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명의 시간
위궁은 때를 기다렸다.
노유곽이 붙어 있는 이상 어떤 방법을 쓰든 암살은 무리.
어떻게든 소백이 따로 떨어지기를 바라왔다.
그리고 지금.
노유곽이 몸종 계집과 함께 외유를 나간 순간이 암살 최적의 시간이었다.
"네 죽음을 바라는 이가 많다, 소백. 오늘만큼은 살아서 돌아가지 못할 거다."
"환사, 위궁. 그래도 신교 십이걸 중 하나 아닌가? 당신이 꼭두각시 노릇을 할 줄은 몰랐어."
"날 어찌 평가해도 좋다. 널 죽여 궁이 평화로워질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게 혈염마녀 그 계집의 말이냐?"
"······"
위궁이 답을 회피하고 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혈염마녀가 배후인 건 맞는 거 같긴 한데······’
태도에 약간 미묘한 부분이 있었다.
"뭐, 좋아. 마침 나도 널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죽을 자리를 고르는 건가?"
"아니. 어르신께서 가르쳐주신 재주. 널 상대로 시험해 볼 요량이었거든."
"제정신이 아니구나, 소백. 절 지켜줄 사람은 없다."
"알아. 아니까 더욱 좋은 시험이다."
쌍각사, 성성이, 은소소.
그리고 노유곽까지 당장은 주변에 없다.
‘무공은 체득해야 비로소 자신의 것이 된다.’
이를 위해 위궁 만큼 좋은 상대는 없다.
"망나니 주제에 감히······"
"그 망나니를 한번 죽여보라고."
"원한다면!"
팅. 시위가 튕기는 소리가 들리고.
빛의 번짐과 함께 검은 비령시가 어느새 눈앞까지 당도해 있었다.
그야말로 전광석화.
‘출수를 함은 간결하게.’
하지만 명한은 당황하지 않았다.
주워든 나뭇가지를 몸 안쪽에서 밖으로 뻗었다.
간결하게 그어지는 일(一)자 획.
키르르르릉.
비령시의 촉이 나뭇가지 중심에 맞아 거칠게 돌았다.
강대한 내기는 단숨에 나뭇가지를 파고들어도 부족함이 없었지만, 타구봉법의 묘리는 이를 상회했다.
밀어내는 힘, 척(斥).
가지 끝의 탄력이 비령시를 비틀어서 옆으로 튕겼다.
화살은 두어 바퀴를 돈 뒤 바닥에 박혔다.
"······타구봉법."
"역시 아직은 손에 익지가 않네."
"몇 수 배웠다고 사람이 바뀌는 건 아니다."
위궁이 연달아 화살을 쐈다.
좌우로 갈라져 긴 호를 그리며 날아왔다.
그리고 그 가운데로는 자신이 직접 뛰어 거리를 좁혔다.
‘닿는 시간이 완벽하게 같다.’
그야말로 홀로 삼 인분을 해내는 절묘한 수법.
"나도 봉법만 있는 건 아니라서."
명한이 나뭇가지를 바닥에 튕겼다.
마치 살아있는 물고기처럼 파르르 떨리며 튀어 오르는 나뭇가지.
낭창하게 휘는 나뭇가지의 궤적은 정확하게 좌우로 나뉜 화살의 그것과 맞닿았다.
그리고 그사이, 명한은 주먹을 뻗었다.
오독경을 따라서 움직이는 독단의 기운.
퍼엉―!
맞물린 일격에 명한과 위궁이 반대쪽으로 물러났다.
명한은 세 걸음, 위궁은 한 걸음 반.
뚜렷하게 나타나는 내공 차이였다.
‘내 내공으로도 화경 고수에게는 안되는군.’
수치상으로도 밀리지만, 질에서도 차이가 있었다.
독단의 독기와 내공이 완벽하게 융화가 안 되기 때문.
완벽한 상태였으면 차이를 반걸음으로 좁힐 수 있었을 것이다.
"······소백. 역시 세간의 평가와는 다른 건가."
"이제 와서 재평가를 해주는 거냐?"
"널 죽이려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의미니까."
순간, 땅에 박혔던 화살들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극한의 무공경지, 허공섭물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아니지. 이건 내 회백과 같은 특수 기공.’
위궁이 자랑하는 비령만우(飛靈萬雨)였다.
떠오른 화살에 위궁의 화살까지 합쳐져서 한꺼번에 쏟아졌다.
그 숫자가 얼추 잡아도 수십.
"악견타두(惡犬打頭). 개새끼가 길을 막으면 대가리를 후려쳐야지."
명한은 이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발로 차, 손으로 쥔 뒤 강하게 휘둘렀다.
때리는 대상은 그의 발끝, 흙더미.
갈색의 토사가 충격에 튀어 올라 명한의 나뭇가지를 타고 호를 이루었다.
‘검막?’ 놀란 위궁의 목소리대로.
이는 검막을 응용한 은소소의 재주였다.
투두두둥. 투둥. 퉁.
흙벽에 부딪혀 튕겨 나가는 화살들.
비령시 한 수에 뚫렸던 은소소와는 다른 경우였다.
