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19/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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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검산장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성운로.

오랜 침묵을 뒤로하고 다시 가동을 시작했다.

땅으로부터 울리는 묵직한 진동음에 주검산장 모두의 얼굴이 밝아졌다.

"드디어, 주검산장이 본래의 모습을 찾아가는군요."

"아직 멀었습니다. 흩어진 산장의 식구들도 찾아야 하고, 전쟁통에 밀린 의뢰도 마무리해야 합니다. 신뢰를 찾지 못하면 주검산장은 이름뿐이니까요."

"암요. 맞습니다. 정운 도련님······아니 장주께서 생각이 깊습니다."

어린 장주.

못 미더워하는 시선은 여전했으나, 전처럼은 아니었다.

적어도 곁에서 보좌하며 주검산장을 본래의 모습으로 만들겠다는 의지는 분명했다.

"모두 당신들 덕분입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까요?"

정운은 이 모든 것이 누구의 덕인지를 알았다.

그리고 대가 없는 호의가 없다는 것도 인지했다.

눈앞의 세 사람이 어디에서 온 이들인지 알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약속만 지키면 돼. 혼자서 힘들면 입 무거운 사람 두엇만 대동해서 처리해 줘."

"정말 그것으로 충분한 건가요?"

"딱히 큰 대가를 바란 건 아니야. 약속과 침묵. 두 가지면 충분해. 아······아니다. 하나만 더 부탁해도 될까?"

"뭐든지 말씀하세요."

주검산장을 홀라당 넘기는 일만 아니라면.

정운이 명한의 다음 말에 집중했다.

"주검산장이 무기에 특화되어 있다는 건 알지만, 혹시 피갑(皮鉀)도 가능한가?"

"가죽으로 말인가요?"

"질 좋은 재료가 있어서. 가볍게 옷 안쪽으로 입을 피갑을 하나 만들어 줬으면 하는데."

명한이 혈독주의 가죽과 실을 꺼냈다.

"아, 아니! 이건 혈독주의 가죽 아닙니까!?"

"오오오! 이 실은 혈독주가 몸 안에 품고 있는 실이야! 세상에, 이 구하기 힘든 재료들을!?"

반응은 정운이 아닌 뒤에서 나왔다.

쌓인 나이만큼 보는 눈이 뛰어난 주검산장의 원로들이었다.

명한이 내어놓은 재료 주변을 빙빙 돌면서 파르르 떨었다.

"어떻게 가능할까?"

"오······가능하지요. 가능합니다. 정운 장주님을 구해주시고 우리 주검산장을 구원하셨으니, 이 정도는 대수롭지 않은 일입니다."

"하루. 하루만 주시면 세상 둘도 없는 물건으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장로들의 호언장담에 명한이 정운 쪽을 보며 눈으로 물었다.

어쨌든 결정은 장주인 그가 해야 했다.

"받은 은혜와 비교하면 티끌에 불과합니다. 주검산장의 전력을 동원해서 최고의 물건으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래. 주검산장의 명성. 기대해 보겠어."

금 마차를 녹이며 겸사겸사.

챙길 건 알뜰하게 챙기는 명한이었다.

#

마차 석대 분량의 금괴.

명한은 눈앞에서 반짝이는 금괴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얼추 이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었지만, 직접 눈으로 보는 건 또 느낌이 달랐다.

"어마어마한 양이네요. 정말 마차로 옮겨도 괜찮겠습니까? 자칫 분실이라도 하면······"

"지금껏 끌고 다닌 게 금 마차야. 이제 와서 불안하다고 하면 우습지 않겠어?"

"하긴 그렇군요. 그보다 이 금들······사용처는 제가 알 바 아니지만, 처분이 쉽지는 않아 보입니다. 주검산장의 옛 인맥 중에 상인들도 여럿인데, 제가 소개를 해 드릴까요?"

"고마운 말이네. 근데 괜찮아."

정운의 배려에 명한이 고개를 저었다.

"이 금은 따로 처리할 사람이 있어."

"그렇습니까. 그럼 더는 묻지 않겠습니다."

"하하. 넌 나이치고 신중한 게 장점이야. 그 탓에 귀여움은 좀 적지만."

"귀여움받으며 주검산장을 지킬 수는 없으니까요."

