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섞이는 이야기
갈지자로 뻗어 나가는 쌍각사의 위로 검은 그림자가 떨어졌다.
거칠고 굵은 털로 온 몸을 덮은 원숭이였다.
크기는 대충 열 서넛 정도의 아이.
하지만 겉모습으로는 판단할 수 없었다.
"캬아아아!!"
달려드는 쌍각사를 순식간에 잡아서 패대기치는 원숭이.
기습이라고는 하지만, 상대가 무려 쌍각사.
보통 원숭이에서 나올 수 없는 힘이었다.
‘이런 영물이 흑동에 있었다고?’
명한은 일순간 당황하여 걸음을 멈췄다.
"뭐 하고 있어!?"
하지만 길진 않았다.
카랑카랑한 은소소의 외침에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눈에 담았다.
‘원숭이 숫자는 다섯······아니, 여섯인가.’
선두에서 향아를 쫓는 놈이 하나 나머지는 쌍각사와 은소소 쪽으로 나뉘었다.
"이런 원숭이 따위 베어버리면 그만이다!"
그 사이, 은소소는 행동에 들어갔다.
검을 사선으로 움켜쥔 뒤, 내딛는 걸음 그대로 벴다.
향아를 쫓던 원숭이의 등 쪽 방향이었다.
‘뭐?’ 하지만 이 원숭이도 보통 원숭이는 아니었다.
곡예를 넘듯 허공을 돌아서 은소소의 검기를 흘려냈다.
"키키킥!"
게다가 가소롭다는 듯 웃기까지 했다.
은소소의 이마 위로 핏대가 팍, 하고 섰다.
완벽한 도발이었다.
"이 원숭이 새끼가 감히!"
"은소소, 말려들지 마!"
"시끄러워!"
명한이 만류했지만, 그녀는 그대로 뛰어들어갔다.
날카로운 검기를 뽐내며 원숭이를 양단하려고 했다.
단순한 실력만 보자면 아마 그렇게 됐을 것이다.
하지만 이 원숭이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물러난 공간에 은소소가 들어왔을 때.
벽과 벽 사이에 설치되어 있던 함정이 작동했다.
좌우에서 강철 화살이 쏟아지고, 바닥에서는 독이 묻은 철침이 솟구쳤다.
"이이익!"
아무리 재주가 좋아도 발휘하지 못하면 쓸모가 없다.
은소소가 원숭이의 공격에 되레 밀리기 시작했다.
손은 검은 화살을 쳐내기 바쁘고 발은 침을 피하기 급급하니까.
원숭이와 함정의 협공에 농락당하는 꼴이었다.
"이 원숭이들 이곳 지형에 매우 익숙해."
어쩌다가 굴에 눌러산 놈들이라면 불가능한 이야기.
‘함정이 발동되는 걸 여러 번 봤다는 거야.’
어쩌면 흑점과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은소소, 바닥을 그어. 물러날 틈을 번다."
"저 새끼들을 베기 전까지는 물러날 수 없어!"
"약속은 날 지키는 거다, 은소소."
"큭!"
잇소리를 내며 은소소가 크게 물러났다.
그리고는 벌린 거리만큼 강력한 검기를 바닥으로 쏟아냈다.
신나게 몰아붙이던 원숭이도 이건 무서웠는지 빙글빙글 돌아서 물러났다.
"쌍아야, 향아 쪽으로 밀어붙여. 향아는 틈을 봐서 이쪽으로 넘어와라."
"네, 네!"
다음은 고립된 향아였다.
그녀의 보법은 빼어난 구석이 있지만, 그래 봐야 아직 배운지 얼마 안 된 수준이다.
난전에서 제대로 써먹을 역량은 없었다.
명한의 손짓에 쌍각사가 원숭이 사이를 가로질러 향아의 공간을 열어 주었다.
"지금이다."
뒤도 안 보고 줄행랑을 쳤다.
다행히 함정이 여러 차례 발동한 덕분에 물러날 여유는 충분했다.
원숭이들 역시 일정 거리 안쪽으로 깊이 쫓아오지는 않았다.
‘역시 단순한 원숭이들이 아닌가?’
짐승이라기보다는 이곳을 지키는 수호신.
