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26/235)

흑점을 손아귀에. 다음은?

명한은 흑뇌결과 흑뇌해도를 모두 익혔다.

하지만 등록되는 무공은 ‘진·흑뇌결’ 하나였다.

‘세상에 진이라니.’ 유치하기 짝이 없는 이름에 명한은 혀를 내둘렀지만, 손댈 방법은 없었다.

말 그대로 그의 무공은 진(眞), 흑뇌결이니까.

"진기 운행 방식이 잘못됐어."

진짜 흑뇌결을 익히자 이전 흑뇌결의 단점이 보였다.

이전의 흑뇌결도 그 자체로는 완성된 무공.

다만, 치명적인 단점이 존재했다.

그건 일정 경지 이상으로 올라갔을 때 발생하는 내기의 역행이었다.

전창소가 미쳐서 날뛴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바로잡을 수 있겠어?"

"흐름만 제대로 잡아두면 정신은 돌아올 거야. 다만, 그걸 하기 위해서는 내공이 부족해."

"내가 도와줘?"

"아니. 익숙하지 않은 내공이면 되레 충돌만 할 거야."

"그럼 어쩌게?"

은소소의 질문에 답은 미루고 시선을 옮겼다.

어딘가 멍한 얼굴의 성성이 쪽이었다.

겨우 정신은 차렸지만, 아직 멀쩡한 상태는 아니었다.

"성성이. 네가 날 도와줬으면 하는데."

명한의 목소리에 겨우 고개만 들었다.

‘저 원숭이에게?’ 은소소는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 쳤지만, 명한은 진심이었다.

지금껏 전창소를 제어하던 게 성성이다.

그만큼 익숙한 기운을 가지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돕고 싶다. 하지만 모른다. 인간의 방식]

쌍각사와 같은 방식의 전심통이 전해졌다.

성성이 역시 쌍각사 수준의 영물이라는 의미였다.

"네가 날 따르면 돼. 마음이 통한 주인과 영물은 기운의 합치에 어색함이 없어."

쌍각사와 마찬가지로 사역수가 되면 된다.

하지만 성성이는 선뜻 긍정하지 못했다.

그가 지금껏 지켜왔던 건 전창소.

아주 어릴 적에 구원받은 은혜에 대한 보답이었다.

"넌 충분히 했어. 이 사람도 깨어나고 나면 그 사실을 알 거야."

명한은 단번에 상황을 꿰뚫고 적절한 말을 건넸다.

성성이가 쌍각사 급의 영물이라면 남에게 보내는 건 아깝다.

이기적이지만, 그걸 택하는데 망설임은 없었다.

[알았다. 그를 구하는 것도 보은. 너를 따르겠다]

이내, 성성이가 결정을 내렸다.

큰 몸을 일으켜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명한의 앞에 몸을 쪼그렸다.

그 몸집이 거의 곰 만했다.

[성성이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성성이가 당신을 주인으로 인정합니다]

머리를 관통하는 느낌.

명한이 그 이어짐을 만끽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이로써 따르는 사역수는 전부 둘.

둘 모두 은소소 급의 최고위 영물이었다.

"그럼, 이 양반을 처리해 보자."

최고의 선물을 받았으니 그만큼 일해주는 것이 도리.

명한이 전창소의 등을 돌린 뒤 손을 얹었다.

의도를 읽은 성성이 또한 나란히 앉았다.

"내 기운에 맞춰서 따라와."

크릉, 성성이가 울음으로 답했다.

#

"마, 말도 안 돼!"

이건 이월의 첫마디.

"저, 정말로 전 장로님이세요? 정말로!?"

이건 오월의 첫마디였다.

내공을 바로잡은 전창소는 이내 정신을 차렸고, 그간의 상황을 깨달았다.

주화입마에 빠져서 이지가 흐려졌을 뿐.

기억까지 사라진 건 아니었다.

흑점으로의 복귀를 최우선 과제로 택했다.

"오랜만이구나, 이월. 그리고 오월."

"세상에. 우리 모두 장로님은 돌아가셨다고 생각했어요!"

"문중에서 제사까지 지냈었다고요!"

놀라는 둘을 향해 전창소가 쓰게 웃었다.

사실상 죽은 것과 다름없었다.

거대원숭이 성성이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그 뒤에 찾아온 명한이 돕지 않았다면.

‘광인이 되어 내 손으로 흑점을 헤쳤을 수도 있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반가운 건 알겠지만, 밀린 이야기는 따로 하자고. 지금 중요한 건 다른 문제니까."

