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25/235)

부족한 설정 메우기

본래 전창소의 무공은 화산파의 자하신공.

자하신공의 심층을 연마하다가 주화입마에 빠지는 것이 그가 광인이 되는 주요 원인이었다.

하지만 지금 전창소의 무공은 절대로 자하신공이 아니었다.

"네놈들의 목을 뜯어서 날 가둔 놈들과 함께 태워버리겠다!"

새카맣게 밀려오는 흑뇌진기.

그 보법과 몸의 쓰임 역시 오월의 모습을 닮아 있었다.

즉, 무공의 근간이 흑점에 있다는 의미.

‘설정이 섞여 있어. 만리향으로 판단하면 안 돼.’

명한의 머리가 바쁘게 굴러갔다.

"은소소, 제압한다."

"제압? 보통 고수가 아니야!"

"알아. 일 책은 제압. 불가능하면 처리로 간다."

선택은 빠르게 내려졌다.

전창소야 알 바 아닌 인간이지만, 설정이 흑점에 엮여 있다면 그를 살리는 것이 좋다.

쯧, 은소소가 혀를 차며 앞으로 뛰어나갔다.

검은 기운에 휘감긴 전창소와 순식간에 뒤엉켰다.

"쌍아, 이쪽으로. 은소소를 도와라. 그리고 향아 넌······"

추가 지시를 내리려는 순간.

[주인. 이곳, 영물. 위험]

쌍각사가 전심통으로 다른 상황을 전해왔다.

토사가 솟구쳤던 바로 그 부근이었다.

‘아, 그렇지. 전창수가 나왔다면 그 원숭이가······’

흑동의 원숭이들을 다스리는 거대원숭이.

만리향에서는 주인공의 스승격이 되어주는 영물이다.

명한이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축였다.

"향아, 내 뒤를 따라와. 쌍아 넌 그쪽에서 빠져서 은소소를 도와라. 우리 중에 저 싸움에 낄 능력은 너밖에 없어."

만리향의 상황이 그대로 이어진다면, 한쪽을 끝내고 다른 쪽을 개입할 시간이 없다.

명한이 일행을 둘로 나누었다.

땅을 미끄러지며 은소소 쪽에 합류하는 쌍각사와 거리를 가로질러 토사 더미 쪽으로 뛰는 명한.

"캬아아악!!"

"키이익!!"

그리고 그 앞에 도착했을 때.

명한은 검은 기운에 휘감겨 있는 거대한 원숭이를 발견했다.

흑동의 원숭이들이 그 주변을 돌며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만리향에서는 자하신공에 오염됐었어. 이곳에서는 흑뇌결에 침식된 건가.’

무공은 다르지만, 상황은 같았다.

명한이 빠르게 맥락을 잡았다.

"향아야, 잘 들어. 저 거대원숭이가 폭주하면 나머지도 따라서 날뛸 거다."

"저 원숭이들 전부가요?"

"그래. 그때가 되면 넌······남은 원숭이들을 유인해 줘야겠다."

향아 혼자서 나머지 전부를.

과연 맞는 선택일까, 명한이 순간 망설였다.

"네, 도련님. 제게 맡겨 주세요. 싸움은 모르겠지만, 도망치는 건 자신 있어요."

"그래. 내가 널 안 믿으면 누굴 믿겠냐."

하지만 향아의 시선에 망설임을 지웠다.

그녀는 다름 아닌 벽안지체의 소유자.

월보를 익힌 일월신교의 전인이다.

믿고 쓰기 위해서 무공도 전한 것 아니겠는가.

― 크아아아앙!!!

"온다."

"네, 도련님."

거대원숭이의 폭주가 시작됐다.

#

명한과 향아는 각기 다른 방향으로 달려나갔다.

원숭이들이 먼저 반응한 것 위협적인 속도의 향아였다.

괴성을 지르며 그녀를 쫓았다.

폭주 상태에서는 이성적인 판단이 마비되는 법.

거대원숭이를 지켜야 할 입장임에도 원숭이들은 맹목적으로 향아를 추격했다.

그 사이를 명한은 놓치지 않았다.

"거대원숭이. 아니, 성성아. 아프지 않게 해 줄 테니까, 얌전히 맞자."

원작, 만리향의 기준으로 성성이는 주인공에게 맞아서 정신을 차린다.

단순하지만 가장 효과적인 방법.