"일찍 철이 들어버린 소년인가.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이 조금 쓰라리군."

정운은 굳이 답하지 않았다.

"그보다 앞으로는 꽤 번잡스러울 거야. 주검산장 후계가 정해지고 성운로가 가동됐다는 소문은 금세 퍼져나갈 테니까."

"각오하고 있습니다."

"아마······아니 확실히 조만간일 거야. 무림맹에서 네게 접근하겠지."

"무림맹에서요?"

"그래. 그쪽도 집안 사정으로 이래저래 무기에 목을 매거든."

"그럼 혹시 제게 따로 당부할 말씀이라도 있는 건가요? 무림맹과 거리를 두라든지······"

정운은 명한의 소속을 어림짐작하고 있다.

그리고 그 소속, 신교가 무림맹과 여전히 적대적인 관계임도 안다.

저울질은 장주로서의 판단이었다.

"아서라. 벌써 줄타기하다가는 떨어지기 십상이야. 무림맹이 손을 내밀면 좋은 조건으로 잡아."

"그래도 괜찮은 건가요?"

"당분간 그들만큼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이들도 없을 테니까. 비를 막아줄 우산이기도 하고."

"으음. 그리 말씀하신다면 따르겠습니다."

"너희는 주검산장이야. 어딘가의 산하기관이 아니라고."

"······명심하겠습니다."

신교 소속으로는 할 말이 아니지만, 명한에게는 그런 소속감 따위는 없다.

신교든 무림맹이든 사실 알 바 아니다.

중요한 건 그 안에서 챙겨야 할 이득.

그리고 살아남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다.

"그럼, 이 정도로 마무리하지. 연이 되면 또 보자."

"은공의 앞날에 행운만이 가득하기를 빌겠습니다."

밑그림은 차곡차곡 그려지고 있었다.

#

[이름 : 혈독주갑(血毒蛛鉀)]

[분류 : 의복]

[등급 : 지중급]

[설명 : 혈독주의 가죽과 실로 만든 피갑. 매우 가볍고 착용성이 좋다. 독에 대한 저항력을 올려주며 날붙이에 대한 방어도가 훌륭하다. 불에는 취약함]

명한은 떠나는 길에 마지막으로 피갑을 챙겼다.

연녹색의 얇은 내의 형식이었다.

온 안쪽에 덧대 입어도 티가 나지 않았다.

"이건 네가 입어라."

"네? 저요?"

피갑은 향아에게 주었다.

독 저항이 높은 명한과 검막을 쓸 수 있는 은소소보다는 향아 쪽에 필요한 물건이었다.

"안에 덧대 입으면 돼. 귀찮다고 벗지 말고 꼭 입고 다녀."

"하, 하지만 이런 보물을 어떻게 감히 제가······"

"입으라면 입어. 안 입으면 과자 1주일간 압수다."

"이, 입을게요!"

궁상맞은 대꾸는 과자로 눌러두었다.

물건은 필요에 의해서 분배하면 그만.

보물이라고 꿍쳐두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저 몸종을 꽤 아끼는 눈치네?"

그런 명한에게 은소소가 넌지시 물었다.

"그나마 남은 이들 중에서는 가족 같은 사람이니까."

"혈육이 널린 천마궁 안에서?"

"피가 이어진다고 가족인 건 아니지. 그건 너도 알고 있잖아."

"······"

은소소가 무어라 대꾸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 그만두었다.

"그보다 이젠 슬슬 털어놓아 보시지?"

대신 화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마차에 실린 금괴도 그렇고 계획이 뭐야?"

"갑자기 궁금해지기 시작한 거야?"

"내기에 졌으니 군소리는 안 하려고 했어. 하지만 소림사까지 가는 여정에 너무 많은 중간과정이 있지 않나? 조금은 알아야 할 거 같은데."

나름 타당한 의견이었다.

‘대충 윤곽 정도는 괜찮으려나?’

명한이 짧게 생각을 정리하고 입을 열었다.

"날 죽이려고 하는 궁곡의 모친. 혈염마녀에 대해서는 너도 알고 있지?"

"알다마다. 궁내에서 그녀를 모르는 사람은 없지."

"혈염마녀는 독곡 출신으로 그 지위와 힘이 막강해. 하지만 궁의 위치를 확고하게 잡아주는 건 다른 사람이야."

