견을 내던 다른 이들도 청운이 선을 그은 이상 불만을 표하지는 않았다.

"향아야, 음식을 가져오너라."

명한은 냉큼 야숙을 준비했다.

#

"뭔데, 그래서? 그 미친 여자를 찾는 거야?"

새벽이 끝나갈 무렵.

은소소가 명한 옆으로 다가와서 넌지시 물었다.

분위기를 읽고 입을 다물었을 뿐, 궁금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찾는 건 여자가 아니지만, 그 여자를 쫓아야 찾을 수 있어."

"무슨 선문답이야, 그건."

"생각해 봐. 무당산 본전을 공격할 만큼 뛰어난 무공을 지닌 여자야. 배경이 없겠어?"

"여자에게 배후가 있다?"

"배후라기보다는 배경이라고 해두자."

제갈가에서 찾은 악보와 맞닿아 있는 이야기다.

흐름은 모두 알지만, 자세한 장소와 세부적인 이야기까지는 명한도 알 수 없다.

그때그때 맞춰서 대응하는 것이 최선.

‘그리고 기회가 되면······’

눈앞의 있는 은소소의 이야기까지.

"뭐야? 왜 그렇게 봐?"

"아니, 뭐 새벽 어스름에 보니까 눈이 예뻐서."

"······뭐라는 건지."

"일단 지금은 그 여자를 찾는 것에 집중하자고. 상황이 잘 풀리면 그때그때 얘기를 해 줄 테니까."

"하여튼 비밀만 많아서는."

은소소가 툴툴거리며 일어났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변명도 있지만, 지금은 명한을 따르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고 있다.

호기심도 득이 되는 상황도.

평생을 궁금해 왔던 의문에 대한 해소도.

모두 그의 곁에서 풀릴 것 같은 예감 때문이었다.

"아, 두 분. 일찍 일어나셨군요."

때마침 잠에서 깨어나는 청운과 그의 사형제들.

동이 터 주변이 밝아오고 있었다.

"바로 출발할까요?"

"도움을 받겠습니다."

추격 재개였다.

#

광인은 흔적을 여러 곳에 남겼다.

감출 정신이 없는 것도 있고, 추격에 대한 두려움도 큰 탓도 있었다.

사방에 나 있는 흔적을 쫓아 올라가는 건 쉬웠다.

"동굴이군요."

"아마 이 안에서 몸을 숨겨왔던 모양입니다."

그렇게 발견한 자연 동굴.

발자국은 정확하게 동굴 안으로 이어져 있었다.

주변을 돌아봐도 다른 통로는 보이지 않았다.

"죄인을 잡는 건 저희 무당의 몫입니다. 세 분께서는 최대한 떨어져서 뒤만 맡아주시길."

"당연한 말씀을. 무당의 명성을 뒤에서 지켜보겠습니다."

무리는 셋씩 둘로 나누었다.

앞선에 청운과 그 사제, 사매.

뒷선에는 명한 일행이 포진했다.

[무상비고(無狀秘庫)에 진입하였습니다]

그렇게 발을 굴 안에 들이는 순간.

머리 위로 익숙한 창이 튀어 올랐다.

‘역시 여기가 무상비고였군.’

제갈가 비고에서 찾아낸 악보의 근원.

무상가(無狀家)혹은 무상은가(無狀殷家)의 숨겨진 통로였다.

[무상비고에서 살아남아라]

[의뢰 등급 : ??]

[제한 시간 : ??]

[완료 보상 : ??]

그리고 이어진 의뢰 창.

지금껏 나왔던 창과는 다른 형태였다.

뚜렷한 목표도 제한 시간이나 보수도 보이지 않았다.

이 무상비고라는 장소의 특징 때문.

"앞에 적이다! 모두 무기를 들어라!"

"사형! 거대한 늑대입니다!"

"늑대!? 여기는 거미다! 엄청난 숫자야!"

"이 많은 것들이 대체 어디에서 튀어나왔단 말인가! 뒤를 조심해라! 모여서 상대한다!"

환영, 환각.

모든 것이 허상으로 이루어진 진법의 영향이었다.

동굴에 들어와서 무상비고에 진입하는 순간부터 이미 진의 영향권에 들어온 것이었다.

무공의 고하와 상관없이 진을 파훼하지 않으면 이 공간은 뚫을 수 없었다.

"어······도련님, 저분들은 왜 저러는 거죠?"

만약, 향아가 없었다면 명한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향아의 벽안지체.

그야말로 만물을 꿰뚫는 초월적인 눈이었다.

그녀 눈에는 무당의 인물들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손짓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눈을 속일 수 있는 진법은 무림 전체를 다 털어도 한 손에 꼽는다.

