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주를 계승합니다, 아버님
은장대가 거칠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오래 묵은 먼지가 안개처럼 퍼졌다.
‘어디냐!?’, ‘적은!?’ 그 위를 덮는 건 다급한 목소리.
수십의 인파가 건물 안을 가득 메웠다.
"이, 이게 어찌 된 일이냐!? 보고에는 수십의 무리가 있었다고 하지 않았나!?"
"분명 보고서에는 흑점 무리가 몰려 있다고······"
"그럼 대체 그놈들이 어디로 사라졌다는 말이냐!? 연기처럼 사라지기라도 했다는 건가!?"
제갈 운의 외침에 은장대 대원이 쩔쩔맸다.
분명, 수십의 사람이 모여있는 걸 확인했는데 귀신같이 사라지고 없다.
홀린 기분이었다.
"미련한 놈들. 바닥을 봐라."
상황을 바로잡은 건 제갈 수였다.
그는 구겨진 얼굴을 한 채, 건물 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뚜렷하게 보이는 끌린 자국이었다.
"미, 밀어! 상자를 밀어라!"
"젠장! 아래에 비밀통로가 있었다고?"
"계단입니다, 소주! 지하로 통하는 계단이 있습니다!"
상자를 걷어내자 계단이 나타났다.
수십의 사람이 사라지고도 남을 너비였다.
"형님, 지금이라도 쫓겠습니다."
제갈 운은 즉시 쫓아갈 채비를 취했다.
"멍청한 놈. 이 마당에 쫓긴 뭘 쫓는다는 거냐?"
"네?"
"당했다. 흑점 나부랭이들이 우리 기습을 어떻게 알고 몸을 피했을까? 사전에 전달받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사전에? 설마 은장대 안에 첩자가!?"
"하아. 이런 놈을 부관이라고 데리고 다니는 내 꼴이 우습군. 우리가 어떤 정보를 기반으로 흑점을 습격했는지 잊은 거냐?"
"아! 일월 말입니까?"
"어쩐지 불안하다 싶었어. 빌어먹을 계집년."
콰득. 제갈 수의 손아귀에서 나무 상자가 부서졌다.
방법은 모르겠지만, 거짓 정보로 자신들을 이곳으로 유인한 건 분명한 사실.
‘······그렇다면 노림수는 비어있는 본가인가?’
너무 뻔한 수법에 당했다.
"병력을 돌린다. 놈들이 노리는 건 본가가 분명해."
"하지만 본가에는 가주님과 장로님들이 계십니다."
"흥. 뒷방 늙은이들 따위. 판을 짠 놈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머리를 굴릴 줄 아는 놈이라면 전력 분석은 끝냈을 거다. 늙은이들로는 못 막아."
"자, 잠시만요 형님. 그럼 그놈들이 설마 지하 감옥을?"
"그래. 발각되면 너나 나나 명줄 유지하긴 힘들다."
가주마저 속이고 유지했던 지하 감옥.
공개되는 날에는 가문의 지위조차 유지하기 어렵다.
‘어떤 놈이냐. 어떤 놈이 감히 나 제갈 수를 이렇게 엿 먹인단 말이냐.’
이를 갈며 걸음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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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취."
"앗! 괜찮으세요, 도련님?"
"어, 어. 괜찮아. 어떤 놈이 내 욕을 하나 보네."
명한이 코를 훌쩍이며 감옥 안쪽을 훑었다.
밖은 이미 정리되어 대부분 병력을 무력화한 상황.
가주인 제갈 첨을 비롯하여 장로들까지 전부 제압해 두었다.
"은공. 은공.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까요."
물론, 일월을 비롯한 갇혀있던 이들 역시 구했다.
상태가 안 좋은 이들은 미리 밖으로 후송하고, 나머지는 이곳에서 추스르도록 했다.
아직 시간은 넉넉했다.
"몸으로 갚아."
"······네?"
"은공! 그렇게 말하면 오해합니다!"
"틀린 말은 아니니까. 넌 흑점에 지은 죄가 많아. 나가게 되면 평생에 걸쳐서 갚는다는 생각으로 일해."
"아······! 몸이 뼛가루가 되도록 일하겠습니다."
이월이 중간에 끼어들긴 했지만, 의미는 제대로 전했다.
일월은 흑점 입장에서는 배신자.
의도했든 아니든 달라질 건 없다.
갚으려면 평생도 모자라다.
"자자. 그럼 남은 이들은 밖을 좀 돕고, 성성이는 가서 바구니 들고 따라와라."
"크엉."
"은공, 저희도 돕겠습니다."
