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235)

경험치 이벤트

향아의 눈동자가 연신 돌아갔다.

지하에 특별한 공간이 있다.

이런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넓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도련님, 엄청 넓어요!"

"천산 전역을 관통하는 지하미로니까. 섣불리 움직이지 마라. 괜히 길 잃으면 평생을 헤매야 해."

"힉! 도련님 뒤만 따라갈게요."

냉큼 숨는 향아를 데리고 명한이 깊이 들어갔다.

쉭쉭, 거리는 뱀들이 즐비한 쌍각사의 굴이었다.

이내 수십, 수백의 뱀들이 마중 나왔다.

"도, 도련님! 뱀!" 놀라는 건 향아 뿐이었다.

"오랜만인데 새끼들이나 보고 와라."

명한은 적당한 곳에 쌍각사를 풀어주었다.

고향 집으로 돌아왔는데, 자식 얼굴은 봐야 할 것 아닌가.

쌍각사가 신나게 기어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도련님 여기서 뭘 하시려는 거죠?"

"못 들은 거냐? 수련. 무공을 익혔으니 완전히 체득할 때까지 단련해야지."

"하지만 도련님은······"

우물쭈물.

향아가 다음 말을 쉽게 뱉지 못했다.

무공을 익히지 못하는 체질은 소백을 평생동안 따라다닌 족쇄였다.

"그러고 보니 아직 네게는 제대로 설명을 안 했네."

"네? 뭘요?"

"무공."

명한이 벽을 손으로 짚고 오독경을 운용했다.

독단에서 흘러나온 독기가 손바닥 모양으로 퍼져서 벽을 녹였다.

굳이 표현하자면 오독장.

향아의 눈이 동전만 하게 커졌다.

"도, 도련님 무공을 익히셨어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아. 다행이에요. 정말 다행이에요. 흐윽."

"자, 잠깐만. 왜 울고 그래?"

갑자기 주저앉아 우는 향아의 모습에 명한이 당황했다.

깜빡 잊고 말하지 않은 말에 지나친 반응이었다.

"흐윽. 흑. 전······아는 걸요. 그동안 도련님이 얼마나 상심하셨는지. 무공을 익히지 못해서 많이 괴로워하셨잖아요. 근데, 이제라도 익힐 수 있다니 너무 기뻐서······"

"그런 거였냐."

"네, 네. 정말 다행이에요. 정말로."

하지만 향아에게는 아니었다.

체질 하나 바뀐 것에 불과한 명한과는 다르게 그녀는 소백과 오랜 시간을 보냈다.

무공에 대한 소백의 갈망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래. 고맙다.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익혀야지. 너도 배운 거 열심히 단련하고."

"네! 도련님 실망시키지 않도록 열심히 할게요."

"쓸데없이 착하긴."

머쓱함에 명한이 향아의 머리를 헝클었다.

"훌쩍. 근데, 도련님. 왜 여기에요? 수련이라면 천마궁 내에도 있잖아요."

"왜긴. 위에는 암호랑이가 눈에 불을 켜고 수색 중이잖아. 게다가 이곳은 수련의 명당이거든."

"명당이요?"

지하미로에 존재하는 한빙호는 무려 지급 영지다.

몸을 담그고 있는 것만으로도 내공 수련에 버프가 얹힌다.

‘한빙호만이 아니지.’

쌍각사의 굴은 지하미로의 극히 일부분.

그 나머지 영역은 여전히 적대적이고, 사나운 짐승들로 가득 차 있다.

"여기서 동쪽으로 가면 식인을 하는 거미들이 살고 있어. 준 영물급의 괴물이지. 예정된 시간까지는 놈들을 잡으면서 무공을 수련한다."

"시, 식인 거미요!?"

"너무 무서워할 건 없어. 이쪽에도 안전장치는 있거든."

식인 거미들의 등급은 40 초중반.

지금 능력으로는 사실상 대적이 불가능한 수준이다.