"천하상단의 상단주, 하백."

"그래. 혈염마녀의 부친이자, 천하의 거부. 그의 돈이 천마궁으로 흘러들어와 혈염마녀와 궁곡을 배 불리고 있지."

흔히 천하 4대 상단이라 불리는 곳이 있다.

동쪽의 ‘은월상단’, 북쪽의 ‘북망상단’, 남쪽의 ‘금가상단’.

그리고 서쪽의 천하상단.

천하의 금권을 사분한다고 알려진 막강한 세력이다.

"그래서 우선 적으로 천하상단의 힘부터 빼놓을 생각이야."

"네가? 무슨 수로? 설마 마차 세 대 분량의 금괴로 그를 상대하겠다는 건 아니겠지?"

"마차 세 대 분량의 금괴라면 분명 큰돈이지. 하지만 그 정도로는 천하상단의 금력과 비교하면 바다에 떨어진 빗방울에 불과해."

"그럼 뭘 어쩌겠다는 거야?"

"간단해. 천하상단과 대적할 서쪽의 상단을 만들겠어."

명한의 손끝이 서쪽을 가리켰다.

"내가 상단에 대해서는 무지하지만, 천하상단은 쉬운 상대가 아니야. 무슨 수로 그들과 대적할 상단을 만들겠다는 거냐?"

"저점에서 사는 거지."

"뭐?"

"전문용어야. 지금 이 시점에 바닥을 치고 있는 상단이 하나 있거든. 마차 세 대 분의 금괴로 그들의 지분을 사는 거지."

은소소의 물음표 가득한 얼굴을 보며 웃었다.

현대라면 미래를 알고 하는 주식투자.

이 시대, 이 설정에서는 훗날 천하 대상이 될 소상단에 대한 투자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금괴만 던진다고 끝나는 건 아니지만.’

힘을 써 줄 사람이라면 눈앞에 있다.

"무력, 권력, 금력. 시작은 금력이야."

원대한 포부였다.

#

"뭐? 주검산장의 일이 마무리되었다고?"

청색 도포 차림의 잘생긴 청년이 급히 말을 세웠다.

휘날리는 도포에는 무당산 1대 제자에게만 내리는 독특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다시 제대로 말해 봐. 정식 후계자가 반란으로 밀려난 것이 고작 이틀 전이었잖아."

"그 이틀 사이에 난이 정리됐어요."

"불가능해. 정식 후계는 아직 스물도 안 된 소년이야. 무슨 수로 반란을 정리한다는 거지?"

무당산에서 무림맹 지부로 이어지는 정보집단 비각(飛閣)의 급보를 받고 출발한 것이 하루 전.

이건 빨라도 너무 빨랐다.

"중간에 다른 사람의 개입이 있었다고 해요."

"다른 사람? 누구?"

"그건 아직 비각에서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어요. 상황이 벌어진 뒤, 바로 끼어들어서 정리했다고 해요."

"바로 끼어들었다고? 그건 기다렸다는 건가?"

"그렇게 해석이 되나요?"

"우리도 겨우 소식을 접했다. 지나가던 길에 우연히 상황을 목도하고 하루 만에 정리하는 것이 가능할까? 미리 계획된 일이 아니라면."

청년의 목소리는 매우 설득력이 있었다.

단순히 그가 1대 제자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중원의 칠룡 팔봉중 하나이자, 무림의 신성.

무당등룡(武當登龍) 막군천이기 때문이다.

"비각에 의뢰해서 개입한 이들을 찾아내. 무슨 목적으로 움직였는지 확실히 알아내야겠어."

"네, 사형."

"우리는 정도의 불빛이야. 작은 어둠 하나라도 허투루 다룰 수 없어. 힘들겠지만, 부탁한다."

"걱정하지 마세요, 사형. 사형의 부탁이라면 불 속에라도 들어갈 수 있으니까요."

"믿는다."

막군천이 사제의 어깨를 힘주어 다독였다.

정도의 신성, 청년 무림의 기둥 같은 모습이었다.

‘대체 어떤 놈이냐. 주검산장을 손에 넣을 절호의 기회였는데.’

"남은 이들은 나를 따라라. 주검산장으로 이동한다!"

"네!"

속은 어떤지 모른다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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