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가를 털다
성대한 환영식이 끝나고 주검산장은 빠르게 퇴장했다.
운검도 건넸고 앞으로 좋은 거래를 하자는 확답도 전했다.
서로가 만족하는 좋은 만남이었다.
"쯧. 뭔가 찝찝한데."
하지만 제갈 수만은 못내 만족스럽지 못했다.
수색의 실수로 굴욕을 당한 것도, 아무 일 없지 지나간 주검산장도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머리 위에서 놀리는 기분이었다.
"소주, 오셨습니까?"
"열어라. 계집은 어떻게 하고 있지?"
"여전합니다."
"흥. 주검산장 무리도 떠났겠다······아버님의 재가도 떨어졌으니 제대로 주리를 틀어봐야지."
이 기분을 풀 상대는 정해져 있었다.
체면이라는 족쇄가 풀렸겠다, 마음껏 토해낼 생각이었다.
그걸 위한 도구도, 사람도 준비는 되어 있었다.
"일어나라."
철제 울타리 앞에서 일월을 깨웠다.
머리부터 쏟아지는 찬물에 퀭한 눈이 겨우 눈꺼풀을 밀어냈다.
‘저 눈이야. 저 눈을 공포로 물들게 해주겠어.’
그래야 이 찝찝한 마음이 가실 것 같으니까.
"오래 기다렸지? 불청객도 갔으니, 이제부터는 온전히 너에게 집중해 주마."
"······"
"그게 두렵다면 지금이라도 흑점에 대한 걸 불어. 그리한다면 조금이라도 편······"
"불겠다."
"뭐?"
"불겠다고. 흑점의 위치."
제갈 수의 입술이 달라붙었다.
‘뭐하자는 거지?’
이런 반응은 예상하지 못했다.
"귀라도 먹은 거냐? 말하겠다고, 흑점의 위치."
"갑자기? 이제 와서?"
"너무 힘들어. 이렇게 버티는 것도 너와 말씨름 하는 것도. 차라리 모두 털어놓을 테니, 편하게 해줘."
"······"
낯선 반응에 제갈 수가 입만 벙긋거렸다.
정보를 말하겠다니 기뻐해야 할 일.
하지만 풀리지 않은 매듭마냥 기분이 찝찝했다.
"아니면 고귀하신 제갈가의 인물이 단순한 기분 풀이를 위해 날 고문이라도 할 셈인가?"
"······너. 대체 무슨 속셈이냐?"
"셈 같은 건 없어. 이대로 견뎌봐야 네놈의 시커먼 배만 불린다는 걸 알았을 뿐이야. 그냥······편해지고 싶다."
"가족들을 버리면서?"
"하. 하하······그걸 네가 말하니 우습네. 이미 한 번 버린 가족 아닌가?"
낙담한 목소리에는 거짓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 계집이 정말로 포기한 건가?’
의심은 되지만 마냥 무시할 수는 없었다.
"좋아. 그럼 어디 말 해봐. 쓸데없는 정보로 나를 교란할 생각이면 지옥을 보여줄 테니까."
"······잘 들어."
일월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정보.
아주 자세하고 정교한.
거짓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
"병력이 대거 빠져나갔습니다, 은공."
하루하고 반나절이 지난 후.
제갈가에서 대규모 병력 이동이 감지됐다.
선두에 선 제갈 수나 은장대의 규모로 볼 때, 전체 전력의 절반 이상임은 분명했다.
"일월의 연기가 제법 그럴싸했나 보군."
"사람 홀리는 재주라면 저보다 나으니까요."
"그럼, 분타 쪽으로도 연통을 넣어라. 서류나 물건은 빼앗겨도 좋지만, 사람은 안 돼."
"알겠습니다, 은공."
제갈 수의 본대가 분타에 당도할 즈음 낚시 매물을 빼돌리면 된다.
거리가 거리인 만큼 일을 처리할 시간은 충분하다.
"제갈가 내의 병력은?"
"가주인 제갈 첨을 비롯해서 장로 몇몇이 남아 있습니다."
"쯧. 제갈 첨도 같이 움직여 줬으면 좋았을 텐데. 못내 아쉽게 됐군."
"그는 제가 맡겠습니다, 은공."
말을 한 건 전창소였다.
"괜찮겠어? 제갈 첨이 동시대 오대세가 가주 중에서 최약체라고는 하지만, 화경에 든지 오래야."
"이긴다고 장담은 할 수 없지만, 지지는 않을 겁니다."
"여차하면 성성이나 쌍아가 붙으면 되니까. 은소소, 너는 어떻게 할래?"