"돕긴 무슨. 너흰 가서 화풀이나 하고 있어. 널리고 널린 게 제갈가 놈인데, 죽은 사람 생각하면 분풀이라도 해야지."
"그, 그래도 되나요?"
태연한 말에 이월에 되레 당황했다.
기습작전을 펼쳤지만, 상대는 중원의 명문가.
뒤를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능력 뒀다가 뭐할 건데? 제갈가가 사람을 납치해서 고문하고 있었다는 거. 사람들한테 안 알려? 그 정도 당했으면 밖에 가서 분풀이한다고 사람들이 손가락질할까?"
"······"
"왜? 명예니 도의니 그런 거 따질 거 같아? 너희가 뭐 애들이냐? 알아서 선만 잘 지키면서 하라고. 힘없는 애들을 죽일 것도 아니잖아."
"그런 짓은 안 합니다!"
"그럼 됐네. 제갈가 머저리들한테 가서 말해. 우리가 흑점이라고. 너희가 잘게 뜯어먹은 그 들개가 힘을 길러서 왔다고."
툭툭.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에 이월이 끄덕였다.
그녀만 아니라 일월과 뒤늦게 들어온 전창소도 같은 얼굴이었다.
한 번 부서졌던 자존심이 다시 살아나는 느낌.
‘잘 다독여야 부려먹기 좋지.’
너무 수동적인 집단은 되레 짐일 뿐이었다.
"그럼, 나 진짜로 간다?"
"네, 네!"
후루룩 올라가는 모습은 꽤 귀엽기까지 하다.
명한이 피식 웃으며 지하 감옥 한쪽으로 걸어갔다.
‘제갈가의 창고는 외부에 있지만······’
찾는 물건은 밖이 아닌 안쪽에 있었다.
"성성아, 이 벽 좀 부숴줘."
"크릉."
일월이 갇혀있던 방 건너편 벽.
성성이가 힘을 주어 통째로 무너뜨렸다.
뻥 뚫린 벽은 굽이친 통로 몇 개로 이어져 있었고, 이 중 하나는 커다란 방과 통해 있었다.
이곳이 바로 진짜 비고였다.
"이야. 많이도 모았네, 이 새끼."
제갈가에 속해있지만, 사실은 제갈 수가 모은 것들.
가문의 방침과는 별개로 그가 독립적인 세력을 규합하면서 모아둔 물건이다.
앞서 보았던 수감자들 역시 이 물건의 희생양일 것이다.
"성성아, 하나씩 담아."
"크릉!"
챙겨온 바구니에 창고의 물건을 쓸어 담기 시작했다.
각종 보석은 기본이고 내공을 증진 시키는 영약부터 구하기 힘든 검보까지 다양했다.
[이름 : 만년설삼]
[분류 : 영약]
[등급 : 지상급]
[설명 : 설산에 자생하는 신비한 약초. 먹으면 30년 내공의 증가와 함께 한기에 대한 내성이 증가한다. 기 수치가 일정 영역에 도달하지 못했다면 섭취가 불가능하다]
[이름 : 파산검보]
[분류 : 무공서]
[등급 : 지중급]
[설명 : 멸문한 파산문의 비전절기. 그 위력이 산을 쪼갠다 하여 파산이라 불렀다. 자격 없는 자라면 익히지 못한다]
[이름 : 오색칠주]
[분류 : 실]
[등급 : 지중급]
[설명 : 오색사의 몸 안에서 뽑아낸 실. 강도는 철 이상이며 탄력이 매우 뛰어나다. 실력 있는 장인이 다루면 천고의 보물을 만들 수 있다]
굵직한 것 몇 개만 뽑아도 이 정도.
칠룡이라며 떵떵거리며 뒤로는 참 열심히도 모았다 싶을 정도였다.
"어디 보자, 어디 보자. 이 안 어딘가에 있을 텐데."
하지만 명한이 찾는 물건은 이런 게 아니었다.
천마궁을 떠나서 소림사로 가는 길에 구하고자 한 핵심 물건 중 하나.
"아, 찾았다."
짐 더미에서 명한에 건져 올린 건 오래된 악보였다.
낡고 헤져서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모습이었다.
주변 금은보화와 비교하면 아무런 가치가 없어 보였다.
[이름 : 무상악보(無狀樂譜)]
[분류 : 악보]
[등급 : 천중급]
[설명 : 저자 미상의 악보. 신비로운 기운이 감돈다]
하지만 명한은 이 악보의 가치를 안다.
무림을 다 털어도 몇 없는 천중급의 무공비서.
아니, 무공비서의 일부분이다.
