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이 있다면 이별도 있는 법
노유곽 등은 얼마 안 지나 명한 곁으로 모였다.
애초에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았다.
기습 자체는 은밀했지만, 노유곽의 감지 범위는 그것을 월등하게 초월하고 있었다.
단지, 기다리라는 그의 말에 끼어들지 않았을 뿐.
"클클. 싸우는 꼴이 개방에 딱 어울리는구만."
"너무 부족해요. 어르신의 봉법에 조금만 더 익숙했어도 이렇게 막싸움은 안 해도 됐을 텐데."
"화경을 고수를 잡아놓고 불평은."
"그래, 명한. 화경 고수를 상대로 승리하는 건 나도 어려운 일이다. 넌 그걸 해냈어."
은소소는 아예 호승심을 불태웠다.
명한에게 한 수가 있음은 알았지만, 화경 고수를 이길 정도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지금이라도 붙어볼까?
손이 근질근질했다.
"내 몸에 쌓인 독 덕분이지. 그 번쩍이는 눈은 좀 치워 줘. 지금 싸웠다가는 제명에 못 죽을 거 같다."
"나중에. 기대 하겠어, 소백."
"끄응."
앓는 소리를 내지만 명한도 울상은 아니었다.
상처가 많든 적든 자신보다 급 높은 고수를 이긴 건 사실이었다.
지금껏 배운 무공이 통한다는 이야기였다.
제갈 수와 위궁.
충분한 증명이었다.
"클클. 다음에 붙거늘 이걸 들고 싸우거라."
노유곽이 허리춤에서 봉을 꺼내서 던졌다.
대나무로 만든, 오래되고 손때를 탄 물건이었다.
"어르신?"
"내게는 이제 필요 없는 물건이다. 앞으로는 네가 쓰거라."
하지만 명한은 이 물건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안다.
한때, 개방을 상징하던 이대 신물 중 하나.
지금은 비록 개방의 사분오열되어 그 의미를 잃었으나, 가치까지 사라진 건 아니다.
[이름 : 오죽타구봉(烏竹打狗棒)]
[종류 : 봉]
[등급 : 천하급]
[설명 : 개방의 신물 중 하나. 오죽도의 신비한 대나무를 벼려서 만든 무기. 탄력이 강하고 부러지지 않는다. 신비한 기운이 깃들어 있어 부정한 것들을 밀어낸다]
무려 천하급의 무기.
다른 건 둘째 치고 ‘부러지지 않는다.’라는 매우 강력한 고유 특성은 사기에 가깝다.
그 어떤 신병이기와 맞서도 부서질 걱정은 없으니까.
"어르신께 절을 올리겠습니다."
"어허, 민망하다 이것아."
"부디 받아주십시오."
명한은 가타부타 노유곽 앞에 머리를 숙였다.
타구봉법을 전해주고 오죽타구봉까지 준 은인.
"어르신이라 생각하고 아끼겠습니다."
절이 아니라 더한 것도 가능했다.
#
수장인 위궁이 죽은 이상 나머지는 위협이 아니었다.
기습이나 암살 시도는 없었다.
일행은 탈 없이 호북지역까지 도착했다.
"이 마을만 지나면 무당산까지는 금방입니다, 어르신."
"무리해서 갈 필요는 없다. 오늘은 여기서 쉬자꾸나."
무당산 아랫길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었다.
일행은 마차를 몰아 쉴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래도 왕래가 잦은지 마차를 댈 곳도, 숙소도 그럴듯하게 갖춰져 있었다.
"어르신, 이곳에 제법 그럴싸한 술들이 많습니다."
명한은 재빨리 방을 잡고 술부터 수소문했다.
무당산을 통하는 객들을 위해 여러 가지 술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눈에 보이는 대로 샀다.
"클클. 적당히 사거라."
"아니, 갑자기 금주라도 하십니까?"
"과하게 마시고 밤을 새면 내일 어찌 떠나겠느냐. 오늘은 정도껏 마시고 그만하자꾸나."
"떠나요?"
뒷말은 향아의 것이었다.
술상을 준비하던 그녀가 쪼르륵 달려왔다.
"마을을 지나 산을 오르면 무당이다. 나야 이제 큰 목적이 없이 유랑이 전부나, 너희는 다르지 않느냐."
"같이 가도 되잖아요. 맞죠, 도련님?"
"······"
"도련님?"
