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4/235)

설전(舌戰)

명한이 식은땀을 소매로 훔쳤다.

등은 이미 축축해서 다 달라붙을 지경이었다.

1분. 아니, 10초만 늦었어도 비명에 가루가 될 뻔했다.

‘약을 챙겨와서 다행이야.’

약통이 텅텅 비었지만, 죽는 것보다야 나았다.

"아빠. 아빠 맞아?"

소년이 힘없는 걸음으로 걸었다.

정신은 돌아왔지만, 상처가 다 나은 건 아니었다.

몇 걸음 떼지도 못한 채 다시 주저앉았다.

권왕, 율무기가 순식간에 그 앞에 나타나 부축했다.

손은 떨리고 눈동자는 쉼 없이 흔들렸다.

"영아야. 영아야······네가 정말로 맞는 거냐?"

"응. 나 맞아. 아빠 아들 영아가 맞아."

"아······아아아. 다행이다, 다행이야. 천지신명이시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들, 영아를 온몸으로 껴안고 흐느꼈다.

삼왕오제의 권왕.

천하의 고수이나, 한 아이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인간적으로 무너진 채 흐느끼는 모습은 평범한 사람과 다를 바 없었다.

"미안하다, 미안해. 이 아비가 너무 늦었구나."

"흐윽. 흑······! 다 죽었어. 아빠, 다 죽어 버렸어. 삼촌도 아저씨도. 마을 친구도 전부 죽었어. 흐으윽!"

"미안하다. 이 아비가 너무 미안해."

"흐아아아앙!!"

아들의 눈물에 감정이 용암처럼 끓어올랐다.

안전하게 아들을 찾은 것에는 감사하나, 겪어야 했을 비극에는 분노했다.

이 울분을 어딘가에는 풀어야 했다.

"······금색 마차의 소년. 네가 천마의 자식인가?"

영아를 품에 안은 채 물었다.

목소리에서 용암같은 분노가 느껴졌다.

"무림 말학이 선배님께 인사 올립니다. 소인, 소백이라 하옵니다."

이에 명한은 더없이 정중한 모습으로 답했다.

천마의 자식, 소궁의 주인이라는 신분은 눈앞의 남자에게 통용될 것이 아니었다.

까딱하면 날아가는 건 목이었다.

"이 아이가 어째서 네 마차에서 나온 것이냐?"

"부상 입고 쓰러진 아이를 제가 치료했습니다."

"네가? 정말이냐, 영아야?"

확인차 던진 질문에 영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제 겨우 정신을 차린 참.

상황에 대한 파악 따위는 되지 않았다.

화산 같은 율무기의 시선이 명한으로 향했다.

"날 속이려 한다면 죽음뿐이다."

"······거짓말을 한 적은 없습니다. 권왕의 아드님께서는 이제 막 부상에서 회복한 차입니다. 앞뒤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지요."

"그럼 네가 말해보라. 내 아들이 어째서 이곳에서 부상을 입은 것이지?"

상처 입은 범의 눈빛이었다.

명한이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핥았다.

‘젠장. 이게 사람의 압박감인가?’

한 마디만 잘못해도 머리가 터질 판이었다.

"비적입니다."

"비적?"

"네. 아드님께서는 스스로를 비적이라 칭하며, 몇 사람과 함께 마차를 습격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차의 호위를 맡은 백염당에게 부상을 당하였지요."

"웃기지 마! 영아가 어째서 비적 따위를······!"

"자의로 할 리는 없지요."

명한이 재빨리 뒷말을 받았다.

율무기의 발끝에서 뻗어 나온 진기가 땅을 짓누르고 있었다.

"저도 의아했습니다. 아드님과 함께 온 이들의 행색은 어디까지나 촌민. 비적질을 할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호위인 백염당의 무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군요."

"무슨 의미냐?"

"기다렸다는 듯 그들을 죽였습니다. 제가 막지 않았다면 아드님도 그렇게 죽었겠죠."

답과 함께 시선을 연우락 쪽으로 옮겼다.

"거짓말입니다! 전부 저자가 시킨 일입니다! 상황이 여의치 않자 거짓말로 모면하려는 수작입니다!"

