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 남자가 되다
발악과 같은 싸움이었다.
구문연 자체는 확실히 수준 높은 고수.
그것도 경험이 바탕이 되는 실력파 고수였다.
하지만 상대가 좋지 않았다.
"이, 이! 어린 계집이!"
"실력을 나이로 논할 셈인가?"
은소소는 절정의 끝자락.
심지어 무공은 신교의 최상급 절기였다.
그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이 차이를 극복하는 건 무리였다.
"저 어린놈을 잡아!!"
결국, 궁여지책을 택하는 구문연.
남은 부하를 움직여 명한과 정운 쪽을 노렸다.
적어도 정도 무인이라면, 이조차 그의 오해였지만, 아이를 인질로 잡으면 승기를 쥘 거라 여겼다.
"안 그래도 환골탈태의 위력을 실험해 보고 싶었는데. 알아서 다가와 주는군."
하지만 범을 피해서 이리의 아가리로 뛰어드는 것이 결코 현명한 판단은 아니다.
명한이 양손을 교차하며 독단의 기운을 뽑아냈다.
오독경으로 제어되는 1갑자(60년)이상의 공력이었다.
손바닥부터 팔꿈치 아래까지가 녹색으로 물들었다.
"아이를 내놓아라!!"
"큰놈은 죽여!"
거리가 한 발짝 안으로 좁아졌을 때.
명한이 응축했던 독단의 기운을 사방으로 뿜어냈다.
녹색의 물결이 원형으로 퍼지며 사월문도를 관통했다.
"아아악!!"
"소, 손이 썩는다! 독이다, 독이야!"
"이, 이! 비겁한 놈!"
독은 지독했다.
순식간에 피부가 짓무르고 근육이 녹아내렸다.
내공으로 몸을 보호하거나 이를 견디며 돌입할 용기 있는 놈은 없었다.
전부 무기를 던지며 물러났다.
"콜록! 콜록!"
"뭐, 뭐야!? 그 짧은 시간에······!?"
"끄······끄윽. 끅!"
하지만 중독은 한 호흡이면 충분했다.
사월문도의 폐로 빨려 들어간 독기는 순식간에 사지로 퍼졌다.
몸을 마비시키고 기능을 앗아갔다.
뻣뻣하게 굳어서 쓰러지는 모습은 마치 목각인형 같았다.
"괜찮은데? 확실히 전보다 독기의 제어가 수월해. 가이신공의 등급이 오른 덕도 있지만, 세맥이 열린 값을 하는군."
쓰러진 이들을 내려다보며 명한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심, 기, 체가 오르고 내공이 상승했다는 수치의 변화로는 알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큰 바다를 중심으로 뻗어 나가는 지류의 확장.
신체 말단까지 기운의 수발이 가능했다.
‘조건 몇 개만 만족하면 그것도 가능해지겠어.’
아직은 먼 이야기나 벌써 흥분되기 시작했다.
"본래부터 독을 썼나?"
"음? 아, 벌써 끝내고 온 거냐?"
명한이 잠시 상념에 빠져있던 시간 동안.
은소소가 구문연을 끝내고 돌아왔다.
머리채 잡힌 채 질질 끌려오는 비참한 꼴이었다.
"사파의 너절한 무공 따위는 대수롭지 않아."
"크, 크윽!! 당장 이 손을 놔라!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것이냐!?"
"사월문의 구문연. 살인, 강도, 방화, 강간, 유괴. 온갖 더러운 짓은 다 하고 다닌 쓰레기. 부가 설명이 필요하냐?"
"내, 내 뒤에는 사파연합이 있다! 감히 날 건드리고도 네놈들이 무사할 것 같나!?"
구문연이 발악과 같이 외쳤다.
실력으로 상대가 되지 않는다면, 세력으로라도 구명을 해야 했다.
사파 인생에 체면 따위는 없었다.
"사파 연합?"
"녹림과 수적을 포함해서 장강 일대에 자리한 연합체야. 숫자로는 신교나 무림맹보다도 많다고 하더군."