하지만 명한에게는 ‘쌍각사’라는 오버스펙의 펫이 존재한다.

‘생각해보면 초반 기연 중 최고는 쌍각사네.’

고렙에게 쩔 받는 건 고속 성장의 기본.

― 주인. 새끼들. 건강.

"좋은 아빠네."

자랑이라도 하듯 새끼들을 데려오는 쌍각사를 보며 명한이 흐뭇하게 웃었다.

#

네 쌍의 눈을 번뜩이며 거미가 달려들었다.

강철도 찢을 것 같은 괴물 같은 앞다리.

사정없이 사방을 쓸어갔다.

"쉬익!" 이때 등장하는 것이 쌍각사.

꼬리로는 앞다리를 쳐내고 화살처럼 허공을 날아서 거미의 몸통을 물었다.

"마비됐어요!"

여기까지가 딱 1페이즈.

거미 굴에서 거미를 낚아오면 쌍각사가 마비.

향아와 명한이 손쉽게 처리하도록 하는 과정이다.

아무리 급이 높아도 쌍각사의 독이면 제대로 거동하기는 힘들다.

"신중하게 움직여. 마비됐어도 거의 영물에 근접한 놈이니까."

"네, 네!"

2페이즈는 명한과 향아의 합공.

마비독에 걸린 놈 주변을 돌면서 가진바 무공으로 체력을 갉아먹는 과정이다.

습작의 설정상 모든 무공은 숙련도 시스템을 따른다.

많이 쓸수록 경지가 깊어지는 방식.

대상이 강하고 등급이 높다면 그 효율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10등급 내외의 향아와 명한에게 40등급 언저리의 거미는 매우 좋은 상대였다.

[무산권법의 경지가 상승합니다. 3성->4성]

[무산심법의 경지가 상승합니다. 5성->6성]

[무산보법의 경지가 상승합니다. 4성->5성]

익혀둔 무산 무공들은 차곡차곡 경지가 올라갔다.

애초에 등급이 낮은 것들이라 요구치도 낮았다.

‘향아도 이게 적용되면 좋은데.’

아쉽지만 이 숙련도 시스템을 정면에서 적용받는 건 명한 자신뿐이었다.

향아 역시 경지를 올리기 위한 경험치의 면에서는 득을 보고 있지만, 명한 만큼은 아니었다.

"도련님, 마비가 풀리는 거 같아요!"

"쯧. 아직은 우리끼리는 어렵나 보다. 쌍아야, 마무리."

"쉬익―!"

적당한 시점에서 쌍각사가 마무리 지었다.

마비가 풀린 뒤는 일정 시간 내성이 생기는 법.

마무리 경험치를 포기해도 안전하게 쌍각사가 처리하는 편이 나았다.

"하아. 하아. 너무 긴장돼서 서 있기가 힘들어요."

거미가 늘어지는 걸 확인한 뒤, 쌍아가 주저앉았다.

땀범벅에 숨도 거칠었다.

아직은 전투에 익숙하지 않다는 증거였다.

‘그래도 이 정도면 상당히 빨라.’

습작 기준, 쌍아가 제대로 전투를 치르는 건 반년도 훌쩍 넘은 시점이다.

그 전까지는 전형적인 ‘민폐캐릭터’였다.

― 주인. 거미 내단

쌍각사와는 다르게.

어느새 쌍각사가 거미를 도륙낸 뒤, 내단을 꺼내서 다가왔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주먹만 한 핏덩이였다.

[이름 : 줄무늬 거미의 내단]

[종류 : 내단]

[등급 : 지상 급]

[효과 : 복용 시 5년의 내공이 상승한다. 중독(거미 독) 상태에 걸린다]

명한이 헝겊으로 피를 닦아내고 물로 씻었다.

40등급 이상의 영물에게서 구할 수 있는 내단이었다.

나름 귀한 물건.

"독이 들어있네."

다만, 이런 물건은 잘못 쓰면 독이 되기 쉽다.

