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인이라는 이름의 기인
누더기 차림의 노인이었다.
바람과 같은 걸음으로 장내로 들어오더니, 벼락같이 손을 휘둘러 비령시를 쳐냈다.
나무에 박혀 찌르르, 우는 비령시.
검막마저 찢고 들어오는 화살이 일수에 튕겨 나간 것이었다.
"······"
위궁은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노인의 일수에서 그의 경지를 엿봤다.
쉽사리 여길 상대가 아니었다.
"클클. 이 야밤에 무슨 드잡이질을 하나 싶더니, 고작 저 아이들 상대로 활이나 쏴대는 거였나?"
"뉘신지는 모르겠으나 상관없는 일입니다. 관여하지 마시고 물러나시지요."
"고놈 말하는 품새 좀 보세? 이 늙은이가 노구를 끌고 예까지 왔으면 어련히 알았습니다, 하고 물러나야지. 계속 싸우겠다?"
"남의 일입니다. 두 번은 경고하지 않겠습니다."
위궁이 시위에 화살을 먹였다.
상대가 범상치 않은 고수임은 알지만, 받은 명령은 분명했다.
사십 팔궁의 주인, 소백의 죽음.
끼리리릭.
끝까지 당긴 시위에서 거친 소리가 났다.
"클클클. 이 늙은이가 그 검은 비령시를 못 알아볼 것 같더냐? 쓸데없이 힘쓰지 말고 물러나라."
"······"
"에잉. 고집스럽기는."
투웅. 당긴 시위가 손끝에서 풀려났다.
마치 물속을 헤엄치는 잉어처럼.
검은 비령시가 거침없이 나아갔다.
그 힘과 속도가 앞선 것보다 배는 강했다.
하지만 노인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누더기에 가까운 옷을 손으로 둘둘 말더니 앞으로 내질렀다.
지나가던 똥개를 쫓아내듯, 가벼운 동작이었다.
키르르르릉―!
그러자 놀랍게도 노인의 옷자락이 창처럼 바짝 서서는 검은 비령시와 맞섰다.
봉극에 닿은 화살촉.
거칠게 마찰하더니 위로 튕겨 나갔다.
"타구봉법? 개방의 인물?"
"클클. 알아보았다면 썩 물러나거라."
"큭······!"
노인은 그것에서 멈추지 않았다.
돌돌 말았던 소매를 툭 털어 풀더니, 그대로 허공을 부드럽게 휘감았다.
이에 쓸려오는 건 튕겨 올랐던 검은 비령시.
마치 물살에 휩쓸리는 낙엽마냥 한 바퀴 돌아서는 위궁을 향해서 쏘아졌다.
피할 틈도 없이 위궁의 옆, 나무에 틀어박혔다.
"항룡이십팔장(降龍二十八掌)?"
위궁은 대경하여 화살도 뽑지 못하고 물러났다.
노인의 장법은 너무나 유명한 것이었다.
"설마, 노유곽 어르신 되십니까?"
"클클클. 젊은 것이 그래도 보는 눈은 있군. 알았으면 썩 물러나라."
"······개방은 일선에 물러났습니다. 이리 개입하시면 여러 가지로 일이 복잡해질 텐데요?"
"이미 죽을 날만 기다리는 노인이다. 이제 와서 네 주인이 무섭기라도 할까 봐?"
"······"
위궁은 잠시 노유곽과 명한 쪽을 번갈아 바라봤다.
수십, 수백 가지의 가정을 세워봐도 언제나 결과는 같았다.
‘······오제의 일인인 노걸개(老乞丐), 노유곽이라니.’
날고 기어도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위궁 자신이 화경의 고수라고 해도 마찬가지.
"다시 찾아뵙죠."
"클클. 배웅은 안 한다."
숲의 그림자 속으로 위궁이 물러났다.
#
위궁이 물러나고 난 뒤.
노유곽은 허리를 툭툭 두드리며 모닥불 앞에 앉았다.
너무 자연스러운 동작이라 명한은 제지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크으윽."
아니, 그보다는 은소소의 부상이 먼저였다.
황급히 마차 안으로 뛰어들어가 약을 챙겨 나왔다.
옷자락을 뜯어내고 비령시가 관통한 부위에 약을 부었다.
비령시 끝에는 독이 묻어있기 때문에 응급처치가 우선이었다.
"독기를 한곳으로 몰아. 내가 빨아낼 테니까."
"젠장, 방심했어. 내기를 한곳으로 집중시켰으면 막을 수 있었을 텐데."
"후회는 나중에 하고."
명한이 상처 부위에 손을 얹고 독기를 빨아냈다.
지독한 독이지만 그의 독단에는 미치지 못했다.
순식간에 몸으로 흡수되어 양분이 되었다.
"덧나지 않게 잘 묶어 둬."
"이런 상처 별거 아니야."