하지만 연우락도 포기하지는 않았다.

어떻게든 물고 늘어졌다.

권왕, 율무기에게는 상황을 판단할 근거가 적으니까.

일개 호위보다는 소궁의 주인이 더 책임자에 가까웠다.

"······일견 저 말이 옳다. 네가 소궁의 주인이라면 어찌 일개 호위가 마음대로 살인을 저지른단 말이냐? 네게 책임이 없다 할 수 있는가?"

"그 말도 맞습니다."

"음?"

명한의 긍정에 되레 율무기가 놀랐다.

"상황을 맞춰보니 답이 나오더군요. 아드님과 그 촌락 사람들. 그저 쓰기 좋은 패로 다루어졌을 뿐입니다."

"쓰기 좋은 말? 무슨 의미지?"

"천마궁 안에는 절 죽이려는 자들이 여럿 있습니다. 저자와 백염당도 비슷한 부류지요. 암살 흔적을 가리기 위해 촌락민들을 비적으로 이용했다. 그러니 제게도 책임이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명한이 깊이 허리를 숙였다.

‘율무기의 성향은 불꽃. 어중간한 변명은 하지 않는 편이 나아.’

차라리 전부 터놓는 것이 낫다.

진실만이 먹히는 인물이다.

"거짓말!! 네놈이 한 짓을 누구에게 덮어씌우려는 거냐!?"

연우락도 발버둥을 멈추지 않았다.

어떻게든 죄를 명한에게 뒤집어씌우기 위해.

"그만해라, 연우락. 그래도 신교의 무력부대 백염당의 당주라는 사람 아니더냐. 그만 부끄럽게 굴어라."

"어, 어디서 그런 거짓말을!"

"죄가 있다면 벌을 받고. 책임이 있다면 지면 그만. 나는 도망치지도 숨지도 않는다."

"······!"

뒷짐 진 채 추상같이 쏘아붙이는 명한.

소문대로의 망나니도 아니었고, 출발 후 지금까지 보여준 한량의 모습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부끄러움 없는 대장부의 모습이었다.

‘어디서 연기를!’

발끈하여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만."

"······큭!"

하지만 그 동작은 율무기의 한 손에 막혔다.

그의 눈동자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별똥별처럼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무릇 하나를 보면 열을 아는 법. 구명을 위해 주인을 팔아먹으려는 자와 책임을 통감하는 자. 누가 진실을 말하는지는 훤히 보인다."

"크, 크으으윽!!"

"죽어간 이들을 위한 몫이다."

"크아아아아!!!"

끝없이 짓누르는 압력에 연우락의 모든 뼈가 바스러졌다.

어떤 무공도 어떤 내공으로도 벗어날 수 없었다.

죽음으로 이어지는 고통의 수레바퀴.

하지만 그보다 그를 더욱 괴롭히는 건······

‘소, 소백!! 소백!!!’

고개만 숙인 채 희미하게 웃고 있는 명한의 모습.

"크아아아아아!! 소백―!!!"

절규와 함께 스러졌다.

#

"그래. 그렇게 된 거였구나."

향을 두어 개 태울 시간이 지난 뒤.

기억을 수습한 영아가 명한의 주장을 뒷받침해 주었다.

마을을 습격한 괴한과 그들의 요구.

그리고 서슬 퍼런 백염당의 공격에서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준 명한까지.

"큰 결례를 범했군. 아들의 은인에게 자칫 실수를 저지를 뻔했어."

율무기가 깊은 포권으로 명한에게 사과했다.

성정이 불같아서 그렇지 오고 가는 건 확실한 사람이었다.

"괜찮습니다. 앞서 말했다시피 이번 일의 발단은 어디까지나 신교. 대표로 사과드리겠습니다."

"허허. 그만하게. 신교 정도 되는 집단이면 어디 머리가 하나둘이겠나. 이 나이 먹고 중원을 횡단하는 몸이나, 사리 분별 정도는 할 줄 아네. 이번에는 내가 자네에게 큰 빚을 졌어."

