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31/235)

행운은 알아서 찾아온다

제갈가 병력 상당수가 죽었다.

살아남은 이들 역시 멀쩡하지는 않았다.

팔다리가 부러진 건 약과.

혈맥이 꼬여서 주화입마에 빠진 이들도 여럿이었다.

[추신 : 제갈가의 명성을 생각한다면 침묵하시오]

"······"

하지만 그럼에도 제갈가는 움직일 수 없었다.

제갈 수가 죽고 유폐에서 풀려난 제갈 첨도, 부상에서 회복한 장로들도 마찬가지였다.

핏줄이 저지른 죄는 가문에 지고 갈 짐.

이걸 부정할 힘도 의지도 지금의 제갈가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제갈가는 현시점부터 봉문(封門)에 들어간다]

문을 닫고 침묵으로 일관했다.

중원에서 뭐라 떠들든 소문이 어떻게 나든.

그들은 그저 고개 숙인 채 입을 닫는 것이 최선이었다.

"이걸로 일단락 지었네요."

"남은 건 너희가 하기 나름이다. 무공도 현물도 모두 찾았으니 예전의 명성도 돌려놔야지."

"은공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무너진 제갈가와 다르게 흑점은 그야말로 날개를 달았다.

막대한 현물을 바탕으로 옛 선들을 회복하니, 등 돌리고 떠났던 사람들도 금세 돌아왔다.

오월상단 역시 모든 빚을 탕감하고 순식간에 거래처를 늘렸다.

"여기 몇 가지 지침을 남겨 두고 갈 테니, 상황이 막힌다 싶으면 확인해라."

"떠나시는 건가요?"

"이곳에서의 일을 마무리 지었으니, 본래의 목적으로 돌아가야지."

"어디로 가시는지 알 수 있을까요?"

"호북지방. 무당파를 거쳐서 소림으로 올라간다."

"무당파요?"

이월은 소백이 천마의 자식임을 안다.

소림은 사절이니 그렇다 쳐도, 무당은 의외였다.

"무당파에서 챙겨갈 물건이 있거든."

제갈가 비고에서 찾은 악보.

악보의 원주인은 다름 아닌 무당의 인물이다.

설정의 흐름대로라면 이 악보는 막군천의 손에 들어가 그를 절대고수로 만들어준다.

하지만 미쳤다고 그 꼴을 지켜보겠는가.

가는 길에 겸사겸사 남의 기연부터 빼먹을 심산이다.

"가시는 길에 저희가 돕지 않아도 괜찮을까요?"

"너희가 오면 흑점은 어떻게 하고? 전창소를 주먹으로 두면 너희가 머리로 남아서 운영해야지."

"일월 언니도 왔고······"

"어찌 됐든 일월은 죄인 신분이야. 그녀를 고깝게 보는 흑점 사람도 많을 텐데 중책을 맡기면 분란만 생긴다. 이월, 네가 흑점을 관리해."

"그건 그렇지만······"

이월이 우물쭈물 말을 잇지 못했다.

"에잇! 언니, 말을 제대로 해! 나도 같이 따라가고 싶다! 은공 곁에 있다고 싶다!"

보다 못한 오월이 등을 떠밀며 소리쳤다.

몇 걸음 떠밀린 이월과 명한의 거리가 한 뼘으로 좁혀졌다.

붉어진 얼굴을 명한이 코앞에서 바라봤다.

"정말이냐?"

"그, 그······네. 소녀, 은공의 곁에서 계속 머물고 싶어요."

터질 것 같은 얼굴이지만, 끝까지 말했다.

연심난측이라 하지만, 이번에는 어쩔 수 없다.

생긴 것도 마음에 쏙 드는데, 위기에서 구해준 영웅.

그 배포와 치밀함은 중원의 난다긴다하는 영웅들보다 나으면 나았지만 모자라지 않다.

마음이 가지 않으면 되레 이상한 일이었다.

"내가 어디에 속해있는지 알면서?"

"소녀가 따르는 건 신교가 아닌 은공이니까요."

"내가 했던 말이군."

"은공께서 구해주신 몸. 곁에서 모시고 싶어요."

이유야 어떻든 마음은 진지했다.

명한이 그 시선에 설렘과 당황을 함께 느꼈다.

본래의 삶에서 이처럼 예쁜 여인에게 사랑 고백받을 기회가 어디 있었겠는가.

태연한 척하지만, 등줄기에서는 식은땀이 흥건했다.

"크, 크흠. 지금은 너나 내게 있어서 중요한 시기야. 흑점을 본래의 모습으로 돌리는 것이 우선이지."

"아······소녀가 부족한 모양이군요."

"아니. 크흠. 그런 의미는 아니야. 넌 충분히 예쁘고 자격이 있다. 다만, 큰일을 앞에 두고 있으니 당장 널 데리고 움직일 수 없다는 거지."

