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7/235)

쓰레기 청소

커다란 쇳덩이가 장식처럼 놓여있는 대전.

시뻘게진 얼굴의 한 남자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다.

현 주검산장의 장주 대리, 청백이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분명 약속하지 않았나요!? 사월문의 힘으로 정운을 잡아 오겠다고!"

그가 소리치는 대상은 흑색 두건 차림의 사내.

가슴팍에 그려진 검은 달은 ‘사월문’의 소속임을 나타냈다.

"진정하시죠, 청백 장주."

"지금 진정하게 생겼습니까? 정운이 그놈이 없으면 성운로를 가동할 수 없다 이겁니다! 성운로가 없으면 주검산장도 없어요!"

"이해합니다. 힘으로 장주직에 올랐는데, 정작 중요한 건 부릴 수 없으니. 허울뿐인 장주가 된 기분이겠죠."

"이이익! 지금 날 놀리는 겁니까?"

"설마요. 주검산장과 우리 사월문은 돈독한 사이 아닙니까. 그만큼 애석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청백의 곁으로 다가갔다.

음울한 기척에 청백의 얼굴이 일순간 굳었다.

흑색 두건의 남자.

사월문의 문주인 구문연은 같은 편으로 두어도 어딘가 꺼림칙한 인물이었다.

"후후후. 정운 그 어린아이 곁에 생각지도 못한 고수가 붙어 있나 봅니다. 나찰이 손도 못 쓰고 죽었다는 얘기를 고려해 보자면 못해도 일류 상급. 어쩌면 절정급의 고수인지도 모르죠."

"저, 절정급? 인근에 그런 고수가 있단 말이요?"

"큰 세력이 모두 물러난 지금 떠오르는 곳은 없지만······혹시 또 모르는 일입니다. 전대 장주께서 비밀리에 사람을 구했을지도."

"큭! 그 노친네가 끝끝내!"

청백의 이가 거칠게 갈렸다.

끝끝내 자신을 장주로 인정하지 않던 전대 장주의 모습이 떠올라 치가 떨렸다.

‘그 어린놈보다 내가 더 어울려!’

유약한 정운보다는 자신이 낫다고 믿었다.

"어떻게, 사월문에서 방도가 있겠습니까? 상대가 절정 고수라고 가정하면."

"쉽지는 않죠. 절정무인이 어디 바닷가의 모래알도 아니고. 그 정도 고수와 싸우려면 사월문도 많은 걸 걸어야 합니다."

"크윽. 그래서 뭐요? 뭘 원하는 겁니까?"

"하하. 장주는 말이 통해서 좋습니다. 성운로가 가동되면 일찍이 무림맹에서 맡겨 두었던 그 검도 꺼내올 수 있겠죠?"

"설마, 운검(雲劍)을 말하는 거요?"

정식 명칭은 일뇌운검(一雷雲劍).

무림맹의 고수가 전쟁을 앞두고 수리를 맡겨 두었던 물건이다.

주인은 전쟁통에서 죽고 주검산장도 떠밀리며 골동품처럼 남게 되었다.

"우리 사월문도 그럴듯한 상징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일이 성공한다면 운검을 내어주시죠."

"······이번에는 확실한 겁니까?"

"걱정마시길. 만약을 위해서 제가 직접 나설 겁니다."

"오! 염사권의 대가인 구문연, 당신이 말입니까?"

"제 손에 걸린다면 어설픈 절정 무인쯤이야 우습지요."

구문연이 호언장담했다.

그가 익힌 염사권은 그 성질이 독특한 사파 특유의 기공.

같은 절정급 무인이라고 해도 파훼법을 알지 못하면 필승을 자신한다.

‘운검을 내세우고 일대를 사월문의 것으로 한다.’

장밋빛 미래가 그려졌다.

"좋습니다. 성공한다면 운검을 내어 드리죠."

‘버러지 같은 사파 새끼들이지만, 써먹을 만해.’

청백도 생각을 정리하고 말을 받았다.

"기대에 부응해 드리죠."

"믿고 있겠습니다, 구 문주."

동상이몽.

겉과 속이 다른 채 합의가 끝났다.

#

정운은 눈만 깜빡였다.

훅 들어온 제안이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절 도와주신다고요?"

"그래. 네가 장주에 오르는 걸 도와줄게."

"어째서요?"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다.

주검산장을 안다고는 하지만, 이런 제안은 너무 갑작스러웠다.

"주검산장에 부탁할 일이 있거든. 그러려면 너나 청백이라는 인간이 장주가 되어야 하는데······사월문 같은 싸구려 사파 따위와 거래하는 인간은 믿기지 않아서."

"하, 하지만 그들은 여럿이고 전 이제 혼자에요."

"원래 아쉬운 쪽에 거는 거야."