"그 고생을 한 보람이 있네."
주검산장에서 금 마차를 녹이면서 지금까지.
줄기차게 달려온 보람이 있었다.
‘남은 건 제갈 수를 처리하는 일인가.’
명한이 허리를 쭉 펴며 주변을 살폈다.
성성이가 열심히 퍼담은 덕에 비고는 텅텅 비어가고 있었다.
"뭐, 알아서 달려들겠네."
성인군자면 참겠지만, 제갈 수는 그렇지 않다.
인간적인 열등감과 텅 비어버린 창고.
도발은 충분했다.
#
"······"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돌아온 본가.
제갈 수의 눈에 들어온 건 무너진 폐가의 모습이었다.
무공을 익힌 대부분의 병력이 당했다.
그 안에는 가주인 제갈 첨도 장로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제갈 수!"
그리고 그곳에서 제갈 수를 맞이한 건 성난 목소리였다.
"아버님."
"아버님이라 부르지도 마라! 네놈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것이냐!? 제갈가의 지하에 사람들을 짐승처럼 가둬두다니!"
"······본 건가요?"
"허. 허허허! 이놈이 부정조차 안 하는구나!"
제갈 첨이 머리를 부여잡고 휘청거렸다.
지날 날의 격전으로 당한 부상이 다시 도지는 기분이었다.
"그런 사소한 문제는 차일로 미루죠. 얼마나 당한 겁니까?"
"미뤄? 미루자고? 지금 네놈이 벌인 일 때문에 가문이 이 꼴이 됐는데, 그런 말이 나와!?"
"이제 와서 체면치레는 그만두시죠. 흑점을 공격하고 일월 그 계집을 나포해 둔 건 아버님께서도 허락한 일입니다."
"네놈이 그래도! 흑점 그 계집은 어쩔 수 없어서 그랬다 친다만, 나머지는 뭐냐!? 대체 우리 제갈가를 뭐라고 생각한 게냐!?"
"······"
역정에 제갈 수의 얼굴이 굳었다.
그는 짧게 무언가를 중얼거리더니 뒤를 돌아봤다.
은장대의 전력이 뒤에 도열해 있었다.
"지긋지긋하군요."
"뭐?"
"당신들······노친네들의 고루한 고집 때문에 그동안 얼마나 많은 걸 놓친 줄 아십니까? 일찍이 일월 그 계집만 고문했어도 흑점을 손에 넣었을 겁니다."
"고, 고문? 네놈은 정도의 자부심도 없는 게냐!?"
"하. 자부심? 이미 무림은 마도천하입니다. 신교의 힘 앞에 굴복한 정도 따위에 무슨 자부심이 있다는 거죠?"
"네, 네놈이 마도에 빠졌구나!"
"마도천하에서 살아남는 길이 마도라면 차라리 그편이 낫겠죠. 고리타분한 방식으로는 무엇도 이루지 못합니다."
속내를 드러내는 것에 망설임이 없어졌다.
어차피 지하 감옥이 걸린 이상 속이는 건 의미 없는 짓이었다.
소주 직위를 빼앗기고 갇히거나······
"전부 제압해. 제갈가는 내가 접수한다."
"명을 따릅니다."
되레 뺏거나.
제갈 수의 명령에 은장대가 발 빠르게 움직였다.
정상적인 상태라면 모르겠지만, 제갈가의 대부분은 부상 당한 몸.
순식간에 제압당했다.
"제갈 수!! 네놈이 정녕 미쳤구나!"
"미친 건 아버님입니다. 기회를 잡지 못하고 뒷방 늙은이에 만족하는 고루한 인간."
"네, 네놈이!!!"
"차라리 잘 됐습니다. 이번 기회에 낡은 것들은 모두 처리하고 새로운 제갈가로 다시 태어나겠습니다."
"네······커억! 컥!!!"
제갈 첨이 피를 토하며 무너졌다.
깊은 내상을 입고 있던 몸.
아들이 자신을 배신했다는 사실에 기혈이 역류하고 말았다.
"어울리는 모습이군요, 아버님."
"네, 네가 제갈가를 몰락으로 이끄는구나······"
"흥. 뒷방에서 지켜보시죠. 제가 이끄는 제갈가가 어떤 모습이 되는지를."
제갈 수는 제갈 첨을 돕지 않았다.
쓰러진 모습 그대로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모두 제압했습니다, 소주. 아니, 가주님."
이미 얻을 건 다 얻어 두었으니.
"정비해라. 감히 대 제갈가를 건드린 자들에게 벌을 내리러 갈 테니까."
남은 건 징벌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