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생기면 자다가도 떡이 나온다
새카맣게 밤이 내려온 시간.
이월은 홀로 방안에 앉아 무언가를 고심하고 있다.
깊이 내린 수심은 고민이 가볍지 않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응. 확실해. 숨기려는 생각조차 없었어."
혼잣말에 가까운 목소리가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이월을 제외한 누구도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
"우리에 대해서 매우 자세하게 알고 있었어. 너나, 나. 돌아가신 아버님보다도 많은 걸 아는 눈치야."
그녀의 목소리는 늘어진 그림자로 향해 있었다.
"아니. 신교에서 파악한 정보는 아니라고 하더라. 개인적으로 알아낸 거라고 하는데······확실하지는 않아. 애초에 우리가 평가한 소백이라는 인물은 천마궁의 열외전력이었잖아. 첫 단추조차 맞지 않았어."
짧은 한숨을 내쉬고 손끝으로 미간을 눌렀다.
깊어진 고민이 얼굴로 드러난 것이다.
"알아. 주름 잡히는 거. 자꾸 그렇게 엄마처럼 잔소리하지 마. 너무 놀라서 그런 거라고. 네가 그 사람을 직접 봤어야 해. 그냥 얼굴만 잘생긴 샌님이 아니라고."
이번에는 입술을 비죽이며 그림자에 토로했다.
"뭐? 얼굴 보고 넋을 뺐다니, 대체 누가? 내 취향이기는 했지만······흑점을 두고 방심 같은 건 안 해. 들고 온 정보부터 일을 밀어붙이는 방식까지, 그 또래의 사람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어."
잠시 툴툴대긴 했으나, 표정은 이내 돌아왔다.
흑점을 둔 이야기에 농담은 어불성설이었다.
"응. 알고 있어. 금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일단 금괴로 오월상단의 빚부터 정리하고, 흑동에 대한 이야기를 어르신들께 전할게. 그분들이 어떻게 반응할지는 가늠이 안 되지만."
이야기의 끝자락.
이월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젖혔다.
속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나니 한결 가벼운 얼굴이었다.
"······응? 만약 그 사람의 모두 사실이면 어떻게 할 거냐고? 글쎄. 솔직히 흑점의 상황이 녹록지 않은 건 사실이잖아. 자금부터 무력까지. 이대로 가면 다른 세력에 전부 먹혀버릴 거야. 그걸 막아준다면 뭐든지 해야지. 뭐든지······"
그녀가 뒷말을 삼키고 그림자에 귀를 쫑긋거렸다.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런 생각은 안 했다고! 남사스럽기는!"
그리고 무언가에 놀란 듯 얼굴을 크게 붉히며 소리쳤다.
바닥을 두드리는 손까지 붉었다.
"으으. 장난은 일절만 해. 날이 밝는 대로 서둘러 돌아오기나 하고."
황급히 손 부채질을 하며 그림자 쪽으로 손을 흔들었다.
무언가 보이지 않는 ‘연결’이 끊어졌다.
남들에게는 말하지 않는 그녀만의 독특한 능력이었다.
‘이 애도 참. 긴장을 풀어주려는 시도임은 알지만.’
부끄러운 건 부끄러운 것이었다.
"휴우. 얼굴은 왜 아직도 화끈거린담."
유명 기루, 황하루의 주인 이월.
화려한 겉모습과는 달리······
남자 경험이라고는 티끌만치도 없었다.
#
명한은 그대로 황하루 최상층에 눌러앉았다.
흑점에 소식을 전하고 오월상단이 오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무공 연습을 도와달라고?"
"응. 기본공 위주로."
그리고 명한은 그 시간을 허투루 쓸 생각이 없었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독공을 익힌 것 아니었어? 다른 무공을 쓰는 건 못 봤는데."
"독공도 기본이 돼야 힘을 쓰지. 본래라면 조금 더 뒤에 기본을 잡을까 했는데, 얼떨결에 환골탈태도 했겠다 낭비하면 못쓰지."
