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장주를 줍다
명한은 어디선가 거적을 하나 주워와 마차를 덮었다.
말 여덟 마리가 끄는 마차에 거적 더미.
어울리는 꼴은 아니었지만, 이젠 금색이 필요한 때가 아니었다.
"어디로 가는 거냐?"
"말했잖아. 금 마차를 녹이러 간다고."
고삐는 명한이 쥐었다.
여덟 마리나 되는 말을 감당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신교에서 고르고 고른 명마라 그런지 알아서 잘 갔다.
이것이 과거 형태의 자율주행.
명한은 그저 틈틈이 고삐만 당기면 됐다.
"이렇게 티 나는 물건을 받아줄 사람이 있을까? 식견 좀 있는 사람이면 이 마차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아볼 텐데."
"아무것도 안 묻고 녹여줄 사람을 알아."
"안다고? 네가? 어떻게?"
그렇게 썼으니까.
명한이 뒷말을 웃음으로 삼키며 고삐를 당겼다.
은소소도 잠시 바라봤을 뿐 깊이 묻진 않았다.
동행일 뿐 친구나 가족은 아니었다.
"그럼 목적지가 어디인지 정도는 말할 수 있어?"
"멀지 않은 곳이야. 주검산장(鑄劍山莊)이라고 들어 봤어?"
"주검산장. 대충 들어본 것 같기도 한데? 본래 요동의 장인가문 아니었나?"
"맞아. 난리 통에 떠밀리다시피 중원 깊은 곳으로 이주했지. 그 장소가 이 근처야."
주검산장은 명공을 배출하던 이름 높은 장인집단.
하지만 신교와 중원의 세력다툼이 가열되면서 떠밀리듯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좋은 무기는 전쟁의 행방을 가르는 요소.
서로 손을 뻗어 쥐어짜니 그 압력을 견디지 못한 것이다.
‘가문은 사분오열되고 후계마저 엉망이 됐지.’
여기에 명한이 이용할 부분이 있다.
"본래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고 하잖아."
"뭔 소리야, 갑자기?"
"주검산장은 남의 떡이거든."
주인공의 라이벌 격.
훗날의 무림맹주가 얻어야 할 자산이 주검산장이다.
이왕 챙길 거면 남의 떡이 좋다.
"금을 떡으로 바꿔 보자고."
고삐를 힘껏 당겼다.
#
하늘을 덮을 듯 수목이 솟아있는 숲의 한가운데.
남루한 복장의 소년이 수풀 사이를 달리고 있다.
나뭇가지에 찔리고 긁힌 몸은 이미 상처투성이.
얼굴에서는 땀인지 눈물인지도 모를 액체가 계속해서 흘러내렸다.
"하아! 하아! 하아······!"
숨도 거칠어 넘어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은 소년의 체력이 고갈 직전임을 증명했다.
"도, 도련님 계속 도망가세요!!"
"유, 윤 아저씨!"
"돌아보지 마시······커억!!"
하지만 그럼에도 소년은 멈출 수 없었다.
가려진 숲의 그림자 속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던 이들이다.
목숨을 걸고 벌어준 시간인 만큼, 소년은 멈출 수 없었다.
"히힛―! 우리 도련님께서 어딜 그리 바삐 가시나?"
"왁!"
다만, 멈추지 않는다고 도망칠 수 있는 건 아니다.
어느새 한 남자가 소년의 옆으로 따라붙었다.
반쯤 밀어버린 머리카락에 뱀 같은 눈을 가진 남자였다.
"소중한 돈줄이 도망가면 못쓰지."
"이, 이거 놔!!"
남자는 손을 뻗어 그대로 소년을 낚아챘다.
갈고리처럼 길고 단단하게 뻗은 손가락은 소년의 목을 강하게 옥죄였다.
응조수의 일종.
소년은 발버둥 쳐 보았지만, 벗어날 수 없었다.
"히히. 고것 참 날로 먹어도 비린 맛 하나 없을 것 같이 생겼네. 돈 받고 건네기 전에 팔다리 하나 정도는 먹어도 되지 않을까?"
"······!"
"키히히히. 표정 봐! 표정 보라고! 캬하하하!!"
남자는 소년을 장난감처럼 들어 올린 채 웃었다.
목소리에 섞인 광기가 정상은 아니었다.
"아우야, 상품에는 손대지 말라고 했지?"
"어이쿠, 형님. 벌써 오셨습니까?"
그리고 이내, 묵직하게 생긴 거한이 장내로 진입했다.
