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부할 수 없는 제안
은침이 핑그르 돌아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팅, 하는 탄성음과 함께 그림자가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
바람과 같이 쏟아지는 검붉은 선들.
갈래를 나눠 공간을 등분하고 있었다.
‘―뒤로 물러나 있어!’ 크게 소리치는 건 오월.
그녀의 발끝이 땅에 닿아 폭발하듯 튕겼다.
공간을 나눈 검붉은 선들 위를 제비마냥 유영했다.
옷깃과 옷깃 사이를 스쳐 가는 선들이 아슬아슬한 곡예비행을 떠올리게 했다.
"젠장. 이것들 강하잖아?"
짧게 벌어진 호흡 사이로 오월이 입술을 깨물었다.
실력을 알아보는 데는 몇 합이면 충분했다.
암살자의 실력은 뒷세계 기준 1등급.
혼자서 전부 상대하는 건 무리였다.
‘일단 신교의 도련님부터······’
혀끝으로 마른 입술을 축이며 다시 땅을 밟았다.
어느새 뽑아 든 소검이 그녀의 손아귀에서 화살처럼 날아갔다.
타타탕. 탕.
부딪쳐 튀어 오르는 금속.
빛을 받아 은색의 물결을 내비치는 사이, 오월이 명한의 허리춤을 휘감았다.
물러나는 보법은 그야말로 신속.
그녀의 발이 땅을 떠나는 것과 동시에 검붉은 침들이 사정없이 내리꽂혔다.
암살자들이 쏟아지는 비처럼 따라붙었다.
"젠장, 꽉 잡아!"
혼자도 어려운데 짐까지 지고 가는 건 힘들다.
오월이 휘청휘청, 아슬아슬하게 암살자의 공격을 회피했다.
그때마다 찢어지는 건 옷자락.
살이 베이고 요혈에 꽂히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아!"
하지만 그 곡예가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넓다지만, 실내.
벗어날 수 있는 공간은 제한적이었다.
결국, 공세를 피하던 오월이 구석으로 몰렸다.
벗어날 곳 없는 위치였다.
"신호를 주면 뒤도 보지 말고 도망가."
위기에서 택할 수 있는 건 제한적인 선택.
오월은 스스로 미끼가 되는 걸 선택했다.
상단과 흑점을 위해서는 소백이 살아야 했으니까.
‘해 보자. 할 수 있다, 오월.’
바짝 마르는 입술을 깨물며 힘을 쥐어짰다.
그리고 그 순간.
쉬익―!!
사방에서 한 호흡으로 은침을 쏟아냈다.
"도망쳐!!"
전부 피하거나 전부 막는 건 무리.
치맛자락을 크게 휘둘러 방위를 막으며 소백을 다른 쪽으로 밀었다.
아니, 밀려고 했다.
그녀의 손이 민 건 아무것도 없는 허공.
"왜 이월이 황하루에 남고 네가 상단을 맡았는지 알 것 같군."
대신 다른 곳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숨소리에 귀가 간질거릴 정도로 가까운 거리.
옆으로 한 걸음 돌아서, 자신을 품에 안을 듯 바짝 붙은 위치였다.
무심코 돌린 시선 속에 얼굴이 가득 들어왔다.
"너······?"
"답은 나중에."
명한은 순식간에 오월을 품 안으로 당기며 손을 털었다.
어느새 낚아챈 은침이 주인을 향해 거꾸로 날아갔다.
허공에서 충돌하는 수십의 은침.
탁자, 기둥, 벽면에 고슴도치마냥 박혔다.
"점과 점을 잇는 건 이런 느낌인가."
그 와중에서도 명한은 연습을 잊지 않았다.
은침을 던지는 암살자의 기척, 기의 흐름, 기감으로 찍은 점과 점의 연결.
능력은 시스템으로 올려도 활용은 어디까지나 경험과 학습의 영역이었다.
"좋아. 충분히 빼먹은 것 같군."
이 정도면 됐다.
명한이 그리 판단하고 손을 내렸다.
비처럼 쏟아지는 은침과는 정반대의 방향이었다.
"위험해!!"
다급하게 들려오는 오월의 외침.
명한의 모습은 얼핏 생을 포기한 사람 같았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생에 대한 집착이 강한 것이 명한이다.