"그, 그래! 바로 그 사파 연합에 우리 사월문도 속해있다 이 말이다! 당장 이 손을 놓지 않는다면 너희는 사파 연합의 추격을 받게 될 것이다!"
은소소가 답은 아끼고 명한 쪽을 바라봤다.
판단과 결정에 관한 건 그를 신뢰하는 태도였다.
"말이 연합이지 결국 몸집 부풀리기에 지나지 않아. 장강 유역이면 모르겠으나, 이런 곳까지 그들이 신경 쓸 리도 없고. 게다가 사월문이 그리 유명한 곳이 아니잖아?"
"우, 우리 사월문을 무시하는 거냐!?"
"세상에는 온갖 오물과 더러움이 있어. 개중 일부는 닦을 수 없는 흔적이기도 하지. 하지만 너희 사월문은······바짓단에 튄 흙탕물 정도야."
"너! 너!! 네놈이 대체 뭐라고 우리 사월문을!?"
"말했잖아."
명한이 손을 뻗어 구문연의 머리를 쥐었다.
희미한 망설임은 가슴에서 얼룩처럼 번지나, 각오는 그보다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스승이 천마라고."
독이 구문연의 머리를 녹였다.
#
긴 대전.
철로 만들어진 발판 위를 정운이 걸었다.
본래 그가 뛰어놀던 공간.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많은 이들이 함께 웃던 장소다.
"······"
하지만 이제 그 사람들은 없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죽어버렸다.
"왜 그런 겁니까, 형님."
대전의 끝자락.
철로 된 상좌에 앉은 청백을 보며 물었다.
소년과 장주 그 어딘가 즈음에 놓인 눈빛이었다.
"왜? 왜냐고 물은 거냐, 동생아?"
"우린 가족이었어요. 같은 주검산장의 식구였다고요. 어떻게 그 사람들을 모두 죽일 수 있죠?"
"하! 가족. 가족이라고 생각한 건 너뿐이겠지. 나는 단 한 번도 그들의 가족이었던 적이 없다."
청백의 목소리는 끓어 넘칠 듯 위태로웠다.
"언제나 너뿐이었지. 장자니까. 피를 이어갈 혈육이니까. 하지만 이 주검산장은 너 같은 어린애가 이어받을 곳이 아니야. 사리 분별도 못 하는 어린애가 사방의 늑대들을 상대로 뭘 할 수 있다는 거냐!?"
"······그럼 곁에서 도와주시지 그랬어요."
"닥쳐! 닥치라고! 어차피 너도 마찬가지잖아! 형님, 형님. 입바른 말이나 하고, 때가 되면 날 내쫓을 생각이었지!?"
"한 번도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요."
"흐. 흐흐흐흐. 말은 쉽지. 네가 이 자리에 올라왔을 때, 나 같은 놈이 곁에 있다는 걸 용납할 거 같아?"
어차피 던진 돌이었다.
청백은 흐느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한다면 직접 와서 가져가. 내 눈알을 파서 장주를 승계해라. 계속 남의 뒤에만 숨어있지 말고."
"······꼭 그렇게 해야겠습니까?"
"와서 가져가라고!"
"······"
정운이 입술을 깨물며 앞으로 걸었다.
원한은 불같이 뜨겁지만, 그래도 한때는 형님이라고 따랐던 사람.
마음이 무거웠다.
긴 대전을 더욱 길게 걸어서 청백의 앞에 섰다.
"청백 형님······"
"하. 하하하하하."
"형님?"
"이래서 애새끼는 안 되는 거다!"
그 순간.
청백의 파안대소와 함께 바닥에서 검붉은 창살이 올라왔다.
특수하게 제작한 함정이었다.
정운과 청백 그 자신만을 가두게끔 고안된.
"형님. 끝까지 이러는 겁니까?"
"내가 왜 네 형님이냐? 주검산장은 내 것이야. 너 같은 놈에게 넘겨 줄 수 없어!"
"형님!!"