"클클. 네 도련님을 그만 곤란하게 하거라. 묻지 않고 여기까지 왔으면 헤어질 때도 그리하면 된다."
노유곽은 호북지역에 들어오는 순간까지도 명한 일행의 정체를 묻지 않았다.
그건 궁금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아무리 은거에 뜻을 두었어도 정파의 인물.
그것도 오제 중 일인인 노유곽이 신교의 인물들과 유랑한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로 문제였다.
무언의 약속이었을 뿐이다.
"조금은 더 함께할 수 있으리라 여겼습니다."
"됐다. 만나면 헤어지는 것이 인연. 연이 닿아 무거운 짐도 덜었고, 귀여운 제자까지 얻었으니 충분하다. 달을 벗 삼아 이별주를 하자꾸나."
"사부님······"
"어허. 이 노유곽의 제자가 어찌 함부로 눈물을 보일까."
금세 눈시울이 붉어진 향아를 노유곽이 다독였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손녀같이 살가운 향아에게 꽤 정이 붙은 그였다.
게다가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재능은 어떤가.
마음 같아서는 아예 데리고 가서 절기를 모두 가르치고 싶었다.
‘그럴 수는 없겠지.’
무공 한두 초식이야 넘어갈 수 있는 일.
하지만 노유곽 자신이 움직이는 건 경우가 다르다.
오제라는 이름값은 정파에서는 태산과 같은 것.
그 굴레는 천하의 고수조차 묶어둘 만큼 무거웠다.
"훗날 제가 직접 어르신을 찾아가겠습니다."
"네가 말이냐? 엉덩이 떼기 쉬운 곳은 아닐 텐데?"
"어르신만 하겠습니까. 언젠가 몸을 둔 곳보다 제가 무거워지는 순간. 그때 어르신을 찾아뵙겠습니다. 그때는 밤을 새워 술을 마시죠."
"클클클. 그놈, 포부 하나는 천하제일이구나. 네 위에 있는 자가 누구인지 알면서도 하는 말이냐?"
"알다마다요. 허나, 하늘을 이기지 못하고 어찌 태양을 맞이하겠습니까."
"하하하하. 그래, 그래. 그때를 기다리마."
마도천하.
세상천지 누가 있어서 감히 이런 말을 할까.
젊은이의 객기라 해도 노유곽은 시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앉아라. 오늘은 술맛이 달겠구나."
밤이 오기 전, 그늘진 시간 속.
이별주의 달콤함은 조금 이르게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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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은 빠르게 찾아왔다.
밤이 끝나고 새벽이 찾아올 무렵.
노유곽은 첫 만남 때와 마찬가지로 홀연히 떠났다.
명한과 은소소는 아쉬워하고 향아는 한참을 울었다.
"저리 자유분방하신 분도 정파의 굴레를 벗어나지는 못하셨네."
"그건 너나 나도 마찬가지니까."
"쯧. 마도니 정도니. 선 긋고 사는 일에 무슨 멋이 있다고."
명한은 답 대신 웃기만 했다.
이런 세계관을 구축한 건 다름 아닌 그 자신이었다.
"그보다 이젠 어떻게 할 거냐? 노 노사를 따라다니느라 시간을 꽤 낭비했어. 무당산을 꼭 거쳐야 하는 거냐?"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지나치긴 뭐하지. 내 예상이 맞는다면 긴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을 거야."
"그······정보 말이냐?"
은소소가 쭈뼛거렸다.
예전에 지나가듯 말 한 ‘백은’과 ‘응봉’에 대한 미련 때문이었다.
그날 모닥불 앞에서 묻고 난 뒤 지금껏 무소식.
자존심에 다시 묻지는 못했으나, 신경 쓰이는 건 사실이었다.
"어쩌면 전에 네가 말 한 것들에 대해서도 단서를 잡을지 몰라."
"정말이냐!?"
자신도 모르게 올라가는 목소리에 은소소가 되레 놀랐다.
명한이 손끝으로 얼굴을 살짝 밀어내며 답했다.
"내가 알아낸 바에 의하면 백은은 신분, 응봉은 지역이야. 두 가지 정보를 바탕으로 상황에 적용하고 있어."
"신분과 지역이라고? 그걸 어떻게 알았어?"
"누차 말하지만······"
"아. 알았어, 알았어. 어떻게 알았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다. 도움이 되는지를 보라 이거지?"
명한이 잘했다는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설명이 불가능한 부분이니, 이렇게 만성적인 조건으로 만드는 것이 편하다.
