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0/235)

월척을 위해 목숨을 걸다

[이름 : 혈독주피(血毒蛛皮)]

[분류 : 가죽]

[등급 : 지하 급]

[이름 : 혈독주사(血毒蛛絲)]

[분류 : 실]

[등급 : 지하 급]

[이름 : 혈독주단(血毒蛛團)]

[분류 : 내단]

[등급 : 지하 급]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혈독주는 죽어서 세 개의 아이템을 남겼다.

명한이 죽은 혈독주의 시체에서 이를 수거했다.

굳이 피를 볼 것도 없이, 시스템에 기반하는 명령어면 충분했다.

가죽, 실, 내단은 고스란히 인벤토리로 들어왔다.

"도련님, 상처는 없는 거죠?"

"괜찮다니까. 거미 따위의 독으로 죽을 거였으면 천폐독으로 이미 죽었어."

"전 심장이 내려앉는 줄 알았다고요."

"그렇게 간이 약해서야 앞으로 날 지키겠냐?"

벌게진 향아의 이마를 쿡 눌러준 뒤, 숨을 헐떡이는 쌍각사에게 다가갔다.

번개를 내뿜은 후유증으로 상당히 약해진 상태였다.

‘역시 영물 단계에서는 버거운 모양이네.’

번개 같은 자연의 힘을 다루는 건 신수(神獸)의 단계.

아직은 쌍각사가 다룰 힘이 아니었다.

"기다려라. 이대로 네가 약해지면 곤란하니."

명한은 루팅한 세 아이템 중 내단을 꺼내 들었다.

먹는다면 족히 30년의 내공을 얻을 수 있는 기물.

하지만 쌍각사를 위해서 가볍게 포기했다.

손끝으로 내단을 으깬 뒤 헐떡이는 쌍각사의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 주인······

힘겹게 몇 입 삼키고 나자 겨우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바짝 들고 꼬리로 비비는 모양새가 꽤나 감동한 눈치였다.

"간지럽다, 이것아." 명한이 가볍게 웃으며 남은 내단은 새끼들에게 먹였다.

번개 후유증에 후들거리던 새끼들도 이내 기운을 차리고 일어났다.

아니, 되레 전보다 더 건강한 모습이었다.

― 주인. 은혜. 보답.

쌍각사의 눈빛이 전보다 강하게 빛났다.

[사역수(使役獸)와의 관계가 깊어집니다]

[쌍각사의 인연 조건 중 하나를 만족했습니다]

[쌍각사의 진화 조건(1 / 2)]

"아. 쌍각사의 조건이 이거였군."

이어진 알림말에 명한이 낮게 탄성을 흘렸다.

작중에 등장하는 모든 영물이나 신수는 특정 조건을 만족하여 진화하는 것이 가능하다.

용이나 백호 등이 대표적인 예.

당연히 쌍각사도 그런 진화가 가능했다.

다만, 습작의 내용에서는 쌍각사가 소백에게 합류하지 않기에 명한도 알지 못했을 뿐.

지금 이 조건은 그로서도 처음 아는 내용이었다.

"그래, 그래. 네가 복덩이다."

명한이 흐뭇하게 웃으며 쌍각사의 뿔을 쓰다듬었다.

고등급의 영물도 물론 대단하지만, 신수 단계로 오르면 이건 아예 차원이 다르다.

운 좋게 얻은 쌍각사가 더없이 예뻐 보였다.

"도, 도련님!"

순간, 목소리 높여 명한을 부르는 향아.

"응? 왜 그러냐?"

"저기 그······월보가 8성에 도달했어요!"

"그건 이미 전에······"

말하지 않았느냐.

명한이 대꾸하려다 멈추고 향아를 봤다.

붉어진 얼굴은 복숭아 같고, 꽉 쥔 손은 드물게 격정적이었다.

‘이 계집이 쌍아에게 질투를 하는구나.’

뱀에게 질투라니.

우습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수고했다. 앞으로도 정진해라."

"네!"

그래도 ‘내 것’이라 평했으니 다독여야지.

힘껏 답하는 향아를 보며 명한이 흐뭇하게 웃었다.

적어도 이곳에서만큼은.

이렇게 웃을 수 있었다.

#

필요한 조건은 모두 충족했다.

혈독주의 죽음은 모자란 경험치를 채우고도 남았다.

무산심법, 무산보법, 무산권법.

각각의 무공이 모두 10성에 도달한 것이다.

"별 볼 일 없는 무공들이지만, 이를 모두 대성하면 새로운 길이 열리지. 익힌 자가 고려혈통을 잇고 있다면."

세 무공을 동시에 열어서 허공에 겹쳤다.

물 위로 잉크가 번지는 것처럼, 각 항목이 무너져 하나로 합쳐지기 시작했다.