툭툭, 어깨를 두드리는 율무기에 명한이 겨우 웃음을 참았다.

권왕의 빚이면 천금보다 무거웠다.

"그보다······이젠 어찌할 셈인가? 호위로 붙인 이들조차 자네 목을 노린 거라면 상황이 녹록지 않아 보이는데."

"저 나름의 방책은 있습니다. 다만······"

"다만?"

"상황이 예상과 다르게 일찍 어그러지니, 아무래도 걱정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해서 부탁을 드리고자 합니다만······"

"미안하지만 신교의 일에 개입해 달라는 거면 할 수 없네."

명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율무기가 답했다.

"아까는 아들놈이 죽었다는 생각에 앞뒤 안 가리고 날뛰었지만, 기본적으로 난 중원의 인간이네. 신교 일에 잘못 끼어들었다가는 자칫 중원의 의견으로 읽힐 우려가 있어."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응?"

"무리한 부탁을 드릴 생각 따위는 없었습니다."

애초에 명한은 율무기의 입장을 확실하게 알고 있다.

습작에서도 도움을 청하는 소백을 완고하게 거절했었으니까.

‘게다가 이 인간이 붙어 있으면 제약이 많아.’

이래저래 권왕에게 뽑아먹을 건 다른 부분이었다.

"그럼 내가 뭘 해주면 되겠나?"

"우선은 저 뒤에서 침 흘리고 있는 제 친구와의 대련입니다."

명한이 마치 뒤쪽을 가리켰다.

몸만 숨긴 채 고개를 빠끔 내민 은소소가 있었다.

그녀는 무공에 미쳐서 별호마저 광(狂)자가 들어가는 인물.

‘미리 호감도를 높여서 나쁠 건 없지.’

삼 왕 중 하나인 권왕이 눈앞에 있는데, 관심이 없을 리는 없었다.

"호오. 안 그래도 기도가 범상치 않다 싶었네. 자네의 비밀 호위인가?"

"뭐······그렇게 말할 수도 있죠. 무에 대한 거라면 광적으로 좋아하는 친구라. 가능하면 한 수 대련을 부탁하고 싶습니다."

"진 빚에 비교하면 그건 일도 아니지."

율무기가 시원하게 허락하며 손짓했다.

마차 뒤에 숨어있던 은소소가 바람같이 뛰어왔다.

붉어진 얼굴은 그녀가 얼마나 흥분했는지를 보여주었다.

"후배, 은소소라고 합니다. 평소 권왕의 명성은 익히 들어왔습니다. 영광입니다."

"영광이랄 것도 없네. 여기 이 친구의 빚을 갚는 것에 불과하니까. 그나저나 이 율모가 나름 허명은 있는데, 고작 대련이라. 자네를 꽤 아끼는 모양이야."

"아."

은소소가 그제야 자신의 대련이 어떤 가치인지 깨달았다.

‘권왕에게 받을 빚을 날 위해 쓰다니······’

자신이라면 그럴 수 있을까?

소백이 새롭게 보였다.

"앞으로 할 고생의 선금이라 생각해. 권왕께 한 수 배울 수 있다면 나로서도 좋은 일이니까."

"······응. 이 은혜는 잊지 않을게."

"딱히 은혜는 아니지만, 편할 대로."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에는 진한 애정이 서려 있다.

‘위험하다고 도망치지는 않겠네.’

은소소가 그럴 성격은 아니나, 보험으로는 충분했다.

명한이 다시 시선을 율무기로 옮겼다.

"그럼 두 번째 부탁을 드려도 될까요?"

"뒤로 수십 개가 있는 건 아니겠지?"

"설마 그리 염치없는 인간이겠습니까. 이게 마지막 부탁입니다."

"그래, 말해보게나."

가벼운 농에 희미하게 웃으며 명한이 대꾸했다.

태도가 무겁지 않아 율무기도 대수롭지 않게 받았다.

두 번째 부탁도 앞선 것 정도라 여겼으니까.

하지만 막상 명한의 입이 열렸을 때.

"절 환골탈태시켜 주십시오."

율무기는 바로 답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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