그래야 떨어질 콩고물도 크고.

도덕적인 이유를 따지지 않아도 정운 쪽에 베팅을 걸 이유라면 차고 넘쳤다.

‘게다가 이렇게 해야 무림맹에 안 붙거든.’

본래, 정운을 구해주는 건 후에 무림맹주가 될 인물.

기지를 발휘해서 위기에서 도망친 정운이 그와 만나는 것이 시작점이다.

남의 떡을 빼앗으려면 확실한 편이 낫다.

"어때? 장주 자리를 되찾고 싶은 마음은 있어?"

"전 솔직히 관심이 없었어요. 청백 형님이 장주가 된다고 해도 괜찮았어요. 경험도 더 많고, 따르는 사람도 훨씬 많았으니까요. 하지만······"

"하지만?"

"형님은 이러면 안 됐어요. 같은 주검산장 식구인데. 한솥밥을 먹고 한 이불을 덮은 사이인데. 그들을 그렇게 죽여서는 안 됐어요."

정운이 눈물이 나올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꽉 쥔 손은 피가 통하지 않아서 하얗게 질렸다.

장주에 대한 욕심보다 죽은 식구에 대한 분노가 훨씬 컸다.

"그래. 제 식구도 챙기지 못하면 그게 어디 장주일까. 어리고 약한 건 용서가 되어도, 같은 식구 팔아먹는 건 용서가 안 돼."

"만약······제가 제안을 받아들이면 당신께서는 뭘 받아갈 생각이죠?"

"주검산장의 절반 정도면 값이 맞나?"

"······! 그, 그건 너무 과합니다!"

"목숨을 구해주고 장주 직위도 주는 거야. 절반이면 나쁜 제안은 아닌 거 같은데."

툭 던진 제안에 정운이 입술을 깨물었다.

아직 어린 그에게는 너무 무거운 질문이었다.

하지만 각오를 생각하면 답은 미룰 수 없었다.

"그건 불가합니다."

"호오. 어째서?"

"주검산장은 이미 신교와 무림맹 사이에서 비슷한 갈등을 겪었어요. 이번에 당신에게 절반을 넘긴다면 결국 같은 전철을 밟을 뿐이죠. 제 원한은 풀지 못하겠지만, 주검산장을 그렇게 만들 수는 없어요."

움켜쥔 주먹만큼 옹골찬 대답이었다.

명한이 이가 보이도록 크게 웃으며 그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잘 말했다. 적어도 장주가 되려면 그 정도 줏대는 있어야지."

"네? 네?"

"그냥 한 번 떠본 거야. 주검산장을 받아서 내가 뭐에 쓰겠다고. 필요한 일만 해주면 그것으로 충분해."

"아······"

안심한 얼굴이 귀여워 한 번 더 헝클어트린 뒤 말을 이었다.

"숲 안쪽에 숨겨둔 마차가 있어. 장주 직위를 되찾으면 그걸 좀 녹여 줘."

"녹여요? 마차를?"

"응. 순금마차거든."

"순금? 세상에 순금으로 마차를 만드는 사람이 어디에 있어요? 신교의 팔······헉!"

어려도 한 장원의 후계자.

정운은 한 번에 마차의 정체를 간파했다.

"입은 닫고 마차만 녹이는 거로. 어때? 가능하겠어?"

"······네. 성운로만 가동할 수 있다면 그보다 큰 것도 한 번에 녹일 수 있어요."

"좋아. 그럼 그렇게 거래하는 거로 하자고."

결정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찰나의 순간에 결정의 득실을 따지는 것이 장주의 소질.

그런 면에서 정운은 확실히 재능이 있었다.

"그럼, 가볼까? 장원을 되찾으러."

"네!"

일생일대의 결정이었다.

#

사월문의 문주 구문연은 신중한 사람이다.

온갖 더러운 짓은 다 벌이지만, 그래도 자기 주제를 알기에 문파를 이만큼이나 키울 수 있었다.

신교나 무림맹이 강성할 때는 숙이는 것으로.

그 둘이 없어진 뒤로는 적당한 목표만 노리는 것으로.

"하. 완전 애새끼들인데?"

그런 그에게 이번 제안은 분명 적당한 목표였다.

나찰이 죽었다고는 하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일대의 무림인 중 자신이 상대하기 거북한 자들은 이미 다 파악해 두었으니까.

게다가 상대는 많아 봐야 약관을 겨우 넘은 듯한 남녀.

"나찰 그 머저리 같은 놈들. 고작 저런 애새끼들에게 당했단 말이야?"

혀를 차며 승리를 자신했다.

간혹 기인의 제자가 약관에 나와서 활약하기는 하지만, 그래 봐야 신출내기.

‘어린놈들은 그에 맞게 상대를 해 줘야지.’