반듯하게 밀어버린 머리에는 검은색 먹으로 ‘나(羅)’자가 진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쪽도 꽤나 급한 모양이다. 어떻게 해서든 저 아이를 잡아서 데려오란다."
"키히히. 역시 하나만으로는 가주 인장이 작동을 안 한답니까?"
"선대가 나름대로 머리를 굴린 모양이야. 어린 것이 잡아먹힐 거라 생각한 거지. 뭐, 그래 봐야 결과는 변하지 않았지만."
거한이 큰 걸음으로 다가와 소년을 건네받았다.
두려움과 불안으로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한 번 눈으로 훑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왼쪽 눈의 문양. 확실히 주검산장의 인장이다. 그림자를 풀었나 싶어서 죄다 때려죽이면서 왔으니 확실하겠지."
"크히히! 우리 형님께서 힘 좀 쓰셨군요!"
"아우만큼 했을까. 사지를 잘라 죽인 호위가 서른이 넘는다고?"
"키히히! 검이나 만들던 놈들이라 그런지 죄다 싱거웠지 뭡니까!"
"흥. 우리 나찰(羅刹) 형제에게 걸리면 죄다 우스울 뿐이지."
거한이 이를 내보이며 크게 웃었다.
나찰 형제라고 하면 인근에서는 적수가 없는 강자.
채 열다섯이 안 된 소년을 잡아 오는 일이라면 말 그대로 우스울 뿐이었다.
"나찰. 우스꽝스러운 별호를 달고 있네."
"누구냐!?"
순간, 지척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거한이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는 놈들이야?"
"소문만 조금. 나찰의 나를 맡은 거한이 서범천. 본래 소림의 중이었는데, 살계를 열어서 쫓겨났어. 그 옆의 남자는 찰의 융계. 밑바닥 살수로 밥을 빌어먹다가 저 서범찬과 의형제를 맺었다고 해."
"그게 조금이야?"
"몇 줄이나 된다고."
그리고 그 너머에서 걸어 들어오는 일남 이녀.
명한, 은소소, 향아였다.
"뭐야, 이것들은? 이 어르신이 누구인지 아는데 코앞에서 건방을 떠는 거냐?"
"말했잖아, 안다고. 너희가 살인과 유괴. 온갖 더러운 짓으로 밥벌이를 하고 있다는 사실도."
"이 새끼. 어린놈이 고용한 호위냐?"
"어린놈이라면······그 소년?"
명한이 시선을 서범천에서 소년으로 옮겼다.
그는 이 소년이 누구인지 훤히 알고 있다.
‘주검산장의 작은 주인, 정운.’
애초에 이 만남을 기대하고 걸음을 서두르던 차였다.
"아니, 아니지. 큰놈 쪽에서 우리 말고도 사람을 더 붙였구나. 아서라, 어린 것아. 이건 우리가 잡은 사냥감이야. 탐내지 말고 썩 물러가라."
"혼자서 북 치고 장구치고 다 하네."
"뭐?"
"내가 너희같이 더러운 짓이나 하는 잡배 같냐?"
툭 던진 말에 서범천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소림사에서 살계를 저지르고 쫓겨나기를 10여 년.
가장 싫어하는 말이 잡배였다.
"네놈 머리통을 벗겨서 술안주로 삼아야겠구나."
"할 수 있다면."
명한이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한 걸음 물러났다.
"응?"
놀라는 건 악귀 얼굴의 서범천과 은소소.
"뭐해? 호위는 너잖아."
"아니, 그렇게 당당하게 말해놓고 싸움은 나보고 하라고?"
"저런 잡배와는 손을 섞기가 싫어서."
"나는 되고?"
"꼬우면 내기에서 이기셔야지."
씩 웃는 명한의 모습에 은소소가 혀를 찼다.
내기에서 진 건 진 거니 변명은 없었다.
허리춤의 검을 뽑아서 두 사람을 겨냥했다.
"귀찮으니까 한 번에 덤벼라."
"하. 하하하하! 이 버러지 같은 것들이 이 어르신을 아주 제대로 약 올리는구나! 아우야!"
"키히히히! 네, 형님!"
"연놈을 토막 내서 배터지게 먹어보자!"
성난 나찰 두 마리가 상대.
권왕에게서 배운 요령을 실험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그래, 꼬우면 이겨야지."
아쉬운 대로 검을 휘둘렀다.
#
"괜찮니?"
은소소가 울분을 검으로 풀고 있을 때.