‘타구봉법의 낭(浪)자 결을 섞었지.’
같은 벽이라도 탄력 있는 쪽이 더 잘 막는다.
비령시에 실린 힘만 막을 수 있다면 그냥 화살에 불과하니까.
"구걸도 한입부터. 일구나천(一口拏天)."
흙벽이 무너짐과 동시에 명한이 앞으로 뛰었다.
놀란 위궁이 활대를 검 삼아 휘둘렀지만, 이미 거리를 잡힌 후였다.
벼락같이 앞으로 쏘아지는 나뭇가지.
그 일격이 마치 검격의 찌르기와 같았다.
쩍, 소리와 함께 위궁의 몸이 몇 걸음이나 밀려났다.
"······잔재주를!"
하지만 위궁도 화경을 도박으로 딴 건 아니었다.
밀려나는 힘을 발끝으로 받아, 몸을 회전시키더니 그대로 시위를 튕겼다.
화살 없이 내공을 튀기는 기탄(氣彈)의 경지였다.
거리를 주지 않으려고 추격하던 명한의 가슴팍에서 불꽃이 튀었다.
"쯧."
"재주가 있고, 재능도 있구나. 하지만 그것도 여기까지다."
위궁은 큰 기술 몇 개로 끝내려는 마음을 접었다.
손끝을 세게 오므려 기탄을 연달아 튕겼다.
궁수가 거리를 잡기 위해 상대를 견제하는 요령.
명한은 나뭇가지로 연달아 이 기탄을 튕겼으나, 거리를 좁히지는 못했다.
콰직.
무기의 한계 때문이었다.
"고작 나뭇가지로 나, 위궁과 싸우려 한 점은 오만이다."
"그게 부끄러우면 봉을 찾을 때까지 기다려 주든가."
"그렇게 하기에는 네 성장이 너무 빠르다. 이곳에서 반드시 죽인다."
"칭찬은 고맙군."
다시금 쏟아지는 기탄에 명한이 큰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기탄은 분명 위력적이지만 관통력은 약하다.
나무는 크게 흔들릴 뿐 부서지지 않았다.
‘일단 호흡을 고르고······’
떨어진 나뭇가지를 다시 줍는다.
명한이 다음 계획을 수습하려는 찰나.
쉬익.
바람 소리와 함께 나무 옆을 돌아 화살이 날아왔다.
깜짝 놀란 명한이 몸을 숙였지만, 완전히 피하는 건 무리였다.
어깨를 스쳐 나무에 박혔다.
"······나무 화살."
"네놈만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바닥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주워서 날린 것이다.
비령시가 모두 떨어져 있다는 사실에 방심한 것이 실수였다.
‘젠장. 역시 화경의 고수인가.’
실력은 둘째 치더라도 경험치에서 차이가 컸다.
"언제까지고 숨어있을 수는 없다."
숨 고를 틈도 없이 화살이 날아왔다.
이번에는 좌우로 갈라져서 양면을 노린 협공이었다.
앞서 막은 방식이 있지만, 이번에는 쓸 도구가 없었다.
명한이 나무 등치를 발로 차며 뒤로 몸을 뺐다.
비령시는 아니니, 피할 시간은 충분했다.
‘―위!?’ 하지만 위궁은 이 또한 예상했다.
좌우로 말고 위로 날린 화살이 한 대 더 있었다.
명한이 다급하게 손을 뻗어 막아 보지만, 이미 살갗을 뚫고 들어왔다.
파바박! 팍!
게다가 공세는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좌우로 나뉘었던 화살 위로 다른 화살이 꽂혔다.
나무통이 큰 충격에 박살 나는 것처럼, 나무로 만들어진 화살은 파편을 사방으로 날렸다.
검막이면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위력이나, 명한은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파편이 날아와 전신에 꽂혔다.
"재주 몇 가지 배웠다고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너와 난 걸어온 길 자체가 다르다."
"······젠장. 역시 화경의 고수는 버겁네."
가이신공이 자연스럽게 움직여 파편을 밀어냈다.
상처는 얕았으나, 상황의 변화는 없었다.
첫수 몇 가지로 위궁을 놀라게 한 것이 전부.
화경 고수와 명한 자신의 차이는 명확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불가능도 아니야.’
타구봉법을 배웠어도 그것이 명한의 전부는 아니다.
"이제부터는 좀 더럽게 싸워보자."
"잔재주는 통하지 않는다고 했을 텐데?"
"내 잔재주는 좀 맵거든!"
이번 선공은 명한이 가져갔다.
나무 파편에 찔려서 난 상처를 손끝으로 훑으며 위궁 쪽으로 던졌다.
붉은 피의 암기였다.
"치졸한 수를!"
당연히 위궁은 맞지 않았다.
소매를 둘둘 감아 피를 쳐내는 것이면 족했다.
하지만 그 반응이 명한이 원하는 것이었다.
즉시 장력을 담아 바닥을 후려쳐, 토사로 시야를 가렸다.
‘시야를 가린다고 될 것 같나!?’ 위궁은 대노하며 화살을 바람같이 날렸다.