멋모르고 먹었다가는 주화입마 되기 딱 좋은 물건.

‘하지만 나는 독단이 있으니까.’

명한처럼 내성 있는 사람에게나 약이었다.

소매로 슥슥 물기를 닦아내고 한입에 먹었다.

입안에서 터지는 비린 맛에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우욱." 헛구역질하는 향아 쪽은 일부러 쳐다보지 않았다.

[독단의 기운이 증가합니다]

[거미 독에 대한 저항력이 증가합니다]

그래도 효과는 확실했다.

몸 안, 독단의 기운이 조금 더 단단해지는 느낌이었다.

― 주인. 거미. 더 온다.

"잔잔바리 내단으로는 한계가 있지만······"

지금은 그게 어딘가.

명한이 핼쑥한 향아의 어깨를 툭 치며 고갯짓했다.

어둠 속, 거미의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일어나. 쉴 시간은 없어."

작업장은 빡빡하게 돌려야 제맛.

1분 1초도 아까웠다.

#

"슬슬 씨가 마른 건가."

명한이 텅 빈 공터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며칠 전만 해도 거미가 득실거리던 공간이었다.

내내 사냥만 반복하다 보니 남은 개체가 극도로 줄어버렸다.

‘이게 게임이면 젠이 되겠지만······’

아쉽지만 그건 아니었다.

번식이든 뭐든 시간이 필요한 문제였다.

"그럼 남은 숙련도가 문제인데."

현재, 명한의 숙련도는 전부 9성.

10성까지 조금만 남은 상태였다.

차이는 고작 1성이지만, 무산 무공들은 그 차이가 매우 중요했다.

‘무리해서 더 들어가야 하나?’

안쪽은 준 영물을 넘어선 괴물들의 영역.

더 심해지면 전대 고인이나 원귀 등과 만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고. 이거 참······"

깔끔하게 포기하고 다음을 기약하면 편하겠지만, 앞으로 벌어질 일을 생각하면 쉽지 않다.

명한이 몇몇 기연을 당겨서 얻은 것은 사실.

하지만 그렇다고 다가올 시련을 손쉽게 극복할 힘을 얻은 건 아니다.

까딱 잘못하면 시련이 아니라 죽음도 가능했다.

‘숭산으로 가는 길이 특히나 고난인데.’

어찌해야 할까.

뒷머리를 긁적였다.

"도련님, 도련님!"

"응?"

그때, 향아가 호들갑 떨며 다가왔다.

내공 수련을 위해 한빙호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길.

"거, 거미예요! 거미!"

아직 남은 놈이 더 있었던 걸까?

의아함 반 반가움 반으로 명한이 맞이하려는 순간.

품 안의 쌍각사가 빛처럼 튀어나갔다.

쾅―!!!

허공에서 부딪치는 그림자 두 개.

굉음으로 토해내며 양쪽으로 튕겨 나갔다.

하나는 잔뜩 독 오른 표정의 쌍각사.

그리고 다른 하나는······

"혈독주(血毒蛛)!"

거대한 크기의 거미였다.

앞선 며칠간 상대했던 거미보다 배는 더 커 보이는 놈이었다.

‘거미 놈들의 대장이 나왔구나.’

얼핏 기억하기로 혈독주의 등급은 55.

쌍각사보다는 낮았지만, 무시할 놈은 아니었다.

― 주인. 위험.

언제나 여유롭던 쌍각사마저 경고를 보내올 정도.

명한이 쉬이 나서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다.

"도, 도련님 저 괴물은 너무 강해 보이는데요?"

쪼르륵 옆으로 피난 온 향아가 물었다.

지금껏 상대해 온 놈들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아챈 것이다.

"강하지. 혈독주라는 놈이야. 독니에 물리면 사지가 녹아서 사라져 버릴 거다."

"흐익. 저, 저런 괴물하고도 싸워야 해요?"

"일단은 쌍아가 맞서게 해 둬야지. 제아무리 혈독주가 강해도 쌍각사만큼은 아니니까."

