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와 재와 분노
불에 타 재가 돼 버린 마을.
점점이 남은 혈흔과 새카맣게 그을린 사람의 흔적만이 이곳이 마을이었음을 증명했다.
바스락.
그 위로 한 남자가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대충 올려 묶은 머리카락에 넝마에 가까운 복장.
낭인의 행색을 한 인물이었다.
"······누구냐."
가라앉은 목소리에서 분노가 느껴졌다.
"누가 이런 짓을 벌인 거냐."
남자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재를 손으로 훔쳤다.
검붉은 먼지가 손 사이로 흘러 내려왔다.
"여기는 그저 화전민이 사는 마을이었을 뿐이다. 별다른 욕심 없이 하루하루 사는 사람들에 불과했다. 근데. 근데 어째서······"
흐느낌 섞인 울분이 잿더미 위로 내려앉았다.
한때는 웃음으로 가득 차 있던 마을.
지금은 죽음과 적막만이 맴돌고 있다.
어째서. 누가.
끓어 오른 분노가 용암처럼 그의 몸 주변으로 흘러넘쳤다.
대지가 떨고 대기가 비명을 내질렀다.
"어째서!!"
벼락과 같은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건 소리의 탈을 쓴 분노라는 주먹이었다.
남자를 중심으로 한 사방 십여 장이 삽시간에 뭉개졌다.
마치 거인이 주먹으로 눌러놓은 듯.
인간이 아닌 자연재해와 같은 모습이었다.
후두둑.
모래 먼지가 비처럼 그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해 주마."
주먹을 움켜쥐며 짓눌린 목소리로 뱉는 다짐.
남아일언 중천금.
아니, 금보다 무거운 다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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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과 동시에 뒈질뻔했네."
명한이 잠들어 있는 소년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늦지 않아 소년을 구할 수 있었다.
"대체 뭐야? 그 비적 소년이 중요한 인물이기라도 한 거냐?"
조금은 어이없다는 말투로 은소소가 물었다.
약한 대상을 상대로 하는 일방적인 학살.
이 자체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래 봐야 비적이라는 의견에는 다를 것이 없었다.
굳이 난리 치며 구해야 할 당위성을 느끼지 못했다.
"중요하지. 암, 중요하지."
"증인으로 쓰려거든 포기해. 그딴 말 들어 먹을 사람들이 아니야."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야."
명한이 고개를 흔들며 소년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왼쪽 이마 상단에 희미하게 별 모양 점이 존재했다.
‘맞아. 내가 묘사했던 그대로야.’
두 눈으로 확인하자 심장이 더 두근거렸다.
본래 이 소년은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된다.
"인과가 바뀌었어."
소년을 소백이 만나게 되는 건 며칠 뒤의 일.
그것도 비적이 아닌, 멀쩡한 화전마을의 일원으로 만나게 된다.
암살에서 도망친 소백을 구해주는 것이 소년.
‘그래야 하는데······화전마을이 습격을 당했어.’
습작에 없던 추가적인 공작 때문에.
"내가 은소소를 만나서인가?"
"나? 내가 왜?"
"널 만난 것이 혈염마녀를 자극한 모양이야. 생각보다 더 치밀하게 일을 꾸몄어."
그 때문에 멀쩡해야 할 화전마을이 당한 것이다.
후에 만나야 할 소년도 이런 꼴로 조우하고.
‘······젠장.’
속이 쓰렸다.
이야기를 알고 그 안의 주인공이 되겠다.
이런 다짐의 이면에 쓰린 결과가 있을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뭐냐, 그 면상. 너 때문에 소년이 이리됐다고 자책이라도 하는 거냐?"
"······어쩌면."
"의외네. 천마궁 안에서 망나니 소리를 듣던 인간이 비적 소년 하나에 죄책감을 느끼다니."
"비적이든 소궁의 궁주든 다를 건 없어."
"흐음?"
"아니, 됐다. 어차피 벌어진 일. 매달려 봐야 달라지는 건 없겠지."
명한이 입술을 짧게 깨문 뒤, 생각을 지웠다.
죄책감이든 뭐든 깊이 들어갈 문제는 아니었다.
‘일이 벌어진다면 그것에 맞게 행동하면 될 뿐이야.’