보이지 않아도 기척을 감지하는 건 화경 수준의 궁수라면 당연한 재주.
화살은 토사를 관통해서 명한을 쫓았다.
몇 개는 튕겨냈으나 몇 개는 몸에 박혔다.
비틀. 뿌연 시야 속에서 흔들리는 모습이 보였다.
"마무리를 지어주마."
"누구 마음대로."
화살에 시위를 먹이는 위궁.
하지만 그보다 명한이 피를 머금어서 뱉는 것이 먼저였다.
이에 위궁이 잠시 멈칫거렸다.
단순히 앞이 붉어져서가 아니었다.
기척이 순간적으로 사라졌기 때문.
"······!"
기척이 다시 나타난 건 몇 족장 안의 지척.
붉은 안개를 뚫고 명한의 나뭇가지가 맹렬한 속도로 위궁의 가슴팍을 노렸다.
훌륭한 기습.
하지만 위궁의 대처는 더욱 훌륭했다.
활대에 달린 시위를 현으로 사용해서 나뭇가지를 쭉 긁은 뒤 기로 잘라냈다.
아무렇게나 구할 수 있는 나뭇가지가 위궁의 무기 비현궁의 현을 이길 수는 없었다.
‘내 무기는 궁만이 아니다.’
그리고는 텅 빈 명한의 가슴에 장법을 날렸다.
투웅―!
묵직하게 들려오는 충격음.
"······!?"
그리고 놀란 위궁의 얼굴.
때린 건 자신인데 반탄진기에 되레 충격을 받았다.
오른손부터 어깨까지가 전부 저렸다.
"이젠 시위를 당기기 쉽지 않겠지?"
"너!"
입가에 피 칠갑을 한 채 웃는 명한.
충격을 감수하면서까지 가이신공으로 힘을 돌려준 것이다.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하는.
아니, 뼈를 내주고 뼈를 취하는 방식이었다.
"떨어지게 놔두지 않는다!"
명한은 반사적으로 물러나는 위궁의 어깨를 낚아챘다.
이에 위궁도 몸을 돌려 명한의 손을 쳐냈다.
순간적으로 맞닿는 두 사람의 손.
폭발적으로 기운이 충돌하는 내력싸움의 양상이었다.
‘어리석은. 내력 싸움에서는 내가 우위에 있다.’
위궁은 자신했다.
이미 앞서 내력의 우위를 증명했고, 긴 싸움의 여파로 상처는 명한 쪽이 깊었다.
"······큭! 크윽!?"
하지만 결과는 그의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다.
내공 싸움에서 먼저 피를 흘린 건 위궁이었다.
노도와 같이 밀어붙여야 할 그의 내공이 산공독에라도 당한 듯 힘을 쓰지 못했다.
"말했잖아. 더럽게 싸운다고."
"······큭!"
명한에게는 말할 여유까지 있었다.
당연하게도 단순 내력 싸움으로 상대가 안 되는 건 그가 누구보다 잘 안다.
그렇기에 죽어라도 피를 뿌리면서 야금야금 위궁을 중독시킨 것이다.
화경 정도의 고수라면 일반 독으로는 씨알도 안 먹히는 것이 정상.
다만, 격전 속 호흡으로 인한 중독은 피할 수 없다.
일정 수치를 누적시킨 뒤 내공싸움으로 이를 격발시킨 것이다.
"그쪽이 나에 대한 걸 알았다면, 내가 중독당한 독이 천폐독임도 알았겠지. 천마궁의 망나니. 단순히 그리 여긴 것이 네 패인이야."
"쿨럭! 쿨럭! 이건······불가능하다!"
"망나니가 신교 십이걸중 하나를 이기는 거? 아니면 화경의 고수가 그 아래의 무사에게 지는 거? 세상에 불가능은 없어. 내 몸이 그 증거거든."
자신이 쓴 글에 들어와서 사는 사람도 있다.
불가능, 그건 그저 단어에 불과하다.
"죽기 전에 말이나 해 봐. 혈염마녀 말고 날 죽이라고 의뢰한 사람이 또 있나?"
"······쿨럭! 쿨럭!!"
"그냥 죽으면 억울하지 않아? 네 죽음에는 사주한 자의 책임도 있는 거라고."
"상관없다. 쿨럭! 어차피 네놈도 곧 죽게 될 운명. 신교를 위해서라도······쿨럭! 네놈은 꼭 사라져야 한다."
죽은 피를 토하면서도 끝까지 말을 아끼는 위궁.
‘단순히 이해관계를 위해 일을 사주받은 건 아니야.’
철저한 신념이 바탕이 되어 있었다.
"뭐, 마음대로 하라고 해. 누가 오든 차곡차곡 시체로 산을 쌓아주면 되니까. 신교를 위해서든 모시는 주인을 위해서든······난 죽어줄 생각이 없어."
"쿨럭! 쿨럭!! 소백······!"
"잘 가라, 환궁."
콰드득.
[등급이 올랐습니다]
[등급이 올랐습니다]
[등급이······]
"분위기 깨기는."
쓰러지는 위궁 위로 알림창이 쌓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