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235)

세 권의 책과 한가지 무공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가는 법.

소궁의 주인, 소백의 재미있는 내기는 이미 바람을 타고 일각무고 전역으로 퍼졌다.

향아가 승리하면 술과 고기를.

패배하면 서원승이 금 천냥을 거머쥐는 흥미진진한 내용이었다.

"누가 이길 거 같아?"

"아무래도 서원승 아니겠어? 그래도 홍요 각주님의 제자잖아. 몸종과 비교할 건 아니지."

"나도 같은 생각이야. 호위도 아니고 몸종이 강해 봐야 한계가 있으니까."

전체적인 평가는 서원승의 우위였다.

무고 관리자와 몸종은 기본적인 격차가 존재했다.

하물며 향아는 성인도 되지 않은 몸.

구할 이상이 서원승의 우위를 점쳤다.

"제, 제가 이길 수 있을까요?"

이 분위기는 향아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두려움, 걱정, 불안 등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이기면 원하는 과자를 마음껏 먹게 해 주마."

"······어. 정말요?"

"그래. 내각에서 맛좋은 홍과가 들어왔다고 하더라. 달달하니 한 입 베어 물면 열흘은 입에서 꿀맛이 난다더군."

추르릅.

아마 만화였다면 그런 소리가 났을 것이다.

향아가 침이 흐를 것 같은 얼굴을 간신히 다잡고는 서원승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꼭 이길게요."

"오냐."

향아가 단순하게 전의를 다잡았다.

불안과 걱정보다 전에 먹었던 과자의 맛이 더 크게 다가왔다.

"도련님께서도 참 짓궂으십니다. 저런 아이를 놀잇감으로 삼으시다니."

맞은 편에서 서원승이 웃으며 다가왔다.

진다는 건 애초부터 상정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러냐? 나름 진지하게 임하는 중인데."

"하하. 아무리 이 서모가 못나도 고작 몸종 하나 이기지 못할까요. 도련님께서 흥을 돋우기 위해 이리 자리를 마련하신 거로 생각하겠습니다."

"뭐, 마음대로 생각해라."

굳이 구구절절 설명한 마음 따위는 없다.

명한이 잔뜩 상기된 향아의 등을 가볍게 밀었다.

두 사람의 거리가 한 걸음으로 가까워지고.

"살수는 허용하지 않는다. 먼저 쓰러지는 쪽이 패배하는 것으로 간주하지."

곧바로 시작의 신호가 되었다.

"계집아이야, 금 천냥이다. 마음에 담아두지 말거라."

서원승이 크게 발을 구르며 곧바로 향아를 노렸다.

내딛는 보법은 경쾌하고 속도는 상당했다.

주변 감탄사가 채 뻗기도 전에 그의 손이 향아의 허리춤에 거의 닿았다.

스슥―

"어?"

하지만 한순간에 두 사람의 위치가 바뀌었다.

손을 뻗던 서원승은 앞으로 향아는 그 뒤로.

"너······잔재주가 있구나!"

이에 발끈한 서원승이 다시금 땅을 박찼다.

갈지자로 점과 점을 잇는 보법에 두 손은 강맹한 기운을 담고 뻗어 나갔다.

"운룡수!" 지켜보던 누군가의 외침.

일필서생 홍요의 독문무공 중 하나였다.

"저걸 피해!?"

"뭐야? 보이지도 않았어!"

하지만 이번에도 귀신같이 두 사람의 위치가 바뀌었다.

서원승의 운룡수는 애먼 허공만 때리고 말았다.

"너, 너! 대체 무슨 수를 쓰는 거냐!?"

"어······"

향아는 입만 벙긋거리며 답을 하지 못했다.

사실 그녀 스스로도 이를 설명할 재간이 없었다.

일월신교의 월보는 ‘달그림자를 타고 이동한다.’라는 평가가 있을 정도로 은밀한 기예.

게다가 지금 그녀는 ‘일원전인’이라는 최상급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일월전인은 일월신교의 모든 무공 효과를 200%로 만들어주는 사기 중의 사기.

이 버프를 받은 향아의 움직임은 거의 마법에 가까웠다.

"이익! 어디선가 한 가닥 재주를 익혔구나! 감히 몸종 주제에 기예를 훔쳐 배우다니!"