"그럼 소녀가 흑점을 본래의 궤도로 올릴 수 있다면, 그때는 은공 곁에 있어도 되는 건가요?"

"······"

뭐라고 거절을 해야 할까.

명한이 머리를 굴리다 잠시 멈칫했다.

‘아니, 왜 거절해야 하지?’

본래의 세계가 아니니까?

언젠가 떠날 세계라서?

그건 그냥 얄팍한 변명일 뿐이었다.

이곳에서 살아가는 자라면 응당 마음으로 답해야 한다.

"그래. 그때가 되면 네 마음에 답을 해주마."

"아······! 감사합니다, 은공. 그것으로 충분해요. 소녀, 이월. 최선을 다해서 흑점을 최고로 만들겠습니다. 그리고 그때. 다시 은공에게 다가갈게요."

사뿐하게 예를 올리는 이월.

하늘에 뜬 달처럼 예쁜 미소를 짓더니, 한 걸음 다가와 명한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피할 수 있지만, 피할 수 없는 그런 입맞춤이었다.

"작은 욕심······증표로 간직할게요."

무어라 답을 할 수 있을까.

명한이 겨우 웃음 비슷한 걸 만들어 이월에게 건넸다.

기절하고 싶을 만큼 달콤한 입맞춤이었다.

#

덜컹. 덜컹.

마차가 산길을 거칠게 굴러갔다.

"아주 얼굴이 찢어지겠어."

그리고 못지않게 거친 은소소의 말이 이어졌다.

황하루를 떠나서 지금까지.

썩 좋은 표정이 아니었다.

"남 얼굴 가지고 품평하는 건 그만두지?"

"그럴 거면 히죽대는 거나 그만둬라. 기루 계집이 입맞춤했다고 헤벌쭉하기나 하고."

"기루 계집이라니. 흑점의 책임자야."

"그거나 그거나. 하여튼 예쁜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니. 네가 천마와 다를 게 뭐냐?"

"거, 말을 해도."

명한이 입술을 비죽이다 그만두었다.

말로 설득할 영역이 아니었다.

"됐고, 오늘은 여기서 야숙하자. 더 가 봐야 민가가 나올 분위기는 아니네."

마차를 세우고 야숙할 준비를 시작했다.

흑점을 떠날 때 물자를 넉넉하게 챙겨온 터라 부족함은 없었다.

금세 사람 서넛은 넉넉하게 쉴 쉼터가 만들어졌다.

"이 속도로 달리면 호북지역까지 얼마나 걸리지?"

"넉넉하게 일주일. 쉬는 시간 줄이면 오 일이면 될 거 같은데."

"쯧, 머네. 굳이 무당산 쪽으로 돌아갈 이유가 있어?"

"말했잖아. 무당 쪽에 챙길 물건이 있다고."

"제갈가의 비고 같은 거?"

"이제 대충 감이 오나 보네."

은소소가 나뭇가지로 모닥불을 들쑤셨다.

타탁, 타탁. 불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피어올랐다.

"너 말이야. 그런 정보는 대체 어디서 구하는 거냐?"

"나름의 방식이 있어. 전에도 말했다시피 남의 집 비법은 묻는 게 아니야."

"그런 치졸한 짓은 안 해. 대신······"

"대신?"

안개처럼 불씨 사이에서 은소소가 잠시 망설였다.

입이 열린 건 꽤 시간이 지난 후였다.

"네 그 정보를 사용해서 사람을 찾을 수 있을까?"

"사람? 누군데?"

"그냥······꼭 찾고 싶은 사람이라고만 알아둬. 조건을 말하면 찾을 수 있겠어?"

"흠. 일단 얘기나 해 봐."

은소소가 말하기를 꺼리는 인물.

명한은 한 번에 감이 왔지만, 굳이 입 밖으로 거론하지는 않았다.

"내가 아는 단서라고는 두 가지뿐이야. 하나는 백은(白銀). 다른 하나는 응봉(鷹峰)."

"고작 단어 두 개로 사람을 찾아달라는 거냐?"

"제갈가의 비고도 찾고 그랬잖아. 귀신같은 정보면 또 모른다고 생각했지."

"흐음."

"어렵다는 건 알아. 하지만 나한테는 매우 중요한 일이야. 만약 찾아준다면,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네 편에 선다고 맹세할게."

쉽게 뱉을 수 없는 말이었다.

‘역시 그 사람을 찾으려는 거구나.’

명한은 은소소가 찾으려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챘다.

무당산 언저리로 가면 나오지 않을까 싶었던 부분.

배경 설정이 이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일단 노력은 한 번 해볼게. 하지만 너무 기대는 마. 단서가 너무 적다고."

