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자의 책임
오월은 마차 가득 실려 오는 물자에 입을 떡 벌렸다.
상단 일을 해오며 수많은 셈을 해 봤지만, 지금 이 물자는 헤아리기가 힘들었다.
그만큼 많았다.
"제갈가를 통째로 털어왔다. 상단에서 소화되겠어?"
"저, 전부를 말인가요?"
"필요한 건 챙겨 두었으니까, 나머지는 군자금으로 써야지. 오월상단이 상대해야 할 건 어중이떠중이가 아니야. 천하상단이지."
"천하상단? 아니, 아니. 상대가 있는 건 당연하겠죠. 이 정도의 보물이면······"
마른 침을 삼킨 뒤, 오월이 머리를 굴렸다.
오월상단의 부족한 점은 굴릴 수 있는 현물과 그걸 지탱해줄 무력이었다.
‘현물은 충분하다 못해서 넘쳐. 그리고 무력은······’
돌아온 전창소와 흑뇌진결.
시간은 조금 필요하겠지만, 부족하지 않다.
"가능해요. 흑점의 부활을 알리면 그동안 등 돌리던 이들도 선을 댈 터. 이를 바탕으로 오월상단을 키우면 막아설 사람은 없을 겁니다."
"좋아. 육 개월을 줄 테니, 천하상단과 맞설 만큼 키워놔."
"육 개월······"
"적어?"
"아뇨. 해보겠습니다."
도전적인 목적이지만, 약한 모습 보이고 싶지 않다.
오월이 다부진 목소리로 답했다.
"좋아. 이제부터 상단은 전적으로 오월, 네가 관리한다. 상단 일에 관해서는 흑점 윗선의 지시도 듣지 마. 네가 주체가 되어서 굴리는 거다. 알았지?"
"네. 천하제일의 상단으로 만들어 볼게요."
"이제야 그럴듯한 얼굴이 됐네."
천하제일 거부 오월.
그 이름에 걸맞은 얼굴이었다.
"그럼, 다음 문제. 이월. 흑점에 연락은 넣었겠지?"
"네. 각지 분타와 본점 장로들에게 전부 서신을 돌렸습니다."
"반응은?"
"반반이에요. 목표를 달성한 이상 잠시 몸을 숙이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하는······"
"쯧. 그런 태도로 수그리고 있으니 흑점이 뒤통수를 맞는 거야. 칠 때는 확실하게 쳐야지. 장로들 의견 말고 네 의견은 어때?"
"전······"
이월이 잠시 망설였다.
흑점의 안주인으로 있지만, 원로에 속하는 장로들을 완전히 무시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계속 그럴 수는 없어.’
고민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뿌리를 뽑고 영역을 확장해야 한다고 봐요."
"근거는?"
"제갈가의 악행은 좋은 구실이에요. 신교에게 정도가 무너진 이후, 중원은 혼란스럽죠. 흑점이 파고들 부분은 차고 넘쳐요."
"옳다. 신교부터 정도. 웅크리고 있는 사도까지 전부 손을 뻗어서 망을 만들어 둬. 그 정보가 가장 큰 힘이 될 테니까."
"네. 명심하겠습니다."
흑점은 과거의 개방이나 하오문 이상 가는 잠재력을 지녔다.
제대로 다듬기만 하면 가장 큰 무기가 될 것이다.
"좋아. 그럼 나만 마무리하면 되겠네."
"제갈 수 말이죠? 그가 정말로 나올까요?"
"나와. 그런 인간에 대해서라면 잘 알고 있거든."
"위험하지는 않을까요? 제갈 수라면 칠룡 팔봉중 하나인데. 제갈가 일이 마무리된 이상······"
"마무리는 아니지."
걱정하는 이월의 말을 명한이 잘랐다.
"이득을 위해 세력이 싸우는 건 당연한 일이야. 하지만 제갈 수의 방식은 선을 넘었어. 이걸 갚아주지 않으면 안 돼."
"······"
"걱정할 필요는 없어. 제갈 수의 두뇌가 아무리 뛰어나도 넘을 수 없는 것이 있거든."
작중 인물은 작가를 넘어설 수 없다고 하든가.
역량을 비꼬는 말로 자주 쓰이기는 하나, 지금은 그보다 적절한 설명도 없다.
‘어차피 후일에 적이 될 놈. 미리 자르는 편이 낫지.’
키워서 먹는 취미 따위는 없다.
#
목(木)이라는 단어에 제갈 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단어의 뜻을 아는 건 칠룡팔봉의 일원들뿐.