‘문제는 스펙차이인데.’

소설이 다르기에 비교는 힘들지만, 만리향의 주인공은 이미 절정급 고수였다.

지금의 명한 자신이 그 수준에 이르렀을까?

"몸으로 부딪쳐 보면 알겠지."

어차피 답을 알려줄 사람은 없다.

명한이 짧게 숨을 뱉고는 성성이와의 거리를 좁혔다.

붉은색 눈동자가 허공에서 맞물리고 철퇴 같은 주먹이 머리 위에서 떨어졌다.

가이신공이 있어도 맞으면 안 된다.

명한이 몸을 옆으로 비틀어 공격을 흘린 뒤, 성성이의 옆구리에 주먹을 쑤셔 넣었다.

퉁―!

묵직하게 느껴지는 반탄진기.

몸 전체가 붕 떴다가 두 걸음 이상을 밀려났다.

독기는 섞지 않았지만, 1갑자 이상의 내공을 실은 주먹이었다.

‘역시 보통 영물이 아니야. 쌍아 수준이라 봐야겠어.’

적당히 싸울 상대가 아니었다.

"해 보자."

전력으로 기운을 불러모았다.

1층에 쌓이는 것은 영약으로 만든 내공.

2층에 쌓이는 건 독단으로 응집된 독기운.

가이신공은 두 기운을 차곡차곡 쌓아서 하나의 기운으로 응집했다.

‘후―!’ 짧게 뱉는 숨과 함께 기운이 주먹에 모였다.

은소소에게 배운 힘을 다루는 기본공의 요령.

녹색의 물결이 거대한 파도처럼 성성이를 휩쓸었다.

"크아아아앙!!"

괴로움에 발악하는 성성이.

털이 녹고 살점이 타들어 갔다.

보통의 영물이었다면 그대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모습.

하지만 성성이는 이를 기합으로 견디며 돌진했다.

‘젠장. 이게 약해진 힘이라고?’

오랜 세월 전창소를 막으며 약화 된 게 이 정도.

명한이 혀를 차며 거리를 벌렸다.

"······!"

하지만 이번에는 성성이도 그걸 그냥 바라만 보지는 않았다.

바닥의 돌을 주워서 명한 쪽으로 던졌다.

단순한 돌팔매질이지만 그 주체가 성성이면 이야기가 다르다.

파공성이 들린 순간, 이미 돌은 눈앞에 당도해 있었다.

퍽, 소리를 내며 명한의 몸이 뒤집혔다.

"도련님!"

"신경 쓰지 마! 네 역할에 충실해라!"

겨우 몸을 바로 했지만, 충격이 어마어마했다.

가이신공이 아니었다면 머리통이 박살 났을 것이다.

‘이런 걸 정통으로 연거푸 맞으면 못 견뎌.’

피한다는 보장도 없었다.

"글이 언제나 작가의 뜻대로 흘러가는 건 아니지."

피를 손끝으로 훔치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위기라면 위기.

작가가 글에 잡아먹히는 형국이었다.

하지만 한 번 펜대로 써 갈겼으면 그 뒤는 뛰어노는 자식과 같은 것이 글이다.

그때마다 엎어 버리면 그것도 못 할 짓.

"바로잡아주마."

힘을 모아 다시금 앞으로 뛰었다.

"캬아아아아!!!"

발악과 같은 반응을 보이며 돌을 연거푸 던지는 성성이.

그 속도가 유성과 같았다.

전부 피하며 접근할 수 있는가?

향아라면 가능하겠지만, 자신은 무리였다.

‘흡!’ 기합에는 기합으로.

명한이 내공을 몸에 두른 채 그대로 돌진했다.

쾅. 쾅. 쾅.

연거푸 이어진 충격에 영혼이 빠져나갈 것 같았다.

하지만 거리를 좁힌 덕에 되레 충격은 덜했다.

흐르는 피를 속도의 추로 삼아서 마지막 간격을 좁혔다.

쿠으으응!!

내공을 두른 주먹에 거대한 북소리가 났다.

성성이의 거구가 잠시 허공에 뜰 정도의 충격이었다.

‘안까지 먹히지 않아.’

하지만 그조차 기이할 정도로 두꺼운 성성이의 피부를 뚫는 건 무리였다.

"젠장. 위기에서 각성하는 건 취향이 아닌데."

