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수 위
정운은 급편으로 온 서신을 천천히 읽었다.
주검산장을 구해준 은인에게서 온 서신이었다.
인사치레를 제외하면 내용 자체는 매우 짧았다.
"장주, 무슨 내용입니까?"
"은공께서 제갈가와의 거래를 주선하셨어."
"제갈가? 갑자기 제갈가와 무슨 거래를······?"
산장 일원의 물음에 정운은 편지를 보여주었다.
편지 한쪽에는 누군가 쓴 것으로 보이는 시구가 적혀 있었다.
"이건, 운검의 면에 적힌 시구 아닙니까?"
"맞아. 은공께서는 이 시구를 제갈가에서 봤다고 해. 그쪽에 서신을 보내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이 어떤지 물어보시네."
"제갈가면 무림의 명문가. 운검이 정말로 그들의 물건이 맞는다면 주인에게 돌려주어서 나쁠 건 없습니다. 은혜를 입히는 느낌으로 거래처를 열 수 있으니까요. 다만······"
"어떻게 운검의 정체를 알았는가. 이게 궁금한 거지?"
끄덕이는 산장 일원의 모습에 정운이 고개를 저었다.
"그분은 혜안을 가지고 계셔. 천지만물을 꿰뚫어 보시지. 아무리 먼 곳에 있어도 우리의 사정을 낱낱이 들여다보고 있는 거야."
"그건······과한 말씀 같습니다만."
"의심하지 마. 그분은 그런 분이야."
"네, 네."
번뜩이는 정운의 눈빛에 남자가 움찔했다.
장원 전체가 빚을 진 인물임은 알지만, 정운의 태도는 어딘가 광적인 부분이 있었다.
‘하긴 가까운 사람 대부분이 죽었을 때 도와준 거니.’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일단 제갈가에 연통을 넣어. 그분께서 바라는 일이니 최대한 빠르게 처리해야지."
"으음. 그럼 방문 인원은 어떻게 정할까요?"
"격은 맞춰야 하니, 장로 분들을 모셔가야지. 아, 그리고 은공께서 요청한 사람이 한 명 있어. 일행에 포함해야 해."
"은공께서 요청한 사람이요?"
"응. 매우 아름다운 여성분이라 했어."
설명은 그게 끝?
남자는 의문으로 물었지만, 정운은 되레 이상하다는 듯 보기만 했다.
그제야 남자가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알겠습니다."
"그래."
명한이 전달한 내용.
그것이면 충분했다.
#
툭툭.
제갈 수의 손가락이 반복해서 탁상을 두드렸다.
생각이 깊어질 때면 나오는 그의 버릇이었다.
"소주, 편지에 뭐라 적혔습니까?"
"전대 가주님의 검. 운검을 주검산장이 가지고 있다는군. 그걸 돌려주겠으니, 자신들과 거래를 열자고 한다."
"가주님의 검이 그들에게 있었던 겁니까!?"
"그래. 가주께서 수리를 맡겼던 것이, 지금껏 잊혔던 모양이야."
사촌 동생 제갈 운은 반색했지만, 제갈 수의 표정은 여전히 펴질 줄을 몰랐다.
"걸리는 부분이라도 있습니까?"
"시기. 이제 막 늙은이들의 재가가 떨어졌다. 비고에 갇힌 그 계집의 주리를 틀 순간인데, 이런 제안이 들어온 것이 꺼림칙해."
"하지만 주검산장과 흑점은 관계가 없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 애초에 접점이 있었어도 별다른 의리가 있을 놈들은 아니고."
말하자면 기우에 가깝다.
‘하지만 왜 이렇게 불안하지.’
툭툭. 탁상을 두드리는 제갈 수의 손가락이 멈추지 않았다.
"안 되겠다. 주검산장에 서신을 보내. 검을 건네받는 장소를 제 삼의 영역으로 하자고."
"문외에서 운검을 받자는 말씀인가요?"
"영 불안해서 안 되겠어. 적어도······"
"그건 안 될 말이다."
마지막 말은 다른 방향에서 들려왔다.
제갈 수의 서재 입구 부근.
품 넓은 부채를 휘두르는 중년인이 그 주인이었다.
"아버님, 오셨습니까."
"그래. 안 그래도 소식을 전해 듣고 걸음을 서두르던 참이다."
"일을 처리한 뒤 보고드릴 생각이었습니다."
"안다. 하지만 운검을 받는 건 절대로 문외가 되어서는 안 된다."
"아버님."
"운검은 우리 제갈가의 상징적인 물건이다. 이를 밖에서 겁쟁이처럼 건네받으면 뭇 사람들이 우리를 뭐라 생각하겠느냐."