"저, 전 훔쳐 배운 적 없어요. 전 도련님께서 가져오신 무서만 익힌걸요."

"거짓말! 일각무고에 그런 기예가 어디 있단 말이냐!?"

"진짜예요. 명월심법과 월보를 익혔을 뿐인데······"

향아의 작아지는 목소리에 서원승의 눈썹이 크게 솟았다.

그도 무고의 관리자인 만큼 명월심법과 월보를 안다.

둘 다 일각 무고에 맞는 가치 없는 무공들.

‘감히 몸종 따위가!’

향아가 자신을 속인다고 여겼다.

"소백 도련님을 대신해서 네 방자함을 꾸짖어야겠다."

"거짓말 아닌데."

"시끄럽다! 고작 몸종 따위가 쓰레기 무공을 익혀서 이 몸을 이긴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도련님이 알려주신 무공이에요. 제가 천한 몸종인 건 맞지만, 도련님이 주신 무공까지 그렇게 말하는 건 받아들일 수 없어요."

"뭐?"

"그 말 취소하게 만들겠어요."

향아의 기세가 일변했다.

어딘가 늘어진 봄바람 같던 기세가 한겨울의 삭풍처럼.

흔들거리던 몸도 시선도 모두 곧게 섰다.

‘이 계집이······?’

서원승은 무언가 이질감을 느꼈다.

하지만 상대는 고작 몸종 아닌가.

본능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앞으로 뛰어나갔다.

"운룡대천!"

"일필서생의 절기다!"

누군가의 외침대로.

최선의 수, 최고의 공격을 꺼내 들었다.

양손을 휘감은 내기가 와류를 만들어 거대한 용의 형상으로 향아를 휩쓸어갔다.

절기라 칭할 만큼 강맹한 공격이었다.

"사기 캐릭이 괜히 사기 캐릭이 아니라고."

하지만 향아는 그 폭풍 사이를 가볍게 스쳐 갔다.

그림자 사이를 스치는 바람처럼.

발끝에서 스러지는 먼지처럼.

나부끼는 옷자락이 가라앉기도 전.

이미 그녀는 서원승의 등 뒤에 서 있었다.

"이게 도련님께서 가르쳐 주신 무공이에요."

그리고 훤히 열린 서원승의 등을 손으로 밀었다.

힘을 쏟아낸 공백의 틈새.

쓰임이 얼마나 절묘했는지 그는 버티지 못했다.

쿵, 소리를 내며 고꾸라지는 그의 얼굴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의문으로 가득했다.

"그러니 다신 도련님의 선택을 비웃지 마요."

무어라 대꾸할까.

아니, 대꾸할 염치나 있을까.

손에 작은 날붙이라도 있었다면, 사라지는 건 체면이 아닌 목숨이었다.

입술만 깨문 채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내, 내가 졌다."

그래도 승패는 아는 놈이었다.

#

명한이 건넨 금 천 냥에 서원승의 한 달 치 봉록.

이 돈을 모두 합쳐서 술과 고기가 제공되었다.

설마 술과 고기를 정말로 내어줄까.

이리 고민하던 일각 무인들이 호화스러운 상차림에 두 팔 벌려서 환영했다.

"다들 엄청 좋아해요, 도련님. 지금 도련님 이름을 연신 외치고 있다니까요."

"힘낸 건 넌데, 환호받는 건 난가? 괜히 미안하군."

"아, 아뇨! 전부 도련님께서 시킨 대로 했을 뿐인데요. 환호받아 마땅한 건 도련님이죠."

"그럼 둘이 했다고 치자. 저기서 환호하는 이들 중 절반은 너한테 반한 것 같으니까."

명한이 짓궂게 웃으며 향아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술과 고기에 빠져있던 일각 무인들이 그 모습에 무섭도록 환호했다.

작은 소녀가 무고 관리자를 제압해서 얻은 성과이니, 즐거움은 두 배였다.

명한 말대로 반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하, 하하······즐거우신 모양입니다."

물론, 전부가 즐거운 건 아니었다.

술과 고기를 나르던 서원승.

잔뜩 구겨진 얼굴 속에서 온갖 굴욕과 부끄러움이 흘러나왔다.