"뭘 물어. 남은 장로는 내가 맡는다."
제갈 첨을 뺏긴 것이 못내 불만이라는 말투.
정마대전이 우려된다든지, 질 것이 두렵다든지.
걱정 따위는 한 줌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그래. 이게 광검이지.’
싸움 앞에서는 망설임이 없었다.
"좋아. 최대한 빠르게 치고 빠진다."
"네, 은공만 믿겠습니다."
"제갈가의 검을 구경이나 해보자고."
구구절절 설명은 필요 없었다.
"가자."
일월 탈환작전.
아니, 제갈가 초토화 작전의 시작이었다.
#
공격은 마치 들불과 같았다.
한 곳에서 번지기 시작하여 일순간에 전역을 뒤덮었다.
끄기 위해 물동이를 날라도 이미 늦은 후였다.
"급습이다, 급습! 모두 무기를 들어!!"
"젠장! 네놈들은 누구냐!? 누군데 감히 제갈가를 공격하는 것이냐!?"
"막아! 장로님들을 원호해라!"
남은 병력을 쥐어짜 방어를 시도했지만, 이미 주력은 빠져나간 지 오래.
제갈 첨과 장로들을 각각 전창소와 은소소가 맡고 나면 힘이 없었다.
이월이나 오월.
다른 흑점의 인원은 필요하지 않았다.
"크아아아앙!!"
"곰이다!! 곰이야!!"
"으아아악!! 이 곰은 대체 뭐냐!?"
"원숭이다, 이 머저리들아."
날뛰는 성성이.
"커억! 배, 뱀이 있어!"
"조심해! 바닥에 독사가 있다!"
"젠장! 무슨 뱀이 이렇게 빨라!?"
헤집는 쌍각사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절정 끝자락 급의 영물 둘이 날뛰는 상황에서 주력 부대가 없는 제갈가는 견딜 재량이 없었다.
순식간에 전력이 잘려나갔다.
"크으윽! 대체 네놈들은 누구냐!?"
"제갈 첨. 오랜만이군. 예전 거래 이후로 처음인가?"
"너······너는 전창소? 죽었던 것이 아니었나?"
"지옥에서 돌아왔다. 네놈에게 유린당한 흑점의 원한을 갚기 위해서. 네놈의 목을 이곳에서 베어주마."
"크으윽! 흑점! 빌어먹을 사파 나부랭이가 감히!"
제갈 첨과 전창소는 동수.
경험과 수의 다양함은 제갈 첨이 우위였지만, 힘은 전창소 쪽이 더 나았다.
흑뇌진결은 제갈가의 무공을 압도했다.
"하하하하! 제갈가의 검은 고작 이건가!?"
"빌어먹을, 이 계집은 대체 누구지!?"
"조심하게, 서 장로! 계집의 검이 매우 매섭네!"
"크으윽!"
반대쪽, 은소소와 장로들의 대결도 비슷한 형국.
그녀는 천마의 절기 없이도 그들을 손쉽게 몰아붙였다.
‘확실히 오대세가 중 최약체라 그런지 약하네.’
그리고 명한은 이 전황을 뒤에서 관찰했다.
"이월, 일월의 목소리를 따라가."
"네, 은공."
주목적을 이루기 위함이었다.
앞장서 뛰는 이월의 뒤를 쫓아서 제갈가의 장원을 가로질렀다.
"이 도적놈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사람 납치해서 날로 먹으려는 놈들이 누구보고 도적이래."
"컥!"
몇몇 제갈가의 무사들이 막아섰지만, 명한의 상대는 아니었다.
장력 한 방에 한 놈씩 고꾸라졌다.
"여기에요, 은공. 이 아래에서 목소리가 들려요!"
그렇게 달려서 도착한 장원의 구석.
겉으로는 평범한 공터로 보이는 공간이었다.
"향아야."
"저쪽, 구석의 나무가 이상해요."
제갈가다운 진법.
하지만 이곳에는 벽안지체를 지닌 향아가 있었다.
그녀의 눈은 진실을 꿰뚫는 창.
어설픈 진법으로는 가릴 수 없었다.
날듯이 뛰어간 이월이 나무를 부러뜨리자, 공간이 무너지며 아래로 이어지는 계단이 나타났다.
"성성아, 접근하는 적이 있으면 박살 내라."
"크아앙!!"
성성이를 경비로 입구에 세우고.
"들어간다."
"네!"
일월을 구하기 위해 아래로 향했다.
#
계단으로 이어진 지하에는 꽤 넓은 공간이 자리하고 있었다.
