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235)

밑 작업은 착실하게

"그 빌어먹을 새끼."

형편없이 부서진 연무장의 안.

은소소가 주먹을 움켜쥐며 뇌까렸다.

분이 가라앉지 않은 목소리였다.

"내 백염을 어떻게 받아낸 거지?"

적염권 10성, 최후의 초식인 백염.

그 위력은 천마궁의 4대 명가나 중원의 9대문파 절기와 비견해도 모자라지 않다.

단순 파괴력은 되레 위.

얼마 전까지 ‘망나니’소리 듣던 사람에게 막힐 공격은 아니었다.

"실력을 숨겼던 건가?"

은인자중을 위해?

하지만 고작 반년 전에 봤을 때만 해도 소백은 그야말로 망나니에 어울리는 인간이었다.

고작 그사이에 바뀌었다는 말인가?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 은소소의 머리가 헝클어졌다.

‘게다가 그 부탁······’

무려, 광검 은소소.

천마궁 소궁 서열 5위에게 요구할 수 있는 조건이었다.

누군가의 목을 따거나 궁곡 같은 적대 세력에 대항해서 연합도 가능했다.

하지만 소백이 내건 조건은 평범했다.

"한 번. 외유에 동행해서 지켜달라는 것이 전부였어."

단순하지만, 그렇기에 화가 났다.

자신을 고작 그정도로 밖에 쓰지 않는다는 사실.

무시 받는 느낌을 자아냈다.

‘소백. 소백.’

거슬리고 불쾌하며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는 남자.

"흥."

그리고 신경 쓰이는 남자였다.

#

은소소가 소백에게 이를 갈고 있을 무렵.

두 사람의 충돌 소식은 천마궁 곳곳으로 퍼졌다.

벽이 다 무너지고 지반이 가라앉을 정도로 싸웠는데, 모르는 것이 이상했다.

"······네, 어머님. 은소소와 충돌한 건 사실인 것 같습니다."

대전 가운데에 무릎을 꿇고 앉은 궁곡.

맞은 편, 상석에 앉은 중년 여인을 향해 보고하듯 정보를 나열했다.

그의 모친이자 천마의 아내, 혈염마녀였다.

"은소소. 은소소. 암호랑이와 그 불여우의 자식이 부딪쳤다는 건가요? 이유에 대해서는 들어온 정보가 있나요?"

"귀의 때문이라고 합니다. 소백, 그 모자란 놈이 독 때문에 귀의를 끼고 도는 통에 은소소가 탈이 났을 때 제대로 부르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흐음. 이상한 일이네요. 그 불여우의 자식에게 은소소의 흑14수를 제지할 방도는 없을 텐데."

"잔머리만 남은 놈입니다. 필시 소궁의 규율을 핑계삼아 숨어있었던 거겠죠."

툭툭. 혈염마녀가 팔걸이를 손끝으로 두드렸다.

궁곡의 말은 이치에 맞다.

하지만 뭔가 거슬렸다.

‘무공 한 점 모르는 놈이야. 천폐독에 중독되기도 했고. 근데 은소소에게 맞섰다고?"

망나니라고 부르지만 어디까지나 아랫사람에 국한된 행패.

은소소 같은 거물에게 척 질 배짱은 없었다.

"어머님. 곧 독이 올라 죽을 놈입니다.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야 할까요?"

"······아드님은 그자의 모친을 못 봐서 하는 말입니다. 그 불여우. 뱀 같은 혓바닥에 도마뱀 같은 끈질김을 가지고 있었죠. 그 자식놈도 피를 이어받았다면 그리 녹녹하게 봐서는 안 됩니다."

으드득.

강하게 마찰하는 잇소리에 궁곡이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모친이지만 ‘그 여자’를 언급할 때면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차라리 잘 됐습니다. 어차피 독으로는 마음이 안 내키던 차. 불안함도 씻을 겸, 그 불여우의 자식 놈은 이번 기회에 확실히 처리하도록 하죠."

"숭산의 사절 말인가요?"

"네. 윤 총관이 사절의 대표를 선정할 겁니다. 금 백관을 한입에 먹어 치웠으니, 이 정도 부탁은 들어주겠죠."

"금 백관······"

작은 성이라도 살법한 거금.

그런 돈을 단지 뇌물로 써버린 것이다.

‘외조부님의 천하상단의 힘이라 이건가.’