"여흥에는 웃어야지. 고작 일각무고의 무서를 일개 몸종이 익혀서 관리자를 이긴 거니까."

"하. 하하. 저는 웃음이 잘 나오지 않습니다."

"웃어."

"네?"

"웃으라고. 아니면 나와의 내기에서 진 것이 부끄럽기라도 한 거냐?"

"그, 그런 의미는······"

"의미?"

말꼬리 잡는 명한에 서원승이 뭔가 싶어 바라봤다.

그리고 웃는 얼굴 속, 깊이 가라앉은 분노를 발견하고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뭐, 뭐지?’

평소 알던 소백의 모습이 아니었다.

"네 스승, 홍요를 봐서 이 정도로 멈추는 거다. 혹여라도 다시 한번 더 내 눈앞에서 재능 운운했다가는 네 눈알을 파서 이 무고의 장식으로 써 주마."

"······"

"대답."

"네, 네! 명심하겠습니다!"

저절로 힘이 들어가는 대답.

사람을 찍어 누르는 위압감을 느꼈다.

‘이게 정말로 그 망나니 소백이라고?’

소문은 역시 믿을 것이 못 되나.

소원승이 마른 침만 꼴딱꼴딱 삼켰다.

"그건 그렇고······내가 찾으라고 한 책은?"

"아! 네! 찾아왔습니다!"

"내놔."

"여기 있습니다!"

소원승이 냉큼 챙겨온 책을 건넸다.

색 바랜 표지에 페이지 하나하나가 너덜너덜한.

다 낡은 세 권의 책이었다.

명한이 묵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며 책을 살폈다.

[무산심법]

[무산보법]

[무산권법]

이름도 특별할 것 없는 무산의 무공서.

하나하나의 가치는 인하급 수준.

천마궁을 기준으로 불쏘시개로 써도 하등 문제가 없는 책들이었다.

‘하지만 이 무공서의 가치는 따로 있지.’

핵심은 무산이라는 명칭.

"이곳의 무산이라 하면 백두를 지칭하지."

바로 고려에서 건너온 백두종파의 무서라는 점이었다.

설정상 백두종파는 고려의 피를 잇지 않으면 익힐 수 없는 비전무학의 종파.

세 권의 무공서는 이런 무공을 감추기 위한 위장수법이었다.

‘무공서를 모두 대성하면 숨겨진 무공이 나오지.’

조만간 벌어질 일을 대비하기 위해서 반드시 얻어야 할 무공이었다.

"도련님, 원하는 걸 전부 얻으셨나요?"

"대충은. 남은 건 숙달의 문제겠지."

"숙달······그래야 할 이유라도 있는 건가요?"

명한을 바라보며 향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단순히 무공에 관심이 생겼다, 라는 느낌은 아니었다.

아니, 그전에 숙달이 가능한지도 의문이었다.

"조만간 천마궁 밖으로 나갈 일이 생긴다."

"네? 천마궁 밖으로요?"

"소림사가 있는 숭산까지. 멀고 험한 길에 기다리는 승냥이들도 사나우니 준비를 안 할 수는 없지."

"어째서 도련님이 그 먼 길을?"

"그야······"

천마궁 안이 아닌 밖에서 죽이려는 심산.

명한이 설명을 혀끝에 담으려는 순간.

― 소백!!!

어마어마한 괴성과 함께 땅이 요란하게 흔들렸다.

사람의 목이 아닌 하늘에서 내려친 천둥과 같은 소리였다.

"천마후(天魔吼). 암호랑이가 납시었군."

이런 미친 굉음이라면 다른 이는 없다.

재능 하나만으로 천마의 절기를 사사 받은 천재, 은소소였다.

귀의의 설득이 제대로 먹히지 않은 모양새였다.

"향아야, 짐 챙겨라. 먹을 것도."

"네? 네?"

"호랑이가 왔으니 몸을 숨겨야지 않겠느냐. 때가 될 때까지는 꽁무니를 빼자."

재료는 챙겼으나 아직은 시간이 필요하다.

명한이 세 권의 무공서를 품 안으로 갈무리하며 소리의 반대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향아도 뒤늦게 짐과 음식을 챙겨 쫓았다.

"어, 어디로 가시게요?"

"작업장."

물음표를 띄우는 향아를 뒤로한 채.

명한이 열심히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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