"그래도 잘 묶어. 흉터가 남으면 그건 그것대로 속상하니까."
"······칫."
혀 차는 은소소를 뒤로 명한이 몸을 돌렸다.
급한 불을 껐으니, 이젠 노유곽의 차례였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구명의 은혜, 감사드립니다."
"클클클. 이 늙은이가 본디 남 일에 끼어드는 취미는 없다만······네놈이 그래도 의리는 있다 싶어서 한 수 거들었다."
"그래 봐야 한참 부족한 객기에 불과했죠."
"세상사 객기와 용기를 누가 구분할까. 물러남 없이 맞서는 모습에는 부족함이 없다."
노유곽은 모닥불 불빛에 노곤한 미소를 지으며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강맹한 기운을 날리던 고수의 모습은 없고, 느긋한 노인의 모습만이 가득했다.
‘노유곽. 노유곽. 설마 그 오제, 노유곽인가?’
명한은 그 모습에서 익숙한 부분을 읽었다.
"실례가 아니라면 노 선배님께 술을 한잔 올릴까 합니다."
"오······! 젊은 친구가 그래도 경우는 있군. 무슨 술이지? 죽엽청? 오엽주?"
술이라는 말에 금세 눈을 반짝이는 노유곽.
‘정말로 오제, 노유곽인가 본데?’
술을 좋아하고 맛있는 음식을 찾아서 떠도는 걸인.
삼왕 오제의 일인이며, 한때 중원 최고수를 놓고 다투던 기인이기도 하다.
"향아야, 마차 안에서 술을 꺼내오거라."
"네, 도련님. 어떤 술을 꺼내 갈까요?"
"전부."
"네?"
"전부 다 가지고 오너라."
상대가 오제 중 하나라면 아끼는 건 말이 안 된다.
이런 노상에서 오제를 만날 확률이 얼마나 될까?
그야말로 벼락 맞을 수준의 행운이다.
‘이런 곳에 노유곽이 있는 건 의문이지만······’
할 일은 분명했다.
"서쪽 황하루에서 특별히 취급하는 설매주입니다. 이건 백곡주, 저건 청루주. 독한 걸 찾으시면 분곡주와 노주도 있습니다."
"오, 오오오. 젊은 친구가 술장사라도 하나?"
"운이 좋아, 황하루 주인과 인연을 맺게 되었죠. 넉넉하게 실어 두었으니 마음껏 드시지요."
"이거, 이거. 선행하면 복이 온다더니 딱 그런 모습이구만. 내, 젊은 친구 성의를 봐서 사양은 안 하겠네."
침을 줄줄 흘릴 것 같은 얼굴로 노유곽이 술로 손을 뻗었다.
잔도 필요 없었다.
병째 들고 벌컥벌컥 마셨다.
"크아아! 이거 맛있군! 황하루의 술맛이 그리 좋다더니, 오늘에야 맛을 봐! 하하하하!"
"넉넉하게 있습니다. 천천히 맛을 보시죠. 향아야, 어르신께서 약주 하시는데 가볍게 곁들일 안주가 있을까?"
"네! 금방 만들어 드릴게요."
"어이쿠, 내가 젊은 처자를 귀찮게 한 건 아닌지 모르겠네."
"아닙니다, 어르신. 구명을 받았는데 대접에 소홀함이 있어서야 쓸까요. 편히 먹고 마셔주시면 저희가 감사할 노릇입니다."
명한은 한 점 거짓 없이 대꾸했다.
노유곽 같은 고수에게는 어설픈 셈 따위는 통하지 않는다.
단순함이 최선의 대응이었다.
"클클클. 젊은이가 참 경우가 있군. 노유곽 이름 석자 들으면 별별 난리를 다 겪곤 하는데."
"어르신께서도 저희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으시지 않았습니까. 전 그저 구명해 주신 은인에게 예를 다할 뿐입니다."
"하하하. 그래, 그래. 네 말이 옳다. 오늘은 내 여기서 코가 삐뚤어지게 마셔야겠다."
이젠 아예 양손을 다 동원해서 술병을 쥐었다.
하나하나가 도수 높은 술이었지만, 노유곽의 주량은 이를 훌쩍 뛰어넘었다.
먹고 마시는 데는 천하에 적수가 없었다.
"오! 저 뱀도 안주인가?"
"쉬이익!?"
밤새워 먹고 마셨다.
#
이른 새벽.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명한이 일어났다.
전날, 노유곽에 말려서 술 대작을 하다 보니 취해서 뻗어버린 것이었다.
환골탈태를 한 몸이라도 주기를 빼지 않으면 취하는 건 매한가지였다.
노유곽 왈, 취하지 않으면 왜 마시느냐.
명한은 그 말을 거부할 수 없었다.
"클클클. 일어났는가?"
"아, 어르신. 그리 마시고도 멀쩡하신 겁니까?"