어쩌면 혈염마녀를 이 자리에 앉힌, 궁곡의 서열을 끌어올린 원천이라 할 수 있다.

"아드님도 지켜보도록 하세요. 원(怨)은 철저하게 갚는 겁니다. 그 씨를 불태우고 뼈를 갈아 마시는 순간까지. 아시겠어요?"

"······네, 어머님."

다른 답을 감히 할 수 있을까.

궁곡의 고개가 더욱 깊이 내려갔다.

#

며칠 뒤.

내각에서 사람 한 명이 조용히 명한을 찾아왔다.

흑백이 교차 된 별, 다섯 개를 달고 있는 인물이었다.

별 하나에서 둘은 내각의 평무인.

셋에서 넷은 중요 임무를 맡는 정예 무인.

다섯부터는 핵심적인 일에 투입되는 최고 수준의 고수였다.

"내각의 고수가 이곳까지는 무슨 일이지?"

찻물을 올려놓은 채 명한이 물었다.

이날 방문자가 있으리란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명령입니다. 소림사로 가는 사절에 대표로 참석하시랍니다."

"소림사라. 멀고 먼 길이네."

"명은 전했으니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아, 잠시만."

돌아서는 고수를 명한이 불러세웠다.

"받고 안 받고에 대한 결정권은 없나?"

"내각 상부의 명령입니다. 아무리 소궁의 주인이라 하여도······"

"상부는 무슨. 윤 총관의 명령이잖아. 천마가 은거에 들어간 이후, 이런 잡무는 전부 그가 도맡아서 하고 있는데."

"말조심하십시오."

"왜? 같은 내각이라고 싸고돌아?"

도전적인 명한의 시선에 고수의 미간이 좁아졌다.

지위상으로는 소궁의 궁주가 분명 위.

하지만 눈과 귀가 있으니 ‘망나니 소백’에 대한 소문은 그도 알고 있다.

불쾌한 것이다.

"얼굴 펴. 여차하면 한 대 치겠다?"

"장난은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명령은 전달했으니 저는 이만 물러나 보죠."

"기다리라니까. 사람이 왜 이렇게 급해?"

"또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소궁의 궁주 직위로 청구권을 사용한다. 내각 명령을 수행할 경우 필요한 물품 세 가지를 청할 수 있어. 맞지?"

"그런 내규가 있긴 합니다만······"

"있으면 지켜야지. 그게 내각 아니야?"

일종의 사장된 규율이다.

내각과 소궁의 궁주들은 톱니바퀴와 같은 관계.

명령이 내려왔다는 건 이미 준비가 다 돼 있다는 의미였다.

명한처럼 내규로 요구하는 경우는 없다.

"제가 결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헛소리는 그만해. 허리춤에 별 다섯 개 달고 와서 아니긴. 내각의 행정이 개판이라도 격식은 챙기잖아. 소궁의 힘 있는 사람들이 불쾌해하니까."

"······"

"아니면 그 문제까지 묶어서 윤 총관하고 면담할까?"

말하자면 체면치레용 인사.

결정권을 준 내각의 고수로 하여금 소궁의 궁주에게 임무를 떠맡기는 것이다.

그래야 형식상으로는 그럴듯하니까.

‘이럴 개 짓거리를 당하는데 챙길 건 챙겨야지.’

마냥 당해주기에는 기분이 고깝다.

"······소문과 같은 사람인지 아닌지 분간이 어렵군요."

"많이들 그러더라. 그래서 어떻게 할래? 세 가지 요구사항. 들어, 말어?"

"무리한 요구는 안 됩니다."

"이래 봐도 상식 있는 사람이야."

명한이 히죽 웃으며 고수의 옆으로 붙었다.

"일단······"

전형적인 사기꾼의 얼굴이었다.

#

"미친 새끼."

은소소가 저도 모르게 욕을 내뱉었다.

평소보다 조금 일찍, 연무장을 나선 차에 만난 명한.

그리고 그가 안내해준 가로변에서 본 거대한 무언가.

이런 장소에서 볼 거라 생각조차 해 본 적 없는 물건이었다.

"역시 광검도 이 물건에는 놀라는 건가?"

"제정신이냐? 너, 이게 뭔지는 알고 가져온 거야?"

당황으로 목소리까지 떨리는 기분이었다.