포기 같은 건 없었다.
웅―!
아래에서 위로.
명한이 손을 올리자 중간 공간이 크게 떨리며 은침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수십, 수백의 은침이 그대로 허공에서 멈췄다.
"허, 허공섭물!?"
"아쉽지만, 그건 아니고."
가이신공의 요령 중 하나.
손과 손 사이의 기운을 회전시켜서 인력을 만든 것이다.
습작 기준 소백은 이를 ‘회백(會㓦)’이라고 불렀다.
암살자의 비침 등을 상대하기에는 꽤 괜찮은 수법이었다.
"도로 가져가라."
모아둔 은침을 그대로 되돌려 보냈다.
같은 은침이었지만, 결과는 달랐다.
회백으로 모아둔 기운은 응축한 용수철과 같은 개념.
몇 배의 속도로 날아간 은침을 피할 암살자는 없었다.
순식간에 고슴도치가 되어 절명했다.
"쓸만하네."
싱그럽게 웃는 명한.
"······"
하지만 품 안에 안긴 오월은 그럴 수 없었다.
‘내가 뭔 짓을!’
얼굴이 화끈거렸다.
#
"아래에 있던 것들은 전부 정리했다."
명한 쪽 상황이 끝날 즈음, 은소소가 들어왔다.
암살자의 공격은 그녀 역시 감지하고 있었다.
위는 맡기고 아래를 정리하고 돌아오는 차였다.
"수고했어. 흘린 놈은?"
"없어. 그쪽 여자는?"
"오월. 내가 걱정돼서 뛰어든 의리의 여자."
"으, 으윽!"
부끄러움에 붉어지는 오월 옆으로 은소소가 섰다.
슥, 훑어보고는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마치 ‘네가?’라고 말하는 것 같아 오월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너무 그렇게 보지 마. 그래도 도와준다고 망설임 없이 달려와 준 사람이야."
"뭐······그렇다고 치자. 도착은 내일 아니었어?"
"일정을 당겼겠지. 이월에게 전해 들은 내용으로는 못 미더웠을 테니, 직접 보려 한 거겠고."
명한이 눈으로 묻자, 오월이 끄덕였다.
하나부터 열까지 벗어나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직접 본 감상은?"
"생각보다 멋······이 아니라 대체 저 암살자들은 누구입니까? 상단 쪽에서 고용한 암살자가 저렇게 고수일리는 없어요."
"그쪽이 판단하기로는 어때?"
"판단은 무슨······"
그냥 설명을 해라.
오월이 말을 혀끝까지 올렸다가 다시 삼켰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 속에서 다른 의도가 있음을 읽었기 때문이다.
‘떠본다 이거지?’
그녀가 했던 것처럼.
입술을 살짝 물고, 천천히 말을 이었다.
"표식은 없지만, 사용하는 무기는 눈에 익어요. 머리카락처럼 가늘고 날카로운 은침. 주로 남쪽 지방 암살자들이 애용하곤 하죠."
"그리고?"
"보법과 진형. 목표를 대하는 방식도 체계적이었어요. 앞에 삼할을 두고 뒤에 칠할을 남기는. 여차하면 꼬리를 자르고 도망가기도 쉬운 방식이죠."
"누구인지 알아보겠어?"
"강남의 만객당이나 남만의 독곡. 고르자면 독곡이겠네요."
오월이 죽은 암살자의 옷자락을 손끝으로 뒤집었다.
북쪽 지방의 옷과는 다른 독특한 재질과 마무리 방식이었다.
"그럼 독곡이 날 노린 이유도 알 수 있을까?"
"떠보는 건 일절만 하죠? 신교와 관련된 이들 중 독곡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건 혈염마녀 밖에는 없어요. 아마 당신이 신교 밖으로 나온 것도 같은 이유겠죠. 아닌가요?"
"확실히 흑점의 역량은 아직 살아있는 것 같군. 이 정도도 알아채지 못한다면 전부 없었던 일로 무르려고 했는데."
"······"
"거래에 앞서 서로를 알아보는 과정이잖아. 토라지지는 말라고."
"누가 토라졌다고 그래요. 그래서, 이제 우리 정식으로 거래하는 건가요?"
토라졌지만, 토라졌다고는 말하기 싫다.