약점을 파고드는 법 정도는 익숙했다.

"신호를 보내면 약을 풀어라."

숨어있는 부하에게 지시를 내린 뒤 앞으로 나섰다.

"하하하. 장주 동생분 아닙니까. 형님께서 걱정이 많으십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시죠."

너털웃음은 호인의 그것.

"우, 웃기지 마! 당신이 우리 식구들을 죽였잖아!"

하지만 정운이 그것에 혹할 리는 만무했다.

눈앞에서 식구들이 죽는 걸 지켜봤다.

두려움보다 앞서는 건 분노였다.

"이거, 이거. 뭔가 오해가 있었던 모양이군요. 전 그저 장주 동생분을 모셔오라 시켰을 뿐입니다. 아랫것들이 조금 실수를 한 모양이군요."

"시, 실수라니! 영문도 모른 채 칼을 맞아 죽었어! 그게 어떻게 실수가 되지!?"

"그야······잘못된 주인을 따른 죄가 아닐까요?"

"이이익! 이 인간말종!!"

"하하. 어차피 무기 만드는 재주를 제외하면 하등 쓸모도 없는 인간들 아닙니까. 몇 놈 잡아 죽였다고 대수로울 것도 없지요."

정운이 순간적으로 휘청거렸다.

독사 같은 구문연과 독대하기에는 아직 어렸다.

툭, 하고 명한이 등 뒤를 손으로 받쳐주었다.

"시커먼 사파 새끼가 혓바닥만 기네."

"······뭐?"

"사파 새끼라고. 이 잡배 놈아."

그리고 아주 날 것 같은 말로 도발했다.

사파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지역에서는 알아주는 인물.

구문연이 어디서 이런 말을 들어봤겠는가.

이마 위로 핏줄이 돋아났다.

"어디서 재주 하나 주워 익힌 모양인데······젊은 나이에 객사하면 아쉽지 않나?"

"다 늙은 네놈한테 듣고 싶진 않은데?"

"하. 하하. 말해 봐. 네놈들 사부가 누구냐?"

"천마."

"천······뭐?"

"천마라고. 귓구멍도 막혔냐?"

이죽거림에 구문연의 이가 부서질 듯 마찰했다.

대체 이곳에 천마의 제자가, 그것도 수행원 없이 이렇게 덜컥 나타날 리 있겠는가.

‘이 쥐새끼가 날 놀려?’

당연히 도발이라 여겼다.

"······됐다. 사부가 누구든 상관없어. 사지를 뜯어서 개밥으로 주면 네놈들이 이곳에 있었는지 누가 알까."

"잔인하네. 역시 사파 쓰레기라 이건가?"

"어린 새끼가 혓바닥만 거칠군."

"거친데 뭐? 보태준 거라도 있나?"

"흥. 강호에 나서서 함부로 설치면 안 된다는 것을 알려주마."

순간, 때를 맞춰 구문연이 손가락을 튕겼다.

기다렸다는 듯 사방에서 사월문의 무인들이 튀어나오며 작은 구슬을 던졌다.

펑, 소리를 내며 연기를 뿜어내는 구슬들.

산공(散功)의 효과가 있는 물건이었다.

이내, 주변이 뿌연 안개로 휩싸였다.

"콜록! 콜록! 이, 이게 뭐야!?"

"흐흐흐. 무지한 어린놈아. 어르신이 오늘 강호의 이치를 깨닫게 해 주마."

"산공독!?"

"이제 알아봐야 늦었다."

이미 그는 해약을 먹은 상태.

어린놈 둘이 무공이 높아 봐야 내공이 없으면 칼 앞에 놓인 물고기에 불과했다.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다가갔다.

"봐봐. 이렇게 말하면 다가올 거라고 했지?"

"확실히 단순하네."

"······뭐?"

하지만 그 걸음은 채 두 발자국도 되지 못했다.

뿌연 안개 속에서 느긋하게 들려오는 목소리.

그리고 어느새 쓰러져 있는 사월문의 무인들.

예상과 다른 전개였다.

"나는 백독불침이라 이런 싸구려 산공독은 통하지 않아."

"백······독불침?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이 안 되는 건 내가 아니지. 나야 독을 다루는 처지니 가능한 거지만, 이쪽은 말이야······"

웃음이 가득한 명한의 손짓에 앞으로 나서는 은소소.

그녀의 몸은 희미한 기운으로 뒤덮여 있었다.

"검막!?"

절정의 끝자락.

화경으로 넘어가기 직전의 능력이었다.

"견뎌봐. 오는 길에 사월문이 얼마나 쓰레기 집단인지 열심히 설명해 줬거든."

뽑아 든 은소소의 검 끝이 은색으로 빛나고.

구문연의 얼굴은 창백하게 변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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