글을 쓴 작가이지 신은 아니었다.
"향아야, 챙겨온 짐에서 약재란 약재는 모조리 꺼내."
"저, 전부요?"
"그래. 몇 푼 아끼려다가 모조리 죽는 수가 있어."
"모조리? 대체 그 소년이 뭔데 그렇게까지 말하는 거냐?"
불쑥 끼어든 은소소에 명한이 잠시 입술을 달싹였다.
말해야 하나, 고민은 있었으나 선택은 쉬웠다.
"권왕(拳王), 율무기. 삼왕오제(三王五帝)의 일석을 차지하고 있는 남자의 아들이야."
모르면 죽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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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주. 그냥 여기서 죽입시다."
백염당 무인 중 하나가 넌지시 제안했다.
명한 등이 타고 있는 마차와는 거리가 있는 숙영지의 한곳이었다.
"섣불리 행동하지 마라."
"굳이 시간 끌 필요가 있습니까? 어차피 무공 하나 못하는 폐인 하나와 몸종이 전부입니다. 맡겨 주시면 당장이라도 목을 베어옵죠."
"내가 고작 저 쓰레기 하나 못 죽여서 시간을 끄는 것 같냐?"
부하의 직언에 연우락이 미간을 찌푸렸다.
"여기서 저놈 목을 베면? 그냥 조용히 일이 마무리 될 거 같냐?"
"보는 사람도 없지 않습니까?"
"생각을 해라. 저 금색 마차를 우리만 봤을 것 같아? 신교가 중원을 통일했다지만, 아직 세작을 거두지는 않았어. 분명 중원까지 소식이 닿았을 거다."
"그래 봐야 중원 놈들이 뭘 어쩌겠습니까? 죽이고 입 닫으면······"
"멍청한 새끼. 금색 마차 타고 떠난 신교의 소궁주가 산길에서 죽었다? 그런 이야기를 중원 놈들에게 전하라고?"
그제야 맥락을 이해한 부하가 입을 닫았다.
"괜히 궁모께서 애쓰시는 게 아니다. 밑 작업을 하고 있으니, 약속된 장소까지 기다려. 그곳에서 놈을 죽이고 중원의 반란분자 소행으로 넘기면 되니까."
"그럼 역시 그 비적들도······?"
"그래. 인근 몇 개 마을을 불태워뒀다. 몇 번 시늉해 두면 비적인지 마을 농분지 알기 어렵지."
"역시. 궁모께서는 다 생각이 있으셨군요."
"독곡에서 나오셔서 천마를 사로잡은 분이다. 마차 안에 있는 저 쓰레기의 어미가 아니었다면 진즉 대모가 되셨을 텐데."
연우락의 시선이 증오로 물들었다.
백염당의 위치가 6위에 머무르는 것도 전부 그 탓.
혈염마녀가 대모의 위치라면 더 많은 영약과 고급의 무공을 익힐 수 있었을 것이다.
‘흥. 머지않았어. 저놈을 죽이고 궁곡님이 후계자가 된다면······’
그날이 진정으로 독곡이 핵심에 이르는 때이다.
"응? 당주. 이곳에서 만나기로 한 사람이 있습니까?"
그때였다.
외곽에서 주변을 경계하던 백염당의 무인 하나가 손을 들고 한쪽을 가리켰다.
컴컴해진 숲의 경계 안쪽으로 누군가 접근하고 있었다.
"누구냐? 신원을 밝혀라."
손님은 있을 리 만무한 상황.
연우락이 허리춤에 손을 대며 목소리를 높였다.
"······네놈들인가?"
"응? 신원을 밝히라 했다. 누구냐?"
"네놈들이 마을을 불태우고 내 아들을 죽인 것이냐?"
"제정신이 아닌 자로군. 귀찮으니 소리 없이 정리해서 안 보이는 곳에 버려라."
웅얼거리는 목소리.
초점 없는 눈동자.
연우락은 남자가 미친 사람이라 판단했다.
"이런 곳에서 서성거리지 말았어야지. 원망하지 마."
백염당의 무인 중 하나가 검을 뽑고 앞으로 나섰다.
촌부 하나를 베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었다.
검을 쥔 채, 내기를 끌어올렸다.
