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의 변수
흔한 이야기다.
한 사람을 사랑했고 모든 것을 주었는데, 그 사람이 자신을 배신한.
슬프지만, 흔한 이야기.
"······이렇게 찾아오는 것도 지겹지 않아?"
그리고 흔한 이야기의 결말은 언제나처럼 뻔하다.
상처 입는 건 사랑을 준 사람.
남겨져 고통받는 것도 그 사람.
상처를 준 사람은 상처 없이 웃기만 한다.
"너무 그렇게 매정하게 보지는 마, 일월. 한때는 사랑을 속삭였던 사이잖아."
"간악한 인간. 한때나마 널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나 자신을 증오한다."
"증오는 고통스러울 뿐이야. 지금이라도 포기하고 흑점에 대한 걸 실토해. 그리하면, 예전처럼 내 손길이 네 몸을 보듬어 줄 수도 있을 테니까."
"······쓰레기."
어둠 속에서 바라보는 한때의 연인.
다정함과 사랑으로 빛나던 눈동자 속에는 비열함과 탐욕만이 가득 차 있다.
어째서 저 본질을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일월은 심장이 뜯어질 것 같은 후회를 했다.
"하긴, 예전부터 네 고집은 알아줬지. 나한테 푹 빠졌으면서도 흑점에 대한 정보는 죽어도 누설하지 않으려 했어. 내가 기지를 발휘해서 연락책을 찾은 게 아니었다면 아직도 헤매고 있었겠지."
"그만 떠들고 죽여라. 네게 말하느니 혀를 뽑고, 너를 보느니 눈을 도려내겠다."
"하하, 잔인한 소리. 중요한 정보원을 그렇게 험하게 다룰 수야 있나. 흑점만 손에 쥘 수 있으면 만일의 지루함도 달게 받을 수 있지."
드르륵.
한때의 연인이었던 남자가 철창 앞에 앉았다.
먹으로 그린 듯한 미남자.
중원의 칠룡 중 한 명으로 유명한 수선룡(秀鮮龍) 제갈 수였다.
"만일이 아니라 억만년을 기다려도 내게서는 무엇도 알아낼 수 없어. 포기하고 날 죽여라."
"후후. 네 고집이라면 아마도 그렇겠지. 하지만 그것도 조만간이다."
"무슨 소리냐?"
"정도의 이름으로 어찌 그런 더러운 짓을······그렇게 떠들던 노인네들이 드디어 고집을 꺾었거든. 체면보다 실리가 중요하다는 걸 깨달은 거지. 이제 그동안 체면 운운하며 참아왔던 모든 수단을 쓸 수 있게 된 거야."
"······"
일월이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껏 비밀을 토로하지 않고도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제갈 수가 운운하는 체면 때문.
하지만 그 방패가 벗겨진다면······
"기대해. 네 속살이 얼마나 연한지, 네 알량한 자존심이 얼마나 연약한지. 한올 한올 벗겨서 정성껏 요리해 줄 테니까."
"제갈 수······대체 어디까지 타락할 셈이냐."
"하하하. 우스운 이야기야. 나는 언제나 이런 놈이었어. 눈이 멀어 나를 제대로 못 본 건 다름 아닌 너야, 일월. 흑점을 팔아넘기고 모든 자매를 죽음으로 몬 배신자."
"제갈 수!!!"
쾅.
일월의 몸이 발작이라도 하듯 거칠게 요동쳤다.
하지만 몸을 묶고 팔다리를 결박한 쇠사슬을 힘만으로 끊어낼 수는 없었다.
"기다려. 네 입에서 흑점의 모든 걸 알아낸 뒤, 남은 계집들도 차례대로 끌고 와 줄 테니까. 그때가 되면 그토록 바라던 자매상봉의 기쁨을 누릴 거야. 뭐, 사지 멀쩡하게 만날지는 모르겠지만. 하하하하."
"아아아아악!! 제갈 수!"
악 바친 몸부림에 제갈 수를 웃게 할 뿐이었다.
#
이월과 오월은 쉬이 믿을 수 없었다.
흑점의 장로들은 분명 일월이 죽었다고 전했다.
특히, 이월은 눈앞에서 일월이 칼 맞고 쓰러지는 모습까지 봤다.
제삼자인 명한이 ‘일월이 살아있어.’라고 말해 봐야 믿기는 힘들었다.