"닥쳐! 네놈을 죽이고 인장만 빼앗는다면 끝이다. 네놈이 데리고 온 고수가 얼마나 강하든 상관없어! 내가 장주가 되면 되니까!"
정운이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역시 안되나 봅니다."
"그렇다니까."
그리고 이내, 두 사람이 그림자처럼 나타났다.
명한과 은소소였다.
"말했잖아. 한 번 탐욕에 눈먼 사람은 설득으로 돌아오지 않아. 네 마음은 알겠지만, 이건 덧셈과 뺄셈 같은 단순한 문제야."
"다른 분들도 같은 의견인가요?"
"장주의 의견을 따를 뿐입니다."
"전대 장주의 의견은 분명했습니다."
"일은 마무리 짓고 다시 시작해야죠."
아니, 두 사람만이 아니었다.
어디선가 속속들이 사람들이 나타났다.
분란을 피해서 몸을 숨겼던 주검산장의 인물이었다.
"노대? 규염? 백주?"
"이렇게 됐으니, 포기하시죠."
"이, 이! 버러지 같은 놈들이 이제 와서 무슨 소리냐!? 내가 장주 대리로 있을 때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놈들이!?"
"바른 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을 뿐입니다."
이들은 모아온 사람은 바로 명한이었다.
그는 주검산장의 후속 이야기를 모두 꿰차고 있었다.
정운이 어떻게 차기 무림맹주를 만나는지, 사월문을 무찌르는지, 남은 세력을 규합하는지.
전부 알고 있는데 복잡하게 돌아갈 이유는 없었다.
곧바로 숨어있는 장소로 들어가 싹 다 끄집어서 이곳으로 끌고 왔다.
"시끄러워! 시끄러워!! 그래서 네놈들이 어찌할 건데? 이 흑철 감옥은 내가 아니면 해제할 수 없어. 이놈을 죽이고 내가 유일한 후계자가 된 후에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토씨 하나 안 틀리네. 이건 좀 실망이야."
"뭐?"
발악하는 청백의 앞으로 다가가는 건 명한.
혹시나 이번에도 사건이 뒤틀리지 않을까 싶어서 지켜보기만 했는데, 대사 하나 변하지 않았다.
‘무림 맹주가 아닌 내가 왔는데도.’
어느 정도 변화의 폭이 있다는 의미였다.
"그만 치졸하게 떠들고 포기해. 상황 터졌다고 구석에 숨어있던 저 인간들도 영 미덥지 않지만, 기회다 싶어서 동생 뒤통수 친 네놈은 절대 아니야."
"네놈이 뭐라고 떠드는 거냐? 이건 주검산장의 일이다!"
"그 논리면 사월문을 끌어들이지 말았어야지. 새끼가 논리가 없어요."
"이, 이이······! 더 다가오면 이놈을 죽이겠다!"
결국, 검을 꺼내 정운을 겨누는 청백.
"이 정도면 됐다. 향아야, 꺼내와."
"네, 도련님."
"······!"
명한의 명령과 동시에 천장에서 그림자 하나가 떨어졌다.
무엇도 들어올 수 없다고 자신했던 감옥의 안쪽.
그림자는 마치 형태가 없는 듯 정운을 휘감고는 감옥 밖으로 유유히 빠져나갔다.
감옥 안쪽에 남은 건 청백이 유일했다.
"좋군. 월보가 매우 유려해졌어."
"헤헤. 감사해요, 도련님."
자연스럽게 명한의 옆에 안착하는 건 향아.
신기에 가까운 경공이었다.
"이, 이럴 수는 없어! 돌아와라, 정운! 정운!!"
"······주검산장의 장주로서 명령할게요. 그의 인장을 수거하세요. 그리고 반역자로 처단합니다."
"정운!!! 네놈이 내게 이럴 수는 없다!!"
"모든 건 죽어간 식구들을 위해서."
눈물 한 방울 흘리며, 정운이 말을 맺었다.
끝없이 들려오는 청백의 절규를 애써 외면하며.
"우리는 다시 주검산장이 됩니다."
소년이 아닌 장주로서 명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