콰득―!
그리고 머리가 목 위에서 터졌다.
"뭐?"
당황한 목소리가 채 퍼지기도 전.
"냄새가 난다. 마을을 불태운 피와 재의 냄새."
"고수다! 무기를 들어라!"
콰드득. 콰득.
순식간에 3보 내의 무인 둘이 절명했다.
형체조차 남기지 않고 머리가 분쇄되어 버린 것이다.
어떤 수를 쓴 건지 알아보는 이는 없었다.
"연무진을 펼쳐라! 보통 놈이 아니다!"
그나마 연우락의 판단이 빨랐다.
뽑아 든 검으로 남자의 앞을 베며 대응할 진을 구축했다.
순식간에 검수 여덟으로 이루어진 검진이 완성됐다.
백염당이 자랑하는 팔인 연무진.
"그들은 그저 화전민이었을 뿐이다."
"······!?"
하지만 검진의 기운이 채 뿌리 내리기도 전.
거리를 생략한 채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위기감을 느낀 연우락이 절기를 사용해 검기를 뿜었지만, 태산 앞의 산들바람이었을 뿐이다.
천지가 울리는 굉음과 함께 주변 공간이 내려앉았다.
"커, 커어억!!"
그나마 버티는 것도 연우락 뿐.
나머지는 전부 핏덩이가 되어 무너졌다.
단순히 초식이 정교하고 내공이 강하다, 의 수준이 아니었다.
아득하게 강한, 초월적인 힘이었다.
"마, 말도 안 돼. 어떻게 당신이?"
그리고 이런 초월자에 대한 정보라면 당주급인 연우락이 모를 수가 없다.
단지 추레한 행색과 남루한 모습에서 인지하지 못했을 뿐.
무공은 한눈에 알아봤다.
"권왕 율무기! 패왕권(覇王拳)!"
"날 안다면 답해라. 어째서 그들을 죽인 거지?"
"크으윽! 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답해!"
"커어억!!"
거대한 철구가 짓누르듯 연우락이 주저앉았다.
모든 내공을 끌어올려 저항하지만, 권왕의 힘 앞에서는 무기력하기만 했다.
삼왕오제.
경이로운 실력에 존경의 의미를 담아서 붙인 별칭.
한 명 한 명이 신화적인 힘을 지닌 이들이었다.
‘젠장! 대체 어디서 권왕이 끼어든 거지!? 힘으로는 상대할 수 없어. 어떻게든······’
연우락의 머리가 바쁘게 돌아갔다.
권왕같은 존재는 상정 외의 존재.
힘이 아닌 계략으로 상대해야 했다.
"기, 기억났습니다! 기억났습니다!"
"말해라."
"그······그 마을 아닙니까? 화전마을! 화전마을 사람들을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흘러간 말 몇 마디에서 단서를 잡았다.
"누가 그곳을 파괴했는지 알고 있습니다."
"누구냐!? 누가 그 사람들을 죽였지!?"
"시, 신교의 소궁주. 소백이라는 자입니다."
그리고 그 단서를 이용할 방법도 떠올렸다.
독으로 독을 제압하는 이독제독의 계책이었다.
"신교의 소궁주라고?"
"저 황금 마차를 기억하십니까? 천마가 직접 하사한 물건입니다. 신교의 소궁주가 아니라면 감히 누가 저런 걸 타겠습니까?"
"어째서 신교의 소궁주가 그들을 죽인단 말이냐?"
"······단순한 취미입니다. 소백이라는 자는 성정이 괴악하고 살인을 즐기는 인간이니까요."
으드득.
권왕 율무기의 이가 거칠게 마찰했다.
큰 이유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고작 취미라니.
신교의 소궁주라해도 참을 수는 없었다.
"막지 않겠습니다. 저희도 저런 파렴치한 인간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싶진 않으니까요."
"······"
연우락은 율무기의 눈빛을 보고 판단했다.
그라면 신교나 천마를 무시하고 소백을 죽일 거라는 걸.
‘상황이 이상하지만, 괜찮아. 권왕이 죽인다면······’
이보다 나은 변명도 없었다.
푹 숙인 고개 속에서 연우락이 미소를 지었다.
"아빠?"
이 목소리가 들리기 전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