"믿을 수 없어. 증거라도 있나요?"
"증거는 모르겠고, 증인은 있어."
"증인? 누구요?"
명한이 턱짓으로 이월을 가리켰다.
"저, 저요?"
"아니, 네가 있는 흑점의 장로들. 일을 덮을 때 그녀의 정보도 같이 숨겼을 거다."
"그건 불가능해요!"
"정말?"
"······"
이월이 입술을 씹었다.
정보 조작, 은폐 등은 흑점의 전문 분야였다.
생존 사실을 숨기고자 했다면 충분히 가능하다.
"고민하는 이유는 알겠어. 그러니 내가 흑동을 나온 뒤의 일을 결정하라고 말하는 거야. 흑뇌결을 들고나오면 장로든 뭐든 반박할 수 없어."
"흑뇌결을 바탕으로 정보를 받아내자 이건가요?"
"그래. 일월이 살아있다는 정보를 확인받은 뒤, 내 조건을 수락할지 말지 결정하는 거야."
"······우리가 정보만 받고 배신하면 어쩌려고요?"
"해 봐. 나 없이 너희끼리 일월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아? 위치는 아냐?"
쥐고 있는 패라면 넉넉하다.
이월과 오월이 서로를 바라보며 의견을 주고받았다.
고민은 침묵 속에서 꽤 길게 이어졌다.
한참 뒤, 입을 연 건 역시나 이월이었다.
"좋아요. 모든 조건을 다 수락했다고 치자고요. 그럼, 어떻게 되는 거죠? 우리가 당신을 위해서 어느 수준까지 따라야 하는 건가요?"
"어느 수준? 지금 나랑 협상이라도 하자는 거야?"
"우리에게도 원칙은 존재해요. 당신의 방식이 우리와 동떨어져 있다면······"
"집어치울까?"
"네?"
"아직 머리에서 현실이 그려지지 않는 모양이네. 아쉬운 건 내가 아니라 너희야. 오월상단이 망하면 흑점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아? 흑점이 없으면 일월은? 전부 다 죽고 뿔뿔이 흩어진 뒤에도 원칙 운운할 건가? 지금 너희가 할 건 바짝 엎드려서 비는 거야. 제발 도와달라고."
명한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굳이 협박성으로 윽박지를 필요도, 무력으로 찍어누를 필요도 없었다.
필요한 건 처지에 대한 자각이었다.
"언니, 그만둬! 저런 조건이면 노예나 다름없잖아! 상단이라면 내가 어떻게든 해 볼게. 일월 언니도······언니도 우리끼리 구하면 돼!"
"······"
"언니!"
"오월아, 그만. 이건 소백 공자님의 말이 맞아. 우리 처지는 협상 탁자 위에 올라갈 수준도 못 돼. 우리끼리는 상단을 구할 수도 일월의 구출도 불가능해."
"하지만······"
"결국, 흑점과 상단을 물건으로 팔아서 언니와 미래를 구해야 해. 지금이 아니라면 반값도 받지 못할 테니까."
"상단주를 이월이 맡는 편이 나을 뻔했나?"
명한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처지를 알고 그에 맞게 거래를 하는 건 결코 굴욕이 아니다.
"조건을 받아들이겠어요. 당신이 우리를 구할 수 있다면······흑점과 오월상단. 일월 언니를 구할 수 있다면 우리는 앞으로 당신을 따르겠어요."
"무게는 알고 있겠지."
"배신의 대가는 피로."
이월이 손톱으로 팔뚝을 그어 피를 찻잔에 떨어뜨렸다.
붉게 번지는 찻물에 명한이 지그시 미소지었다.
만족스러운 맹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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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점 장로라고 별수 있을까.
처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이들이 장로였다.
이월이 보낸 서신에 긍정으로 화답했다.
어차피 성공과 실패의 이지 선다니, 흑동을 열자는 내용이었다.
"이곳을 통하면 흑동으로 들어갈 수 있어요."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었네."
이월이 안내한 흑동은 성 밖으로 반나절을 간 곳에 위치해 있었다.
생각외로 평범한 산등성이었다.
"애초에 흑점의 원로들이 묻힌 무덤이 시작이었으니까요. 밖을 꾸미는 것은 그분들이 반대했어요."
"하지만 들어가면 지옥과 같은 기관이 자리하고 있다는 거겠지?"