명한이 적당한 시점에서 끼어들었다.

"아, 그렇죠. 죄송해요. 생각지 못한 일에 너무 당황했네요."

"이해해. 죽었다고 생각한 사람이 돌아왔으니까."

"그럼, 흑동 안쪽에서 흑뇌결도 구해오신 건가요?""글쎄. 이걸 흑뇌결이라 해야 할까?"

"네? 설마 흑뇌결이 없었어요?"

이월이 깜짝 놀라서 토끼 눈을 했다.

"은공, 어린아이들입니다. 그만 놀리시죠."

그러자 전창소가 바로 끼어들었다.

명한이 흥 식은 얼굴로 입술을 비죽거렸다.

"재미없기는. 이럴때 아니면 써먹을 수 없는 패인데."

"네? 써먹을 수 없는 패라니, 무슨 의미인가요?"

"찾은 건 흑뇌결이 아닌, 진·흑뇌결이다. 이름이 유치하니까 흑뇌진결로 부르자."

"흑뇌진결······?"

여전히 토끼 눈인 이월이 전창소를 봤다.

답 대신 끄덕이는 전창소.

체득한 당사자이니 이전의 흑뇌결과 흑뇌진결이 다르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알았다.

"내가 흑동 깊숙한 곳에 거주하고 있던 건 흑뇌결의 결함으로 인한 주화입마 때문이었다."

"주화입마요!?"

"그래. 흑뇌결은 절정 상부까지는 안전성이 보장되나, 그 너머로 가면 급격히 불안해진다. 내가 그런 경우였지."

"그, 그런. 흑뇌결에 그런 문제가 있었다니······"

"대부분의 문도가 몰랐지. 절정 상부가 쉬운 경지도 아니고, 익힌다 하더라도 그 너머를 보는 건 더욱 드물었지."

"그럼 지금은 괜찮아진 건가요?"

"은공 덕분이다. 은공께서 흑뇌결의 결함을 발견하시고 이를 보완하여 흑뇌진결을 완성하셨으니까."

"하······?"

이월과 오월이 같은 얼굴로 명한을 돌아봤다.

약을 쓰거나 때려서 정신 차리게 했다면 차라리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흑뇌결의 결함을 보완해서 완성된 무공을 만들었다?

이건 농담으로도 안 들릴 이야기였다.

"정말이다. 은공께서 전해주신 흑뇌진결이 아니었다면 나는 여전히 주화입마에 빠져있었을 거야."

"그럼, 정말로 소백 공자께서 흑뇌결의 결함을 보완했다는 건가요?"

"단순히 보완한 수준이 아니다. 한 단계 높은 수준으로 이끄셨지. 그리고 그 덕에 나는······"

전창소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검은색의 기운이 빛처럼 일어나더니 뚜렷한 형태로 주먹에 맺혔다.

"강기(姜氣)!?"

"맙소사! 전 장로님, 화경에 이르셨군요!?"

입신화경(入神化境).

인간이 신이 되는 초입이라 칭하는 경지.

기의 수발이 자연스럽고, 수납과 정제 역시 이전과는 아득하게 다른 역량을 지닌다.

강기는 일종의 상징과도 같은 힘.

이전의 흐리고 불완전한 기운과 다르게 뚜렷하고 강하게 응집된 형태의 힘이다.

"모두 은공의 덕이다. 저분께서 흑뇌진결을 완성하지 않았다면 난 여전히 주화입마에서 헤매고 있었겠지."

"······정말로 소백 공자님께서 하신 일이군요."

"나는 개인적으로 평생을 다해 갚을 은혜를 입었다. 그리고 흑점의 입장에서도······"

"평생을 따라도 모자랄 은혜네요."

단순히 흑뇌결을 구해온 수준이 아니다.

결함을 고치고 화경의 고수마저 데려왔다.

3대. 아니, 흑점 대대로 갚아도 모자랄 은혜였다.

이월과 오월이 동시에 명한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은공께 인사 올립니다."

"그간의 무례를 용서하세요."

거래를 받느니 마느니.

이제 그런 대화는 의미가 없었다.

흑점은 이제 명한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

"이제 어떻게 하면 되죠?"

대충 상황이 수습된 이후.

이월이 대표로 명한에게 물었다.

"할 일은 크게 두 가지야. 첫째는 일월을 구하는 것. 위치와 경비 등은 내가 알아. 자세한 건 조금 후에 전달하지."

"두 번째는 무엇인가요?"