일자형 복도와 좌우로 배치된 감옥.
그 숫자와 규모가 어지간한 관청 이상이었다.
"으, 으으으······살려 줘."
"너흰 누구냐? 날 이곳에서 꺼내라. 어서!"
"도와주세요. 이곳에서 제발 꺼내주세요."
그리고 그 감옥 하나마다 사람이 갇혀있었다.
너덜너덜한 몸에 생기를 잃은 눈빛.
멀쩡한 사람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없었다.
게다가 바닥의 말라붙은 피나 얼룩진 쇠사슬 등은 이미 몇이나 이곳에서 죽어 나갔음을 증명했다.
이건 감옥이 아니었다.
고문장.
사람의 피와 살을 조이는 형장의 모습이었다.
"저, 저 사람은 하남일괴? 세상에, 복건 표국의 진표사? 대체 이 사람들이 왜 이곳에!?"
정보에 밝은 이월이 갇힌 이들의 면면을 알아봤다.
명망 있는 표국의 표사, 명성을 날리던 협객, 거칠게 무를 뽐내던 야인까지 다양했다.
"하. 이 새끼, 제갈 수."
습작 속 제갈 수는 분명 가문의 체면 때문에 일월을 단순하게 가두기만 했다.
하지만 제갈 수처럼 약은 놈에게 흑점이 유일할까?
‘진법으로 속여서 다른 놈들을 납치해 왔어.’
가문에는 흑점 하나뿐이라 속이며.
책에는 적지 않은 또 다른 이야기였다.
"네놈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여기는 함부로 들어올 곳이 아니다!"
기다렸다는 듯 사방에서 은장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흑점을 공격하기 위해 떠난 주력과는 별도의 병력.
이것만 봐도 제갈 수가 가문 몰래 사람을 부려왔음을 증명한다.
"명망 높은 가문이라 포장하고 다니더니, 순 양아치였네."
"감히!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이곳에 들어온 이상 살아나갈 희망은 버려라!"
"죽여!"
명한의 비웃음에 은장대가 곧바로 반응했다.
좌우로 흩어져 자연스럽게 협공하는 모습은 수준 높은 무력대의 면모였다.
"컥―!"
"도, 독!?"
하지만 그 이면에 썩은 내가 풍긴다면 대우해 줄 이유는 없다.
명한의 손짓을 따라 번진 독에 은장대가 무너졌다.
얼굴은 시퍼렇게 변색 되고 입에는 거품을 물었다.
대비되지 않은 독공은 천하의 어떤 기공보다 무섭다.
"비, 비열한 놈! 독을 쓰다니!"
"사람을 납치해서 이용하는 네놈들이 할 소리는 아닐 텐데?"
"크윽! 이자들은 무림의 해악이다! 정도를 위해서 하는 일에 부끄러움은 없다!"
"좀 부끄러움을 가져라, 이 새끼들아. 해악이면 태워죽이면 그만. 이렇게 납치해서 네놈들 배만 불리고 있는 거 아니냐?"
"끄으윽! 우리는 정도의······"
"정도, 정도. 지랄나셨네."
명한이 바동거리던 은장대를 발로 걷어찼다.
정도, 흑도, 사도.
어느 쪽에도 관심 없는 그이지만, 이런 이율배반적인 모습은 치가 떨린다.
‘제갈 수. 그냥 털어먹고 끝내려 했는데, 안 되겠어.’
습작의 품위를 위해서도 처리해야 했다.
"으, 은공! 이 앞에 언니가 있어요!"
"일단 가서 구해. 난 여기에 선물을 좀 두고 가야겠으니."
들뜬 이월은 먼저 보내고 명한이 자리에 남았다.
‘흑점에서 허탕을 치고 돌아오면 여기부터 오겠지.’
머리가 좋은 만큼 뭘 노렸는지는 단번에 간파할 것이다.
"머리 좋고 셈에는 밝지만······열등감투성이지."
명한은 이런 제갈 수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안다.
같은 칠룡 팔봉으로 묶이지만, 세간의 평에서는 가장 말석에 위치한 것이 제갈 수.
필두의 막군천에게는 뿌리 깊은 열등감이 있다.
‘막군천이 주검산장에 들른 일은 제갈 수도 알 터.’
그렇다면 미끼로 쓰기에는 충분하다.
[정도의 이름으로 옳지 못한 일을 바로잡는다]
슥슥, 바닥에 휘갈기는 글자.
필적조차 감별이 안 되는 악필이지만, 이것이면 충분하다.
[목(木)에서 기다린다]
제갈 수라면 충분히 알아들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