"세상에. 무인이라면 꿈에서도 얻기 힘든 환골탈태를 무슨 길 가다 주운 동전처럼 얘기하냐?"
"뭐, 인생이 다 그렇지. 그래서 도와줄 거야, 말 거야?"
너스레 떠는 명한에 은소소가 혀를 찼다.
참 얄미운 얼굴에 얄미운 말투다.
하지만 이 제안을 단번에 잘라내지 못하는 건 호기심 때문이다.
‘내 적염권을 맞고 버틴 것도 신기하고.’
명한이라는 인간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알았어, 궁에서 가르치는 기본 공이라면 봐줄게."
"바로 하자. 참고로 나는 외공이라면 문외한에 가까우니까 적당히 해 줘."
"······이전까지는 궁에서 뭘 한 거야?"
"노름, 술, 한량 짓······더 말해줘?"
"아니, 됐다. 생각이 바뀐 건지 사람이 바뀐 건지."
"그러게."
핵심에 근접한 은소소의 말에 명한이 가볍게 웃으며 자리를 옮겼다.
오독경과 가이신공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상황.
이제는 실전에 어울릴 만한 외공을 택할 시점이다.
‘그 무공의 기본 조건이 체 수치 30 이상이었지.’
환골탈태로 여유는 있지만, 확실한 편이 좋다.
"해보자고, 은 선생님."
"흥. 내 손은 매워, 소백 제자."
남은 짜투리 시간을 활용하는 법.
명한의 시간은 언제나 촘촘했다.
#
덜그럭거리며 경사를 올라가는 마차.
묵직하게 실린 짐은 상단 마차로 보였으나, 이를 나타내는 상징은 보이지 않았다.
사람 없는 새벽 시장에 홀로 길을 가로질렀다.
"이거 너무 힘듭니다, 누님."
"고생했어. 예상보다 하루를 더 당겼으니 우리가 올 거라 생각하는 사람은 없겠지."
"그렇게 서둘러야 했습니까?"
"상단의 명줄이 달린 일이잖아. 게다가 그 사람을 언니 몰래 확인하고 싶기도 해서."
마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는 한 사람.
큰 키에 시원시원한 이목구비가 매력적인 여성이었다.
오월상단의 상단주, 오월.
바로 그녀였다.
"잘생긴 남자라니까 구경 가는 건 아니고요?"
"후후후. 그것도 한몫했지. 우리 상단 동생들은 다들 착하고 마음씨는 좋은데, 얼굴이 망가졌어."
"상처받습니다, 누님!"
"농담이야, 농담. 그럼 마차는 정해진 곳에 숨겨둬. 나는 그 인간이 어떤 속셈으로 접근했는지부터 캐러 갈 테니까."
"혼자서 위험하지 않겠어요?"
"왜 이래. 나, 오월이야."
상큼하게 한 번 웃어 보인 뒤, 오월은 마차와 다른 방향으로 갈라졌다.
상단은 흑점에 속해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대외비.
행동은 별개의 것으로 해야만 한다.
"흐흥. 황하루 최고층에 머물고 있다고 했지?"
샛길로 빠져나온 오월은 그대로 건물 위로 올라갔다.
상단을 맡기 전, 그녀의 전문 분야는 염탐, 정보 수집, 그리고 장물 확보였다.
쉽게 말하자면 도둑질.
벽과 벽, 건물과 건물을 옮겨 다니는 건 우스웠다.
"······오. 저기 있군."
이내, 황하루 인근 건물에 도착했다.
사막 끝자락 선인장도 구별하는 그녀의 시력이 누각 끝 족에 서 있는 한 남자를 확인했다.
이월이 묘사한 그대로의 모습.
‘잘 생겼잖아?’
호리호리한 체구에 먹으로 그린 듯한 이목구비를 가진 미남자였다.
"확실히 언니 취향이긴 하네. 속셈만 없으면 잘 엮어보고 싶어. 문제는······저렇게 잘 생긴 사람은 항상 뒤끝이 안 좋은 건데."
다른 곳도 아니고, 다른 사람도 아니다.