어떻게 안 그럴 수 있을까.

지금 눈앞에 있는 건 황금으로 도배한 ‘황금 8륜 마차’였다.

"사절단의 대표로 면을 좀 살리고자 했지. 이 정도 끌고 가야 천년 무림의 대표인 소림사도 어깨를 으쓱하지 않겠어?"

"장난치지 마. 이 황금 마차가 어떤 의미인지 알잖아. 무림을 통일한 뒤, 천마께서 직접 하사한 물건이야. 통일의 증표라고."

"알지. 순금으로 도배한 돈 지랄 마차."

"미친놈아. 그걸 소림사로 끌고 가면 중원의 인간들이 가만히 있을 거 같아?"

"그야, 그게 목표니까."

툭툭. 번쩍이는 금색을 두드리며 명한이 답했다.

"천마궁을 나서는 순간부터 내가 사절이다, 라고 외치려면 이 정도 급은 돼야지."

"죽고 싶어서 환장이라도 한 거냐? 천마궁 내에서나 네가 소궁의 주인이지, 밖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야. 네 목을 노리고 불나방처럼 달려들걸?"

"불이 커야 불나방도 많이 모이는 법이니까."

너스레 떠는 모습에 은소소가 혀를 찼다.

자신도 꽤 미쳤다 자부하는 인간이지만, 소백은 정도를 넘었다.

천년무림의 상징, 소림사.

중원의 패자인 신교를 반갑게 맞이할 리가 없다.

황금색 마차는 꼬리표가 되어 온갖 불나방들을 불러올 것이다.

‘잠깐만. 불나방?’

은소소의 미간이 짧게 파였다 펴졌다.

"······너, 설마. 중원의 불나방으로 널 노리는 칼을 막을 셈이냐?"

"오. 역시 은소소. 아무리 무(武)에 미쳐 살아도 천마궁 돌아가는 꼴은 알고 있네. 맞아. 문밖만 벗어나도 날 죽이려는 인간이 수두룩해. 발악은 해 봐야지."

"그래서 이 미친 짓이라. 정상이 아니군. 확실히 제정신은 아니야."

"광검에게 그런 말을 듣다니. 기분이 묘한데?"

"닥쳐봐, 좀."

확실히 이건 미친 짓이다.

제정신 박힌 인간이면 소림사로 가는 길에 중원 통일의 상징을 끌고 가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만큼 패기도 있다.

사십 팔 소궁의 궁주 중 누가 이런 미친 짓을 벌일 수 있을까?

할 수 있어도 할 배짱이 있는 놈은 없다.

"확실히 네놈은 객사하기에는 아까운 배짱이 있어. 숭산이든 뭐든 어떻게든 살아서 돌아와라. 그때가 되면 내가 직접 내 궁으로 초대를 해 주지."

"뭔 소리야. 너도 같이 가는데."

"······뭐?"

"기억 안 나? 내 부탁 하나를 들어주기로 한 거. 숭산 가는 길에 금색 마차 하나만 믿을 리가 없잖아. 화살 비를 막아주는 우산은 바로 너야, 은소소."

명한이 씩 웃으며 은소소를 가리켰다.

금색 마차에 광검 은소소.

고작 48궁에 불과한 소백의 이름을 가리기에는 충분한 치장이다.

‘화려한 색 사이에서 서로 타올라 주면 좋고.’

그럴수록 안전해질 테니까.

"너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군."

"궁 안에는 내 목을 노리는 사람이 허다해서. 보험은 들어둘 수 있을 때 드는 편이 낫지. 어때? 천마의 이름을 걸고 한 약속인데, 차버리진 않겠지?"

"빌어먹을 놈. 돌아오고 나면 이번에는 검으로 붙자."

"하하. 그건 그때가 되면 생각해보자고."

8륜 황금 마차.

그리고 광검, 은소소.

숭산행 필수 준비물 두 가지는 챙겼다.

이제 남은 건 가는 길에서 벌어질 일.

‘챙겨야 할 기연들이 빡빡해. 내 것으로 만들 상단도 있고. 시간 분배를 잘해야겠어.’

계획은 이미 머릿속에 전부 그려져 있다.

문제는 작가의 손을 벗어난 세상 속 인과.

"그래도 해야겠지. 이곳에서만큼은."

포기는 한 번으로 족하니까.

명한이 깊게 미소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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