오월이 허리춤에 손을 올리며 당당하게 물었다.
"아침은 먹고 시작하지. 새벽부터 거미줄에 걸린 나비를 도와주었더니 출출해서."
"거미줄? 나비? 아······!"
뒤늦게 눈치채고 발끈하는 오월.
명한이 가볍게 웃으며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천하제일 거부, 오월이라.’
아직은 요원한 모습이었다.
#
둥그런 탁상 앞으로 둥글게 모여 앉았다.
한쪽에는 명한과 은소소가 다른 한쪽에는 이월과 오월이.
주제는 흑점과 오월상단.
그리고 흑동이었다.
"마차 세 대 분의 금괴라면 당장 상단의 빚은 모두 탕감할 수 있어요. 못마땅해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그쪽에서 말한 대로 흑동을 통과할 수 있다면 일은 크지 않겠죠."
"일의 성패는 내게 달렸다. 너희는 금괴를 받고, 후의 일을 택하면 그만이야."
"흑뇌결을 찾아왔을 때, 우리가 신교를 따르라는 건가요?"
"아니, 그건 아니지."
명한이 이야기의 흐름을 바로잡았다.
"너희가 따라야 하는 건 나, 소백 개인이야."
"신교와는 별개로 당신을 따르라 이건가요?"
"그래. 너희는 내 개인 상단이 되는 거야. 흑점도 마찬가지고."
"······"
이월과 오월이 서로를 바라봤다.
말은 안 해도 주고받을 수 있는 내용이 있었다.
입을 연 건 이월이었다.
"다른 건 다 괜찮아도 종속은 불가해요. 흑점은 지금껏 철저하게 중립을 지켜왔어요."
"속 편한 이야기를 하는군. 이전까지 중립을 지켰으니, 앞으로도 계속 지키겠다? 그런 낭만이 너희 앞길도 지켜주나?"
"흑점의 철칙이에요. 모욕하지 말아 주세요."
"철칙이라. 그럼, 그 마음가짐으로 다른 자매들도 모두 포기하겠다는 얘기인가?"
"······무슨 소리예요, 그건?"
주검산장과 흑점은 경우가 다르다.
전자가 맡겨도 좋을 자생 가능한 집단이라면 후자는 아니다.
이대로 두면 흑점은 무림맹에 집어 삼켜진다.
‘그 꼴은 못 보지.’
명한이 마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전쟁 직후, 흑점이 급속도로 몰락한 이유를 알고 있나? 우연히 흑뇌결이 사라지고 너희 자매들이 찢어졌을까?"
"당신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흑점의 은밀함은 분명 대단하지만, 표면적으로 드러난 일부 인사까지 가릴 수 있는 건 아니야. 전쟁 직후, 신교에 세가 밀린 무림맹은 자신들의 취약점을 보완할 필요성이 있었지. 정도의 이름과는 걸맞지 않은 짓을 하면서까지."
흑점과 오월상단에 대해서 내밀하게 짜 둔 설정.
엉킨 실타래를 어디서부터 풀어야 하는지, 명한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일월은 무림맹의 요인을 사랑했고, 자신도 모르게 흑점의 정보를 넘겼어. 그때, 흑점은 무림맹의 공격을 받아서 괴멸적인 타격을 받았지."
"거, 거짓말! 일월 언니는 전쟁 중에 사망했어!"
"그렇게 덮었으니까. 안 그래, 이월?"
"언니?"
"······"
굳게 닫혀있는 이월의 입.
오월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탓할 것 없어. 그렇게 덮어서 수습하지 않았다면 흑점은 그날로 무림맹에 흡수됐을 테니까. 막판에 정신을 차린 일월이 장로들의 도움을 받아서 꼬리를 자르고 모두를 도망치게 했지. 덕분에 무림맹은 닭 쫓던 개가 됐고."
"······대체 그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죠?"
"말했지? 중요한 건 내가 아는 방식이 아니야. 내가 너희에게 줄 수 있는 것이지."
오월과 이월의 시선을 한 번에 받으며 명한이 말을 이었다.
정보는 한 번에 공개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이월과의 첫 독대에서 가려 두었던 이야기.
"일월은 아직 살아있어. 그게 내가 너희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다."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