창고를 털어간 무리에 막군천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면 절대로 나올 수 없는 단어였다.
"형님. 아무리 그래도 무당이 저희를 쳤겠습니까?"
"흥. 정의 운운하며 뒤를 치는 게 무당파 도사라는 것들이다. 기회라 생각했다면 거리낌 없이 움직였겠지."
정도의 의미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
그도, 막군천도 이 사실은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창고에 적힌 ‘목’자가 더 뚜렷할 뿐.
"흑점과 무당이 손을 잡았다 이건가요. 우리끼리 상대가 되겠습니까?"
"전력으로 싸운다면 무리겠지. 하지만 막군천 이놈이 날 불러냈다면 승산은 있다."
"승산이요?"
"목. 칠룡팔봉간의 약속 같은 거다. 우리 안에서 알력이 생기면 단기전으로 승부를 내자는 거지. 유치하지만······이걸 따르고자 하면 가능성은 있다."
제갈 수가 목자를 검으로 짓이겼다.
글자의 획 사이가 벌어지며 화살표와 비슷하게 바뀌었다.
그 방위는 선 곳을 중심으로 남동쪽.
"남동쪽으로 10리인가."
약속된 방위와 거리였다.
"모든 병력을 불러와라. 막군천을 친다."
"네!"
뒤통수는 마지막에 치는 놈이 승자다.
제갈 수는 승자이고 싶었다.
#
제갈가 남동쪽 10리 거리에 있는 작은 숲.
평소라면 고요함 속에서 새 지저귐만 들려올 공간.
하지만 지금은 많은 인기척이 그 안을 움직이고 있다.
"주변 인기척은?"
"고요합니다. 숲 가운데에 놓인 정자 안에 남자 홀로 앉아 있을 뿐입니다."
"막군천인가. 오만한 놈. 감히 자신을 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모양이군."
무리를 이끌고 나온 제갈 수였다.
소리 나게 이를 갈며 손짓했다.
은장대가 몇 개 대로 나뉘어 숲 전역으로 퍼졌다.
일제히 기습하여 막군천을 잡아먹을 계획이었다.
‘막군천을 죽이고 죄를 흑점에 덮어씌우면 그만이야.’
알든 모르든 상관없다.
정도의 대표 인사가 죽은 이상, 죄는 그 외의 조직에 덮어씌우는 것이 이득.
제갈가도 무당파도 긍정할 수밖에 없다.
"형님, 모두 자리를 잡았습니다."
"내가 먼저 간다. 신호를 보내면 일제히 공격해라."
"네."
병력을 모두 배치한 뒤, 홀로 정자로 향했다.
밤색 도포 차림으로 몸을 가린 남자가 그 가운데에 앉아 있었다.
"막군천. 약속대로 왔다."
풀잎을 밟으며 접근하는 제갈 수.
정원 가운데서 앉아 있던 남자가 고개만 돌려서 바라봤다.
그늘진 음영 속 희미하게 보이는 건 웃음이었다.
"옷자락을 걷어라. 날 비웃으려 하는 거냐?"
"······"
"막군천. 두 번은 말 안 한다. 얼굴을 드러내. 네 오만한 면상을 보고 직접 이야기해야겠다."
으드득.
부서질 것 같은 잇소리에 남자가 가볍게 어깨를 들썩였다.
그건 놀람도 당황도 아니었다.
웃음. 정확하게는 비웃음이었다.
"제갈 수. 제갈가의 지낭이라 하더니, 친구의 모습도 알아보지 못하는 건가?"
"······! 누구냐!?"
막군천의 목소리가 아니다.
제갈 수가 날카롭게 외치며 한 걸음 물러났다.
"내가 누구인지가 중요한가?"
"허튼소리! 네놈은 대체 누구냐!? 누군데 우리의 약속을 알고 있는 거지!?"
"칠룡팔봉의 약속 말인가? 중원의 용과 봉황이라고 하던데 우습지도 않군. 차라리 지렁이와 닭이라 말하는 편이 어울리지 않을까?"
"정체를 밝혀!"
제갈 수의 손이 소매 안쪽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손끝을 타고 빛을 가르는 건 한 치 반의 철침.
순식간에 거리를 삭제하고 남자의 얼굴을 노렸다.
우웅.
하지만 침은 더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보이지 않은 손에라도 잡힌 듯 남자 앞에서 그대로 멈췄기 때문이다.
"허공섭물? 아니, 묘한 기공이군. 누군데 이런 장난질을 치는 거지?"
"머리가 있다면 생각을 해라, 제갈 수. 제갈가를 털고 그 안에 낙서까지 남긴 사람이라면 무슨 의도로 이곳에 나타났을까."
