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한지몽
환골탈태.
육체가 무공을 익히기에 최적의 상태로 변화하는 걸 의미한다.
방법과 과정에는 여러 종류가 존재하나, 그 결과의 가치를 부정하는 사람은 누구도 없다.
무인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기연.
하지만 뭇 사람이 원해도 이루는 이가 극소수인 건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제정신인가?"
환골탈태는 인위적으로 만드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한다 하더라도 그 대가가 매우 크다.
비전을 실행한 고수의 내공이 모두 소진된다든지, 수명이 줄어든다든지.
명한의 요구는 그만큼 황당한 것이었다.
"무리한 요구일 수도 있으나, 권왕님 정도가 아니라면 아예 시도조차 못 해볼 일입니다."
"환골탈태는 애들 장난이 아니네. 자격을 갖춘 자가 아니라면 외부에서 만들고 말 문제가 아니야."
"절정의 벽을 넘어 무공에 동화되는 경지. 인간이 신이 되어가는 길의 발자취라 하여 화경(化境)이라 한다 들었습니다."
"음. 그걸 알면서 이리 말하는 건가?"
화경의 경지에 이르러 차곡차곡 체질이 변화되어 자연스럽게 환골탈태를 이루는 것이 최적의 경우.
말하자면 정도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돌아가면 시간이 너무 걸려.’
당길 수 있을 때 당기고 싶다.
"제가 익힌 무공에는 중원의 것과 궤를 달리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억지로 틀을 잡아 환골탈태를 이루더라도 부작용을 최소화시킬 수 있는 방법이지요."
"대체 그런 신공이 어디에······아니, 됐네. 설사 그런 신공이 있다 해도 환골탈태는 무리야. 내겐 지켜야 할 아들이 있네."
"권왕께 부담이 심한 방법은 아닙니다."
"아니면 천고의 영약이라도 있나?"
"그것도 아닙니다."
"그럼 대체 뭔가? 무슨 수가 있어서 무리 없이 환골탈태를 할 수 있다는 건가?"
슬슬 올라가는 목소리에 명한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괜히 말을 끌거나 여유 부린 건 아니었다.
"절 한 번 죽여 주십시오."
그만큼 스스로도 부담스러운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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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한의 체질 연단성체는 매우 독특한 성질을 지니고 있다.
그건 바로 단을 두드릴수록 강해지는 성질.
금이 갔던 뼈가 더 단단하게 붙는 것처럼, 단은 외부의 충격을 받을수록 강하게 뭉친다.
게다가 명한의 무공은 가이신공.
쌓아서 다스림을 골자로 하는 이 신공은 단에 전해지는 충격마저 흡수해서 힘으로 삼는다.
마치 철을 단조하는 것처럼.
두드리면 두드릴수록 계속해서 강해질 수 있다.
"이건 권왕님 정도의 고수가 아니라면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제약 없는 힘은 존재하지 않는 법.
너무 강한 힘이면 철이 부러지고, 부족한 힘이면 단조가 되지 않는다.
이를 정확하게 제어할 수 있으며 동시에 강한 충격을 줄 수 있는 고수가 필수 조건이다.
애초에 권왕이 아니면 도전조차 불가능한 일이었다.
"허. 세상에 별별 무공이 다 있다지만, 두드려서 강해지는 방식이라니. 자네가 아니었다면 흰소리라고 크게 혼을 내주었을 거네."
"저 역시 권왕님이 아니었다면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겁니다. 거는 건 다름 아닌 제 목숨이니까요."
"그래. 그렇게까지 위험한 일인데, 굳이 해야겠나?"
"이때가 아니면 기회를 잡기란 요원하니까요. 세상사 걷는 곳곳이 살얼음판. 목숨을 걸어야 한다면 적어도 삼왕 정도는 돼야 멋이 나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호인이군, 호인이야."
율무기가 크게 웃었다.
상대는 중원의 원수인 천마의 자식.
하지만 그런 생각이라고는 전혀 들지 않을 만큼 마음에 쏙 드는 인물이었다.
‘입장이 이렇지만 않았어도 제자로 삼고 싶군.’
그저 상황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래. 내가 뭘 어떻게 해 주면 되겠나?"
"몸이 버틸 수 있는 수준으로 절 두드려 주시면 됩니다."
"까다로운 주문이군."
"삼왕오제의 권왕이라면 가능하리라 믿습니다."
"후후. 좋은 도발이군. 좋네, 좋아. 내 아들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을 죽일 수야 없지. 죽는다 해도 염라와 담판을 지어서 자네를 데려오겠네."
율무기의 양손이 칠흑과 같은 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의 독문무공, 패왕기의 현현이었다.
"각오하게. 내 주먹은 많이 맵거든."
명한이 답 대신 이를 악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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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어린 계집이 내 치마에 차를 쏟았다 이 말입니다."
언제, 어디선가 들었던 표독스러운 목소리.
흐릿한 안개 속에서 두 여자가 대치하고 있다.
한 명이 장미라면 다른 한 명은 국화.