얼룩은 글자로, 파편은 테두리가 되었다.

[가이신공(加痍神功)]

이내, 한 권의 책이 되어 명한의 손으로 떨어졌다.

고려에 맥을 두고 있는 무가의 비전 무공서.

현시점에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무공이었다.

[등급 : 천하 급]

무려 천(天) 급.

무공의 분류 상위 3단계, 천지인 중 최상에 위치해 있었다.

등급에서 제외된 몇 몇 무공을 제외하면 중원의 최고수들이 익힌 무공과 동급.

‘게다가 이 가이신공은 제약이 적어.’

획득 조건은 까다롭지만, 익히는 데는 고려혈통이라는 것 하나만 있으면 충분했다.

다른 무공처럼 ‘심, 기, 체’의 기본 제한이나, 내공 수치, 체질제한 등이 따라오지는 않는다.

"습득, 가이신공."

짧은 명령어 하나면 충분했다.

무공서는 안개처럼 흩어지고 명한의 뇌리에 가이신공이 새겨졌다.

가이신공은 그 자체로 하나의 심법.

여러 성질의 내공을 한 곳으로 모아서 다스리는 능력이 있었다.

영약으로 쌓은 내공도 오독경의 제어를 따르는 독단도 모두 이 안에 녹아들었다.

핵심은 ‘쌓아서 다스리는 것’.

이는 심법이며 동시에 형(形)이었다.

때릴 때는 충격을 중첩해서 주고, 맞을 때는 방어를 중첩해서 피해를 줄이는.

그야말로 공방일체의 무공이었다.

그리고.

"도련님, 도련님!! 또 그 여자가 찾아왔어요!"

"······안으로 모셔라."

이 사나운 방문자와 맞서기에 최적의 능력이다.

#

붉은 머리카락에 이국적인 외모.

명한이 부르기를 ‘사나운 암호랑이’.

천마궁 소궁 서열 5위에 위치한, 독불장군 광검 은소소였다.

"드디어 만났네."

으르렁거리는 목소리.

소설에서 묘사하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어쩐지 조금은 반갑기까지 한 느낌을 받으며 명한이 대꾸했다.

"내가 그렇게 보고 싶었어?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닌 모양이던데."

"보고 싶다 마다. 네가 우리 애들을 잘 다져놓은 덕분에 다른 일은 손에 안 잡혔거든."

"우리 애들? 아, 그 경우 없는 놈들."

콰드득.

은소소의 발밑, 청석에 거미줄 모양으로 깨졌다.

내기 방출 없는 순수한 근력이었다.

‘서역 혈통이라 그런지 힘이 장사야.’

육체만으로도 뭇 고수 못지않았다.

"장난치지 마. 꼭지 돌면 천마궁 내규고 뭐고 다 엎어 버리는 수가 있으니까."

"해 봐."

"······뭐?"

"해 보라고. 열 받아서 온 거 아니야? 그럼 어디 열 받은 만큼 힘을 써 봐."

쿠르르릉.

묵직한 진동음과 함께 명한의 좌우 바닥이 깨졌다.

은소소가 내민 일수(一手)의 결과였다.

사나운 목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네놈 머리통을 여기서 으깨줄까?"

"집어치워, 은소소. 네가 그렇게 으르렁거리면 내가 꼬리를 말고 겁이라도 먹을 것 같냐?"

"······뭐야, 너?"

"네가 보낸 그 머저리 같은 놈들은 맞을 만해서 맞았어. 탓을 하고 싶다면, 그딴 놈들을 부린 네 식견을 탓해."

은소소의 미간이 깊이 씰룩거렸다.

하지만 앞서와 같이 무력을 쓰지는 않았다.

"소백. 실없는 망나니 새끼가 조금 달라졌다는 소문이 돌더니. 그게 사실이었냐?"

"다른 소문은 못 들었어? 피를 나눈 형제께서 음식에 독을 타서 먹였다고 하더라. 사람이 뒤가 없으면 물 불 안 가리는 법이야."

"······흥. 궁곡, 그리고 혈염마녀인가?"

"그렇게 대놓고 말하면 위험할 텐데?"

"그딴 건 신경 안 써. 천마궁의 지위는 오직 힘으로만 정해지는 법. 그따위 권모술수나 쓰는 놈은 인정하지 않아."

붉은 머리카락만큼이나 불같은 답이었다.

‘그래. 은소소는 이런 성격이었지.’

이를 명한은 이미 알았다.

그렇기에 상황에 대한 도전도 가능했다.

"잘 말했네. 천마궁은 힘으로 답을 하는 곳이지."

"뭔 소리냐, 갑자기."

"네 머저리 같은 부하 놈들. 내게 죄를 묻고자 한다면 힘으로 덤벼. 천마궁의 율법에 따라서 받아줄 테니."