"네놈이 먹은 쌀보다 몇 배는 더 마셔왔다. 동정호를 다 술로 채워서 마셔도 부족하지."
"주량만큼은 천하제일입니다."
"클클, 농은. 와서 앉거라."
툭툭, 치는 손길에 명한이 쪼르르 엉덩이를 붙였다.
"재주를 익힌 지는 얼마나 되었지?"
"무공을 묻는 거라면, 채 일 년이 되지 않았습니다."
"일 년이라. 천하의 기재가 여기 있었구만."
난데없는 질문이지만, 명한은 침착하게 답했다.
노유곽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의미 없어 보이는 행동이라도 무시할 수 없다.
"거, 바닥에서 나뭇가지나 하나 주워봐라."
"······이 정도 크기면 될까요?"
"그래. 다리는 좌우로 벌리고. 어깨를 살짝 내리면서. 손에 힘을 주고."
툭툭. 노유곽은 나뭇가지로 명한의 몸을 두드리며 자세를 가르쳤다.
왜? 어째서? 어떤 자세인지?
명한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냥 말없이 노유곽의 손짓에 따라서 자세를 잡을 뿐이었다.
"흠. 그럭저럭 자세가 나오는군."
"이게 무엇입니까, 어르신."
하나의 형(形)이 완성되었을 때.
그제야 물었다.
"대충 떠돌이 개나 때려잡는 방법이다. 앞으로 그 검은 놈들 화살을 보면 이걸로 때려잡아라."
"비령시를 말입니까?"
"비령은 무슨. 흐물흐물하니 냇가의 멱만 못하더만. 점을 때리면 선과 면은 살지 못하니 알아서 멈출 게다."
"점을 때리면······"
명한이 저도 모르게 나뭇가지를 들고 휘둘렀다.
노유곽이 두드렸던 혈들 사이로 내기가 자연스럽게 흘렀다.
하나의 형(形)에 하나의 흐름이었다.
파르르 떨리는 나뭇가지에 노유곽의 눈이 커졌다.
"허. 이거 완전 난 놈이군. 형 하나를 가르쳤더니, 그 안에서 기의 흐름을 잡아?"
"어르신께서 도와주신 것이 아닙니까?"
"몇 대 두드려서 정수를 짚을 줄 알면 세상에 고수가 아닌 놈이 있을까."
"그럼 어르신께서 가르쳐 주신 이 봉법이 저와 아주 잘 맞나 봅니다."
"그놈 혓바닥은 더 좋구나."
웃는 노유곽 앞에서 명한이 연거푸 나뭇가지를 휘둘렀다.
어설펐던 동작은 조금씩 자리를 잡아갔다.
형에 실린 내기의 흐름 역시.
바람 소리가 매서웠다.
"좋다. 힘을 주어 뻗어감에 집중한다면, 비령이 아니라 그 할애비가 와도 떨어뜨릴 수 있을 게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명한이 냉큼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고작 동작 몇 개였지만, 가르친 사람이 오제였다.
엄청난 행운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럼 이 늙은이는 이만 가보마. 연이 있다면 또 만나겠지."
연이 되어 한 수 가르쳤으니, 이것으로 끝.
노유곽은 그대로 자리를 뜨려 했다.
"어르신. 실례가 아니라면 가시는 길, 제가 모시고 싶습니다."
하지만 명한은 그런 노유곽을 놓칠 생각이 없었다.
‘시기는 이상하지만, 노유곽이 이곳에 있다면 이유는 하나야.’
반드시 잡아야 했다.
"클클클. 바람 따라 거니는 것이 이 노부니라. 너희와 같은 결이 아니니, 포기하거라."
"가는 곳마다 술을 대령하겠습니다."
"으, 음······!?"
일단은 술.
"그놈 예의는 있구나. 하지만 노부는 노숙과 산행이 일상인 사람이야. 너희같이 곱게 자란 아이들이 따라올 길이 아니다."
"매일같이 안주도 대령하겠습니다. 어르신 가는 길에 고생 좀 한다고 대수겠습니까."
"허어, 그놈이 참."
그리고 입안의 혀 같은 태도였다.
노유곽이 산천을 유랑하는 걸인임은 맞지만, 수발을 밀어내는 사람은 또 아니었다.
맛 좋은 술에 달콤한 안주까지 맛봤으니, 거절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 봐야 며칠 못 가 포기할 거다."
"그럼 제가 고작 그 정도의 사람밖에는 안 되는 것이지요. 부디 어르신을 모실 기회를 주십시오."
"그놈 참······누구를 닮은 건지. 마음대로 해라. 힘들다고 불평해도 노부는 신경 쓰지 않는다."
"네, 어르신."
필요하면 마차도 금괴도 온갖 보석도 다 버린다.
지금 최우선 목표는 노유곽.
찾아온 행운은 놓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