"그만하셔요. 아이의 실수일 뿐이에요."
그리운 냄새를 풍기는 여인이었다.
"그분의 총애를 받는다고 이렇게 건방지게 나서는 겁니까? 내가 저 어린것 하나 어찌하지 못할 것 같나요?"
"총애를 다툼에 어찌 아이의 목숨을 담보로 할까요. 욕을 하고 싶다면 제게 하세요. 저 어린 것은 건드리지 마시고."
"그 태도가 마음에 안 든다고! 혼자 고상한 척. 도도한 척! 이국땅에서 건너온 천박한 계집 따위가!"
장미 향을 풍기는 여자의 독설.
누군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아프다.
그만하라, 충분하다.
말을 하고 싶지만 굳게 닫힌 입은 열리지 않았다.
"아드님, 그 아이를 지켜주세요."
국화 향 섞인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전부.
아니, 그것이면 충분했다.
그렇게 지키고자 했으니까.
손끝에 닿은 온기를 지키고 국화 향 너머의 목소리에 진심을 보이고자 했다.
"흐윽. 흑. 도련님, 죄송해요······"
하지만 왜.
우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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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련님!"
귀에 팍 꽂히는 목소리에 명한이 깨어났다.
두 눈을 깜빡여 확보한 시야 안에는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있는 향아의 얼굴이 가득 차 있었다.
뒷머리 가득 느껴지는 건 허벅지일까?
때아닌 호사일지도 모르겠다.
"드디어 정신 차리셨군요."
"내가 오래 누워있었던 거냐?"
"네. 반나절을 꼬박 누워 계셨어요."
마지막 기억이라면 율무기의 주먹.
환골탈태를 위해 얻어맞는다는 것이 심했던 모양이다.
제대로 넉다운 당한 격투기 선수마냥 기억이 없다.
되레 남은 건 정신을 잃은 사이에 꾼 꿈.
‘대체 뭐였지, 그건?’
단순히 개꿈이라 치부하기에는 너무 선명하다.
그렇다고 명한 자신의 기억도 아니고.
"······소백의 기억."
설명 가능한 유일한 선택지.
국화 향 가득하던 여인은 아마도 소백의 모친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부탁했던 건 향아.
향아가 모진 구박에도 꿋꿋하게 소백을 따르는 과거의 인연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게 가능한가?’
명한은 소백이 아니다.
소백의 몸으로 활동을 할 뿐, 소백이 된 건 아니다.
아니······정말로 그런가?
"도련님?"
"머리가 아프네."
"여, 역시 부상이 심했던 건가요!?"
"아니, 그런 얘기가 아니야. 호들갑 떨지 마. 그냥 좀, 복잡한 생각이 들어서 그래."
나비가 된 꿈을 꾸는 장자처럼.
명한은 자신이 소백의 꿈을 꾸는지, 소백이 명한이었던 인생을 꿈꾸는 건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상관있나?"
어차피 달라지는 건 없다.
소백이든, 명한이든 그 앞에 놓인 현실이 중요할 뿐.
꿈에서마저 이루지 못한다면 깨어나서 얼마나 허망할까.
[환골탈태에 성공했습니다]
[모든 능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합니다]
[상태에 환골탈태가 추가됩니다]
[가이신공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3성->5성]
[등급이 올랐습니다]
[등급이 올랐습니다]
······
"권왕은 지금 어디에 있지?"
흘러넘치는 알림창을 옆으로 밀며 명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표 중 하나였던 환골탈태는 성공했다.
이젠 다음 목표로 나아갈 때였다.
#
율무기는 은소소와 대련에 한창이었다.
최소한의 내공으로 합만 맞추는 연습 대련이었음에도 그 분위기가 굉장히 흉흉했다.
물론, 은소소의 기준으로.
"역시 권왕은 권왕인가."
천마궁 소궁 서열 5위에 위치한 은소소.
그 재능의 뛰어남에 천마에게서 직접 절기를 사사 받은 천재 중의 천재.
하지만 그런 그녀도 권왕에게는 미치지 못했다.
하늘과 땅 차이의 간극이라 해야 할까.
어떤 수를 쓰든 율무기는 여유롭게 받아냈다.
"소소 아가씨께서 다치는 건 아니겠죠?"
"걱정은. 권왕 정도의 실력자면 손에 여유가 넘쳐. 은소소가 자해를 하지 않는 이상은 다치고 싶어도 다칠 수가 없어."
은소소의 실력은 절정과 화경의 사이.
나이를 고려하면 그것도 어마어마한 것이지만, 현경 끝자락에 있는 율무기의 상대는 아니다.
그녀를 광검이라 부르게 만든 절기를 쏟아내고 있음에도 율무기의 터럭조차 건드리지 못했다.
"후우. 과연, 권왕이군요."
"하하. 자네도 나이치고 굉장한 실력이네. 중원의 젊은것들이 칠용팔봉이라 부르던데······진짜 용과 봉황은 여기에 있었군."
"전 용과 봉황이 아닌 왕이 되고 싶습니다."