"······네놈이군. 뒤에서 장난질을 치던 놈이."
"하하. 이제야 깨달은 건가?"
시원한 웃음에 제갈 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시작이 언제였는지는 감도 오지 않는다.
하지만 주검산장이 가문을 찾은 일부터, 일월의 거짓 정보에 속아서 허탕 친 일.
그리고 가문이 습격을 받은 일까지.
뒤에 누군가 있다는 건 어림짐작하고 있었다.
"막군천의 사주로 날 제거하려고 온 건가?"
"막군천이라. 아직도 그 인간 타령인가?"
"막군천이 아니라면 누가 있어서 약속을 안단 말이냐!? 흑점을 이용해서 날 엿 먹이는 수단 역시 막군천이 아니면 불가능한 이야기다!"
"정말로 열등감투성이군."
"······큭! 닥쳐라!"
제갈 수가 이번에는 부채를 꺼내 들었다.
심이 철로 만들어진 철선이었다.
찢어질 듯한 괴성을 토하며 순식간에 남자의 앞까지 날아갔다.
촤아아악!!
이번엔 철침처럼 완전히 막을 수 없었다.
한 걸음 물러나는 보법에 도포가 찢어졌다.
그리고 드러나는 남자의 얼굴.
"넌······누구냐?"
제갈 수 생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막군천도, 막군천 주변에서 움직이는 호위도.
칠룡팔봉이나 예의 주시하던 다른 세력의 인물도 아니었다.
전혀 모르는, 생판 남이었다.
"내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사실은 오늘 이곳에서 네놈이 죽는다는 거지."
"그냥 미친놈이었나? 감히 나 제갈 수를 죽여?"
"그래. 제갈가의 패륜아. 사람들을 납치하는 것도 모자라 아버지마저 유폐시킨 쓰레기."
"너······!"
"어떻게 알았냐고? 네놈이 이곳까지 나온 걸 보면 확실하거든. 가문이 그 꼴 났는데 반란이 아니면 나올 수가 없지."
잘린 도포자락을 걷어내며 명한이 웃었다.
습작에는 없는 내용이지만, 인물을 알면 상황을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제갈 수는 본래부터 역심이 강한 인간이었다.
언제나 우두머리가 되고 싶었던, 웅크린 이리.
이번 상황을 기회로 여기리란 건 불을 보듯 뻔했다.
"크으으윽. 네놈이 누구인지 무슨 속셈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 자리에 날 불러낸 건 실수야. 오늘 죽는 건 내가 아닌 네놈이니까."
"숲에 배치한 은장대를 믿는 건가?"
"······!"
"한심하군. 네놈같이 속 좁고 옹졸한 인간이 혼자 나올 거라 기대한 적은 없어."
― 크아아악!!
― 곰이다!! 거대 곰이 나타났다!!
― 조심해 발밑에 뱀이 있다!
― 전창서!? 흑점이다!
그리고 그 순간.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은장대에 앞서서 몸을 숨겼던 명한의 병력이었다.
쌍각사, 성성이, 전창서 등.
지휘관 없이 동떨어진 은장대를 잡아먹기에는 충분한 전력이었다.
흑점의 은밀함은 이런 장점이 있었다.
"너, 너!! 감히 네놈이 나 제갈 수를!!"
"그러니까 그건 자의식 과잉이라고. 네놈이 제갈 수인 거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아. 그냥 넌 패륜아에 쓰레기라서 죽는 거야."
"닥쳐!!"
제갈 수의 몸에서 강렬한 기운이 쏟아져 나왔다.
아직 화경에는 닿지 못한 절정 끝자락의 기운.
‘은소소와 거의 동급인가?’
서너 살 많은 나이를 고려해도 빠른 성취였다.
인간은 쓰레기가 맞아도 재능만큼은 확실했다.
"네가 내 기준점이 돼 줘야겠어."
하지만 명한은 그 정도에 기죽을 생각이 없었다.
차라리 이건 기회였다.
그동안 익힌 무공이 어느 선까지 먹히는지.
실전에서 확인할 기회.
‘이 정도는 넘어야 앞으로 견딜만해.’
양손에 독기를 두른 채 뛰어나갔다.
"독공! 설마, 당문에서 날 노린 거냐!?"
"그놈 참, 일관되네. 말했잖아. 네가 대단한 가치가 있어서 노리는 게 아니야. 그냥 쓰레기라서 죽이는 거라고."
교차한 양손에 튕겨 나가는 철선.
가이신공의 특성상 타격에 대한 반발은 뛰어났다.