"언제부터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최근에는 들어갔다가 무사히 나온 사람이 없어요."
이월은 확실하게 덧붙였다.
흑동을 인지한 흑점의 인물들이 왜 엄두도 못 내고 있었겠는가.
그만큼 두려운 공간이기 때문이다.
"대충 느낌은 알았으니까 너희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 시간은 넉넉하게 잡아서 반나절이면 충분할 거다."
"반나절이요?"
"무덤이 깊어 봐야 무덤이지."
명한은 그런 걱정에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흑동은 분명 위험도 높은 장소이나, 이미 그는 그보다 높은 수준의 공간도 통과한 적이 있다.
‘쌍각사의 굴이 65등급이었지?’
흑동은 40등급.
높다 해도 체감상 그리 위협적이진 않았다.
"간다."
짧은 말과 함께 시커먼 굴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흑동(黑洞)에 진입했습니다]
던전 진입에 대한 알림말이 먼저 뜨고.
[흑동(黑洞)을 통과해라]
[의뢰 등급 : 40급]
[제한 시간 : 12시간]
[완료 보상 : 흑뇌결(黑雷結) / 지중급, ???]
공략 내용이 차례대로 떴다.
예상대로 40등급, 제한 시간도 넉넉한 던전이었다.
문제라면 단 하나.
"······추가 보상?"
습작에 없던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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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습작과 다른 내용은 많이 있었다.
원인이 변하면 결과도 변하는 법.
이런 변화에 명한은 이상함을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다르다.
‘흑동에는 내가 개입한 부분이 없어.’
애초에 습작 시작 전에 설정된 영역.
"내가 모르는 변화라도 있었나?"
"응? 여기에 와보기라도 한 거냐?"
"아니. 그냥 혼잣말이야."
의문은 여전하지만, 매달릴 수는 없었다.
은소소의 질문을 피해서 선두에 섰다.
빛이 들어오지 않아 컴컴한 굴속이었지만, 환골탈태를 한 육체는 충분한 시야를 제공했다.
좁고 긴 통로가 눈에 들어왔다.
"기관이네."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통로 좌우로 뚫린 구멍이나 압력에 따라 다르게 작용하는 바닥만 봐도 그랬다.
문제라면 흑동은 외길이라는 점.
"어떻게 할까? 벽째로 베어버려?"
은소소의 태연한 제안에 명한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의 검이면 베고도 남겠지만, 까딱 잘못하면 굴이 통째로 무너질 수도 있었다.
"도련님, 제가 한 번 넘어가 볼게요."
"네가?"
"네. 그동안 월보도 많이 연습했고, 도움이 되고 싶어요."
대신 나선 건 향아였다.
어지간한 일에 먼저 나서는 일이 없는 그녀인 만큼, 이번 제안은 유별난 것이었다.
‘무공에 자신이 좀 붙은 건가?’
주검산장의 일 이후로 자신감이 올라온 모습.
명한이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깊이 들어가면 위험하니까 한 번에 하나씩. 위험하다 싶으면 물러나고."
"네, 도련님."
향아가 가벼운 걸음으로 통로 앞자락에 섰다.
그리고 슥, 하는 마찰음과 함께 다리가 미끄러지는 순간.
좌우 벽면에서 철로 된 화살이 무더기로 쏟아졌다.
수십. 아니, 수백 발.
그대로 걸었다면 고슴도치가 되고도 남을 양이었다.
"호오. 굉장한 상승의 보법이군."
하지만 향아는 이미 화살 세례의 영역을 벗어난 후.
그녀의 걸음은 박자와 박자의 틈새를 자유롭게 움직였다.
남이 정박에 한 번씩 발을 내디딜 때, 그녀는 서너 번 이상을 움직일 수 있었다.
유령 같은 보법, 이라는 설명이 딱 맞는 모습이었다.
"도련님 이 정도면 끝까지 갈 수 있겠어요."
"흠. 굳이 무리할 이유는 없다. 벽만 찍고 돌아와."
"아니에요, 저 정말로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향······"
과한 건 좋지 않다.
명한이 자신감 넘치는 향아를 제지하려는 순간.
품 안에서 잠자고 있던 쌍각사가 갑자기 고개를 치켜들었다.
[주인, 영물!]
예상하지 못한 소식.
"아악!!"
그리고 더욱 예상하지 못한 비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