무상비고의 진법은 아쉽게도 포함되지 않았다.

"잘 들어. 이 앞은 환영으로 뒤덮인 진법이야. 진실과 거짓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건 오직 너뿐이야, 향아."

"제, 제가요?"

"그래. 그러니 지금부터는 네가 우리의 길잡이가 돼 줘야 해."

"······"

마른 침을 꼴딱 넘기는 향아.

몸종이라는 신분치고는 무거운 짐이었다.

하지만 이내 굳은 얼굴로 끄덕이며 의지를 내보였다.

‘도련님은 그 이상이 되라 하셨어.’

실망을 주기는 싫었기 때문이다.

"은소소, 눈 감아. 여기부터는 향아의 손만 잡고 들어간다."

"그 정도인 거냐?"

"잘못 휘둘리면 화경의 고수가 와도 미칠 수 있어. 눈 감고 손에만 의존하는 편이 나아."

"무시무시하군."

향아를 중심으로 명한과 은소소가 좌우로 섰다.

"간다."

진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

오래전. 아주 오래전이었다.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시절.

스치듯 들었던 목소리가 은소소의 귓가를 울렸다.

― 소소야. 소소야. 어서 나오렴, 우리 아가.

어디서 들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목소리.

그냥 지나치고 잊어도 이상하지 않은 기억이었다.

하지만 은소소는 잊을 수도, 이 목소리를 저버릴 수도 없었다.

"······엄마?"

희미하게 남은 손끝의 감각.

붉은 안개처럼 흐릿하게 남은 누군가의 얼굴.

그건 머릿속으로 썼다, 지웠다만 반복한 어머니의 그림자였다.

안개처럼 몸을 휘감아 저 멀리에서 손짓했다.

"가지 마. 가지 마, 엄마. 날 두고 가지 마."

은소소는 이를 외면할 수 없었다.

단 한 번.

오직 단 한 번만 만날 수 있기를 바라왔던 대상이니까.

언제나 흐릿한 기억만으로 추억해 왔던 어머니.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는 것도.

고수와의 대전에 목마른 것도.

천마궁 안의 자신만의 색을 입히는 것도.

한구석 깊이 파인 공허를 채우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기억하지 못하는 반쪽에 대한 그리움.

그저 한 번.

엄마를 만나고 싶었다.

"엄······"

하지만 그 손을 잡기 위해서 앞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은소소!!"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 손목을 거칠게 당겼다.

물에 녹는 먹처럼, 주변 광경이 한 번에 무너졌다.

그렇게나 쫓던 엄마의 그림자도 마찬가지였다.

가슴속에서 분노가 들불처럼 치솟았다.

"너······!!"

뽑아 든 검.

그리고 충돌하는 오죽타구봉.

묵직한 충격에 몸이 들썩거렸다.

"정신 차려, 은소소. 환각은 이미 사라졌다."

"······"

두 눈의 깜빡임 속으로 타구봉을 든 상대가 보였다.

시커먼 동굴 속, 어딘가 창백해 보이는 소백이었다.

그리운 냄새나 쫓던 엄마의 발자취는 없었다.

은소소가 손에 쥔 검을 한차례 본 뒤, 깊고 무거운 한숨을 토해냈다.

"환각."

"그래. 진을 빠져나오는 끝자락에서 걸렸다. 괜찮은 거냐? 뭔가 지독한 환각에 휩싸였던 것 같던데."

"······지독했지."

잡을 수 없는 허상이니까.

입술을 피나게 씹고는 검을 다시 검집으로 되돌렸다.

불처럼 달아올랐던 심장은 싸늘하게 식은 후였다.

"미안하다."

"괜찮아. 내가 끌고 왔으니까."

"후. 그래서, 진을 벗어났다면 우리는 어디에 와 있는 거지?"

길게 이야기하는 건 피하고 싶다.

은소소가 화제를 돌리며 물었다.

겉으로 봐서는 전과 다름없는 굴속.

진을 통과한 건지도 의문이었다.

"궁금하면 직접 물어봐."

"직접? 무슨 의미야?"

의아함에 되묻자, 명한은 어둠 속을 손으로 가리켰다.

새카맣게 이어지는 굴의 끝.

그 어둠이 거품처럼 가라앉자, 완전히 생소한 전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을?"

너른 평원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집들.

굴 안의 광경이라고는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눈으로 묻자, 명한이 웃으며 답했다.

"무상가. 한때는 신비한 것들을 추종하던 집단. 옛 고서에서 말하기를 귀문(鬼門)이라 불리는 곳이야."

"귀문."

그야말로 귀신과 같은 이야기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