"포부 또한 좋군. 어디 전력을 다해서 부딪쳐 보게나."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그 대결도 이제 막바지.
은소소가 비장의 절기를 꺼내 들었다.
천마에게서 사사 받은 두 가지 절기 중 하나.
천마검 4초식, 천마응출(天魔鷹出)이었다.
검 끝으로 회백색의 기운이 모여들어 안개와 같은 형태를 이루었다.
"천마의 절기라. 십수 년 만인가."
율무기도 이것만큼은 경시하지 않았다.
주먹의 패왕기를 두르고 안개에 맞섰다.
삽시간에 주변 공간이 회색과 검은색에 맞물려 뿌옇게 흐려졌다.
그리고 그 맞물림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순간.
소리보다 앞서 강한 충격파가 사위로 퍼졌다.
"쿨럭······!"
쓰러지는 건 검붉은 피를 토하는 은소소.
그녀 주변 사방 삼장 공간이 통째로 짓눌려 있었다.
그녀가 뿜어낸 검흔은 부러진 토막처럼 주변 곳곳에 작은 생채기만 냈을 뿐이다.
승패는 명확했다.
"훌륭하군. 손속에 여유를 두기도 쉽지 않았네."
"후우. 후우. 감사했습니다, 권왕."
"으음. 10년. 아니, 5년 후에는 감당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율무기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은소소 또래에서 자신과 이 정도의 힘겨루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하물며 배움을 받는 장소가 천마신교.
‘중원은 앞으로도 쉽지 않겠구나.’
쓰린 속은 숨기기 어려웠다.
"수고하셨습니다, 권왕."
그렇게 대련이 마무리되는 분위기에 명한이 나섰다.
"깨어났군. 몸은 좀 어떤가?"
"그 어느 때보다 상쾌합니다."
"원하는 건 이루었겠지?"
"네. 권왕님 덕분입니다."
"내 덕이랄게 있겠나. 보통이라면 열 번은 더 죽고도 남을 상처였네. 자네가 익힌 신공이 보통은 아닌가 보군."
죽지 않을 만큼.
율무기는 딱 명한이 원한대로 그를 두드렸다.
하지만 말이 쉽지 그 정도 충격을 누적해서 받으면 보통은 망가지는 것이 당연하다.
이를 견디고 되레 환골탈태로 이어간 건 신공이라는 말로도 부족하다.
"자네 둘을 보니 앞으로도 신교는 번창하겠어. 중원에 몸담은 입장에서 참 복잡한 기분이로군."
"같은 무림의 일원으로 선배님께 도움을 받은 것에 불과합니다."
"실력만큼 입담도 좋군."
율무기가 명한과 은소소를 잠시 물끄러미 바라봤다.
신교와 중원의 미래.
여러 생각이 녹아있는 시선이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끊어냈다.
‘난 이미 은거한 몸 아닌가.’
이제 와서 신교와 중원의 갈등에 끼어들 생각은 없었다.
"이것으로 빚은 다 갚았다 생각하겠네. 후에 연이 된다면 다시 보세."
"부디 강녕하시길. 가는 길, 후배 소백이 인사 올립니다."
"후배, 은소소도 선배님께 인사 올립니다."
깊이 포권을 올리는 두 사람.
율무기는 잠시 바라보다, 이내 시선을 떼고는 영아와 함께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바람과 같은 경공이었다.
"후우. 역시 권왕이라 이건가. 아직 갈 길이 멀군."
"현경 끝자락에 있는 사람이야. 버틴 것만 해도 대단한 거지."
"위로는 됐어. 그보다······이번 일은 내가 확실히 빚을 졌다. 권왕과의 대결은 정말 많은 도움이 됐어. 이번 일만 아니라 다음에라도 필요하면 널 돕겠다."
"광검의 도움이라. 이보다 든든한 것도 없겠네."
은소소의 성격상 허언 따위는 하지 않는다.
돕는다고 했으면, 무슨 일이 생겨도 도울 뿐.
‘호감작을 해 놓길 잘했네.’
돌 하나로 두 마리 토끼를 잡은 격이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거야? 호위가 전부 죽었으니 신교로 돌아가나?"
"아니, 그럴 수야 없지. 이대로 돌아가면 일의 실패를 빌미 삼아서 목을 조이려고 할 거야. 숭산으로 가는 길은 포기 할 수 없어."
"흠. 백염당의 무리가 죽었어도 널 노리는 자들은 아직 남았잖아. 방법은 있나?"
은소소의 질문에 명한이 가볍게 웃었다.
최초의 계획과 조금 어그러지기는 했으나, 큰 틀은 변하지 않았다.
"일단 돈부터 챙기러 가자."
"돈? 갑자기 무슨 돈?"
혈염마녀의 부친이 이끄는 천하상단에 대적하기 위해서.
그리고 앞으로 할 일들을 위해서.
돈줄을 쥐는 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금 마차. 녹여야지."
팔두 금 마차.
이목을 끌기 위해서만 끌고 나온 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