명한은 홀로 남겨진 정운에게 접근했다.
"누, 누구세요?"
"그렇게 겁먹을 필요 없어. 도와주러 온 거니까."
"절······아시나요?"
"글쎄. 어떻게 말해야 하나. 그냥 주검산장에 대해서 조금 안다고 해두자."
명한이 아예 정운의 옆에 주저앉았다.
겁에 질린 소년과 말을 트기에는 이 정도 거리가 좋았다.
"어쩌다가 저런 잡배들한테 쫓기게 된 거야?"
"자, 잡배요? 저 사람들은 나찰이라는 무서운 살인귀에요. 집안 호위도 벌써 수십이나 저 둘에게 죽었다고요."
"수십이나. 조금 더 서두를 걸 그랬나."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저 여자분을 도와줘야 하지 않아요?"
"내가? 광검을? 귀여운 걱정이네."
개가 호랑이를 걱정하는 격이다.
명한이 피식 웃으며 품 안에서 과자 주머니를 꺼냈다.
쫑긋, 귀가 반응하는 향아를 지나쳐 정운에게 건넸다.
"······과자네요?"
"먹어. 저런 잡배들에게 쫓겼으니 많이 힘들었을 것 같은데."
"정말 저분은 안도와도 괜찮나요?"
"내가 열 명이 있어도 저 여자 하나만 못해. 저런 잡배들은 천 명이 와도 모자라고. 걱정은 넣어 둬."
대수롭지 않게 답하며 과자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와삭, 하는 소리와 솔솔 풍기는 냄새.
그제야 정운도 자신이 굶주렸음을 깨닫고는 손을 뻗었다.
들어가는 게 어렵지 그 뒤는 쉽다.
주머니 하나를 통째로 먹어치웠다.
"······잘 먹네요."
"향아야, 도시에 가면 넉넉하게 사줄게."
"윽. 죄송해요, 도련님."
군침 삼키던 향아를 다독이고 손가락을 핥고 있는 정운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가, 감사합니다. 제가 너무 먹었죠?"
"배고프면 다 그러는 거야. 그보다 말은 안 해 줄 거야? 어쩌다가 저런 놈들에게 쫓기게 된 건지."
"아······"
분위기에 휘둘리다 이제야 상황으로 돌아왔다.
정운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대충 뭉뚱그려서 수십이지,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다.
그 죽음이 체감되자 슬픔이 물밀 듯이 밀려온 것이다.
"쯧쯧. 어린아이가 무슨 죄가 있다고."
손수건은 금세 눈물로 젖어 들었다.
명한도 굳이 채근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은소소가 뱀 얼굴의 융계를 베어낼 즈음 닫혀있던 입이 열었다.
"저들은 제 이복 형님인 청백이 사주한 살수예요. 인근에서 세력을 뻗치고 있는 사월문(死月門)의 일원이죠."
"사월문이라. 흑도와 정도의 공백을 틈타서 세력을 키운 사파 무리. 납치, 강도, 살인, 협박······돈이 되는 거라면 뭐든지 하는 놈들이지."
"네, 네! 청백 형님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놈들하고 손을 잡았는지······"
"무슨 생각은 욕심이겠지."
"네? 아······네. 그렇죠. 욕심이죠. 형님이 노리는 건 제 인장이에요. 쌍이 되는 인장이 없으면 가주로 승계를 못 받으니까요."
"주검산장의?"
"네. 가주가 되지 못하면 주검산장의 용광로를 쓸 수 없거든요."
주검산장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성운로(星隕爐).
전설적인 운철이나 현철 등을 녹일 수 있는 보물중의 보물이었다.
‘그리고 내 금 마차를 녹여줄 물건이지.’
이걸로 사전 확인은 마쳤다.
"은소소, 언제까지 그러고 놀 셈이야?"
검을 뿌리며 권왕에게서 배운 요령을 실험 중인 은소소에게 외쳤다.
‘쳇.’하는 혀 차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검로가 순식간에 변화했다.
이전까지가 봄바람이었다면 이건 눈보라.
"이 검에 죽는 걸 영광으로 알아라."
"뭐, 뭐야!? 검기라고!? 대체 너 같은 고수가 왜 이런 일에 끼어드는 건데!?"
"키히이이익!! 혀, 형님! 형님!! 피가 안 멈춰요!!"
패검(敗劍)에 섞인 예검(銳劍)의 묘리였다.
서범천이나 융계 따위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알아챌 리 없는 상승의 무학.
"죽어."
나찰이 나와 찰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