제갈가의 주인, 제갈 첨이었다.
꼬장꼬장한 그의 말에 제갈 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만에 하나 존재할 위험을 사전에 방비하고자 함입니다."
"주검산장에 맡겨 두었던 검을 찾는 일이다. 무슨 위험이 있다고 그리 유난을 떠는 게냐. 게다가 우리가 장소를 문외로 바꾸면 주검산장이 어떻게 생각할까? 자신들을 업신여긴다 생각할 거다."
"주검산장의 생각은 사소한 문제입니다."
"사소하긴! 최근에 막군천이 주검산장을 찾은 일을 모르고 있는 게냐!? 주검산장이 무림맹에 선을 댔다면 예전의 영광을 찾는 건 시간문제다. 우리도 그들과 우호를 다져야 옳아."
제갈 수가 입술을 깨물었다.
막군천, 이름 석 자는 썩 반가운 내용이 아니었다.
"하오나 아버님······"
"됐다. 군소리는 그만두고 주검산장을 맞이할 환영회나 준비하도록 해라."
"꼭 문내에서 그들을 맞이해야 하겠습니까?"
"이건 가주로서 내린 판단이다."
"알겠습니다. 대신, 문내의 경비는 제게 일임해 주십시오."
"으음. 알겠다. 다만, 손님들께 무례를 끼쳐서는 안 될 거야. 이해했느냐?"
그제야 제갈 수가 표정을 펴고 고개를 끄덕였다.
‘빌어먹을 늙은이.’
속마음은 아니더라도.
#
며칠 뒤 주검산장에서 제갈가로 마차가 도착했다.
장주, 정운이 포함된 유력 인사들이었다.
"하하하. 제갈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제갈가에서는 가주, 제갈 첨이 직접 마중을 나왔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주검산장의 장주, 정운이라 합니다."
"오. 선대를 이어 장주직을 이어받았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나이도 어린 데 매우 대견합니다."
"아직 배울 점이 많습니다. 선배님의 많은 지도편달을 부탁드립니다."
"하하하.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자자, 안으로 드시지요. 오시느라 많이 피곤하실 텐데, 방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별다른 조사나 탐문 없이 마차는 문턱을 넘었다.
가주와 장주가 직접 만나는 자리이니 이를 문제 삼을 사람은 없었다.
"잠깐 마차를 세워주시죠."
한 사람.
의심 많고 뒤끝 강한 제갈 수를 제외하면 말이다.
은색 장포를 두른 수십의 무리와 함께 나타났다.
"수아야, 손님들 앞에서 이게 무슨 짓이냐?"
"아버님, 어디까지나 기본적인 조사일 뿐입니다. 혹여나 불순한 무리가 섞여들 수 있으니, 잠시 무례를 범하더라도 용서해 주시기를."
"어허, 수아야!"
"경비는 제게 일임한다 하시지 않았습니까. 직분을 다할 뿐입니다."
제갈 수는 제갈 첨의 만류에도 멈추지 않았다.
‘확실히 의심스러워. 너무 공교롭단 말이지.’
하필 이 시기에, 이런 규모의 방문.
그의 촉각이 위기를 감지하고 있었다.
멍청하고 둔한 아버지는 모르겠으나, 자신만큼은 호락호락 넘어갈 수 없었다.
"정운 장주님,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제갈가는 친구의 방문을 이런 식으로 대하는군요."
"어디까지나 절차일 뿐입니다. 그럼."
정운의 못마땅한 표정마저 무시한 채 대동한 무사들을 움직였다.
제갈가의 무력부대인 ‘은장대’소속 무인들이었다.
주검산장 행렬 사이사이로 들어가 짐을 뒤지고 사람들을 살폈다.
‘어, 어허! 수아야!’ 제갈 첨이 발을 동동 굴러도 거리낌이 없었다.
"······"
제갈 수는 확신했다.
분명, 이 안 어딘가에 수상쩍은 무언가 있을 거라고.
너무 잘 맞아 떨어지는 우연은 우연이 아니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일 뿐이었다.
"소주, 이쪽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기도 별다른 건 없습니다."
"전부 장원 사람임을 확인했습니다."
"이상한 물건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왜일까.
주검산장 행렬을 먼지 하나까지 털고 있음에도 별다른 이상함을 발견하지 못했다.
은장대는 제갈 수 자신이 하나부터 열까지 단련시킨 정예.
집요하고 치밀하여 놓치는 건 있을 수 없다.
‘그럴 리 없어. 그저 우연이라고?’