내공을 중심선에 모아서 그대로 제갈 수의 가슴팍을 두드렸다.
‘얕아.’
하지만 제갈 수도 무공을 멋으로 익힌 건 아니었다.
타격을 입기 전에 몸을 띄워 충격을 줄였다.
핑그르 돌아 바닥에 떨어지는 모습은 꽤 유려했다.
"도륙을 내주마!"
제갈 수는 그것에서 멈추지 않았다.
바닥에 닿는 즉시 몸을 튕겨서 명한의 안쪽으로 접근했다.
철선에 주입한 내공은 날붙이처럼 예기를 이루었다.
검기의 그것과 같은 선기(煽氣)였다.
명한도 이것은 경시할 수 없었다.
양 주먹에 독기를 두르고 맞섰다.
선과 주먹이 쉼 없이 충돌했다.
"······"
그러기를 수 분.
명한의 입가에서 핏물이 흘러내렸다.
"말이 없어지셨나? 감히 나 제갈 수를 노린 대가를 치러라."
반면, 멀쩡해 보이는 제갈 수.
‘정식으로 붙으면 이 정도 차이인가.’
영약으로 내공을 불리고 가이신공으로 몸을 단련했지만, 순수 연차에서 부족하다.
명한은 객관적으로 절정 끝자락에 닿지 못했다.
"죽여주마!"
제갈서가 기세를 몰아 폭풍같이 달려들었다.
그의 선기는 철마저 잘라낼 듯 예리했다.
‘객관적인 평가는 이 정도면 됐어.’
어차피 순수한 실력으로 이길 생각인 건 아니었다.
지금 건 그저 자기 객관화를 위해 필요한 지표.
명한의 장점은 어디까지나 수의 이점이었다.
제갈 수의 선법은 회전하는 칼날.
그 연격은 날카롭고 무서우나, 되레 직선에는 약하다.
명한은 가슴팍을 쪼갤 듯 날아오는 선기를 가이신공으로 받으며 주먹을 앞으로 뻗었다.
내공과 독단의 분리.
말하자면 좌우호박, 쌍수제인이었다.
퍼엉!! 펑!!
명한의 가슴과 제갈 수의 가슴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충돌이 일어났다.
두 사람은 반대쪽으로 먼 거리를 튕겨 나갔다.
"쿨럭! 쿨럭!! 미, 미친놈······"
먼저 몸을 일으킨 것은 제갈 수.
하지만 그의 안색은 정상이 아니었다.
독기가 심장으로 파고 들어와 혈맥을 타고 돌았기 때문이다.
"세긴 세네. 까닥 잘못했으면 가슴이 잘릴 뻔했어."
반면, 뒤늦게 일어난 명한은 상대적으로 멀쩡했다.
조금 창백해진 얼굴과 찢어진 옷자락이 전부.
강력한 선기를 정면에서 맞은 것 치고는 상처가 적었다.
"쿨럭! 쿨럭!!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제갈가의 장점을 사용한 거지. 적을 알고 그에 대응하라. 제갈가의 선법은 분명 대단하지만, 일격 대응으로 가면 위력이 떨어져."
명한이 넝마가 된 옷자락을 뜯어냈다.
그러자 그 안에서 드러난 건 가로로 상처 난 혈독주갑.
싸움에 앞서 미리 향아에게 받아 둔 물건이었다.
"너······너! 네놈은 누구냐!? 대체 누구인데 나와 제갈가에 대해서 이렇게 잘 아는 거냐!?"
"말한다고 믿을까?"
"말해!! 대체 누군데 이러는 거냐!?"
"작가. 너라는 쓰레기를 창작한 사람."
"뭐?"
"그러니까 쓰레기를 치우는 것도 내 몫이어야 해."
쓸 때와 겪을 때는 다르다.
창작했으면 그에 따른 책임도 지는 것.
명한은 이를 피하고 싶지 않았다.
"크, 크르르륵. 나, 제갈 수가······고작 이런 미친놈에게 죽다니. 나 제갈 수가!!"
쿵.
피 끓는 소리를 내며 제갈 수가 무너졌다.
독단의 지독한 독기가 모든 혈맥을 녹인 터라 화타가 와도 부활은 무리였다.
"후······"
명한이 입가의 피를 닦으며 숨을 골랐다.
독을 쓰고, 갑주를 입고, 상대의 무공을 알면서도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아직 갈 길이 머네."
이 글이 내 글이다.
당당하게 외치기에는 아직 많이 약한 상태.
더 많은 기연이 필요했다.
정말로 더 많은 기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