"키이이익!"
"키킥! 키킥!!"
비웃는 놈들을 뒤로 한 채 명한은 물러났다.
잠시 추스를 필요가 있었다.
#
은소소는 쉽사리 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고작 짐승 따위에게 물러났다는 사실이 납득되지 않았다.
발을 쿵쿵 찍으며 소리쳤다.
"다시 가서 싸우자고! 이번에는 그놈들 목을 확실하게 베어버릴 테니까!"
"진정해. 적의 안방에서 무리하게 싸우는 건 좋은 방식이 아니야."
"안방은 무슨! 고작 원숭이잖아!"
"그 원숭이한테 밀린 게 누구지? 그만 흥분하게 진정 좀 해."
한 차례 더 울컥했으나, 그걸 토하지는 않았다.
흥, 소리를 내며 바닥에 주저앉는 것으로 끝났다.
화가 나도 약속은 철저하게 지키는 성격이었다.
"도, 도련님 이런 곳에 웬 원숭이죠? 원숭이가 이런 굴에 살든가요?"
"일반적이지는 않지. 함정에 익숙한 모습도 그렇고."
"그럼 이제 어떻게 해요? 원숭이들이 저렇게 지키고 있으면 지나가기 힘든데."
"방법이라면 찾아봐야지. 죽일 생각이라면 그리 어려운 건 아니겠지만······"
차선이 아닌 최선으로.
명한이 서두르지 않고 생각을 깊이 가져갔다.
그렇게 잠시 침묵이 주변을 휘감았을 때.
소매 끝을 누군가 쿡쿡 당겼다.
"쌍아? 왜? 어디 다치기라도 한 거냐?"
다름 아닌 쌍각사였다.
평소와 다르게 밖으로 나와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같은 냄새]
스스슥, 바닥을 기어가 통로 한쪽에 서는 쌍각사.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흙으로 된 통로의 일부였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명한이 의아해하면서도 일단 쌍각사의 뒤를 쫓아서 그 옆에 섰다.
"······바람?"
그리고 희미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감지했다.
통로 사이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동굴의 형태와 규모를 볼 때 밖에서 직접 들어오는 건 아닐 터.
‘숨겨진 통로인가?’
잠시 고민하다, 그대로 손을 쑤셔 넣었다.
단단한 벽이지만 내공이 담긴 손을 견디지는 못했다.
푸스슥.
"이건 갈수록 흥미진진하군."
순식간에 무너지는 통로 저편으로 보이는 광경.
그림으로 그린 듯한 화단이었다.
#
화단은 꽤 넓은 영역에 걸쳐서 존재했다.
가운데 벽을 하나 세워두고 한쪽은 동굴, 다른 한쪽은 화단으로 만들어 둔 모습이었다.
"별일이군. 여기는 무덤이라고 하지 않았나?"
"내가 알기로는."
"무덤을 이런 꼴로 꾸미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흑점의 인물이라면 아마도 그렇겠지."
"흑점의 인물이라면?"
의아한 듯 되물어오는 은소소.
하지만 명한은 답 대신 손을 들어 올렸다.
아까부터 혀를 날름거리고 있던 쌍각사였다.
고개를 주변으로 빙빙 돌리다 한쪽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그건 뭐 강아지냐?"
"성능 좋고 능력 좋은 반려뱀이다."
"반려뱀은 또 뭐야. 저 뱀은 어딘지는 알고 가는 거냐?"
"그건······"
명한이 채 답을 하기도 전.
쌍각사가 손에서 튕기듯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스슥. 스슥.
엄청난 속도로 기어가 화단의 한쪽으로 사라졌다.
"소백."
"응. 같은 놈들이다."
그리고 동시에 사방에서 원숭이들이 나타났다.
그 숫자가 앞서 상대했던 놈들보다 배는 더 많았다.
표정도 훨씬 험악했다.
‘여기가 저놈들의 거처라 이건가?’
화단의 원숭이.
이미 이야기의 맥락은 종잡을 수 없었다.
"이번에는 확실히 베겠어. 말리지 마."
그 사이, 은소소는 검을 꺼내 내기를 집중시켰다.