감상평 그대로의 전개가 이어졌다.

혈독주는 거대한 몸통을 무기 삼아 쌍각사를 찢어발기려 했으나, 쌍각사는 그보다 훨씬 기민했다.

허공을 날아다니는 벌새와 같았다.

미끄러지고 뛰고 독니로 혈독주를 물고.

그야말로 영물계의 무공 고수와 같은 몸놀림이었다.

순식간에 혈독주의 상처가 늘어났다.

"캬아악!!"

"샤악!?"

그 상성에 문제가 생긴 건 어느 한 시점.

밖의 소란에 쌍각사의 새끼들이 나오면서였다.

혈독주 정도의 영물이면 이미 지성이 싹튼 존재.

놈은 새끼들이 쌍각사와 관계 있다는 걸 대번에 눈치챘다.

독이 묻은 거미줄을 뿜어내며 새끼들을 위협했다.

날래게 공격을 피해야 하는 쌍각사에게 이건 치명적인 제약이었다.

새끼들을 포기하거나 안전을 포기하거나.

선택은 당연히 자신의 안전이었다.

순식간에 쌍각사가 위기로 몰렸다.

"도련님, 어떻게 하죠!?"

"기다려 봐."

"네? 하지만······"

"기다리란 말 못 들었어?"

낮아진 목소리에 향아가 움찔하고 몸을 떨었다.

뱀이긴 하지만, 쌍각사는 지금껏 자신들을 도왔다.

그 사실을 알기에 이번엔 자신들이 도울 차례라고 생각했었다.

‘도련님은······도련님은 아니셨나?’

전이라면 이해한다.

항상 그랬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숙여."

"네?"

무엇 때문에, 라는 질문을 하기도 전.

갑작스러운 굉음과 함께 새하얀 빛이 눈앞에서 폭발했다.

망막이 뜨거울 정도의 빛이었다.

"쌍각사의 뿔은 두 개야. 하는 독을 다루고 다른 하나는 번개를 다루지. 내성이 없으면 휘말려서 죽기 딱 좋아."

"그, 그럼 새끼들은요?"

"누구 새끼라고 생각하는 거냐?"

뿔에서 연기를 내뿜으며 멈춰있는 쌍각사.

그 뒤로 남은 새끼들이 똘똘 뭉쳐서 몸을 보호하고 있었다.

어설프게 끼어들었다면 같이 말려들었을 것이다.

‘그, 그래서 기다리라고 하셨구나.’

향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말했잖아. 내 것이라, 생각하는 건 지킨다고."

"윽······"

"난 무엇도 포기하지 않아."

명한이 붉어진 향아를 둔 채 앞으로 달려나갔다.

번개를 방출한 뒤 숨 고르기에 들어간 쌍각사의 앞이었다.

"캬아아아!!" 기다렸다는 듯 튀어나오는 혈독주.

새끼를 고려한 번개는 놈을 태우기에는 약했다.

쩍 벌어진 독니가 쌍각사의 목을 노렸다.

콰득.

"큭."

하지만 대신 문 건 명한의 팔뚝.

"도련님!!"

당황스러운 향아의 목소리가 귓가를 때리고.

‘중독되었습니다.’라는 시스템의 알림이 머리를 아찔하게 만들었다.

55등급의 영물.

한 번 물리면 답이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해독에 성공했습니다]

[독단의 기운이 혈독주에게 전달됩니다]

[혈독주가 상태이상(극독)에 빠집니다]

하지만 명한에게는 천폐독과 쌍각사의 독으로 만들어진 독단이 있었다.

번개로 약화 된 혈독주의 독은 견딜만했다.

아니, 되레 더 강했다.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그의 독이 거꾸로 혈독주를 공격했다.

상태이상 극독으로 순식간에 약화되는 혈독주.

"경험치. 내놔."

벌어진 놈의 입안으로 주먹을 쑤셔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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