은소소도 큰 불만 없이 넘어갔다.
"그럼, 말 나온 김에 시작해 볼까?"
"시작? 뭘?"
"내 정보도 완벽한 건 아니라서. 현지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최대한 모아두는 편이 좋아. 다행히도 우리에게는 좋은 수단이 있지."
"······아. 흑점?"
마을 초입에서 보았던 검은 문양의 깃발.
흑점의 표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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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점 분타, 유운봉이 눈알 데굴데굴 굴렸다.
불쑥 찾아와 ‘흑점을 이용하려고 왔다.’라 말 한 일남 이녀 때문이었다.
그가 일하는 상점이 흑점의 분타임은 맞지만, 이를 아는 건 극히 소수였다.
"······거, 뉘슈?"
그나마도 책임자인 일월 자매들을 빼면 대부분이 나이 가득한 원로들.
눈앞의 이들처럼 젊은 사람은 없었다.
"우리가 누구인지는 알 것 없고, 흑점의 정보를 좀 받아갈까 해. 특급으로."
"하. 어디서 무슨 이야기를 주워듣고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여기는······"
"자. 이월이 준 명패다."
툭. 탁상 위로 던지듯 내려놓은 철제 명패.
흑점의 상징과 함께, 분타의 책임자만 알아볼 수 있는 특수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유운봉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태, 태사 패! 설마 태사님 되셨습니까!?"
"태사?"
"이 패가 태사 패 아닙니까? 점주께서 흑점을 구해주신 은인분들께 드렸다던······허억! 그럼 여러분께서 그 은인!?"
아예 옆으로 돌아 나와 명한 앞에 무릎을 꿇었다.
쿵 소리는 뼈가 상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뭐 하는 거야?"
"흑점의 은인분들을 뵙습니다. 이 유모가 어리석어서 은인분들을 한 번에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하아. 대충 흑점을 이용할 패를 달라고 했거늘. 이월이 과하게 손을 쓴 모양이네."
"윗선에서 아주 신신당부를 했습죠. 태사패를 보거든 점주님을 보는 것처럼 응하라고. 흑점의 모든 정보, 역량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이월다운 응대였다.
"일단 일어나라. 그렇게 난리를 치면 주변에서도 이상하게 볼 거 아니냐."
"어이쿠! 태사님 말씀이 지당하십니다. 역시 흑점을 구한 분들답군요."
"거, 분타주 맞냐? 왜 이렇게 입이 싸?"
"허업! 입단속 하겠습니다."
입을 손으로 슥 긋는 모양새가 영 마뜩잖아.
명한이 한 번 흘겨본 뒤 본론을 꺼냈다.
"이 마을을 중심으로 무당산에 이어지는 모든 길. 특히, 약초꾼들이 다니는 길 중심으로 특이사항이 있는지 좀 알아봐 줘."
"약초꾼들의 길 말입니까? 특이사항이라면 어떤?"
"산짐승에게 당한 일이나······귀신 같은 거. 뭔가 수상쩍은 일이라면 뭐든지 좋아."
"······어? 귀신 말입니까?"
"음? 뭔가 아는 바가 있냐?"
유운봉이 목이 부러져라, 고개를 끄덕였다.
흑점 분타의 기본 업무는 정보 수집.
며칠 전부터 일대에서 흉흉한 이야기가 돌고 있었다.
"최근에 벌어진 일입니다. 산행에 나간 약초꾼들 중 일부가 귀신을 목격했다고 했습죠."
"귀신이라. 정확하게 그리 말한 거냐?"
"네, 네. 그냥 몇 명 지나가며 하는 말이면 헛것을 봤나 싶었을 텐데······"
"아니라는 건가?"
"약초꾼 몇이 그 뒤로 실종됐지 뭡니까."
실종이라는 단어에 명한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가 기억하는 습작의 내용, 일부였다.
‘시기상으로는 이르지만, 충분히 가능한 일이야.’
배경을 알기에 유추도 가능했다.
"위치를 안내해 줄 수 있겠나?"
"저보다는 그쪽 길에 능한 약초꾼 한 명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왜? 직접 가는 건 무섭냐?"
"흐, 흐흐흐. 저보다야 약초꾼이 길에 밝으니까요."
역시 마뜩잖은 놈이다.
명한이 한 번 더 흘겨본 뒤 말했다.
"약초꾼 이름."
다음 행선지는 정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