"뭐? 감히 너 따위가 나와 힘으로 겨룬다고?"

소백의 소궁 순위는 48.

5위에 위치한 은소소와는 하늘과 땅 만큼의 간극이 있었다.

"세 번. 네 공격을 내가 받아내는 것으로 하지."

"진심이냐? 율법으로 허락한다면 내가 널 죽인다고 해도 아무도 죄를 묻지 않아."

"천마궁 안에서 목숨을 걸지 않는 것도 있나?"

"······하. 하하! 너, 꽤 마음에 드는군. 예전 그 망나니와 같은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아."

은소소는 이를 내보이며 웃었다.

하지만 투기는 되레 거칠어졌다.

새빨간 머리카락만큼이나 강렬한 투기였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어."

"조건? 시시껄렁한 내용이면 용서하지 않는다."

"목숨까지 걸고 내기하는데, 나도 받아가는 건 있어야지. 만약, 네 공격을 내가 세 번 받아낸다면 그 대가로 부탁하나를 들어줘야겠어."

"부탁? 무슨 부탁?"

"그건 내기가 끝나면 얘기하도록 하지. 어때? 받아들이겠어?"

의뭉스러운 답에 은소소가 미간을 찌푸렸다.

"좋아. 네가 세 번의 공격을 받아낸다면 뭐든지." 하지만 이내 호기롭게 답했다.

소백이 자신의 공격을 세 번이나 받아낸다는 것.

그런 가정 따위는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내기는 성립됐어. 천마의 이름으로 맹세한다."

"하! 나 은소소도 천마의 이름으로 맹세한다."

천마궁 내에서 천마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은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족쇄.

신성한 율법이었다.

"적당히 죽지 않을 만큼만 다져주마."

"최선을 다하는 편이 나을 거야."

"시건방진 소리!"

쿵―!

무거운 발걸음 소리와 함께 은소소의 주먹이 붉은색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광검으로 유명한 그녀이나, 권법 또한 그에 못지않았다.

극성으로 익힌 적염권(赤炎拳).

일권으로 바위를 태운다고 알려진 주먹이었다.

"맞고 나서 울지나 마라!"

새빨갛게 달아오른 주먹이 총알처럼 쏘아졌다.

명한의 가슴팍.

거대한 충격이 타점으로터 퍼져나갔다.

지진이라도 난 듯 땅이 흔들리고 소궁 벽이 단번에 박살 났다.

"······견딘다고?"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명한은 무사했다.

붉게 달아오른 가슴팍에 입가에서는 피를 흘리지만.

두 다리는 꼿꼿했다.

은소소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생각보다 가벼운데. 이게 광검의 주먹인가?"

"시건방 떨지 말라고 했을 텐데!?"

곧바로 이격이 이어졌다.

이번에는 오할의 내공이 실린 주먹이었다.

뭇 고수조차 받아내기 힘들 정도의 위력이 있었다.

"말도 안 돼!"

하지만 이번에도 명한은 견뎠다.

달라진 점이라면 안색이 조금 더 창백해진 것 정도.

주저앉아 고통에 나뒹굴 거라는 예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소백, 이 망나니가 이걸 견딘다고? 보물을 걸쳤어도 마찬가지일 텐데?’

은소소는 믿기 힘들었다.

"너. 무슨 수작을 벌인 거냐?"

"남의 수법을 맨입으로 캐려는 거냐? 남은 주먹은 한 번뿐이야. 잘 생각하고 덤벼."

"······"

화는 나지만 이건 명한의 말이 옳다.

천마의 이름을 걸고 한 맹세는 절대적인 것.

은소소도 더이상은 여유를 둘 수 없었다.

‘그래도 죽지 않게 사정을 봐 줬건만······’

이젠 아니었다.

전신 내공을 모두 끌어올렸다.

주먹을 감싼 빛이 붉은색에서 흰색으로 바뀌었다.

"적염권이 10성에 달하면 백염(白炎)으로 바뀌지. 이걸 보고도 살아남은 사람은 손에 꼽을 거다. 견딘다면 진심으로 인정하지."

"광검 은소소의 전력이라. 목숨 걸고 받아볼 가치는 있겠어."

"그 배짱 때문에 죽을 거다."

"아쉽지만 내가 죽는 날은 오늘이 아니야."

명한도 은소소의 전력에 맞서서 내공을 끌어올렸다.

가이신공의 핵심은 켜켜이 쌓아서 다스리는 것.

‘잘 부탁한다, 쌍아야.’

독단과 내공으로 이어지는 1차 벽.

품속의 쌍각사가 막아주는 2차 벽.

그리고 단벌 육체로 버티는 3차 벽이 있었다.

"재는 거둬주마!"

새하얀 불꽃이 명한을 뒤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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