"제갈가의 비고를 터는 거."

"네?"

금괴를 구하고 오월상단을 지원하는 일.

자금 마련이라는 명목으로 진행된 계획은 제갈가의 비고를 터는 일까지 이어져 있다.

"현재 일월이 구금된 장소가 제갈가의 비고야. 흑점을 공격하는 일을 주도한 것이 제갈가지."

"제갈가! 정도의 필두라는 이들이 그런 비열한 짓을······!"

"머리가 좋은 만큼 무엇이 필요한지 명확하게 간파한 거지. 비열함은 둘째 치고, 셈에 있어서는 무림맹 중 제일이야."

"그런 곳을 우리가 공략할 수 있을까요?"

"정면으로는 어렵지."

다른 곳도 아니고, 제갈가에서 관리하는 비고.

고수가 즐비하고 방비 또한 단단할 것이다.

화경의 고수가 합류했다고는 하지만, 절대로 쉬운 상대는 아니다.

‘오대 세가 중 최약체라고는 하지만 조심은 해야지.’

사전 작업이 중요했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너희 자매의 능력이 필요해."

"네?"

"통심(通心). 흑점에서도 극소수의 이들만이 타고나는 재능이지. 형제나 자매에서 발생 빈도가 높고."

"······은공께서는 정말로 모르는 것이 없군요."

"말했잖아. 내가 아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고."

"어떻게 쓰는지가 중요하죠. 네."

통심. 단어 그대로 마음이 통하는 능력이다.

영물의 전심통과 비슷하나, 이건 타고난 재능에 가깝다.

말없이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는 것이 가능하다.

"우선 제갈가에 사람을 투입 시킬 거야. 너희 둘 중 한 명이 그 일행에 합류해."

"제갈가에 사람을요? 무슨 수로······?"

"방법은 내가 낼 테니 걱정하지 마. 둘 중 일월과 통심이 잘 되는 사람은 누구지?"

"제가 오월보다는 조금 나요."

"언니, 너무 위험해."

"일월 언니를 구하는 일이야. 가능하다면 뭐든지 감수해야지."

오월의 걱정 어린 시선에도 이월은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좋아. 이월은 내가 정한 무리에 합류해서 일월에게 계획을 전해. 그녀의 입으로 제갈가에게 흑점의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첫 번째 단계니까."

"흑점의 정보. 거짓 정보로 적을 꿰는 거군요."

"그래. 지금쯤이면 제갈가는 안달이 났을 거야. 일월이 입을 열면 굶주린 짐승마냥 달려들겠지."

"그 틈에 언니를 구하는 건가요?"

"말했잖아. 두 가지라고. 일월을 구하고 제갈가의 비고를 깡그리 털어올 거야."

제갈가의 비고에는 온갖 보물들이 잠들어 있다.

오월상단을 키우고 부족한 내공, 외공, 장비들을 챙기기에 그보다 좋은 곳도 없다.

"만약, 제갈가에서 병력을 많이 남겨 두면 어쩌죠?"

"그럴 가능성은 낮아. 우리도 진짜 흑점 분타 하나를 넘길 생각이거든."

"네?"

"완전히 거짓말로 제갈가를 낚을 수는 없어. 정보와 재물을 분류해서 낮은 것 위주로 낚시 매물에 풀어둬."

"······장로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겠네요."

"꼬우면 흑뇌진결을 구해오라고 해. 흑점의 안주인은 너야. 다신 장로들에게 휘둘리지 마."

"네."

크게 끄덕이는 이월.

따르기로 한 이상 이견은 없었다.

"아, 근데 은공. 제갈가에 접근하는 무리 말인데요. 누구인지 알 수 있을까요? 가능하면 어색하지 않은 모습으로 꾸미고 싶은데."

"흠. 하긴 지금 모습으로는 그들과 어울리지 않겠네."

명한이 짧게 생각한 뒤 입을 열었다.

"주검산장."

"주검산장이요? 검장가? 그들이 왜 제갈가에······?"

"제갈가가 목매는 물건을 주검산장이 가지고 있거든. 운검. 정확하게는 일뇌운검. 전대 제갈가의 가주, 뇌명선생의 애검이지."

"그건 또 어떻게······아. 아니죠. 어떻게 아는지보다 중요한 건 어떻게 쓰는지."

"그래. 제갈가는 절대로 주검산장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해."

그리고 주검산장은 절대로 명한의 제안을 거부하지 못한다.

모든 건 손바닥 안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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