명한이 주먹이 닿은 곳에 손을 포갰다.

은소소에게 배운 기본공은 말 그대로 기본.

무공에 입문한 이들이 배워야 할 기초 지식이었다.

그리고 그다음 심화 과정에서 배워야 하는 것이 지금 명한이 하려는 ‘침투경’의 요령.

‘배우진 않았어. 하지만 알고는 있어.’

손으로 직접 썼으니까.

아주 자세히, 기의 움직임까지 묘사하며 그 요령이 무엇인지 적은 적이 있다.

그렇다면.

"할 수 있다."

"크아아아아!!!"

"움직이지 마."

충격에서 벗어나 손을 뻗는 성성이를 눈앞에 둔 채.

명한이 내공의 흐름을 가속 시켰다.

침투경의 요령은 주먹이 아닌 바늘.

내기를 깊고 날카롭게 벼려서 안으로 쑤셔 넣는 것이 핵심이다.

고도의 집중력과 요령이 요구되는 작업.

‘이건 소백이 아닌 내 능력이다.’

애정을 가지고 썼던 글이니까.

모든 걸 걸고 묘사했던 부분이니까.

쿠웅―!

된다.

성성이의 걸음이 멈췄다.

#

명한이 성성이를 쓰러뜨릴 무렵.

은소소와 전창소의 싸움도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단순한 실력 비교로는 전창소가 근소 우위.

하지만 오랜 시간 성성이에 묶여 있었고, 무공의 폭주로 이성이 마비된 부분이 주효했다.

게다가 이 싸움은 단순히 일대일이 아니었다.

"크아아아!! 빌어먹을 놈들! 이번에도 날 막을 셈이냐!? 나야말로 길이다! 흑점을 위해 애쓰는 건 나밖에 없단 말이다!!"

"시끄러워, 이 미친 늙은이야."

순식간에 좌우에서 협공에 들어가는 은소소와 쌍각사.

전창소는 전력을 동원해서 이에 맞섰지만, 동수에 가까운 적 둘과 동시에 싸울 수는 없었다.

어깨에 쌍각사의 이빨을 허용하고 주저앉았다.

"젠장! 젠장! 나는 흑점을 위해서 노력했을 뿐이다. 내 방식은 잘못되지 않았어······"

"흥. 무공에 집착해서 광인이 되는 놈들은 여럿 봐 왔다. 내 별호에도 광(狂)자가 붙어 있지만, 무엇이 선인지는 확실하게 알아."

"내 무공이다. 내가 만든 무공이야."

"나고 쓰임에 목매지 마라. 무공을 익힘에 오롯한 길은 없으니. 내게 검을 사사하신 분의 말이다."

은소소의 검이 화색으로 빛나더니, 순식간에 전창소의 미간을 관통했다.

숨을 끊는 것이 아닌, 검기로 심지를 제압하는 매우 고등의 수법이었다.

전창소는 넋 빠진 인간처럼 흐느적거리다, 아래로 푹 고꾸라졌다.

"······"

은소소는 그 모습을 잠시 말없이 바라봤다.

쓰러진 전창소가 아닌, 그 모습에 투영되는 다른 무언가였다.

"후우. 죽인 건 아니겠지?"

상념이 깨어진 건 명한이 목소리가 들린 순간이었다.

널브러진 성성이를 원숭이들의 도움을 받아서 끌고 오는 중이었다.

"죽이려면 진즉에 죽였어. 검으로 심간(心間)을 찔러서 잠시 기절시킨 거야. 하지만 이건 일시적인 방법에 불과해. 깨어나면 또 똑같이 날뛰겠지."

"후우. 그 점은 걱정하지 마. 방법이 있으니까."

"주화입마에 들어간 인간이야. 방법이 있다고?"

"응. 불완전한 무공으로 심마에 빠진 인간을 되돌릴 수 있는 건 무공의 완성뿐이지."

명한이 손으로 눈앞의 알림창을 밀어내며 답했다.

왜 만리향이 습작에 섞여들었는지.

전창소가 불완전한 무공으로 주화입마에 들었는지.

의뢰 완료 보상을 받으며 전부 깨달았다.

‘이야기를 완성 시키고 있어.’

부족한 부분을 메꾸면서.

"흑뇌해도. 흑뇌결의 완성판이야."

명한이 보상으로 얻은 무공서를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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