무려 신교에서 온 천마의 자식 중 하나.
금을 주고 흑동을 돌파해서 무공을 찾아주겠다는 말.
덜컥 믿기에는 세상살이가 쉽지 않다.
"······응?"
그렇게 염탐 아닌 염탐을 이어가던 중.
이월은 새벽 그림자 사이로 무언가 이동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새벽이슬을 맞으러 나온 상인도, 술 취한 취객도 아니었다.
걸음에 실린 은밀함은 동종업계의 것.
‘자객? 저 인간을 노리는 건가?’
모여드는 방위만 봐도 목표는 확실했다.
"설마, 거래 내용이 벌써 유출된 건가?"
오월이 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현재, 오월상단은 재정난으로 인해서 이곳저곳에 빚을 지고 있는 상황.
명한이 금괴로 이 빚을 청산하지 않으면, 머지않아서 상단 채로 꿀꺽하는 곳이 나온다.
돈보다 상단을 원하는 이들에게는 명한이 골칫덩이.
암살자를 보내 처리하는 것도 하나의 수다.
‘그래도 천마의 자식인데 당하진 않겠지?’
오월이 개입과 방관 사이에서 갈등했다.
"어? 어어? 뭐야, 저거?"
그러다 창문 너머로 몸을 움직이는 명한을 봤다.
어설픈, 그리고 매우 조악하기 짝이 없는 초식이었다.
무공을 배운지 얼마 안 된 초짜의 몸동작.
오월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젠장, 천마의 자식이라며!"
어느새 건물 난간을 박차고 있었다.
#
"슬슬 올 때가 됐다 싶었다."
명한이 기지개를 쭉 켜며 중얼거렸다.
애초에 혈염마녀의 계획은 사절단을 지정된 위치로 이송해서 죽이는 것.
백염당은 암살자로 배치된 이들이 아니었다.
"숫자는 대충 열 서넛인가. 기감이라는 건 굉장히 독특한 느낌이네."
가이신공의 경지가 깊어지며 감각 또한 날카로워졌다.
황하루 주변으로 포위해 들어오는 암살자의 기척이 하나하나 느껴졌다.
‘은소소에게 기본공을 배우길 잘했어.’
내공을 어떻게 쓰고, 몸을 어떻게 움직이는가.
그 이전에 기본공이라 하면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시작이다.
은소소는 착실하게 이를 주입 시켰다.
"쌍아야, 일단은 얌전히 있어 보렴."
명한이 살기를 내보이는 쌍각사를 다독였다.
암살자 정도야 쌍각사를 내보내면 1합이면 정리되겠지만, 그래서야 의미가 없다.
기본공의 연습도 할 겸 이번에는 직접 하고 싶었다.
창가로 걸어가 가볍게 몸을 풀었다.
"······우선은 셋인가. 꽤나 얕보였군."
열 서넛 중 들어오는 건 고작 셋.
백염당이 전부 죽었어도 명한에 대한 평가는 여전하다는 의미였다.
그건 반가운 소식임과 동시에 불쾌한 소식이었다.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핥았다.
쉭―!
그리고 동시에 창을 넘어서 날아 들어오는 은침.
햇살에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 않을 만큼 얇았다.
이것이 암살자의 무기인가.
기감을 따라 그대로 손을 뻗었다.
헛, 하는 경탄성과 함께 은침이 손끝에 잡혔다.
"셋으로 되겠어?"
뒤를 이어 날아오는 은침도 전부 걷어냈다.
손끝에 모인 숫자가 전부 아홉.
내공을 사용해서 은침을 손바닥 위에서 핑그르 돌렸다.
은소소가 가르치기를 나(螺).
내공을 뻗고 거두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회전시키는 요령이었다.
조금은 둔탁하지만, 의도대로 돌아갔다.
"가져가라."
그렇게 회전시킨 은침은 암살자들을 향해서 돌려줬다.
아니, 돌려주려고 했다.
"위험해!"
갑작스럽게 난입한 불청객이 아니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