회색으로 물드는 검신에서 흉험하기 짝이 없는 기운이 느껴졌다.
적당히 봐주며 상대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주인. 주인. 여기다]
그때였다.
화단 속으로 사라졌던 쌍각사가 고개를 빠끔 내밀며 머리를 흔들었다.
유독 꽃이 우거지게 핀 장소였다.
화악―!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불어오는 바람.
마치 꽃이 바람을 타고 길어 열어주는 것 같았다.
"······어라, 잠깐만."
명한이 머릿속을 스쳐 간 묘사에 멈칫했다.
조금 전의 표현이 지나치게 익숙했기 때문이다.
‘어디에서 봤지?’
스치듯 본 글귀는 분명 아니었다.
"그래. 맞아. 거기에서 봤었지."
머지않아 어디에서 본 묘사인지를 떠올렸다.
습작 이후, 짧게 연재했던 소설 ‘만리향’에서 멋있다고 만들어둔 묘사.
작중, 주인공이 기연을 만나는 장소의 묘사였다.
‘그러고 보니 만리향의 장소 역시 화단이었지.’
착각일까?
명한이 잠시 고민하다 손을 들어 올렸다.
"······만약 착각이 아니라면."
툭툭. 손을 좌우로 부딪치며 내는 마찰음.
주변 원숭이들이 이 동작과 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천천히 다가왔다.
‘명한?’ 은소소는 이를 경계했지만, 명한은 고개를 젓는 것으로 그녀를 만류했다.
이내, 거리가 완전히 가까워지고.
"키이이익!"
"키킥! 킥!"
원숭이들이 친근함을 드러내며 주변을 돌았다.
단번에 경계심을 누그러뜨린 것이다.
‘하. 진짜로 되잖아?’
방금 명한이 한 동작은 이 원숭이들을 기른 화단 주인의 독특한 몸짓.
친근함을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그럼, 원숭이만이 아니라 그자도 있다는 건가?"
명한이 무언가를 깨닫고 퍼뜩 고개를 들었다.
화단 너머 쌍각사가 있는 위치였다.
― 콰콰콰쾅!!!
그리고 그 순간.
지축이 흔들리는 굉음과 함께 토사가 솟구쳤다.
명한은 간신히 균형을 잡으면서도 시선은 쌍각사가 있는 곳에서 놓지 않았다.
모든 가정이 사실이라면 이 폭발의 주인공이 있을 것이다.
"크하하하하! 드디어 포기했구나, 이 빌어먹을 원숭이!"
거칠게 포효하며 토사 더미로 내려오는 한 남자.
누더기에 가까운 옷에 머리카락은 하얗게 새어 산발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 눈은 또 어떠한가.
피로 물든 듯 두 눈이 새빨간 빛을 발하고 있었다.
"광인, 전창소."
소설, 만리향에서 주인공에게 기연을 전달하고 죽는 역할.
본래는 화산파 고수로 원숭이를 기르며 무공을 닦고 있었으나, 주화입마에 걸리며 광인이 됐다.
이를 원숭이들의 왕이 쭉 제어해 왔으나, 후에 주인공이 오면서 균형이 깨어지게 된 것.
[전창소를 물리쳐라]
[의뢰 등급 : 50]
[제한 시간 : 1시간]
[완료 보상 : 흑뇌결(黑雷結) / 지중급]
[완료 보상 : 흑뇌해도(黑雷解圖) / 지상급]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의뢰 내용.
흑동을 통과하지 않고 눈앞의 전창소만 물리쳐도 흑뇌결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였다.
‘아니, 단순히 그게 아니지.’
두 번째 완료 보상 흑뇌해도.
말하자면 흑뇌결의 해법서라고 볼 수 있다.
"크흐흐흐! 네놈은 또 누구냐? 날 막으라고 그 원숭이가 보낸 건가!? 막는다면 죽여버리겠다!"
전창소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칙칙한 기운.
명한은 이 기운이 무엇인지를 단번에 파악했다.
"흑뇌결, 흑뇌진기."
습작의 설정에 이어붙이는 또 다른 이야기의 설정.
"젠장, 잡탕이잖아!"
울컥한 외침과 함께.
전창소가 달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