제갈 수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흐음. 오래전 제갈가의 선대께서 맡긴 물건을 돌려주려 했을 뿐입니다. 친분을 다지고, 어쩌면 새로운 거래 대상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제갈가는 우리와는 생각이 다른가 보군요."
"크, 크흠. 정 장주. 우리 수아가 좀 예민했던 모양입니다. 수아야, 뭐 하고 있느냐? 와서 사과하지 않고!"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도박수는 과오일 뿐이다.
제갈 첨의 목소리에 짙은 노기가 실렸다.
"······아니, 아직 아닙니다. 저 시종은 누구입니까? 다른 이들과 다르게 유독 손에 상처가 적군요. 주검산장에서 일하는 이가 맞습니까?"
하지만 제갈 수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유독 도드라지게 하얀 얼굴의 시종.
남들과 다름은 의심의 시작이었다.
"이젠 산장의 시종까지 의심하시는 겁니까?"
"설명해 주시죠. 제가 알기로 주검산장은 위부터 아래까지 모두가 철을 만진다 들었습니다. 저 아이처럼 상처 없는 손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 시종 하나가 무슨 암살자라도 된다는 겁니까?"
"가능성은 있지 않습니까?"
"그럼 직접 확인해 보시죠. 내공이 있는지를 직접 살펴보면 될 일 아닙니까?"
정운은 손짓으로 시종을 불렀다.
무림에서 내공을 직접 살피는 건 거의 금기에 가까운 행동.
하지만 그만큼 의심을 풀기에는 최적의 수였다.
"자. 직접 손으로 찾아본 뒤 말씀하시죠."
"······"
제갈 수가 말없이 시종의 손목을 낚아챘다.
내공을 숨기고 있다 해도 이런 상태에서는 가릴 수 없다.
‘필시 이놈이 분명하다.’
제갈가의 독문 기공으로 시종의 몸을 살폈다.
"어떻습니까?"
"······"
"말씀해 주시죠, 제갈 선생님."
"아, 아무런 내공이 없군요."
하지만 시종의 몸에는 티끌만치의 내공도 없었다.
제갈 수의 얼굴이 굴욕으로 일그러졌다.
"수아야, 당장 장주님께 사과드려라!"
"크, 크윽."
"어서!!"
이번만큼은 아무리 제갈 수라도 고집부릴 수는 없었다.
일그러진 얼굴 그대로 정운을 향해서 허리를 숙였다.
언제나 남보다 잘났다고 생각하는 그로서는 최악의 굴욕이었다.
"천하의 제갈도 가끔은 실수를 하나 봅니다. 이번만큼의 특별히 용서해 드리죠."
"감사······합니다."
으드득.
이갈리는 소리도 감춰야 했다.
이번 일은 변명할 수 없는 실수였으니까.
#
"······후우. 은공의 말씀이 옳았네."
수색이 끝나고 난 뒤.
제갈 수에게 걸렸던 시종이 남몰래 한숨을 토했다.
그는. 아니, 그녀는 이월이 변장한 모습이었다.
"제갈 수는 의심이 깊어서 어떻게 해서는 꼬투리를 잡으려 할 거라더니. 미리 산공독을 먹지 않았다면 큰일 날 뻔했어."
명한이 주조한 특제 산공독을 마시고 들어왔다.
전신의 모든 내공이 흩어져 보름간 무공을 쓸 수 없게 되지만, 그만큼 효과는 발군이었다.
천하의 제갈 수조차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역시 은공께서는 모든 걸 들여다보고 계셔.’
감탄을 넘어서 경외심이 느껴질 지경이었다.
[······절대 포기 안 해]
그리고 그 순간.
"일월 언니."
저 멀리 어디선가 일월의 생각이 전해졌다.
자매들 사이에서만 통하는 통심의 거리까지 들어온 것이다.
[일월 언니! 나야 이월!]
[이월? 정말 이월이니!?]
[응. 나 이월 맞아. 언니······정말로 살아 있었구나]
[아, 아아······이월아. 이월아. 설마 너도 그 인간에게 잡혀 온 거니? 그런 건 아니지?]
[아니야. 난 은공의 계획을 전하기 위해서 제갈가로 직접 잠입했어]
[은공?]
[말하자면 길어. 일단 이것부터 기억해 둬. 언니를 이 지옥 같은 곳에서 꺼내줄 계획이야]
쌓인 말은 많지만, 시간은 여유롭지 않았다.
이월이 명한의 계획을 압축해서 전달했다.
[······미안해, 이월아]
[그런 말은 나중에. 꼭 꺼내줄게, 언니]
반드시.
이월이 속으로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