"응. 고맙다, 소백. 어쩌면 그날 내기에서 너한테 진 게 행운이었는지도 모르겠어."

"뭐야, 천하의 광검이 그런 말을."

"나도 사람이야. 천마궁 안에서 미친년처럼 검만 휘두르는 건 단순히 좋아하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거지."

은소소가 천마궁 내에서 외톨이인 이유.

개인 사병은 꾸릴지언정 그녀와 연대를 맺는 소궁은 어디에도 없다.

그건 암암리에 인정되는 그녀의 소문 때문.

그녀가······

"······!"

"소백!"

명한의 사고가 이어지려는 찰나.

그와 은소소가 동시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밤하늘에 번지는 불빛처럼 선명한 살기를 감지했기 때문이다.

"암살자!"

황하루에서 한 번.

그리고 이곳까지.

암살자의 추격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하늘에서 비처럼 화살이 쏟아졌다.

촉에 독을 바른, 철로 된 철시였다.

두두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마차가 순식간에 벌집이 됐다.

"······비령시(飛靈矢)!"

화살의 특이점을 알아본 건 은소소였다.

나는 소리가 없고 촉의 예리함이 귀신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신교의 특수부대 ‘비위(飛僞)’의 상징이기도 했다.

"하! 혈염마녀, 이 늙은이가 정신 줄을 놨군! 하다 하다 신교의 특수부대를 움직여?"

"내각만이 아니라 부대까지 손을 대다니. 생각보다 많이 급한 모양이네."

"흥. 그렇다고 달라질 것 같아?"

은소소의 검이 깨질 것 같이 진동했다.

주변 먼지, 낙엽, 흙 등이 진동에 휘감겨서 검극에 달라붙었다.

검을 따라서 궤적을 이루는 흙색의 선.

순식간에 명한과 그녀를 감싸는 막이 생겨났다.

‘검기를 확장해서 검막의 요령으로 쓰고 있군.’

보통의 감각으로는 불가능한 수법.

천재인 은소소만이 할 수 있는 방식이었다.

"대단하지만 벗어날 수는 없다."

이때, 숲의 어둠 속에서 누군가 튀어나왔다.

나뭇가지를 밟고 허공에 몸을 띄우더니, 검은색 화살 한 대를 날렸다.

소리 없이 공간을 파고드는 비령시였다.

"아악―!"

결과는 앞서와 달랐다.

이 검은 비령시는 은소소의 검막을 뚫고 그녀의 어깨마저 관통했다.

단말마의 비명을 토하며 주저앉았다.

"검은 비령시······설마! 환사(幻射), 위궁. 당신이 이곳에 왔다는 건가!?"

"좋은 눈썰미다, 소백. 허나, 그 재주가 빛을 보는 일은 없겠구나."

"어째서 당신이 이곳까지?"

"나는 도구. 원하는 곳에 화살을 날릴 뿐이다."

본래의 습작에서도 비위의 습격은 있다.

하지만 비위의 대장인 위궁은 포함되지 않았다.

애초에 신교 십이걸(十二傑)중 하나인 위궁이 밖으로 도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는 일이기 때문.

‘젠장. 내용이 또 바뀌었어.’

암살자를 너무 쉽게 처리했기 때문에?

짚이는 구석이 너무 많았다.

"고통은 없을 것이다."

생각할 틈은 없었다.

위궁이 다시금 시위에 화살을 얹었다.

검은 비령시는 기공을 파훼하기 위해서 만든 신교의 비밀무기 중 하나.

게다가 그걸 사용하는 위궁 역시 화경의 고수였다.

명한이 이걸 막는 건 불가능했다.

‘은소소를 두고 도망가?’

그녀를 미끼로 쌍각사와 성성이를 쓰면 가능할지도.

"······빌어먹을."

하지만 몸은 이미 은소소의 앞으로 나와버렸다.

거짓된 삶 속, 가상의 인연이라고는 하지만, 저버릴 수는 없었다.

약은 척 이기적인 척하지만······

명한은 그런 사람이었다.

"어디 한 번 받아보자."

제갈 수도 이기지 않았는가.

전신의 모든 내공을 끌어모아서 양손에 집중했다.

검은 비령시는 수가 제한된 무기.

한 번만 막으면 가능성은 있었다.

투웅―!

"······크윽!?"

하지만 그 화살이 시위를 떠났을 때.

명한은 자신의 계산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층층이 쌓은 가이신공의 회백으로도 검은 비령시는 막을 수 없었다.

순식간에 내기가 찢겨나갔다.

‘이렇게 죽는다고?’

아득함이 아찔함의 경계에 닿는 순간.

"사내놈이 배짱은 있구나!"

황색 용이 검은 비령시를 휩쓸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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